2019.4월 세마성당 영적 독서 「상대성 이론과 예수의 부활」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9-04-29 16:17:26    조회 : 317회    댓글: 0
세마 성당 2019. 4월 영적도서 : 「상대성 이론과 예수의 부활」
지은이 : 전헌호 신부
1955년 5월 5일 출생. 서울 가톨릭 대학교를 졸업. 오스트리아 빈(Wien)대학교에서 석,박사. 유학 중 1985년 사제 서품.경북 하양 천주교회 주임 신부를 역임현재 대구 성 바울로성당 주임신부, 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저서로 「인간, 그 전모」, 「거룩한 갈망」, 「자연환경 인간환경」, 「상대성이론과 예수의 부활」등 다수가 있고,
역서로는 총서 「영적 삶의 샘」, 「참 소중한 나」, 「다시 찾은 기쁨」, 「사랑의 집」, 「행복한 선물」등 다수가 있다.
 
 
나눔의 글
 
11차원의 우주 세계, 4차원의 지구, 빅뱅, 블랙 홀, 미시 세계 거시 세계.... 등등 흥미로운 우주 질서 이야기를 다룬 신부님의 저서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 이어서 이번에는 또 다른 차원의 과학적 호기심 많은 교우들을 위한 「상대성 이론과 예수의 부활」이야기입니다.
‘현대 과학의 정점을 이루는 대표적 이론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예수의 부활과는 어떤 연계성이 있을까? 과학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설명할 수 있을까?’
생명과학, 정보통신 공학, 반도체 공학 등 첨단 과학 시대에 태어나 과학적인 사고를 기본으로 하며 살아가고 있는 신세대에게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좀 더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이 책은 상대성 이론을 파악 · 도입하여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관해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신앙인들에게 신선한 감동과 함께 저자의 독창적인 영감과 새로운 시각이 특별히 돋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원 계획은 어떠한 경우에도 물리적 법칙의 설명만으로는 모두 밝혀낼 수 없다는 신비한 것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환경과 영성을 연구 테마로 삼으시는 전헌호 신부님은 어떠한 삶의 방식이 환경 친화적이며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인가에 중심을 두고  2장에서 5장까지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를 다룹니다. 나눔의 글에는 뭐니 뭐니 해도 圖書名 만으로도 설레게 했던 제1장 상대성 이론과 예수의 부활을 중심으로 요점을 올려봅니다.
 
제1장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본 예수의 부활과 승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있다. 지구상의 20억에 가까운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 기쁨과 희망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아무런 의문 없이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내면의 갈등이나 교리상의 어려움을 겪는 일 없이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다.
필자가 관심을 가지는 사항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그렇게 간단하게 믿을 수 없는 사람이나 첨단 과학의 세계에서 자라나고 있는 신세대에게는 이 사실을 어떻게 좀 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자연 과학적인 지식의 범주를 뛰어 넘는 신앙의 문제를 굳이 자연과학의 이치나 이성적인 논리로 해석해 보려는 시도가 무모하거나 신앙의 자세에서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학문 간의 벽을 허물고 자유롭게 생각하려는 21세기 학계의 일반적인 경향과도 일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1. 문제 제기
 
죽은 사람이 부활해서 생전의 그 인격과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다시 활동한다는 사상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유일한 일이다.
성서에서 이 땅위에 머물지 않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보도하는 사람은 예수 외에도 에녹과 엘리야가 있다.
 
1) 비 신앙인의 입장에서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보도를 접하는 비 신앙인의 태도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 이러한 보도는 비과학적이고 신화시대의 산물로서 처음부터 고려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연 과학의 지식에 밝은 사람은 사람의 육신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란 사실을 전면에 내세울 것이다. 사람이 승천을 한다면 어디까지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면 구름 위에서는 어떤 현상이 벌어졌겠는가. 첨단 우주 시대의 지식에 의하면 구름 위에 육신을 가진 사람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공간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성서의 이런 승천 보도는 신빙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가.
 
2) 신앙인의 입장에서
신앙인들 중에서도 성서에서 보도하는 부활과 승천의 글자를 그대로 믿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으로 부활과 승천에 대한 좀 더 명쾌한 해석과 설명을 접하지 못한 상태를 견디어 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일부 신앙인들의 기복적인 생각이다.
 
예수가 직접 행한 기적이나 제자들이 행한 기적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란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행위이다. 그런데 일부 신앙인들 중에는 그러한 기적이 자신들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 건강상의 문제 등 상황을 벗어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 실망과 원망을 드러내고 분노하기도 한다.
 
복음서에 의하면 부활한 예수는 자신의 육체를 우리들 일반 사람들과 같이 이 땅위에서 썩도록 두지 않고 변화시켜 그 변화한 육신을 가지고 구름 위로 승천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들 일반 신자들은 죽음 이후에 부활을 한다 하더라도 그의 몸은 지상에 남아서 믿지 않는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썩어서 분해되어 유기 물질로 땅에 남거나 다른 생명체들의 몸을 구성하는 인자가 된다.
 
교회는 마리아가 예수를 지상에 낳고 기르신 위대한 역할을 고려하여 그녀도 역시 예수와 같이 죽음 이후에 육신이 이 땅 위에서 일반인들과 같이 남아 썩지 않고 승천했다고 과학과 기술 문명의 시대인 20세기 중반, 1950년에 교의로 선포했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기적들은 일반적인 물리 · 화학적 법칙을 뛰어넘는 예외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우리의 삶이 가능한 물리 · 화학적 법칙을 파격적으로 뛰어넘는다는 사실에서 우리들의 삶의 근본 바탕을 뒤흔드는 일이다.
 
예외적인 현상인 기적이 자주 일어날 경우에, 일반 사람들은 일상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동안에 자연의 법칙을 믿고 그 믿음 위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 나갈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요행을 바라면서 정상적인 일을 수행해 나가지 않거나 불확실해진 자연 질서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어서 불안해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과 비 신앙인 모두에게 커다란 기적 사건으로 와 닿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 질서를 교란하지 않고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자연의 현상과 신앙을 새롭게 이해하고 우리의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안정되게 영위해 나가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2.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관한 성서적 고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본질을 파악하는 작업을 하기에 앞서 먼저 부활과 승천에 대하여 성서에서 전하고 있는 보도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이겠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사건에 대한 성서 보도를 성서 주석학적으로 자세하게 분석하고 성서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이 글의 주안점이 아니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자세하게 수행해 놓았으므로, 필자는 그것을 여기에 전통적인 신학계와 교도권에서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날 만큼만 간단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성서적 고찰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예수의 부활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의 부활에 의한 인간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죽음이란 극단적인 절망과 단절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을 채워주는 것으로서 이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고 살아 볼만한 것이 되도록 한다.
 
인간의 생명은 죽음으로 완전히 끝나지 않고 사후 세계를 맞이하거나 이 지상에서 다시 부활하여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멀리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수가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대목은 루가 복음 11장 31-32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있지만 직접 언급하는 대목은 마르코 복음 12장 18-27절에 있다.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식사도 함께 하면서 당신이 실제로 부활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마태 28, 16-20; 마르 16, 9-18; 루가24, 13-49; 요한 20, 11-21.23).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먼 과거에 일어난 일이거나 미래에 일어 날 일이 아니라 바로 현존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예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더 이상 죽음이 없는 새로운 삶,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초기의 자료인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 3-8절에서 바오로는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고 변호하기 위해 부활한 그리스도가 여러 증인들 앞에서 나타났다고 보고하고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로 보도하고 있다. 이들은 “반갑습니다”(마태 28,9).라고 자신들에게 말을 걸며 다가오는 예수를 직접 체험한다. 열한 제자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예수가 미리 알려준 산에서 예수를 만났다(마태 28, 16-17)
 
요한복음에 의하면 부활한 예수는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잠가 놓고 있는 제자들에게 “여러분에게 평화!”라고 말을 걸면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을 세상으로 파견하면서 숨을 불어넣으면서 성령을 주었다.
 
성령을 받으시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요,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요한 20, 22-23).
 
그리고 예수는 다시 나타나서 의심이 많은 제자 토마에게 자신의 부활을 직접 확인토록 했다.
 
당신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살펴보시오. 그리고 당신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시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시오(요한 20,27).
 
그 후에도 예수는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고기잡이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물고기를 많이 잡도록 안내한 뒤 그들이 잡은 물고기와 빵을 집어 들고 그들에게 주셨다(요한 21, 1-14).
 
부활한 예수는 부활 이전과 마찬가지로 제자들과 대화도 하시고 음식을 집어 들고 제자들에게 주시기도 하고 당신도 직접 잡수시기도 하셨다.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의 몸을 만져서 십자가상에서 입은 상처를 확인 할 수도 있었고 예수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함께한 예수의 상태는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는 안으로 잠겨있는 방안으로도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요한 20,26). 그러면서도 동시에 당신의 몸을 만지게도 할 수 있었다.
 
루가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일반 교인들의 믿음을 북돋우기 위해서 예수가 참으로 부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함께 묵으려고 들어가셔서 상 앞에 자리 잡으시자 빵을 들고 찬양하신 다음 떼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그 순간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다......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보니, 열 한 제자와 그 동료들이 모여서 “정말 주님이 부활하여 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하고 있었다(루가 24, 30-31. 33-34).
 
이 대목에서 부활한 예수는 금방 나타나기도 하고 금방 사라지기도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부활한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겪기 이전의 그 예수와 동일한 분이시고, 부활한 이후의 그의 육신도 제자들에게 친숙했던 부활 이전의 육신과 동일한 육신이지만, 동일한 상태에 있지 않고 부활 이전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에 의해 붙잡히고 다시 처형될 수 있는 그런 몸이 아니고 지상에서의 물질과 시간 그리고 공간의 차원을 넘어선 영원한 몸이다.
 
이러한 예수의 부활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생명 체계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의 영역으로 옮겨 감을 의미하고, 이것은 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다시는 파괴되지 않는 새로운 생명이 존재함을 증거하고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일이다.
 
예수가 부활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증인은 없지만 부활한 예수를 만난 증인들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당수 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제자들의 태도는 그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 이후로 의기소침해 있던 그들은 갑자기 힘을 내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단단한 결속력을 지닌 공동체를 형성하여 예수의 부활 사실을 사방으로 전해 나갔다.
 
십자가상에서 죽어간 스승을 버려두고 도망을 친 사실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보기에는 제자들의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과 태도가 너무 진지하고 목숨 걸고 행한 그들의 활동 강도가 지나치게 강하다. 이들의 삶의 태도가 이렇게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은 현상은 바로 실제로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이 그들을 그렇게 변화시킨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으면서 전례와 기도 안에서 만나고 일상의 생활 안에서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지구 위의 모든 사물들과 일상의 모든 일들을 통해서 현존재로 다가온다.
 
하느님의 권능에 의한 이러한 일들이 물리적 법칙을 존중하면서도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본 논문의 주된 목표이다. 이러한 일이 일반적으로 흔히 생각하는 바와 같이 정상적으로는 발생할 수 없고 특별한 경우에 자연의 질서를 교란하고 기적과 같이 생기는 것만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생겨날 수 있다면 이것은 예수의 부활을 한 차원 더 나아가서 이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에도 한계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겠다.
 
2) 예수의 승천
승천은 예수 대한 신앙 고백의 절정이다. 그래서 복음서는 여기에서 끝을 맺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을 만나서 당신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말씀을 남기는 것으로 복음서를 마치고 있다. 마르고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승천에 대해 매우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에 비해 루가 복음서에서 예수의 승천을 간략하게 언급한 루가가 사도행전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신학적인 사유를 좀 더 깊이 전개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의 승천에 대하여 언급하는 부분인 16장 19-20절은 다음과 같다.
 
주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하늘에 올라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제자들이 떠나가 사방에 복음을 선포했는데, 주님이 함께 일하며 표징들이 따르게 함으로써 말씀을 굳건히 뒷받침하셨다.
 
하늘로 맞아들여진 부활한 예수는 하느님의 오른편에도 계시고 제자들과도 함께 계실 수 있는 존재이다. 즉 부활한 예수는 공간, 시간, 지상의 물질적 조건을 뛰어넘어 계신다.
마르코 복음서 16장 9-20절은 2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마르코 복음서 안에 첨가된 것으로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이 당시 교회의 믿음과 신학이 들어 있는 대목이다.
 
마르코 복음에서의 승천은 예수의 부활 사건과 독립된 것이 아니라 부활 사건의 연장이고 부활의 완성이며 예수의 지상 통치의 시작임과 동시에 교회의 시간의 시작이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의 지상 활동을 이어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활동을 현재화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활한 예수가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르 16,20).
 
예수의 승천을 복음서를 마감하는 부분으로 다루고 있는 루가 복음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베다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서 손을 들어 축복해 주셨다.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이끌려 올라 가셨다. 그들은 예수께 엎드려 절한 다음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서 찬양하며 지냈다.(루가 24, 50-53).
 
루가 복음서에서도 예수는 하늘로 이끌리어 올라가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제자들은 하늘로 이끌리어 올라가신 예수의 모습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이며 그들이 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암시를 받고 크게 기뻐하게 된다. 제자들이 이러한 기쁨은 예수가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는 더 이상 함께하지 않지만 그들의 마음 안에 함께하여 계속해서 작용하는 하는 것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루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승천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대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 그분은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위로 올라 가셨고, 구름이 그분을 감싸 시야에서 사라지게 했다. 그분이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사람들이 곁에 다가와 말했다. “갈릴래아 사람 여러분, 왜 하늘을 쳐다보고 있소? 여러분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저 예수께서는 여러분이 본 승천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오.”(사도 1, 8-11)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능동적으로 위로 올라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가 승천하는 모습을 구름이 그분을 감싸 마침내 자신들의 시야를 가려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할 때까지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8장 34절에서 “단죄할 자가 누구입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신데 말입니다.”라고 예수의 승천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3. 자연 현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인식문제
 
인간은 다섯 개 감각 기관으로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들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파악한다. 그래서 인간이 지닌 감각 기관들이 외부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느냐는 것이 점검해 보아야 하는 하나의 대상이다. 또한 인간이 지닌 감각 기관이 감지하지 못하는 영역들도 자연 세계에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영역들에 대한 인식은 실험 도구들이나 다른 동 · 식물들을 통한 연구와 인간의 이성을 활용한 추론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게 되는 일이다.
 
인간이 지닌 인식 능력에 관한 문제는 칸트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상당히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연구해 오고 있다. 과거에는 천동설의 세계관으로 천체의 운행 원리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천동설에 의해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들을 합리적으로 지동설이라는 과정에서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러다 지동설과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고전 물리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물리 현상이 엄연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아인슈타인,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등과 같은 뛰어난 물리학자들이 상대성 이론, 양자론 등과 같은 물리 현상에 대한 인식 체계를 발굴하여 우주와 물질의 현상과 법칙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물질, 공간, 시간, 에너지, 빛 등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인식 체계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자체도 완전한 이론이 아니어서 시간이 지나면 새로 발견되는 천체 물리 현상들에 의해 보완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물리 법칙의 현상으로 완벽히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신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기적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물질계의 안정에 절대로 필요한 물리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창조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은 자연 과학을 위해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서도 매우 유익한 일이라고 하겠다.
 
서양의 역사 안에서 뛰어난 자연 과학자들 중의 대다수는 신심이 깊은 그리스도교인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 과학과 신앙이 서로 모순되거나 대립되지 않고 함께 대화하고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1) 천동설
인간의 오관에 와 닿는 세계는 천동설에 의해 인식되는 세계이다. 지구상의 인류는 오랫동안 천동설의 세계관에 의해서 살아왔고, 지금도 대부분의 일상생활을 천동설의 세계관의 시각으로 지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인류가 천동설의 세계관만 알고 있었을 때에도 사실은 지동설의 세계가 엄연히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인류가 그 사실을 인식해내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2) 지동설
인류는 자신의 감각 기관에 와 닿는 외부 세계의 현상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비교, 분석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우리의 감각 기관에 와 닿는 모습과는 실제에 있어서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지구가 공처럼 둥글고 한계가 있으며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초속 약 30km의 빠른 속도로 공전하고 있고 초속 약 500m의 속도로 자전을 하고 있다는 오늘날에 와서는 이미 상식적인 지식이 된 것을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등을 비롯한 자연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의식의 세계 안에 지동설을 바탕으로 한 우주관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들이 신봉하는 종교 역시 지동설을 바탕으로 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평가한다. 천동설을 바탕으로 하여 서술한 성서의 세계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지동설을 바탕으로 하여 의식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밝혀내어 지동설에 입각한 세계관 이외에 또 하나의 세계관이 있음을 알려주었고,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임을 각종 관측과 실험을 통하여 입증되었다.
 
4.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우리가 오관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는 물질계는 다양한 성질과 원리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성질과 원리에 따라서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물질계의 이러한 현상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존재하는 성질과 원리를 존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오관을 통해서 인식하는 상식적인 현상들은 모두 존중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자연 과학자들이 그동안 물질, 공간, 시간, 에너지 등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온 결과들은 이들이 인간의 감각을 거쳐 인간의 지성에 파악되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다른 면들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물질의 극소 단위인 원자의 세계를 규명하려고 노력한 학자들은 원자의 세계가 태양계와 같은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류는 존재하는 물질의 무게와 부피를 재는 단위를 설정하여 물질의 무게와 부피를 수치로 정확하게 내고 있다. 어느 한 물질의 무게는 사실에 있어서 그 물질을 끌어당기는 중력의 세기를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부피의 경우에는 분자를 구성하는 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의 운동 범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오관의 세계를 통해서 파악하고 있는 정체는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다른 것이다. 쇠나 나무와 같이 단단한 물체들도 사실에 있어서는 태양계의 대부분과 우주의 대부분이 빈 공간이듯이 그 내부가 대부분 빈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원자의 실체에 관한 문제는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이다.
 
우주의 기원을 150억 년 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폭발(Big Bang, Urknall)에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우주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는 천체 물리학은 오늘날 매우 발달하여 우주의 구조와 물질의 기원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밝혀 놓았거나 사실에 가까운 가설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고 1916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여 물질과 에너지, 공간과 시간의 정체를 좀 더 근원적으로 밝혀 놓았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면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관측 가능한 가장 빠른 존재는 빛과 자기장이며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존재들 중에서 이들 보다 더 빠른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 에너지, 공간, 시간도 사실에 있어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고 이해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가 밝혀 놓은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물질, 에너지, 시간, 공간은 움직임이 없거나 움직임의 속도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와 같이 매우 느릴 경우에 우리의 오관에 그렇게 와 닿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움직임의 속도가 빛과 같이 빠를 경우에 물질의 질량은 E =mc² 의 공식에 따라 막대한 양의 순수 에너지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공간의 개념도 바뀌게 된다.
 
1)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의 공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공간이라는 것은 사물 그 자체의 성질이나 상호 관계를 가진 사물 그 자체가 아니다....공간이라는 것은 외감의 모든 현상의 형식, 즉 감성의 주관적 제약이며, 외적 직관은 오직 이 제약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인간의 입장에서만 공간이니, 연장을 가진 물체니 등등을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주관적 제약을 떠난다면, 그때에는 공간의 표상이란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공간은 칸트의 경우에서와 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서도 우리가 일상의 생활에서 경험하는 바와 같이 고정되어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중력장의 세기와 물체의 달리는 속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상대적인 존재이다.
 
우리 은하계의 중심을 비롯하여 우주의 곳곳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중력이 대단히 센 블랙 홀(Black Hole)에서는 모든 것이 그 안으로 끌어당겨져서 공간도, 시간도, 물질도, 인류가 가진 현재의 인식체계로는 알지 못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블랙 홀 안의 상태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좀 더 지속하여 그 정체를 밝혀내면 예수의 기적, 부활, 그리고 승천을 좀 더 잘 규명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또한 빛이 달리는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는 물체에 있어서 공간은 정지되어 있는 물체에 있어서의 공간과 많이 다르다. 물체가 달리는 속도가 빛의 속도에 근접할수록 공간도 신축성이 있는 고무판과 같이 움직인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으로 공간도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중력과 속도에 따라서 변화하는 상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밝혔다.
 
2)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의 시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며, 또 물에 속하는 객관적 규정도 아니다.”고 말하면서 “시간이라는 것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과 우리의 내적 상태를 직관하는 형식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고 시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시간은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상을 직관하는 주관에 속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통해 고찰해도 시간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존재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의미하는 시간은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작용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을 인식하는 유전자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지니고 태어난다.
인간에게 있어서 주관적인 시간의 흐름은 그의 육체적 정신적 상황에 따라서 그 속도가 다르다. 물리적 시간은 천체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이 설정한 인위적인 존재이다. 천체에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천체의 움직임에 일정한 간격을 설정하여 그렇게 분류했을 뿐이다.
 
지구보다 중력이 훨씬 더 센 목성에서 시간의 흐름은 지구에서와 다르며, 태양과 같이 그 보다 훨씬 더 센 항성에서는 더욱더 다르다.
 
인간의 지성은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달리는 물체를 아직까지 발견하거나 추정해 내지 못하고 있다. 만약에 어느 한 물체가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달릴 경우에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가게 되어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어떤 한 물체가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릴 경우에는 시간을 거슬러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물체가 빛보다 더 빨리 달릴 경우에는 그 물체의 질량이 무한대를 넘어서기 때문에 빛보다 더 빠른 물체를 상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질량이 없는 빛만이 빛의 속도로 달릴 수 있을 뿐이다.
 
3)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의 물질
스티븐 호킹을 비롯한 오늘날 우주 천체 물리학자들 대부분은 약 150억 년 전에 있었던 대폭발(Big Bang, Urknall)이 우주의 기원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윌슨 산 팔로마 천문대의 망원경으로 외계 은하를 수년간 관찰 했던 허블은 지구에서 먼 은하일수록 지구에서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는 것에서 착안하여 1929년 우주 팽창설을 주장했다. 학자들은 우리의 우주와 같은 우주가 우리의 우주 곁에 다수 더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고, 만약 다수의 다른 우주들이 존재한다면 이들 간에 물질과 에너지의 상호 교환이 있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대폭발 이전에 에너지로만 존재하던 것에서 물질이 생성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E =mc² 의 공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물질화한 것으로서 그 안에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을 물리학자들은 가속기 내에서 중성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하여 서로 충돌시키면 순수한 에너지로 변했다가 다시 새로운 물질들을 생성하는 실험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이러한 원리를 활용한 것이 원자력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우주의 본 모습을 완전하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인식 체계가 완성되기까지는 물질, 공간, 시간, 속도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밝혀 놓은 바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 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 그의 이론은 여기서 더 나아가 존재 자체 그리고 존재의 현상과 의미를 이해하려는 인류의 철학적 사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본 예수의 부활과 승천
 
신약 성서의 저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겪은 뒤에도 자신의 생명을 잃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부활”과 “승천”이라는 단어들을 동원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이 단어들 역시 인간의 제한된 인식 영역 안에서 통용되는 인간 세상의 단어들이다.
 
신약 성서 저자들은 “부활”과 “승천”이라는 인간의 인식 구조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자신의 두뇌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지상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일어나는 사건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더군다나 글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물질과 에너지는 상호 전환될 수 있는 존재이다. 예를 들면 초에 불을 붙이면 물질이 초이던 것이 열과 빛으로 전환한다. 엽록체를 가진 식물은 빛 에너지를 물질로 고정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떼이야르 샤르뎅은 자의식을 가진 인간의 정신이 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마치 물에 열을 가할 경우에 물의 온도가 99°C까지는 일정하게 올라가다가 100°C에서 갑자기 기화하는 현상을 보이는 것과 같이 물질계에 오랜 기간 일정한 진화의 과정이 있다가 어느 순간에 그렇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과학과 신학을 접목시켜보려고 노력했던 샤르뎅의 사상은 20세기 중반 이후로 신학계와 과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도 샤르뎅의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신과 물질은 서로 무관했던 존재로서 샤르뎅이 말하는 바와 같이 물질계에서 오랜 기간의 진화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자의식을 가진 정신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서로 깊은 관련 속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물질인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 음식이 지닌 각 종류의 무기물들과 태양 에너지를 활용하여 정신작용을 하고 있다. 양초 안에 빛으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이 음식 안에 정신 작용에 활용될 수 있는 성질이 이미 들어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활한 예수의 몸이 일반 사람들의 몸과는 다르게 무덤 속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한 예수와 일치하여 항상 함께한 것은 예수가 완전한 영적인 존재인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던 것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일반 사람들의 몸이 땅에 남아서 다시 물질계로 환원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아직도 영적으로 변화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 물질계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여 하느님의 외아들이 되신 예수를 몸소 낳아서 길렀으며, 공생활을 하는 예수와 언제나 함께한 성모 마리아는 예수와 영적으로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마리아의 육신도 지상에서의 생명이 다하고 난 뒤 이 지상에 남지 않고 영적인 존재로 완전히 변하여 우리의 오관에 와 닿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큰 무리 없이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서 볼 때 물질과 에너지가 처음부터 상호 밀접한 관련 속에 있는 것과 같이 물질과 정신도 처음부터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의 창조 이전부터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는 표현(요한 1, 1-3)이나 현세 이전부터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하셨다(1 고린 2,7)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비추어 보아도 틀림없는 진리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시간이라는 것 안에서 모든 삶을 펼쳐나가고 정신적 사유를 해 나간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존재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이라는 존재를 떠날 수 없는 인간에게만 시간이란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시간을 벗어나 있는 존재에게는 상황이 다르다. 인간이 지각하는 시간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이지 우주의 천체들에게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 지각하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인간에게 지각되는 우주 안의 시간도 달리는 물체의 속도와 중력에 따라서 가변적인 존재이다. 시간의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여 우리는 정신이라는 것도 처음부터 존재해 오던 것으로서 이 지구 위의 물질 안에서 드러나다가 다시 순수한 정신, 즉 순수한 영적인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해 볼 수도 있겠다.
 
고전 물리학의 시각으로는 자연의 질서를 뒤흔들어 교란하는 일이 예수의 부활과 승천 사건 안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상대성 이론을 따르면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작용했다는 것은 어떤 해석에서도 간과 할 수 없는 요소이다.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가 다시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그들이 행하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갖가지 도움을 주었다는 성서의 보도에 의하면 부활, 승천한 예수는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이것은 기존의 공간 개념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들에게 지금과 같은 형태의 공간이 실존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중력의 세기나 이동 물체의 속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상대적인 존재이다. 공간이 반드시 우리가 현재 지각하고 있는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부활 승천한 예수의 모습과 공간을 뛰어 넘어 활동하는 그분의 활동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이는 것이다.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육체를 지닌 우리는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공간을 뛰어 넘을 수 없다. 그러나 더 이상 질량을 지니지 않고 순수한 영적인 존재가 된 부활한 예수에게 있어서의 공간은 질량을 지닌 존재의 공간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것 일 수 있는 가능성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드러났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인지는 여기서 정확하게 서술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다만 현존의 공간 개념을 넘어서는 공간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공간의 존재 가능성이 부활한 예수의 현존 형태와 활동 형태를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데에 하나의 실마리를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6. 종합
 
여기서 다루고자 한 것은 성서에서 전하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 사건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의 법칙을 무시하거나 교란하지 않고 존중하면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을 필자는 물리적 현상을 관찰하는 첨단의 인식 체계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한 물질, 공간, 시간의 이해를 바탕으로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를 위한 작업에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가능성과 더불어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명백히 있음도 이 작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당신의 인류 구원 계획을 직접 알려주셨다는 그리스도교의 계시 신앙의 내용은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 법칙의 설명만으로는 다 밝혀 낼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를 과학적이라는 존재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 방식을 동원하여 완벽하게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비과학적이고 무리한 작업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존재의 근원과 존재 이전의 형태에 관한 문제는 인간의 이성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적 작업 자체가 벌써 하나의 피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근원인 존재의 근거와 존재 이전의 상태에 대한 물음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오고 우리의 근원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그러한 작업의 내용을 담은 것이 계시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신앙의 빛이 반드시 개입해야 가능한 것이다.
 
세상에 대한 천동설의 인식 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기록한 성서를 지동설의 인식 체계를 삶과 사고의 기본 바탕으로 가진 근세 이후의 인류가 읽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안에서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자기 자신과 이웃을 만나고 사랑하고 있다. 그것은 지동설의 인식 체계를 삶과 사고의 기본 바탕으로 가진 학자들이 천동설의 인식 체계를 바탕으로 기록한 성서를 지동설의 인식 체계로 해석하는 작업을 하여 지동설을 인식 체계의 바탕으로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의 세계를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은 하나의 단순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 필자의 이러한 작업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이 세상을 이해하고 성서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장 ~ 5장 생략
 
 
제6장
환경문제 극복을 위한 과르디니의 Askes
 
인간에 의한 물질문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 상황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과 오늘날 하나의 커다란 어려움으로 다가오고 있는 환경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Askes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한다. 환경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의 방식과 덕행 그리고 새로운 윤리 의식을 찾도록 한다.
 
이러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 방면으로 Askes에 대하여 생각하고 Askes의 삶을 살아가기를 요청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오늘날 선진국에서 풍부한 물질적인 조건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절제하는 문화,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닌 것들을 포기하여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는 삶의 형태를 선호하는 경향을 지닌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 Askes는 절제, 고행, 훈련, 수련, 수덕, 금욕, 자기 수련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필자는 그중에 자기 수련이라는 단어가 본래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1. Askes의 정의
 
환경문제를 극복해 나가는 데에 필요한 정신적 자세 중의 하나로 본 논문에서 소개하는 Askes는 근검절약, 절제, 자기 수련, 금욕, 수덕修德, 노력, 수고, 고행, 포기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을 의미하고 있다. Friedrich Wulf는 카톨릭 신학적인 관점에서 “Askes는 그리스도교적 완전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노력의 모든 행위들이며, 투쟁과 포기가 함께하는, 그러나 결정적인 극복은 아직 성취하지 못한 지속적이고 질서 지어진 노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Askes에 대한 정의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Askes는 어떤 형태든지 간에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절제라는 의미를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Askes는 육체적인 요소는 정신적인 것보다 아래에 속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모든 행위들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Askes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요소들 중에 하나 또는 특별한 요소 없이도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훈련 등이다. 단식을 한다던가 성적인 영역에서 금욕을 한다던가 하는 Askes는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을 치르기 위한 준비 단계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본격적인 Askes라고 말하는 엄격하고 철저한 Askes는 일반적으로 거의 예외 없이 육체를 악한 것, 감옥, 무덤으로 보는 이원론적 인간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육체는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투쟁하여 극복해 나가야 하는 존재이며, 마침내 괴멸시켜 버려야 하는 존재이다. 육체가 일으키는 악한 경향들을 극복하고 육체 자체를 이겨 나가기 위한 과정이 바로 강한 금욕주의적인 훈련이다.
 
2. Askes에 대한 현대 사회의 부정적 인 태도
 
이 단어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현대인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것도 사실이다. Askes는 오늘날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경향을 거스르는 것, 부자유스러운 것 등으로 간주되고 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Askes는 실천하기도 힘들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 경제 성장을 위한 생산과 소비의 순환 고리에 지장을 주는 요소가 되기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3. Askes에 대한 현대 사회의 긍정적 태도
 
Martin Heidegger, Arnold Gehlen 등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술 문명을 비판하면서 Askes가 그 위험을 막아줄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기술 문명의 진보에 의해 발생되는 위험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에서 특히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위험이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두 규격화되어 가고 개성을 잃어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Askes는 “자아”를 재발견하게 하여 각자의 개성을 찾도록 한다. 또한 Askes는 각자 자신의 삶에 책임감을 가지게 한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본 Askes의 역할은 나의 자아를 강화하는 데 있다. 한 사람의 내면에 참된 자유 공간을 확보하고 넓혀 나가는데 한몫을 한다.
 
Askes는 또한 사회적 관계를 올바르게 이끌어 나가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말이나 글 또는 표정과 부호로 표시하는 다른 사람들의 의사를 정확하게 알아듣고 올바른 반응을 해 나가는 데에는 상당한 주의력과 인내심 그리고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Askes이다.
 
가정 안에 생기는 갈등들에서부터 국가 간의 갈등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갈등들을 극복해 나가는 데에도 Askes는 큰 역할을 한다. 자신의 권리를 조금 양보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존중하기도 하면서 평화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Askes는 큰 도움이 된다.
 
또한 Askes는 다가오는 현실을 만날 수 있는 힘을 갖도록 하며,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을 그것이 가진 제한성과 함께 받아들이도록 한다.
 
4. Askes에 관한 신학자들의 견해
 
Karl Rahner에 의하면 인간은 이 지상에서 자신의 인간성과 제한성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영원을 향하여 열린 자유와 대면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는 영원한 존재에 관한 인식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존재를 이 영원성과 연결시키기를 원하지만 이 지상에서 맞이하는 것은 결국 죽음이라는 단절이다. 용기를 내어 죽음을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 Askes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한 강한 믿음의 행위이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교적 Askes를 수행하는 행위이다.
 
Rahner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자기 자신을 좀 더 강하게 조절하는 Askes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일상의 생활을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Askes를 수행하는 것은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통찰력과 자제력 그리고 현명한 판단력이 있어야 하며 , 삶의 매 순간 섬세한 배려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삶의 중심에 계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속해 나갈 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Askes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행위이다.
 
Rahner는 수도회들에서 서원하는 그리스도교적 청빈은 오늘날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시대에 필요한 삶의 지침을 제시하는 Askes로 보고 있다.
 
Askes는 하느님이 수많은 물건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또한 Askes는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유지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하는 것이 좋은 물건들을 소비하는 즐거움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안셀름 그륀은 Askes는 “자유로 가는 길이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형성하는 길로서 긍정적인 것이며, 종교적 자세에 도달하기 위한 훈련이다.” 라고 한다. 그는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될 경우에만 비로소 온전한 인간, 건강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자신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Askes를 지나치게 수행하여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은 자세란 것을 주지시키고 있다. 그는 중용을 지키는 것이 잘못된 Askes로부터 벗어나는 길임을 강조하면서, Askes를 자신에 대한 분노로 행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5. 환경문제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Askes
 
환경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인간이 이세상과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과 자세를 전환해 나가야 한다. 오늘날에는 기술 문명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조절하는 능력을 확보해 나가는 것 못지않게 인간 자신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 테마로 등장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 삶의 전체적인 모습에 관하여 섬세한 감수성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인간 전체에 관한 책임 의식을 키워 나가야 하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M. Rock는 선택의 가능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현대의 산업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종류의 광고들과 소비적 요소들 중에서 환경에 부담을 주는 요소들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과 보다 근본적인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야 한다.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선택의 가능성을 많이 갖고, 올바른 선택을 해 나가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 Askes이다.
 
M. Rock에게 있어서 Askes는 생태 윤리에서 근본적인 요소이다. 오늘날 환경 문제가 발생한 것은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Askes를 실천해 나가는 것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6. 로마노 과르디니의 인간관과 Askes
 
Askes의 필요성을 말한 과르디니의 견해는 먼저 인간 존재의 특성을 규명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인간은 정신에 의해 짐승과는 달리 자유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만큼 불안정하게 되어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니게 되어 책임과 자기 조절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과르디니는 “ Askes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르디니는 이러한 생각을 전개해 나가면서도 본능 자체를 나쁜 존재로 여기지 않고, 정신이 본능에 적대적인 존재인 것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본능들을 약화 시키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삶을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Askes의 목적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본능들을 거슬러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들이 일정한 질서의 범위 안에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인간은 이 세상에 각자 자신의 상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인간은 지금의 자기 자신 그대로의 상태를 받아들여야 한다. 여러 가지 부족하고 제한 된 자기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종종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Askes이다.
 
과르디니는 Askes가 필요한 이유 중에는 또한 기회들과 가치들을 동시에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씩 선택하여 실행하던가, 아니면 어떤 것은 선택하여 실행하고 어떤 것은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상황도 해당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과르디니는 인간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 모두를 반대한다. 낙관적 세계관 · 비관적 세계관, 이 두 세계관 모두는 인간이 지닌 자유, 결단, 책임의 영역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과르디니에 의하면 인간이 선한 일을 선택하여 실천하기 위해서는 Askes를 수행하는 수고를 짊어져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하는 Askes는 각 종류의 무질서한 욕망들을 포기하는 것과 편안하게 안주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과르디니는 이러한 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매우 엄격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섬세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 마음을 고요하게 가지는 것, 마음을 모으는 것, 묵상 그리고 관상 등이 Askes의 요소에 속하는 것이다.
 
Askes는 한계를 모르는 무질서한 욕구들을 통제하고 그 중에서 실현 가능한 것을 선택하여 키워 나가는 힘을 길러준다.
 
7. 로마노 과르디니의 문화 비평과 Askes
 
Askes에 관한 과르디니의 견해는 인간의 본질을 깊이 파악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기계 문명을 개발하여 지니게 된 힘은 매우 강력하고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에 위험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Askes를 통하여 자신이 지닌 힘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구비해 나가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개발한 기계 문명의 힘이 야만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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