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성당 2019년 6월 영적 독서「日常道를 살아가는 인간」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9-06-26 17:44:40    조회 : 282회    댓글: 0

세마 성당  2019. 6월 영적도서 : 「日常道를 살아가는 인간」


지은이 : 송봉모 신부
예수회 신부. 로마 성서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을 받고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주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에 성서와 인간 시리즈, 성서 인물 시리즈, 요한복음산책 시리즈와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예수-탄생과 어린 시절」,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을 위한 The Lord Calls My Name, Wounds and Forgiveness  등이 있다.
 

나눔의 글
 
“카이로스는 영원을 향한 시간, 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주는 구원적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말은 흘러가는 시간, 어제, 오늘, 내일 등 소모되는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크로노스와는 구분된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처럼 우리의 삶도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일상적 시간인 크로노스로 언젠가는 허망하게 사라질 세상 것을 향해 정신없이 살다가 쓸쓸히 사라지는 삶이다. 다른 하나는 구원적 시간인 카이로스로 중요한 일들을 우선시하면서 즉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주님에게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한마디로 크로노스적 삶은 날로 탁해지고 속물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허망한 삶이지만, 카이로스적 삶은 날로 새로워지고 내적 인간으로 만드는 영원한 삶이다.”
 (본문 72-73p 4. 자각하며 살아야 할 세 가지 요소 : 바쁜 일과  중요한 일의 구분 中에서)


항상 손에 들고 다니며 읽기 좋은 도서, 싸이즈는 아담하지만 알찬 내용으로 가득한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10번째 도서입니다. 중요한 내용을 요약하여 올립니다.


머리말


 쫓기는 삶에 대한 반성


이런 자는 행복하리라.
이런 자만이 행복하리라.
오늘을 자기의 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만이 행복하리라.
마음에 자신을 가지고
내일이야 될 대로 되려무나.
하여간 나는 오늘을 살겠노라고
그렇게 말하는 자는 행복하리라.
자신 있게 말하는 자가 행복하리라.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


우리 몸은 바쁜 것에 익숙해져 어쩌다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되면 어찌할 줄을 모른다. 조용한 음악을 들으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다든지, 한가로이 공원을 산책한다는 일은 생각도 못한다.


왜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바쁘다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바빠야 인생을 충만하게 사는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낙오자나 실패자가 된 것처럼 생각한다.


쫒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 바쁘다. 너무 바빠서 인생의 친밀한 관계, 곧 부부관계, 가족관계, 친구관계를 돌볼 겨를이 없다. 쫒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너무 바빠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물론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 돌볼 겨를이 없다. 오랫동안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않아 하느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오는 위로와 기쁨을 얻지 못한다. 또 성찰과 영적 독서를 멀리하여 내적 성장은 멈추어 버렸고 영혼은 황폐되어 있다. 


‘쫒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생의 매 단계를 느긋이 즐기면서 내적으로 질서 잡힌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는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풍성한 생명을 주고 또 주고 싶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바쁜 삶을 사셨지만, 그 삶은 언제나 균형 잡혀 있다. 예수님은 음식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수많은 병자들과 군중에게 둘러싸여 지냈지만 그분의 첫 번째 관심은 하느님 한 분뿐이었으며 통합된 삶을 영위하셨다. 우리는 균형 있고 통합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찬미하면서 그것을 가능케 하였던 근본 요소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


마태오복음 6장 25-34절에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통합되게 사시면서 취하셨던 행동양식이 들어 있다. 우리는 이제 이 구절을 함께 묵상하면서 쫒기지 않고 살아가는 삶, 질서 잡힌 삶의 길을 추구해보자. 


1
마태오복음 6장 25-34절의 말씀


성서 본문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여러분의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또 여러분의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
목숨은 양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시오.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추수하지도 않을 뿐더러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중략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시오.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다 여러분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게십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시오. 사실 내일은 그 나름대로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그날의 괴로움으로 족합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본 성서 본문 비판

과연 모든 새들이 먹이 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고 노래 부르고 있는가? 모든 새들이 다들 토실토실 살쪄있는가? 모든 꽃들이 활짝 피어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가?


‘내일을 걱정하지 마시오.’ 라니 경쟁이 덜했던 조선 시대라면 모를까. 요즘 같은 시대에 조금만 방심해도 직장에서 쫒겨나는 판에 어떻게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 주님께서는 부양할 가족이 없어서 내일에 대한 세심한 준비가 얼마나 필요한 줄 몰랐던 것인가?


주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일까?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돈 걱정이 없는 부자들?
예수님이 극심한 가난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시달리는 자들에게 ‘걱정하지 마시오’하고 말한 것은 현실감이 없어서도, 그들의 어려운 사정을 몰라서도 아니다. 그보다는 근심의 노예가 되어 활력을 잃어버리고 건강을 해쳐서는 안 되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근심 걱정이 우리 몸을 해치고 목숨까지 해친다.

이 모든 예들은 하나같이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 부족과 세속에 대한 집착에서 이루어진 쓸데없는 걱정을 경계하는 말씀이다.


모든 근심 걱정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근심 걱정,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까 봐  하는 걱정은 올바른 근심 걱정이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근심’은 회심을 이루게 하는 근심, 영혼 구원을 위한 근심,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기 위한 근심 등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 나그네 삶에서 종신토록 갖고 다녀야 할 근심이기에 終身之憂종신지우라 부른다.


성서 본문에 대한 구조 분석

예수님의 가르침은 선포로써 이루어진다. 인간이 얼마나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살아가면 성서에 ‘걱정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500번 이상이나 나오겠는가?

‘하루하루 그날의 걱정으로 족하다’는 주님의 말씀이야말로 이 책의 제목인 日常道를 살아가는 인간의 핵심 주제가 된다. 

 

2
첫 번째와 두 번째 ‘걱정하지 마시오’


걱정하지 마시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니

주님은 우리에게 依食住 문제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새나 야생 백합같이 하찮은 피조물도 하는 아버지께서 정성으로 돌보아 주시는데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들이야 얼마나 더 잘 돌보아 주시겠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신다.


일찍이 잠언 저자는 심령의 근심이 몸은 물론이요 뼈까지 마르게 한다고 했다(잠언 17, 22). 모든 질병은 근심 걱정에서 나오고 걱정은 우리 목숨을 연장시키기보다 단축시킨다.
주님이 씨를 뿌리지도 않고 곳간에 식량도 비축하지 않는 새 이야기를 하신 것은 우리도 새처럼 농사를 그만두고 저축도 하지 말아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새들이 그날그날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는지 알고 계셨다. 주님의 시선은 먹이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축 늘어져 있는 새의 모습이 아니라 한시도 쉬지 않고 날아다니지만 언제나 활기찬 모습에 가 있다.


의식주 문제, 곧 현세적 문제에 사로잡혀 근심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모독은 물론이요 우리가 그만큼 하느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자기 고백일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이방인이 아니니

의식주를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마태 6,32) 

세상 사람들은 하늘 아버지를 모르기에  자기 목숨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에 노심초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부를 때 항시 ‘아빠’라고 불렀고 우리 또한 그렇게 부르도록 말씀하셨다.


(1) 하느님이 우리의 하늘 아빠라면 그분은 우리가 원하는 자리에 언제나 계신다. 문제는 우리가 입으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그분의 돌보심을 믿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데 있다.


(2) 하느님을 진정 ‘아빠, 아버지’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형식적으로 기도하거나 고해성사를 보거나 미사에 참석할 수 없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들은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할 수 없다.


(3) 하느님이 우리의 ‘아빠, 아버지’시라면 우리가 생에서 겪게 되는 고통스런 사간들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고통은 더 이상 하느님의 진노에서 나오는 저주나 죄에 대한 심판의 표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단련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성서는 이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고통이 자녀를 향한 하늘 아버지의 부성적 사랑임을 강조한다.


(4) 하느님이 진정 우리의 ‘아빠, 아버지’이시라면 우리는 더 이상 십계명에 기초해서 고해성사를 볼 수 없다. 죄와 용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하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한 단계 깊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을 거스르는 행위는 모두 다 죄이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위는 모두가 우리의 허물과 잘못이 되는 것이다.

한편 용서도 아버지와 자녀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하느님은  ‘아빠, 아버지’이시기에 자녀인 우리를 조건 없이 용서하신다.


(5) 하느님이 우리 모두의 ‘아빠,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는 수많은 장벽과 편견을 넘어서서 다른 이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세상 안에 가족 사랑과 형제적 사랑을 확장 시킬 수 있다. 인간관계를 가로지르는 모든 인종적, 국가적, 종교적 장벽과 편견이 ‘아빠, 아버지’라는 하느님 앞에서 해소될 수 있도록 노력하게 만든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제게 이것을 주십시오, 또는 제게서 이것을 가져가십시오.’하고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아버지’를 매순간 신뢰한다.    

 
3
세 번째 ‘걱정하지 마시오’와 일상도(日常道)의 삶


세 번째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이 책의 주제가 되는 일상도의 삶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내일은 그 나름대로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그날의 괴로움으로 족합니다.”(마태 6,34)
 

주님의 권고 말씀은 지극히 실존적이요 현실적이다. 내일을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고통만 허락하신다. 지금은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내일이다.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오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마음의 평화는 쉽게 올 것이다. 내일을 미리 당겨 걱정하는 이들을 회화적으로 표현하자면, 휴가차 유람선을 탔으면서도 마음껏 즐기기보다는 혹시나 타이타닉호처럼 배가 파선되면 어떡하나 걱정돼서 구명대에만 신경 쓰는 꼴이다.


아무리 해야 할 일들이 태산처럼 많고 그 일들이 힘겹다 하더라도 하나씩만 처리한다면 누구든지 끝낼 수 있다. 하지만 한꺼번에 서둘러 처리하려 한다면 몸이 고장 나든 정신이 고장 나든 어느 한쪽이 고장 날 것이다. 정신 건강과 영혼건강에 가장 이로운 것은 내일 할 일은 내일 생각하는 것이다. 내일 일을 걱정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주 전략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속성상 오늘을 살게 하시지만 마귀는 내일을 살도록 이끈다. 마귀는 우리가 늘 내일을 바라보고 살도록 유혹한다. 내일을 바라보면서 수심에 잠기도록 유도할 뿐 아니라 ‘내일 내일’ 하면서 중요한 오늘 일들을 소홀히 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현재를 살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 오늘의 하느님, 일상도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점은 하느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이름에서 드러난다.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은 히브리 말로 ‘나는 있는 자로서 이다’라는 뜻이다.

‘나는 있는 자로서 이다’이신 야훼 하느님은 어제와 내일은 모르시는 분이다. 지금 오늘 이 순간만을 아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日常道 (The Way of Everyday Life)의 하느님으로 불린다.


하느님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신자들의 기도’(우리 식으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예수님은 ‘내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나 ‘우리에게 십 년치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오늘의 양식만 주는 일상도의 하느님인 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일상도의 하느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은 일상도의 영성이다.  일상도의 영성을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은 평화롭고 안정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 우리 마음은 걱정과 수심에 잠기고 영혼은 지치고 메마르게 될 것이다. 
  
 

4
 자각하며 살아야 할 세 가지 요소


일상도의 하느님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면 어느 누가 그렇게 살아가려 애쓰지 않겠는가? 무엇이 일상도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지 하나하나 분석 점검하고 그것들에 대한 적절한 강구책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바쁜 일과 중요한 일의 구분

먼저 바쁜 일들에 치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바쁜 일들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많은 경우 바쁜 일들은 우리 성격이나 그릇된 생활양식에서 온다. 때로 조용한 시간이 주어져도 즉시 정신없는 생활로 돌아간다. 바쁘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성향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오늘 할 일은 오늘 하고, 1시에 할 일은 1시에 하면서 일상도를 살아갈 수 있다. 


바쁜 일들의 또 다른 정체는, 그것이 항상 우리 주위에 늘어서 있다는 것이다. ‘일감 바구니는 언제나 가득 차 있다’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감 바구니의 이러한 속성을 모르고 밀려오는 일들을 급히 처리하고자 애를 쓴다. 몸이 지칠 대로 지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만 하고 쉬어야지, 이것만’ 하면서 몸을 닦달하고 진을 다 뺀다. 40대 젊은 가장들이 과로로 세상을 뜨거나 병에 걸리는 것은 한꺼번에 생명의 진을 고갈 시켰기 때문이다.

생명을 잘 보존하려면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은 힘들여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진리는 자연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면 즉시 알 수 있다.  자연은 소란도 피우지 않고, 진도 빼지 않고, 최소한의 노력만을 하면서 살아간다.


새들은 날아다니려 애쓰지 않고 그냥 날아다닌다. 모두 자기들의 본성을 따라 자연스럽게 자라고 움직인다. 유일하게 자기 본성을 따라 살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욕심과 애착을 버리지 못하기에 그 행위 속에 힘이 들어가 있고, 힘이 들어가 있기에 결과적으로 생명력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만이 욕심을 부린다는 말은 인간만이 늘 몸이 붓고 긴장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바쁜 일들에 끌려 다니면서 생의 힘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중요한 일과 급한 일 사이에서 중요한 일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성서는 짧고 귀한 인생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지혜롭게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여러분은 우둔한 자들이 아니라 슬기로운 이들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자세히 살피시오. 때를 선용하시오.”(에페 5,15)


카이로스는 영원을 향한 시간, 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주는 구원적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그리스 말이다. 이 말은 흘러가는 시간, 어제, 오늘, 내일 등 소모되는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크로노스와는 구분된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처럼 우리의 삶도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일상적 시간인 크로노스로 언젠가는 허망하게 사라질 세상 것을 향해 정신없이 살다가 쓸쓸히 사라지는 삶이다. 다른 하나는 구원적 시간인 카이로스로 중요한 일들을 우선시하면서 즉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주님에게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한마디로 크로노스적 삶은 날로 탁해지고 속물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허망한 삶이지만, 카이로스적 삶은 날로 새로워지고 내적 인간으로 만드는 영원한 삶이다.

성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성도聖徒라 부른다. 주님의 뜻을 일상에서 성취하기 위하여 카이로스적 삶을 부단히 살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 풍파에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삶을 영위해 가는 기준점은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도로 불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 삶은 상당히 크로노스적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잡으려 하는지 바라다볼 시간이 없다. 우리가 중요한 일들 때문에 바빠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귀한 사람들, 배우자, 가족, 친지, 친구들과 편안히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다. 하는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고 성서를 읽으며 주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할 시간이 없다.


카이로스적 삶은 모든 일들을 서둘러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일들을 정성들여 하는 데 있다. 매일 하느님 아버지와 기도 대화를 나누고, 부부가 서로 진실된 대화를 나누며, 자녀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면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은 중요한 일들이지만 바쁜 일들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되지 않는다.


한편 중요하지는 않지만 급한 일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당장 처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은 일감 바구니들, 울리는 전화벨과 답장을 기다리는 편지들 약속들, 이런 모든 것들은 늘 급한 일들로 다가와서 진정 중요한 일들은 뒤로 밀려나는 것이다.


성도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순간 삶이 카이로스적 삶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주님이라 부르는 예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야 한다.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에 첫 번째 관심을 두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중요한 일들을 우선시 하며 살아가려다 보면 항상 바쁜 일들로 인해 갈등을 겪고 마음의 불안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화와 무난한 일 처리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과 바쁜 일 사이에서 섬세한 조정이 필요하다.


① 우선 중요하면서 급한 일을 구분해서 먼저 처리할 필요가 있다.
② 그 다음 순서는, 중요하지만 급하지는 않은 일이다. (하느님, 자신, 가족, 친지, 친구와의 관계)
③ 다음은 중요하지는 않은데 급히 처리해야 할 것처럼 다가오는 ‘일감 바구니’이다. 통상 ‘일감 바구니’는 긴급하다는 가면을 쓰고 있다. 온 가족이 오랜만에 모여 함께 식사 할 때도 전화벨이 울리면 그 귀한 시간을 무시하고 전화를 받는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도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가정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할 때, 하느님은 성전 건축에 종사하는 자들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가족들과 떨어져 있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하느님은 당신을 위한 성전 건축이 아무리 거룩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 전에 가정에 더 충실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쁜 일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기 자신과 친밀한 사람들과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누구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 마음의 평화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니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것이 일상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방법이다.


선택과 결단의 삶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침에 일어나 성호를 그으며 주님께 영광 드리는 하루가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한낮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인욕人慾에 반응하며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똑 같이 살아간다. 왜 그럴까? 정신없이 반응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하루를 살다보면 갖가지 기분 나쁜 일들이 생기고 원치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성질대로 응수했기 때문이다. 


반응하지 않는 것을 리처드 칼슨은 “누군가가 던진 공을 잡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누군가가 던진 공을 반드시 잡을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이 몰상식한 청을 해올 때 그 공을 즉시 받아서 화를 낼 필요는 없다. 누군가가 우리를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도모하려 할 때 그 공을 즉시 받아서 희생당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성질대로 반응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빼앗기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일상도를 살아가려면 언제 공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알아야 한다.


“누군가가 반대 의견이나 비평을 해댈 때 그것을 잽싸게 받아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받지 않고 하루를 평온하게 보낼 수도 있다. 누군가가 문제를 던졌을 때 그것을 반드시 잡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은 평화를 지켜내는 강력한 방패이다.”


일상도를 살아가려면 누군가 던진 공을 생각 없이 받지 말아야 한다. 받을 것인지 받지 말아야 할 것인지, 받는다면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지 그때마다 선택해야 한다. 크고 중요한 일은 물론이지만 아주 평범하고 사소한 일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이 큰일에도 충실하다.”(루가 16,10)고 말씀하셨듯이.

누군가 진지하게 그날 하루를 하느님께 봉헌했다면 어떻게 되는대로 반응하며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루 중 매순간 선택 결정하며 산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현존을 믿으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점이다. 미사를 드리거나, 성체 앞에 머물러 있거나, 영적 독서나 깊은 묵상기도 중에 있을 때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기 빨래를 하든 밥을 짓든, 사무를 보든 다리를 놓든, 그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일로 여기고 정성을 다해서 할 때 함께하신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1 고린 10,31)


많은 경우 선택 결단이 불가능할 경우도 있다. 가난한 내 부모를 바꿀 수도 없고, 사라져 가는 젊음과 병들어 가는 내 육신을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우리의 선택 범위를 넘어서 있다.

하지만 환경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의 몫이다. 주어진 환경이 어떠하든 환경의 주인이 되어 적극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괴로워하든, 휴식을 취하든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다. 주어진 자리와 환경 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행위가 되도록 적극적인 지향을 둘 수 있다. 


가상적 걱정을 멀리함

일상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 실제의 걱정과 가상의 걱정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늘 아버지와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무려 550번에 걸쳐 하셨지만 우리 하루 삶은 여전히 온갖 상상에 의한 걱정거리로 가득 차 있다. 가상적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비극적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전에 그 사건의 고통을 앞당겨 체험한다.


어느 성인은 근심 걱정은 마귀의 운동장이라고 했다. 마귀는 가상적인 비극의 씨앗을 우리 안에 뿌리고는 우리의 평화를 갉아 먹는다. 반면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담대한 영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2디모 1,7)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심리학자 칼슨 박사는 우리가 일상도를 제대로 살아가려면 우선 삶의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된다고 말한다. 별것 아닌 것들을  위급한 사태로 몰고 가는 우리 태도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슬픔과 분노, 스트레스는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전전긍긍하면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인생에 맞서 싸우려 들기만 할 뿐,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느긋해질 줄을 모른다. 인생은 스스로가 그것을 위급 상황으로 내몰지 않는 한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리처드 칼슨, 앞의 책, 242쪽)


칼슨 박사에 의하면 지금 하느님과 함께 온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사 모든 것이 다 사소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주님만이 영원하신 분이시거늘.


어제는 이미 과거 속에 묻혀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이라네
우리가 살고 있는 날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날은 오늘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날은 오늘뿐
오늘을 사랑하라
오늘에 정성을 쏟아라
오늘 만나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라
오늘은 영원 속의 오늘
오늘처럼 중요한 날도 없다
오늘처럼 소중한 날도 없다
오늘을 사랑하라
어제의 미련을 버려라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우리의 삶은 오늘의 연속이다
오늘이 30번 모여 한 달이 되고
오늘이 365번 모여 일 년이 되고
오늘이 3만 번 모여 일생이 된다
                                  토마스 칼라일


 

글을 마치며


아메림노스(걱정하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하여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멘’이란 말 없이 구체적인 이유와 예증까지 들어가면서 논리적으로 우리를 설득하려 하신다. 예수님의 이 논리적 권고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만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까? 
어떻게 해야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예수께서 이 질문에 정답을 주신다. “여러분의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하시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시오.”(요한 14,1)


“나는 평화를 여러분에게 남겨두고 갑니다. 내 평화를 여러분에게 줍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또한 겁먹지 않도록 하시오.”(요한 14,27)


근심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에 대한 믿음뿐이라는 것을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잘 보여준다. 초대 교회 일부 신자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자신의 이름 다음에 아메림노스란 이름을 붙였다. 아메림노스란 ‘걱정하지 않는 자’란 뜻이다.


베드로 사도는 헤로데 아그리빠의 손에 죽기 전 날에도 아주 평온했다. 바오로 사도도 아메림노스로 살아간 분이었다. 그는 그리스땅 필립비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힌다. 치안관들에 의해 벌거벗긴 채 매질을 당한다. 그렇게 매질을 당한 상태에서 하느님께 찬미기도를 드린다. 그는 육신의 고통을 이기는 영적 승리 그리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참 해방은 하느님과 주 예수님에 대한 신뢰로 가능함을 보여준다.


실제적 걱정거리를 모두 하느님 앞에 바치며 

우리는 실제적 걱정을 주님 앞에 바쳐야 한다.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하며 탄원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래야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모범을 보여주셨다. 수난을 앞두시고 주님께서는 “내 영혼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입니다.”(마태 26,38), “영은 간절히 원하지만 육신은 약합니다.”(마태 26,41)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다.


놀라운 것은 예수께서는 마음에 평안이 오기까지 탄원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아버지 뜻이 심령 깊이 들어와 마음이 평화로워지기까지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점이 이것이 아닐까.

마음에 평화를 깨는 모든 구체적 근심거리들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응답을 주시기 전까지는 결코 성당을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여야 한다.


하느님은 눈물과 울부짖음으로 바치는 기도를 거절하지 못하신다. 모세가 홍해 앞에서 위기의 순간에 울부짖었을 때 그 바다가 갈라졌으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히즈카야가 눈물로 기도했을 때 그 수명을 15년이나 더 연장할 수 있었다. 또 요시야가 이스라엘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울부짖음의 기도를 드렸을 때 이스라엘에 구원이 주어졌으며,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전 앞에서 눈물로 기도 드렸을 때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다.
 

실제적 걱정거리를 두고 주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키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걱정 중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한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사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마몬(마귀)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마태 6,24) 

 

예수께서는 그 누구도 하느님과 마몬을 둘 다 주인으로 섬길 수 없기에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다. 걱정하는 것은 마몬을 주인으로 섬기고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이 주인됨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온전한 의탁을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온전히 순종함을 의미한다.


앞서 우리의 근심에는 두 종류가 있음을 보았다. 하나는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느님 뜻에 맞는 근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세상에 대한 근심”(2고린 7,10)이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입술로는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지만 구체적 삶에서는 하느님의 뜻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말한다. 그들은 교회 모임에서는 하느님을 인정하면서도 세상에 나가서는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영원한 생명과 관련해서는 하느님을 신뢰하지만 세상의 일용할 양식과 관련해서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자신을 자기 운명의 설계자로 여기며 살아간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하느님을 미워하는 이들이다. 아무리 입으로는 하느님을 미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마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라는 말씀 앞에서는 자기 합리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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