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성당 2018. 11월 영적도서 : 「가끔은 미쳐도 좋다」
봉달이 신부의 사랑이야기
지은이 : 나봉균 신부
·1999년 대전교구 사제로 서품되어 유천동, 조치원, 홍성 성당 보좌를 거쳐 2002년 교구 사회사목국 차장으로 부임
·2005년부터 장애인사목 전담 신부로 지냈고, 2007년에는 대덕구 장애인 종합복지관장을 겸직
·2011년 진잠 성당 주임을 거쳐 2014년부터 현재까지 교구 사회사목국장
나눔의 글
인간이 행복하려면 누군가가 나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나도 타인을 그렇게 보아줄 필요가 있다.
존재하는 모든 선善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존재 자체나 행동에서 거기에 내포된 善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행복을 찾으려면 우선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수용의 기적 두 번째 탄생」‘개방적 태도’ 중에서
「가끔은 미쳐도 좋다」는 거짓과 가식의 흔적이 없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솔직히 드러낸 어느 젊은 신부님의 가장 순수한 모습, 그 자체입니다.
이야기 한 편당 4쪽을 넘기지 않는 짧은 분량에, 이야기 시작은 늘 일상에서 겪는 구체적 경험입니다. 이렇게 속을 보여도 뒤탈이 없을까 싶을 정도로 솔직하고 웃깁니다.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이야기 끝에 나오는 짧은 성경 구절은 웃음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묘약입니다.
「가끔은 미쳐도 좋다」는 나 신부님이 처음부터 책을 펴내려는 의도로 쓴 글이 아니라 사회 복지 소식지에 10년 넘게 매달 한 편씩 썼던 글들을 모아서 펴낸 책이라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나봉균, 대전교구 소속의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평범한 젊은 신부님입니다. 그러나 그의 별명을 들으면 누구나 쉽게 그를 기억할 것이고 그와 함께 유쾌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것입니다. 내 체면이 구겨지더라도 사람들이 한 번 더 웃기를 바라는 나봉균 신부는 자신의 별명 ‘봉달이 신부’를 무지 좋아합니다.
「가끔은 미쳐도 좋다」를 통해 봉달이 신부의 삶을 엿보는 것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화가 나도 참고, 상냥하고, 절제하고, 조용하다는 것이 신부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였는데, 봉달이 신부를 보면서 이런 환상이 홀딱 깨집니다. 신부도 나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끔은 미쳐도 좋다」는 봉달이 신부의 솔직함으로 무장돼 있습니다. 그는 운전을 하다 화가 나면 “불경스러운 말”이 나오기도 하고, 텔레비전 드라마 〈대조영〉, 〈다모〉를 늦은 밤까지 시청하는 드라마 폐인嬖人(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귀염을 받는 사람)이며, 치매에 걸려 자신의 내부에 있는 “구린내 나는 것들이 튀어나올까” 두려워합니다.
봉달이 신부는 늘 예수님을 찾습니다. 늘 자신이 예수와 닮은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며,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항상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신부가 “직업 이상의 어떤 것”이라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어쩌면 신앙은 사랑, 배려, 나눔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에피소드 ‘적과의 동침’에서 코끼리 정도의 덩치를 가진 짐승이 낼 수 있는 봉달이 신부의 코를 고는 소리가 엄청나, 동창신부들이 녹음해서 들려주는 우정을 발휘하는 일이나 사복을 입은 주교가 길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과 함께 전단지를 받은 일, 읽다보면 키득키득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오는 ‘완전한 평등 : 목욕탕의 평등 : 죽음을 통한 완전한 평등’, ‘방귀를 뀌자’, ‘비풍초똥팔삼’, ‘관리’, ‘미인’,... 등 본당 사목과 사회사목을 하며 겪은 깨알 같은 에피소드가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합니다.
웃음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묘약
「가끔은 미쳐도 좋다」 글 속으로......
신학생 때 ‘봉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누가, 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고, 봉균이라는 실제 이름은 교실에서나 불릴 정도로 그냥 봉달이로 통했다. 까만 피부색 때문에 호號까지 붙었다. 그래서 그냥 봉달이가 아니라 ‘까만 봉달이’다.< 8-9쪽>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과 타인의 부족함을 같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 부족함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부족한 사람이다. “주님! 저로 하여금 완전을 지향하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알게 하소서!”<36쪽>
세상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최고가 되려고 한다. 전부 일등이 되려고 한다. 세상이 일 중심으로 가는 것도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사람 중심이어야 한다. 사제는 사람 중심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일의 성패가 아니라 사랑이다.<43쪽>
나무도 사람도 때가 되면 붙들고 있던 것들을 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유로워지고 홀가분해질 수 있다. 언젠가 우리는 생명과도 이별해야 하는 존재다. 죽어야 하는 것이다. 멋지게 죽고 기쁘게 죽으려면 미리미리 훈련해야 하지 않겠나!<47쪽>
누구라고 밝혀서 미안하지만, 사랑하는 사회사목국장 강길원 신부님이나 존경하는 교정사목 맹세영 신부님은 많은 사람이 타고 있는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별명으로 나를 부른다. “봉달아” 그럴 때마다 모르는 척하는데 그래 봤자 소용이 없다. 손으로 내 몸을 흔들면서 “봉다라아~~왜 모른 척해?”라고 장난기 섞인 억양으로 다시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키득키득 웃음 참는 소리가 난다. 기왕 들통 난 김에 나도 볼멘소리로 한마디 거든다. “아, 진짜! 사람들 많은 데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저도 소셜 포지션social position,사회적 지위이 있다구요!” 그 순간 키득거리던 소리가 웃음으로 변한다.
아무튼 촌스럽지만 친근감을 주는 별명인 것 같다. 그런데 그 별명 말고도 신학생 때 붙여진 또 다른 별명이 있다. ‘나주교’라는 별명이다. 아무래도 덕망이 출중해서 생긴 별명이 아닌가 싶다. 아닌가? &^$#@! 어쨌거나 그 별명은 종종 나의 묵상거리다. 왜냐하면 ‘나주교’를 잘못 발음하면 ‘나죽여’가 되는데 과연 나를 죽이면서 살고 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휴가에서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동창들이 본당신부로 부임해 있는 천안, 아산, 응봉, 서산이었다. ‘나주교’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그리고 ‘나죽여’를 실천하기 위해 자전거를 운송수단으로 하는 사목방문을 기획한 것이다. (“주교님! 무례한 표현을 용서하십시오!”) 대부분 신설본당인 데다 첫 본당신부 발령이라 사목을 잘 해주길 바라는 지향으로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갑작스런 방문인데도 동창들은 융숭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격려하는 뜻으로 꼭 이 말을 했다. “너 미쳤냐? 이 무더위에!”
가끔은 미쳐도 좋다고 본다. 사실 고생을 사서 하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런 미친 짓은 편한 것만을 추구하려는 현대인에게 절실히 필요한 게 아닐까? 올 여름에 미친 짓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휴가를 내고 장애인 캠프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 이웃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 스스로 망가지는 사람들, 좋은 일에 써달라고 후원해 주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소외되기 쉬운 분들이 그나마 밝게 웃으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것 같다. 정말이지 그런 미친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래야 살맛나는 세상이 된다. 그런데 미치려면 제대로 미쳐야 한다. 괜히 남이 알아주길 바라거나 얼굴 찡그리고 투덜거리며 하는 봉사는 그야말로 진짜 미친 짓이다. 죽으려면 철저히 죽어야 한다.
<51~53쪽 ‘가끔은 미쳐도 좋다’ 全文>
때로는 눈물도 참아야 하고, 분노도 다스릴 줄 알아야 하며, 3초 정도의 기다림도 느긋하게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배려이고 사랑이다. 아무리 인생이 고단해도 박달나무처럼 마음이 단단해져서는 안 된다.<158쪽>
나는 신자들에게도 가급적 웃음을 주고 싶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대부분의 신자들은 재미있지 않아도 잘 웃는다. 그런데 잘 웃지 않는 분들도 있다. 무표정이 습관이 되어 버린 분, 걱정이 많아 웃지 못하는 분도 계신 것 같다. 무표정은 버리고 걱정은 주님께 맡기자. 주님은 웃는 사람을 좋아하신다.<182쪽>
꼭 말을 해야만 들리는 것은 아니다.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어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꼭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다.<198쪽>
구원救援은 먼 데 있지 않다. 약한 사람을 배려하는 것, 그 안에 작은 구원이 있다. <205쪽>
꿈, 희망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이에 관계없이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한다. 희망해야 한다. 참고로, 남에게 예수님 되어주는 것을 자기의 꿈으로 삼은 사람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다.<232쪽>
자기 혼자만 정의로운 사람인 양 따지기 좋아하고, 옳고 그름을 지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때마다 피로감에 시달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사람들을 통해 세상이 더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봉사를 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관점이 조금 다를 뿐이지 뭐가 그렇게 옳고 뭐가 그렇게 그르다는 말인가! 이 세상 삶을 마치고 주님을 만났을 때 그분께서는 무엇으로 셈을 하실까? 사실 주님께 드릴 선물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분이 좋아하시는 선물은 사랑이다. 정의만 강조하다가 자칫 사랑을 놓칠 수 있다.<242쪽>
코가 아니라 가슴으로만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있다. 바로 사람 냄새다. 누군가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이고 싶다고. 따뜻한 사람, 사람 냄새가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그런 신부이고 싶다.<2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