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9. 5월 영적도서 :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9-05-28 16:58:53    조회 : 396회    댓글: 2
 세마 성당  2019. 5월 영적도서 :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지은이 : 양승국 신부(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관구장)
살레시오 회 소속으로 1994년 사제품을 받고,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을 위한 그룹 홈 `나눔의 집`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1997년 교황청 립(敎皇廳 立) 살레시오 대학에서 영성신학을 수학하고, 청소년 교정사목 및 양성 담당을 거쳐, 현재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 수도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대전에서 구련장을 맡고 있다.
 


나눔의 글

이 책의 저자 양승국 신부님은 “주님께서는 큰 죄인이고 한없이 나약한 우리에게도 성화聖化에로의 초대장을 보내셨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또한 “사실 성인들의 삶은 우리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들도 많은 결점을 지녔지만, 우리보다 조금 더 인내하고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이웃들을 환대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성화의 길을 걷는 우리를 성모님과 깊은 사랑에 빠지게 초대합니다.

머리말에서
우리는 대부분 성인을 생각하면서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따라가기에 버거운 사람들, 우리와는 동떨어진 별세계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어떠해야만 하고, 어떠어떠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하고 …. 이렇듯 성인을 점점 더 멀리 있는 사람들로 만듭니다. 과연 그럴까?

양 신부님은 성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며, 별세계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인’들은 우리보다 조금 더 기도에 집중했고, 조금 더 긴 호흡을 지녔으며, 조금 더 겸손했고, 조금 더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책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을 통해 우리도 성인들처럼 살아갈 수 있고 성인에 길로 초대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며, 성인들이 성모님을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성모님을 열렬히 사랑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1부 말없이 지켜주는 사랑
 
성모님의 든든한 언덕 성 요셉
침묵의 달인 요셉 성인 
인간적으로 요셉 성인처럼 억울한 분도 드물었습니다. 마리아와 약혼한 상태의 요셉은 결혼식이 코앞이었고 가슴 설레는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기를 가진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밤잠도 제대로 못 이뤘을 것입니다. 분노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이런 요셉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그 뒤로 요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단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신앙 여정에 충실한 동반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백번 생각해도 이해하지 못할 마리아였지만 요셉 성인은 사랑과 온유의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습니다. 평생에 걸쳐 묵묵히, 진지하게, 나자렛 성가정의 든든한 언덕이 되어 주신 분, 그 신앙으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일조하신 분이 요셉 성인이십니다.

그는 ‘투명 인간’이었나?  
그러나 복음사가들은 한결같이 요셉 성인에 대해서 입을 다뭅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서에서 요셉 성인은 거의 ‘투명 인간’취급을 당합니다. 그만큼 요셉 성인이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나보다 더 나를’ 아끼고 사랑해 준 사람 
다행이 마리아 곁에는 요셉 성인께서 언제나 든든한 보루요 언덕처럼 서 있었습니다. 마리아와의 기이하고 특별한 ‘동거 생활’을 해 나가던 요셉 성인의 감정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을 것입니다. 때로 사랑하는 약혼녀를 하느님께 ‘강탈당한’ 것에 대해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고,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는 마리아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마리아를 마음 깊이 사랑했고 흠모했던 분이 요셉 성인이셨습니다. 그 사랑은 지고지순한 영적 사랑, 헌신적인 사랑, 아가페적인 불멸의 사랑이었습니다.


성녀 모니카의 아들이자 성모님의 아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학자

교회역사 안에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성인이 다시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청소년 시절 그의 방황과 타락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또한 그는 세례 받기 전 한동안 마니교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는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방황하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모니카 성녀의 얼굴은, 회개를 위해 눈물로 하소연하시는 성모님의 얼굴과 꼭 닮았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 목숨을 다 바친 기도, 지극한 정성이 담긴 기도를 바쳤습니다. 아들의 새로운 삶을 지향하며 수시로 단식했으며, 더불어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16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했고,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회심의 시절
청년 아우구스티노가 마니교와 방탕한 생활에 빠져 지내던 386년 8월, 그는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은둔 속에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아름다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회개는 평생 지속되었습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 교리 확립
아우구스티노에게 있어 성모님은 너무나 친근한 존재였습니다. 자신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평생토록 눈물로 기도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성모님의 삶과 영성을 보았습니다. 그는 성모님을 ‘살아 있는 감실’이라고 하며,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평생토록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모시고 사셨습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과 한 마음, 한 정신, 한 몸이 되셨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은 동일한 운명의 소유자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 현존하셨습니다. 성모님에게 있어 더 큰 영광은 예수님을 낳은 것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왕국을 성모님께 봉헌하다
성 스테파노 임금

2010년 3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우루과이 대통령을 지낸 호세 무히카는 임기 내내 섬김과 봉사의 리더십을 실천했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웅장하고 화려한 대통령궁을 노숙자 쉼터로 내놓았습니다. 자신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작고 허름한 부인 소유의 농장에서 기거했습니다. 그의 청빈하고 서민적인 삶에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우리 시대 참 지도자요 현자賢者라고 크게 칭송하셨습니다. 

폐차 직전의 털털거리는 고물 자동차를 손수 몰고 출근했으며, 병원을 이용할 때도 일반 시민들과 똑같이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나라로부터 받은 급여는 대부분 기부에 썼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부적격한 지도자들, 언행일치가 안 되는 지도자들, 자기 관리 등 기본도 안 되는 지도자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습니까?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 섬기는 지도자,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봉사를 위해서 사용하는 지도자의 시대가 왔습니다.
 
현대 성인의 선구자요 지도자의 모델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멋진 국왕이 한 분 있습니다.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975-1038) 임금입니다. 그는 헝가리의 수호성인이면서 정교회 쪽에서도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무척이나 청빈합니다. 화려한 복장을 피하고 소박하고 단촐한 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굶주리던 백성들을 위해 왕실의 곳간을 열어 자선을 베풀고 자신의 왕관을 하느님께 봉헌했으며, 헝가리 왕국에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헝가리 왕국이 성모님의 망토 안에 머물도록.....
스테파노의 성모님을 향한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헝가리 모든 백성이 성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도록 적극 장려했으며 성모 승천 대축일을 국경일로 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스테파노는 한 신앙인으로서 성모 신심에도 투철했지만 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도 각별한 성모 신심을 드러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에 뜻에 따라 평화로이 이루어지도록 기도를 올렸고, 성모님의 특별한 중재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성모님을 통해 예수님께로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사실 성인들의 삶은 우리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들도 많은 결점을 지녔지만, 우리보다 조금 더 인내하고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이웃들을 환대했습니다. 성인들 역시 우리가 지니고 살아가는 죄, 한계, 나약함, 상처를 지니고 있었고 ‘어둔 밤’을 지내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어두운 그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하느님과 대화하고,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거룩하게 되는 것’(1테살 4,4 참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빛과 기쁨의 언덕으로 탈바꿈한 클레르보
성 베르나르도 (1090-1153) 아빠스는 12세기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의 지혜와 경륜은 하늘을 찔렀는데, 당대 교황님들과 많은 임금들이 그에게 조언과 상담을 청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라며 우러러보았습니다.

동시에 베르나르도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 수도생활 쇄신의 선구자, 탁월한 성경 학자, 위대한 설교자, 그러면서도 겸손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았습니다. 베르나르도는 가톨릭 교회 쇄신에 강한 열망을 품었습니다. 교황청의 폐단과 고위 성직자들의 세속화를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성모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베르나르도
성모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으로 치면 그를 따라갈 성인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성모님의 겸손과 아름다움을 노래한 음유시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영성의 중심에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열렬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인류 구원의 위대한 계획안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의 겸손을 바라보십시오. 성모님의 보호 아래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의 손을 잡고 계실 때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을 우리 모두의 보호자로
성 프란치스코(1182-1226)

하느님께서는 작은 사람, 겸손한 인간을 총애하십니다. 그 진리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을 ‘아랫사람, 천한 사람, 모든 사람의 종, 죄인 중의 죄인, 주 하느님의 부당한 종’ 등으로 칭했습니다. 그의 겸손은 예수님의 겸손을 판박이처럼 빼닮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100% 추종해
프란치스코 성인이 사셨던 중세기 가톨릭교회의 모습은 부끄러운 구석이 많았습니다. 위풍당당한 대성전들과 수준 높은 예술 작품 등으로 외관상 교회는 활짝 꽃피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회칠한 무덤 같았습니다. 지독한 고행과 극기로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 하나 뿐인 그가, 부패일로를 걷고 있던 제도 교회와 정면 대결을 펼쳤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스승 예수님의 모범을 정신이나, 이성 영성으로만 추종한 것이 아니라 100% 있는 그대로, 실제로, 구체적으로, 온 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심 이후 한평생 예수님처럼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기쁘게 했습니다.

프린치스코의 보호자이신 성모님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성모님은 보호자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원이었던 보나베투라 성인은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성모님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情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주님을 우리의 형제로 만든 분이 성모님이시며 또한 그녀를 통해 인간에게 자비가 도달했기에 그는 그녀를 자신과 형제들의 보호자로 세웠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성모 신심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성모님과 관련된 대단한 교의를 선포하지도,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성모님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고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 드리는 인사’ 찬미가를 불렀습니다.

또한 그의 마리아 공경은 언제나 성삼위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을 향한 그의 신심은 삼위일체이신 주님을 향한 찬미와 흠숭의 과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기도할 때면 그는 성모님을 홀로 모시고 관상하지 않고 언제나 성삼위 세 위격과 관련해서 관상했습니다.

제2의 마리아
성녀 클라라 수녀

출가 이후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제시한 영적 여정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충실히 따랐습니다. 때문에 클라라의 영성은 프란치스코의 영성과 동일합니다. ‘가난과 겸손과 사랑’입니다.
그녀에게 사람들은 ‘복사판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는 ‘제2의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의 거울’, ’프란치스코의 여성적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영웅적 겸손과 빛나는 가난의 성녀 클라라
다른 무엇에 앞서 그녀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수녀원장 이었지만 그녀는 수도원의 허드렛일이 당연히 자신의 일이려니 생각하고 기쁘게 해 나갔습니다. 그녀는 가난이 무엇인지, 추위에 떤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고픔이 무엇인지, 피로에 지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온 몸과 마음으로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녀의 잠자리는 아무것도 깔지 않은 맨바닥이었습니다. 냇가에서 주워온 돌이 베개였습니다. 작디작은 빵 한조각과 물 한 잔이 매 끼니 식사였습니다.

성모님 생애의 복사판
클라라의 생애는 한마디로 성모님 생애의 복사판이었습니다. 회심, 그리고 출가 이후 그녀가 일관되게 유지했던 삶의 모습은 성모님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프란치스코를 ‘제2의 그리스도’라고 칭했는데, 그녀 역시 ‘제2의 마리아’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클라라 성녀의 시성 절차 증인으로 출석한 동료 수녀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이미 지상에서부터 제2의 마리아였다고 합니다. 평생에 걸친 클라라의 삶은 빛으로 충만한 성모님 삶의 반영이었습니다.


2부 모든 공로를 성모님께

내 인생의 동반자 성모님
성녀 카타리나 동정학자

성녀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도미니코회 재속회 회원으로서의 탁월한 신앙생활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 빛나는 수덕 생활, 사심 없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조화
하느님 사랑을 기반으로 한 카타리나의 이웃 사랑은 놀라웠습니다. 살아생전 언제나 주님을 눈앞에 뵙듯이 살았으며, 살아 있는 주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지극 정성으로 섬겼던 그녀에게 주님께서는 五傷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인생의 동반자 성모님
성모님을 향한 카타리나의 사랑과 신심은 아주 각별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성모님께서 자신의 인생길을 동행하신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카타리나는 매주 토요일을 ‘성모님의 날’로 부르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성모님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공경을 표현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병약한 그녀를 몇 번이고 당신의 두 팔로 받쳐주셨고 다시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성모님의 기사騎士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영신 수련은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 사제가  우리 신앙의 후예들을 위해 선물로 남겨 주신 소중한 유산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예수회 회원들은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과 정신에 따라 오직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오늘 나는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한 성찰을 하게 됩니다. 

회심 그리고 식별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는 풍파 많고 우여곡절 투성이인 우리네 삶에 큰 위안과 위로를 건넵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그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 만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기사로서의 큰 성공을 꿈꾸며 투철한 군인 정신으로 목숨까지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하느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521년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던 그는 큰 부상을 당하고 병자성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는 회복 과정에서 영성 서적을 읽게 됩니다.

성모님의 명예를 지키고 싶었던 기사
투병 중이던 이냐시오가 우연히 손에 쥔 영성 서적에 자기도 모르게 심취해 가던 어느 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계신 성모님의 환시를 보게 됩니다. 회개의 길에 들어선 이냐시오는 간병인의 부축을 받지 않고 홀로 일어설 수 있게 되면서 그는 로욜라 성내에 있는 성모님 경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순롓길에 이냐시오는 한 가지 특별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여행 중에 만난 한 이슬람교도가 성모님의 동정성에 대해 계속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계속 주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주님, 성모님의 동정성을 의심하며 성모님을 욕되게 하는 저 녀석을 죽여 버릴까요? 한 번 봐줄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냐시오가 먼저 들른 곳은 당시 중요한 성지 몬세라트의 베네딕토 수도원 성모 성전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꼬박 밤을 지새우며 자신을 회개의 삶으로 이끌어 준 성모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가 칼 대신 손에 쥔 것은 순례자임을 상징하는 허름한 지팡이였습니다. 자신이 걸치고 있던 화려한 옷들 역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벗어주고는 거칠고 투박한 순례자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입신양명을 꿈꾸던 왕의 장교에서 성모님의 기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모든 공로를 성모님께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1515-1582)

오늘날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참된 영성가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의 영성가는 그를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편안해지고, 그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 고맙고 그로 인해 내가 작은 천국과 구원을 맛보게 되는 사람이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영성은 참으로 의미가 큽니다.

위대하고 매력적인 여성
그녀는 관상 기도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녀는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연인관계로 설정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과의 비밀스럽게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바로 ‘천주 자비의 글’입니다. 그녀는 영성생활의 기쁨과 행복, 감미로움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체험을 이웃들과 연결시켰습니다.

성모님의 사도적 개혁가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꿈꿨던 가르멜회 개혁 작업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반대파들은 그녀가 악마의 조종을 받고 있다면서 이단자로 몰아세웠습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생애 내내 성모님께서는 그녀와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녀는 자주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저는 자신을 성모님께 의탁했습니다. 그때마다 여왕이신 성모님께서는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엄마 품에 매달립시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학자(1567-1622)

그는 어렵게만 여겨졌던 성화의 길이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일찍이 만천하에 공표하신 분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성화의 길을 아주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신도들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성인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하고 외쳤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성모신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두드러진 덕행은 한없이 부드럽고 감미로운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사제로서, 학자로서, 주교로서 최고봉에 올랐지만 늘 성모님처럼 겸손했습니다. 그는 자주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의 생애를 묵상했고, 그분의 놀라운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사랑과 각별한 신심은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 「신심 생활 입문」, 「신애론」에 잘 드러납니다.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복되신 성모님을 특별히 사랑으로 공경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어머니이시므로 우리의 어머니도 되십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달려가 매달리듯 우리도 그분께 사랑을 갈망하고 그분께 의지하며 그분의 덕을 본받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듯 진심으로 그분을 공경하십시오.”

성모님의 사제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학자(1696-1787)

이천 년 가톨릭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인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치고 성모님을 사랑하지 않은 성인은 없었습니다. 많은 분 중에서 눈에 확 띄는 성인, 성모신심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분이 계신데, 그 이름은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입니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명설교가이자 대저술가였던 그는 91세의 나이로 선종했는데 살아생전 출간한 저서가 모두 110권입니다.

세속의 변호사에서 ‘주님의 변호사’로
알폰소는 나폴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머리가 비상해서 16세의 나이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유능한 변호사로 세간에 이름을 날리며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는데, 한번은 자신이 맡은 한 사건이 사소한 실수로 패소하는 쓰라림을 당합니다. 세상의 쓴 맛을 본 후 허망해하고 있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1726년 서른 살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된 알폰소는 우연히 나폴리의 뒷골목, 가난하고 버림받은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알폰소는 당시 교회의 전반을 좌지우지하던 얀선주의와 반성직주의에 맞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결코 두려운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찾아갈 때마다 언제나 환대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시고 다시한번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고해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대리자가 앉아 게십니다.”

그는 극단적 경건주의로 인해 훼손된 고해성사의 본래 가치를 복원시켰습니다. 이러한 게기로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고해 사제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합니다.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71세 되던 해에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류머티즘에 목이 심하게 굳어버립니다. 그렇게 그의 한평생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함께 숨쉬는 친근한 어머니로
성모 신심과 관련된 알폰소의 큰 공헌은 성모님을 수천 년 전 나자렛의 ‘멀고 먼 당신’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인격자, 따뜻하고 친근한 어머니로 부활시킨 것입니다.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성모님을 하느님과 죄인들 사이의 중재자로 소개합니다.


성모님은 제 첫사랑입니다!
성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그는 첫 주임 사제로 발령받은 아르스를 단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죽기 직전까지 사목한 특별한 사제였습니다. 당시 그곳은 농사짓는 시골 사람들 230여명으로 이루어진 공소 같은 본당이었습니다.

그는 사목자로서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단행했습니다. 오직 영적인 것, 하느님, 신자들의 영성생활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모든 에너지를 그곳에 쏟아 부었습니다. 성심성의껏 고해성사에 전념하였고, 매일 봉헌하는 미사는 마치도 생애 마지막 미사인 듯 정성을 다했습니다.
만학도로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기적적으로 사제로 서품이 됩니다. 그는 평소 단 한 벌밖에 없는 수단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습니다. 구두는 한 번도 약칠을 하거나 솔을 대지 않은 채 낡은 그대로 그냥 신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어떤 날은 하루 24시간 가운데 18시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남은 6시간에는 미사도 봉헌했고 강론 준비도 해야 했으며 잠도 자야 했습니다.

어머니요 친구요 연인같은  
“성모님은 저의 첫사랑입니다. 저는 그분을 알기도 전에 벌써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조금이라도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즉시 묵주를 꺼내 들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는 언제나 신중했고 꼭 필요해 보이는 건축이라 할지라도 시작하기에 앞서 아주 신중한 식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다름 아닌 성모님과 함께하는 9일 기도였습니다. 본당 신자들과 함께 정성껏 9일 기도를 바치면서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성모님께 여쭈었습니다. 9일 기도가 완전히 끝난 후 본당 신자들과 함께 공사를 시작할 것인가 아닌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였습니다.


3부 성모님의 계곡 안으로

마리아의 계곡 안으로
복자 존 헨리 뉴먼 추기경(1801-1890)

그의 이력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독실한 성공회 가문에서 성장한 그는 1825년 성공회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젊은 시정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신학자이자 사목자로 주목 받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공개 석상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천명합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힘, 그리고 위대한 선택 
“교회의 참된 권위는 사도들로부터 전해 온 것이며, 교회의 통치권은 국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도들에게 부여했고, 사도들은 주교들에게 전승했으며, 주교들은 사제들과 함께 그 권한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깨달음 이후 존 헨리 뉴먼은 큰 고뇌와 번민의 시간을 보냅니다. ‘친구들을 떠나면서’라는 제목의 고별 강론에서 존 헨리는 “그간 내가 확신하던 것이 모두 틀린 것이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원조요, 정통성을 지닌 유일한 교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위대한 선택 이후 그가 직면해야 했던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성공회 측에서는 배신자라는 비난을 가톨릭 측에서는 개종의 진실성, 신학의 정통성에 대한 의구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1982년 영국을 방문하신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향해 ‘하느님이 내린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했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기도문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감명과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주님, 제가 가는 곳마다 당신의 향기를 널리 퍼뜨릴 수 잇도록 도와주소서. 당신의 영과 생명으로 저를 가득 채우소서. 저의 온몸을 소유하셔서 저의 삶이 당신의 광채가 되게 하소서. 저를 통해 빛나시고 저와 함께 머무셔서,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제 영혼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게 하소서.”

마리아의 계곡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면서... 
가톨릭 교회로 개종한 그가 성모님과 관련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당시 영국 교황 대사였던 니콜라스 와이즈먼 주교는 버밍엄에 그의 숙소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는 그곳을 ‘마라아의 계곡’이라고 부를 만큼 성모님을 향한 각별한 애정과 친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생애 안에 드러난 성모 신심의 특징은 절제되고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신심입니다. 신학자로서 그의 마리아론은 성경과 교부들의 문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에 있어 성모님은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요 길잡이였습니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에게 성모님의 존재는 더욱 각별했습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철저한 수동의 시기, 그에게 묵주기도는 아주 중요한 기도 수단이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묵주를 손에 들고 성모님과 함께 예수그리스도의 일생과 구원 사업 전체를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그가 손수 지어 바친 기도를 통해서 성모님을 향한 그의 각별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모든 것은 다 성모님께서
성 요한 보스코 사제(1815-1888)

요한 보스코 인생의 터닝 포인트
성 요한 보스코 사제의 한평생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제요 교육자, 수도회 창립자로서 그의 삶은 셀 수 없는 역경과 고통 수많은 터닝 포인트와 넘어야할 높은 산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의붓형 안토니오는 그의 앞길을 가로 막았고, 너무나 가난했기에 신학교 입학을 위해 동네 사람들로부터 적선을 구해야했습니다.

사제 서품 이후에는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주민들로부터 오해와 마찰이 점점 심해졌고, 동료 사제들 역시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이상자 취급을 했습니다.

1846년 7월 어느 주일 사제가 된지 5년이 된 32세의 요한 보스코는 찜통 같은 더위 속에 고된 하루를 보내고 침실로 돌아가다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는 그는 병자성사도 받았습니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퍼졌고, 그날 저녁 고된 노동을 끝낸 수많은 아이들이 병실을 찾아왔습니다.

“주님, 제발 신부님이 죽지 않게 해 주세요!”
아이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 요한 보스코는 8일 동안이나 사경을 헤맸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성모상 앞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꼬박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이런 아이들의 기도 덕분이었는지, 기적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7월 말 어느 주일 오후, 요한 보스코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오라토리오(여기서는 청소년들의 기숙형 학교)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제가 살아난 것은 바로 여러분 덕분입니다. 저는 앞으로 제 모든 것, 생명까지도 여러분을 위해 바칠 것을 약속합니다.”

성모님의 심부름꾼
요한 보스코는 그 후에도 다른 여러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겪습니다. 그 절박한 위기의 순간, 인생의 밑바닥을 체험하는 순간마다 그는 즉시 걱정을 떨치고 성모님께 의탁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라는 성모님의 현존 의식이었습니다.

그의 업적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칭찬할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저는 성모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유일한 원장이신 성모님
성녀 마리아 도미니카 마자렐로 수녀


한 명의 성인은 또 다른 성인을 탄생시킵니다. 한 명의 성인이 풍기는 성덕의 향기는 주변을 향해 강렬하게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15분 동안이나!
사는 게 바빠 하루 단 15분도 주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지내는 날이 수두룩한데, 요한 보스코와 함께 살레시오 수녀회를 공동 창립한 마리아 도미니카 마자렐로 성녀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오늘 저는 하루 동안 15분이나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어느 날 마리아에게는 한 위대한 인물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요한 보스코가 오라토리오 청소년들과 함께 모르네제로 소풍을 온 것입니다. 그때 마리아는 그와의 첫 대면을 통해  즉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 분은 성인이다.! 안심하고 미래를 맡겨도 될 분이다!” 

내면이 신뢰로 가득차자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를 따라 한 배에 오르게 됩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즉시 갈 곳 없는 소녀들을 위한 집을 마련했습니다. 그들의 미래를 위해 학교를 짓습니다. 오라토리오를 열어 소녀들을 기쁨과 행복의 도가니로 빠지게 했습니다.

그렇게 살레시오회 수녀회는 살레시오회와 더불어 신속하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1872년 살레시오 수녀회기 창설되고 마리아는 초대 총장으로 임명됩니다.

각자의 마음속에 깨끗한 꽃을!
막중한 임무의 봉사직을 수행하던 마리아가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장상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겸손했습니다.
“저는 원장 수녀가 아니라 부원장 수녀입니다. 우리의 원장은 성모님이십니다.”

마리아의 성모님을 향한 큰 사랑은 세 가지 신심으로 요약됩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를 향한 사랑,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를 향한 신뢰,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향한 공경’입니다. 철저한 순명, 자발적 가난, 빛나는 순결, 한없는 겸손, 모성적 희생, 일상적 기도... 그녀의 얼굴은 성모님의 얼굴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친구
성 도미니코 사비오(1842-1857

성 도미니코 사비오 성인의 시성은 보편 교회 전체에 큰 충격을 안겨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중학생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시성된 것은 학력뿐만 아니라 연륜이나 경륜, 지혜와도 무관했습니다. 이는 성화의 길이 어려운 길이 아님을 선포한 것입니다.

저를 성인이 되게 해 주십시오!
도미니코 사비오 성성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겨우 다섯 살 되던 해, 손님과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은 식사 전 기도도 하지 않고 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그는 식사 전 기도를 빼먹은 그 손님에게 뭐라고 한마디 건네고 싶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겨우 참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식사를 하지 않고 거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손님이 떠나고 나서, 걱정이 된 그의 부모가 물었습니다.
“왜 다들 식사할 때 함께하지 않았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식사 전 기도를 빼먹고 짐승처럼 먹을 줄만 아는 사람하고는 식사하기 싫어서요.”

성덕이 워낙 출중했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열한 살이나 열두 살이 되어야 하는 첫 영성체를 일곱 살에 했습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날, 첫 영성체 하던 날은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기뻤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첫영성체를 하며 네 가지 유명한 결심을 합니다.
“자주 고해성사를 보고, 고해 지도 신부님이 하락ㅎ면 항상 영성체 하겠습니다. 축일을 거룩하게 지내겠습니다. 제 가장 친한 친구는 예수님과 성모님뿐입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일곱 살 난 어린이가 이런 결심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겠지만, 정확한 자료를 토대로 한 사실입니다. 성인이 되고 싶다는 그의 요청에 스승 요한 보스코는 아주 쉬운 성화의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모두가 성인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성인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매일 매 순간 여러분이 하는 일을 충실히 하십시오. 또한 항상 기쁘게 지내십시오.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성모님을 바라보는데 합당한 사람
그는 열두 살이 되던 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때 성모상 앞에서 이런 결심을 합니다.
“성모님, 저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저를 항상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해 주십시오, 성모님 언제나 저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죄에라도 떨어지게 된다면 차라리 지금 당장 죽게 해 주십시오.”

하루는 그가 오라토리오 친구들과 시장터를 가는데 다른 친구들은 길거리 연극을 보러 달려갔지만, 그는 본체만체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사비오! 너는 두 눈을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래? 이렇게 재밌는 구경거리를 마다하다니.” 그때 그는 “내 두눈을 잘 간직해 두었다가 천상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바라보는데 쓸 거야. 난 장차 하느님의 도움으로 성모님을 바라보는 데 합당한 삶이 되고 싶어!”

안타깝게도 그는 열다섯 살의 나이에 당시로서는 치명적인 폐렴에 걸립니다. 그는 작별 인사를 하러 모인 친구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친구들아, 부디 성모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다른 친구들도 성모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해 줘.”  

나자렛의 성모님을 따라서
복자 샤를르 드 푸코 사제(1858-1916)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신앙마저 잃어버린 그는 젊은 시절,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깊숙이 세속에 빠져들어 주님과 자신 사이에 높은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심연의 구멍 속으로 하염없이 빨려 들어가던 어느 날, 마침내 그는 보았습니다. 그 깊고 어두운 곳에서도 주님께서는 늘 현존해 계셨다는 것을요. 오랜 타락과 방황의 세월 중에도 주님께서는 간절히 자신을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정적 회심 이후 그는 주님을 더욱 가까이 추종하기 위해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합니다. 그곳에서 6년여 간 침묵과 고독, 기도와 단련 속에 거룩하고 멋진 수도자로 거듭납니다. 그는 그러나 수도원을 떠나 나자렛에 있는 글라라 수녀원으로 갑니다. 1897년부터 1900년까지 그는 수녀원에서 가장 낮은 사람, 잡부이자 정원사, 제의 방지기로 충실히 살아갑니다. 그리고 1901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 다시 말해 신앙이 없는 친구요 사제가 되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깊은 사막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모든 것이 제한된 사하라 사막에서도 지극히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겸손하고 다정다감했던지, 그곳에서 살아가는 유목민들, 회교도들이 그를 둘도 없는 친구로 받아들였습니다. 타종교인들, 특히 회교도들을 향한 그의 관대함과 너그러움은 끝이 없었습니다.

“주님,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게 해 주십시오!”

나무는 떨어지는 나뭇잎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무엇에 앞서 철저하게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피정을 떠났습니다.

사제 서품을 앞두고 그가 한 다짐입니다.
“성직자가 된 나의 천상 식탁은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들이 아니라 사제를 더 필요로 하는 지체장애인들, 시각 장애인들, 더 궁핍한 영혼들에게 차려져야 합니다.”

그는 건강과 죽음에 대해서도 지극히 초연했습니다.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서는 떨어지는 나뭇잎에 대해서 나무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듯 염려하지 마십시오.”

눈과 생각과 마음이 온통 향하는 분
그의 신앙 안에서 나자렛은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그는 나자렛 예수님, 그리고 나자렛 성모님의 숨은 생활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나자렛 예수님과 성모님처럼 숨은 생활로, 그리고 침묵 속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평생에 걸친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마리아의 눈과 생각과 마음은 온통 예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것이 관상의 생활이요, 열정과 찬미로 충만한 사랑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몫으로서 나자렛 성모님의 몫이었습니다.”

성모님의 현존은 샤를르 드 푸코의 영성생활을 지탱하는 중심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관상 기도 중에 틈만 나면 성모님을 찾았고, 불렀으며, 그분께 중재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성모님, 당신과 함께 우리 주님 발치에 머무는 것은 얼마나 감미로운지요. 주님을 바라보고 당신과 함께 주님께 기도하도록, 저의 눈과 정신과 마음이 언제나 깨어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미소 짓는 성모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1873-1897)

그녀의 삶이 마치 깊은 산 속 외딴 곳에 홀로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작은 꽃 같다고 하여 ‘소화小花 데레사’라고도 불립니다. 언뜻 보기에 그녀의 생애는 성인이 되기에 많이 부족해 보였고 불과 24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성덕을 쌓기에 충분한 시간과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레사는 나이와 연륜이 성덕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데레사는 하느님을 마치 사랑하는 연인 대하듯 대했습니다. 그녀가 하느님과 주고 받은 대화 곧 ‘기도’는 마치도 너무 사랑해서 죽고 못 사는 연인들끼리 주고받은 연애편지와 같았습니다. 그녀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작은 한 송이 작은 숨은 꽃이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숨은 것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녀 특유의 빛나는 작은 길을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을 찬란하게
데레사 성녀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우울했습니다. 그녀가 네 살 되던 1877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납니다. 5년 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 역할을 대신했던 언니 폴리나 마저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합니다. 어린 나이에 연이은 이별과 상실 앞에 그녀의 영혼과 육체는 큰 타격을 입게 되고, 열 살 되던 해 그녀의 병세는 최악의 상태에 도달합니다.

언니들은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성모상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탈진 상태의 그녀도 성모님을 바라보며 자비의 기도를 열심히 바쳤습니다.  그 순간 기적처럼 따뜻한 위로와 치유의 손길이 다가왔는데 그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성모님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선함과 부드러움으로 가득했어요. 그 순간 제 모든 고통이 마치 떠오르는 태양 앞에 안개 걷히듯 사라졌습니다. 저는 성모님께서 저를 보고 미소 지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첫영성체를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심을 내세웠습니다.
“저는 결코 용기를 잃지 않겠습니다. 저는 매일 성모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저는 자존심을 굽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병약했던 데레사 수녀가 죽음을 향하던 어느 날, 그녀는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소망 한 가지는 성모님에 대한 시를 한 편 짓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여왕이라기보다 어머니에 가깝습니다. 그분은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을 비범하고 찬란하게 살아가셨습니다.......”

 1897년 9월 30일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 앞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이 저를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저는 죽지 않습니다. 삶으로 들어갑니다.”

 
4부 살아 있는 묵주


성모님의 극진한 효자
가경자 빈체시오 치마티 사제(1878-1965)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시고, 예수위 까리따스 수녀회 설립에도 큰 역할을 하신 가경자 빈첸시오 치마티 사제님은 ‘마에스트로’, ‘주님의 음유 시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당대 유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동시에 아주 감미로운 바리톤 목소리를 지니셨는데, 음악회가 끝나면 목소리에 반한 귀부인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설 정도였습니다. 그가 주관한 선교 음악회는 점점 유명세를 타게 되었는데 일본 전역은 물론 한국과 중국까지 대략 2,000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치마티 신부님은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신학, 영성이나 인품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탁월하고 비범했습니다. 그는 찬란한 성덕과 비범함을 청빈과 겸손의 덕으로 가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복장은 언제나 여기저기 수없이 꿰맨 자국투성이의 낡은 수단 한 벌 뿐이었습니다. 수도회 장상들이 그에게 중책을 맡기려 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완강하게 사양했습니다.  

청소년들의 자상한 할아버지
만년이 도달한 치마티 신부님께서는 한마디로 편안하고 따뜻하고 인정 많은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요한 보스코의 모습과 판박이였습니다.

“큰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입니다. 날마다 자신의 의무를 단순하게 실행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낙천적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하늘 엄마
치마티 신부님은 언제 어디서나 묵주를 손에 들고 기도하셨습니다. 성모님을 향한 그의 극진한 효심은 음악을 통해서도 잘 드러났습니다. 그는 직접 ‘아베 마리아’, ‘레지나 첼리’등 주옥 같은 선율을 작곡하여 성모님께 봉헌했습니다. 치마티 신부님은 성모님을 ‘우리의 하늘 엄마’라고 즐겨 불렀습니다.

성모님의 교황
성 요한 23세 교황(1881-1963)

역대 교황들 가운데 프란치스코 교황 이상으로 착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던 교황이 한 분 계셨는데, 바로 성 요한 23세 교황이십니다.

“교황이 국가수반이자 외교관, 학자이자 조직가이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저 착한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역사상 유례없는 교황님, 교황님 같지 않은 교황님,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교황님, 탁월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 그 누구든 부담 없는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그런 교황님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영혼의 일기
요한 23세 교황님의 「영혼의 일기」를 읽으면서 그가 성화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얼ㄹ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트레이드 맠인 온화하고 따뜻하고 착한 교황의 이미지는 어느 순간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노력 끝에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 할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일기」를 읽으면서 받은 가장 큰 감동은 그분의 솔직함이었습니다. 그분 역시 다양한 인간적 결핍을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가셨으며, 때로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하셨고, 매일매일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한한 노력을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일기 내용 중 자주 등장하는 단골 하소연은 과식이나 게으름, 작심 3일이나 이웃들에 대한 험담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교황님께서는 신학생 시절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평생에 걸쳐 매주 한 번씩 꼭 고해성사를 보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일생 동안 매주 고해성사에 충실해 왔습니다. 잘 준비된 고해성사는 성화의 길에 있어서는 확고한 기초가 됩니다.”

제 생각이 더 자주 어머니를 향하게 하소서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요한 23세 교황님을 ‘성모님의 교황’이라고 칭합니다. 성모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평생토록 지속되었으며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는 순간에도 그러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그를 성모님께 봉헌했습니다.
“안젤로야, 저기봐! 성모님이 참 예쁘시지? 엄마가 너를 성모님께 봉헌했단다.”

요한 23세 교황님은 묵주기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통해 성모님을 향한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묵주기도는 기도의 최고 수단입니다. 묵주기도로 주님의 육화와 구원의 드라마가 우리 마음에 새겨집니다. 저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에게 매일 저녁마다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약속했고 평생토록 실천했습니다.”

교회에 새바람을 불어 넣은 은총의 사건
놀랍게도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교회에 새바람을 불어넣은 은총의 사건, 제2의 성령강림이라 할 수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를 선포하십니다.
또한 공의회의 천상 수호자로 성모님을 지목하시면서 공의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그분의 전구를 간곡히 청했습니다. 전 세계 신자들을 향해서도 묵주기도와 삼종기도를 열심히 바쳐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살아있는 묵주
성 비오 사제(1887-1968)

성인들은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열정, 다시 말해 인간적인 욕구들과 에너지들을 더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피에트릴치나의 성 비오를 五傷의 비오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쓸모없는 돌밭투성이인 가난하고 척박한 농촌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1903년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로 서품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추종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깜짝 놀랄 일이 그에게 발생했습니다. 1918년에 그는 예수님처럼 오상을 받게 됩니다. 놀랍게도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가시밭길과 십자가의 길로 변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고, 교회가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1923년부터 그는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었고,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질문했습니다.  “신부님, 얼마나 아프세요?.“
“굵고 네모난 못을 손에 대고 망치로 힘껏 때려 박은 다음에 그 못을 뺑 돌려보십시오. 꼭 그만큼 아픕니다.”

그는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한 그 50년 동안 골고타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을 똑같이 느꼈습니다. 오상으로 인한 영광과 기쁨도 컸겠지만, 오상으로 인해 그분이 매일 받았던 고통은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오상을 받으신 후 매일 흘렸던 혈액의 양은 대략 찻잔으로 하나 정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을 통해 매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생하게 묵상했습니다.

그는 고해자 한 명 한 명을 각별하게 다루었습니다. 고해가 끝난 후 이런 말로 작별 인사를 건넸습니다.
“잘 가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대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묵주기도
비오신부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사진에는 대부분 양 손바닥의 상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지혈하기 위한 수도복 색깔의 천과 그 천위에 걸쳐진 묵주가 담겨 있습니다.
그가 묵주기도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주변 사람들은 그를 ‘살아 있는 묵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저와 싸우는 악령의 힘은 엄청납니다. 이 전투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바로 묵주기도입니다.”

그가 머물다 세상을 떠난 침실 입구에는 성모님의 성인이었던 베르나르도 성인의 말씀이 걸려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제 모든 희망의 원천입니다.”

교회역사상 그만큼 묵주기도를 사랑한 사람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당당한 제자
성녀 에디트 슈타인 수녀(1891-1942)

혼돈과 격동의 세월이엇던 20세기 초, 파란만장하면서도 숭고하고 위대한 삶을 살았던 신비스러운 성인이 바로 독일 태생의 유대인으로서 가르멜회 수녀회 수도자였던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입니다. 우리에게는 ‘에디트 슈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근합니다.

‘철학자, 여성 운동가, 가르멜회 수녀,아우슈비츠 사랑의 순교자, 최초의 유대인 출신 성녀,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

그녀가 연출한 장엄한 삶의 연극은 총 4막으로 구성됩니다. 제 1막은 그녀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의 30여 년에 걸친 세월입니다. 그녀의 젊은 시절은 진리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추구가 큰 결실을 맺던 날들이었습니다. 열정을 다해 진리를 추구하고 헌신한 결과 그녀는 당대 뛰어난 철학자이자 지식인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안타깝게도 무신론에 빠지고 맙니다.

제2막은 가까운 친구의 죽음 앞에서, 결정적으로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의 자서전을 접하고 나서부터입니다. ‘ 이것이야 말로 진리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찾아 왔던 참 진리가 가톨릭 교회 안에 있음을 발견한 그녀는 곧바로 세례를 받습니다. 

제3막은 또 다른 10여 년에 걸친 가르멜 수녀회 수도자로서의 삶입니다. 그녀는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동기 수녀들과의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낮춤과 겸손의 덕이 필요했습니다. 오랜 세월 축척해온 학문적 성취도 모두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그녀 인생의 절정인 제4막은 나치에 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독가스실에서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마지막 일주일간의 삶입니다. 그녀에게는 유대인의 신분을 감추고 은신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지만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새로운 여성성의 모델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영성이 긴 세월을 건너와서도 찬란히 빛나는 이유는 그녀가 평생토록 지니고 살았던 진리를 향한 강렬한 역동성과 적극성, 개방성 때문입니다. 그 결과 유대교 신자에서 무신론자로, 그리스도교 신자로, 가르멜 수도자로, 사랑의 순교자로 놀라운 성장과 변화를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나치라는 거대한 악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으며, 신앙의 진리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열매 맺는 것임을 저항과 죽음을 통해 선포했습니다.

당당한 성모님과 당당한 에디트 슈타인
무엇보다도 에데트 슈타인은 성모님의 신앙 안에 드러난 진취적인 측면에 방점을 찍습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협조자로서의 성모님, 인류 전체의 영적 어머니로서의 성모님, 여성성의 완전한 모델로서의 성모님을 강조했습니다.

“성모님은 온유함과 강인함을 겸비한 이상적인 여성이셨습니다. 성모님은 십자가 아래 서 계셨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성모님, 그리고 교회와 함께 십자가 아래 서 있어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군사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1894-1941)

그가 마지막으로 헌신했던 사목터는 큰 본당이나 학교가 아니라 악명 높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양 떼는 지하 감방에서 신음하던 동료 수감자들이었습니다.  

그는 폴란드 출신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인 동시에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 창립자였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댓글목록

작성자: 글라라님     작성일시: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을 통하여 전혀 생소한 분, 이미 알고 있었던 분, 영성의 향기 그윽한 성인들을 만날 수 있어서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용량 초과 된 뒷부분이 있어서 첨부파일로도 올립니다.

작성자: 계희hall님     작성일시:

함께한 것 같은 자세한 영적독서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