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9. 3월 영적도서「관상과 식별」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9-03-23 11:04:29    조회 : 342회    댓글: 1
세마 성당 2019. 3월 영적도서 : 「관상과 식별」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뜻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가?
 
지은이 : 로버트 페리시 신부
로버트 페리시는 현재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영성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내적 치유를 위한 기도》, 《관상과 식별을 통한 예수 추구》, 《기도》 등이 있다.
옮긴이 : 심종혁 신부
예수회원으로 서강대학교 교수이며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미국 보스턴의 웨스톤 신학대학원(Weston Jesuit School of Theology)에서 공부하고, 이탈리아 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영신수련과 영적 식별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하느님은 내 삶의 모험] 등 많은 저서와 번역서가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 틈틈이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영성 생활의 진보를 위한 피정과 세미나 지도 및 특강을 하고 있다.
 
 
나눔의 글
 
요즘 들어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나 성령의 힘에 대한 체험적 지식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생활을 하는 모든 이의 목적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일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기도의 목적은 때때로 소원을 비는 기도로만 전락할 때도 있습니다.
‘관상 · 식별’ ....둘 다 그냥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저명한 영성신학자 로버트 페리시(예수회) 신부의 「관상과 식별」은 현대 상황에서 체험하는 갖가지 현상과 영성생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어떻게 서로 연관돼 있는지 명확하고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이 책은 특히 관상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해주고, 삶 속에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해줍니다. 이 책처럼 기도에 관한 핵심적 가르침을 매우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책도 드물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찾고 따르는 모든 이가 '성령 안에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포인트 내용을 간추려 나눔의 글에 올려봅니다.
 
 
제1장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인격적 관계
 
 
나를 위해,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며, 온 우주의 주님이며 나의 주님으로 성부 오른편에 오르셨습니다.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 동시에 내 삶의 주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분은 나를 송두리째 속속들이 아시고 나의 장점과 약점,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내 이름을 부르시는 분
 
근본적으로 나는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치 안에서 성부와 성자 예수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성부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나의 개인 소명입니다.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라고 기도한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나도 하느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니다.”(고백록 1,1)
 
예수그리스도와의 일치, 이것이 바로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고 내 삶의 의미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당신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십니다. 나는 하느님의 힘에 의해, 즉 내 이름을 부르시는 하느님 사랑의 힘에 의해 존재합니다.
 
나는 아직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모릅니다. 사물과 사람은 결국 마지막에 성취된 바로 그 모습으로 자신의 진정한 신원을 드러냅니다. 나는 참다운 내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 나는 죽어서 주님 앞에 나아가기 전까지 결코 진정으로 내가 누구인지 모를 것입니다.
 
지상에서 삶이 끝날 때, 그분은 나의 비밀이며 참다운 이름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주실 것입니다.(묵시록 2,17 참조)
 
나의 완전한 의미는 지상 삶이 끝나는 순간에나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진정한 의미란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무엇이 되느냐에 따라, 또 그것으로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다는 의미도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작품”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 그러기에 내 삶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가운데, 그분과 맺은 인격적 관계 안에서, 그분과 나누는 친교를 통해서 점점 더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더 일치하면서 나는 참다운 내가 됩니다.
 
 
인격적 사랑
 
일치하여 전체를 이루는 개개 요소는 서로 분화됩니다. 인간의 몸에서 이 점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기관과 부분이 각각 고도로 발전하고 잘게 나뉘어 나름대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하나의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이 모든 것은 사랑을 통해 사랑 안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사람들을 일치시킵니다. 사랑의 일치는 일치를 이루는 각 사람을 고유하게 합니다. 결혼 생활이 사랑과 그 사랑이 요구하는 희생에 기초를 둘 때, 결혼한 두 사람은 개성을 잃어버린 한 덩어리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남편과 아내는 일상에서 생생하게 일치함으로써 각각의 고유한 인격체로 성장하게 됩니다.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일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예수의 데레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 토마스 모어, 아기 예수의 소화 데레사 등과 같은 위대한 성인들은 특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과 가깝고 친밀하게 일치한 결과, 그들은 한 고유한 인격으로 성숙하였고 참다운 자기 자신이 되는 데 이르렀습니다. 사랑의 일치는 결코 나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고유한 인격으로 성숙시켜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주님이신 예수님은 나를 부르셔서 당신과 가까운 상호 인격적 사랑 안에 일치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그분이 내 존재 전체의 의미이고 완성이기에, 내 삶의 핵심 관계는 물론 그분과 맺는 관계입니다. 이 인격적 관계는 내가 타인과 맺는 모든 관계, 즉 나와 함께 사는 사람, 내 가족의 다른 구성원, 친구, 함께 일하는 동료와 나누는 관계의 유기적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 역시 모든 상호 관계의 일반 법칙을 따르고, 특별히 그 관계를 존속시키고 유지 시키는 현존의 법칙을 따릅니다. 주님은 늘 나에게 현존해 게십니다. 나 역시 의식적으로 그분께 현존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분께 현존해 있는 것입니다. 관계의 중심에 내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란 의식적으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나는 참다운 나를 표면으로 떠오르게 합니다. 참되고 진실한 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안에 놓인 자신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주님의 현존 앞에 서 있음을 진지하게 의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내가 기도할 수 있도록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제2장
관상 : 예수님을 바라봄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기도의 가르침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를 방문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마치 하나의 머리말처럼 제시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이란 무엇일까요? 그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사랑에 찬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통한 인식
 
관상기도란 사랑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관상은 인식의 한 방법입니다. 나는 관상기도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됩니다. 공부해서 그분에 관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그분을 더 잘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통해 얻는 인식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관상적 사랑을 통해 얻는 인식은 때로 불분명하고, 어둡고, 모호하며, 구름이 낀 듯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추상적이지는 않습니다. 관상이란 예수님이 지금 여기서 나에게 제시해 주시는 구체적인 사람을 사랑으로 아는 것이기에, 그 인식은 구체적입니다.
 
관상이란 예수님을, 곧 그분의 사랑과 관심과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체험은 지성적 체험인 동시에,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감성적 체험입니다. 관상이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또 그 사랑에 응답하면서 얻어지는 감성적 지식입니다.
 
그렇기에 느낌이 부각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주님과 멀리 있는 듯한 느낌으로, 아무 특별한 느낌 없이 사막과 같은 건조함 속에서 기도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관상하는 것은 나를 느낌의 단계로 이끌어, 사랑과 함께 오는 영적인 맛을 보게 해 줍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사랑에 찬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며 관상하면, 나 자신의 성품 혹은 고유한 기질과 일치를 이루는 어떤 조화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사랑을 통한 관상적 지식은 내 존재 전체와 일치하고자 합니다. 주님과 관계를 맺는 나는 바로 지금의 나여야 합니다. 현재의 당신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십시오.
 
관상기도의 조건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은총을 받아야 하고, 둘째는 내가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관상기도의 선물에 어떻게 협력할 수 있을까요? 신실함과 자유, 그리고 단순함을 통해 관상기도의 선물에 협력할 수 있습니다.
 
신실함
 
주님은 관상기도의 선물을 통해서 당신께 신실하도록 나를 부르십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 충실할 때 나는 주님께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름 지어 나를 부르시는 그분에 대한 응답이 곧 신실함입니다. 시간도 필요하지만 나 자신이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시간이란 투신과 신실함을 표현하는 기본입니다. 꽤 많은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랑의 질이 주요한 관건입니다. 신실함의 첫 단계는 바로 시간을 정기적으로 떼어 놓는 데 있습니다.
 
자유
 
관상기도는 갈라지지 않은 마음을 요구합니다. 내 삶에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심으로써 오는 내적 자유를 요구합니다. 일반적으로 관상기도 중 떠오르는 분심이 내가 지닌 무질서한 애착을 감지하게 해 주는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분심거리는 내 삶에서 주님과의 사랑스런 관상적 일치를 방해하는 뭔가를 지적해 줍니다.
 
주님은 나를 내적 자유로 이끄십니다. 그러면 내 친구를 소유물처럼 사랑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사랑하며, 나의 교묘한 욕심이나 필요에 따라 타인을 조정하려는 경향에서 그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모든 관심을 독차지하려는 자기도취적 이기심을 내버리고, 오히려 겸손하게 남을 위한 봉사에 묵묵히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단순함
 
주님은 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라고 초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그분의 마음이며, 그분은 내가 관상기도를 할 때 나에게 당신의 마음을 주십니다. 심리학자들은 어린이와 같은 순진한 행동이 어른에게도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 합당한 행동 양식이라고 합니다. 관상이란 바로 내 삶에서 중요한 사랑의 관계를 친밀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는 단순하고 순진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마리아는 어린이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사랑 가득한 눈으로 단순히 그분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관상기도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께 신실하고 자유롭고 단순하게 응답함으로써 관상의 은총에 협력할 수 있습니다.
 
제3장
관상 :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
 
관상은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관상은 나에게 내려주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의 관상기도는 결코 기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하시며 나에게 나타나시는 하느님과 지금 여기서 맺는 상호 인격적 관계입니다. 관상기도는 좌선을 비롯한 갖가지 불교 명상법, 요가라든지 초월명상 등의 명상법과 바탕부터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관상은 주님이라는 한 인격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관계입니다.
 
향심기도
 
소위 말하는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는 이 점에서 주문을 외는 형태로 된 여타의 기도와 다릅니다. 하나의 말마디나 구절을 되풀이하여 외우며 드리는 기도는 결코 상호 인격적일 수 없습니다. 향심기도에서는 예수님의 이름 같은 말마디나 구절에 집중하지 않고, 바로 그 말마디나, 구절을 통해 그분께 집중합니다.
 
마음속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되풀이하여 외우는 것은 확실히 좋은 방법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를 참된 관상으로 이끌어 줍니다. 하지만 관상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롭고 개념 없이 서로 만나는 것이기에 그분께서 내려 주시는 선물일 따름입니다.
 
관상과 신령한 언어의 은사
 
어째서 그렇게도 많은 사람이 성령 세례를 통해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과의 전폭적이고도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게 될까요? 어째서 그렇게도 많은 사람이 성령쇄신운동을 통해, 특히 성령 세례와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통해 처음으로 참다운 관상기도 속으로, 더 깊고 새로운 관상 속으로 이끌려 가게 될까요? 성령 쇄신의 놀라운 은혜는 바로 개인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되면서 관상기도 속으로 이끌리는 은혜인 듯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령한 언어로 기도하는 은사를 받는 것은 곧 관상기도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우리의 개인 기도를 더 깊고 고요한 관상기도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여러 차례 영성지도를 하면서, 나는 바로 이 신령한 언어의 은사가 더 깊은 관상기도로 이끄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은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령한 언어의 은사가 곧 관상의 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조용한 관상기도는 그저 사랑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비개념적 기도입니다.
 
신령한 언어로 하는 기도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주님을 바라보는 비개념적 기도입니다. 언어학으로 볼 때나는 뜻도 없는 말을 횡설수설할 따름입니다. 신령한 언어로 하는 기도는 비개념적 기도를 소리로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리를 내는 관상기도입니다. 신령한 언어로 하는 기도는 묵주기도와 유사한 면이 있는데, 둘 다 말하면서 예수님 생애의 신비를 관상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주로 사용하는 곳은, 많은 이가 생각하듯이 기도 모임이나 성령 쇄신 모임이 아닙니다. 바로 개인 기도입니다(1코린 14,2-4 참조) 나는 성령쇄신운동과 아무런 연관도 없고 그러한 모임에 불렸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규칙적으로 신령한 언어로 개인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신령한 언어의 은사는 성령쇄신운동을 하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은사를 받기 위해 성령쇄신운동이나 그와 비슷한 모임에 속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은사는 그리스도교에 속하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가?
 
신령한 언어의 은사가 성령쇄신 운동이나 기도모임, 혹은 성령 세례 등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개인 기도를 도와 주님을 더 깊이 관상하도록 이끈다면, 당신도 아마 그것을 받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기법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당신의 방이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주십사고 주님께 청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그분의 선하심을 굳게 신뢰하면서 신앙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제 4장
예수님의 생애 신비를 관상함
 
관상이란 사랑 가득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통해 그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으며 그분이 말씀하시고 일하시고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시는 모습을 관상할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식 관상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영신수련」에서 생애의 여러 신비사적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생애의 신비 사적’이란 예수님의 인생에 얽힌 각종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존경심을 지니고 하느님의 현존에 감사를 드린 다음, 본격적으로 관상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해야 할 세 가지 길잡이를 제시합니다.
 
첫째 길잡이는 그 날의 복음을 천천히 읽는 것입니다. 둘째 길잡이는 성경을 덮고 읽은 복음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예수님과 주변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과 주위 상황을 (실내이거나 실외이거나) 상상 속에서 그려보는 것입니다. 셋째 길잡이는 원하는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가까이 따르기 위해서, 그분을 더 깊이 알게 되는 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냐시오는 그리스도의 삶을 관상하는 방법을 제시하면서도 고정된 하나의 방법만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관상하는 사람의 개인적 특성을 융통성 있게 활용하도록 배려합니다. 즉 이냐시오는 ‘관상’이라는 용어를 넓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묵상이나 자신의 말로 드리는 기도, 또는 감성적 기도를 의미하기도 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관상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성전에서 봉헌되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 행동, 장소, 대화 등을 상상하면서 영적 이익을 거두어들이고 나의 언어로 주님께 담화를 드리면서 묵상을 마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관상은 선물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으로서, 어떠한 말이나 개념도 필요 없이 단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관상의 은총
 
어떤 사람은 주님과 함께 조용히 보내기 위한 기도 시간에 오히려 묵상을 한답시고 복음서의 한 대목을 선택해 ‘바쁘게’ 기도하면서, 왜 자신의 기도가 무미건조하고 산란하고 만족스럽지 못한가 하고 의아해 합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사변적 기도를 지나 묵상의 단계를 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단순하게 기도하는 관상으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가 배워 온 방법으로 계속 기도하려 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관상기도를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는데도 마르타처럼 여러 가지로 바쁜 양상의 기도, 즉 성찰하고 응용하고 의지를 활용해서 이러저러한 활동을 하는 양식의 기도를 고집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상적 방법으로 복음서에 접근할 수 있을까요? 그분 생애의 신비를 통해 어떻게 예수님을 관상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시는 관상의 은혜와 협력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현명하게 이해하면서 협력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에 대한 관상적 접근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느님 현존의 은혜를 청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 신령한 언어로 기도하면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상황에 따라 밖으로 소리를 내거나 속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즉시 주님 가까이에 가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세 가지 길잡이를 따르면서 (예를 들어 그날의 복음이나) 성경 대목을 읽고, 애써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성경의 장면을 간단히 상상해 보면서, 예수님께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합니다. ‘주님을 더 깊이 아는 것’, 그래서 그분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가까이 따를 수 있는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관상기도의 핵심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하시도록 내버려두고, 지금 이 순간 그분이 사랑하고자 하는 방법으로 나를 사랑하시도록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을 관상하는 핵심 열쇠는 그분이 말씀하셨고 행하셨던 바를 내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지금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기억하시며, 나를 당신의 기억 속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내 기도 안에서 나와 함께 머무르시고 되살아나십니다.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당신의 옆구리에 난 상처 속으로, 당신의 가슴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영광스럽게도 당신 몸에 아직도 십자가와 죽음의 다섯 상처를 간직하고 계십니다.
 
관상과 묵주기도
 
묵주기도도 관상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묵주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이 드리는 기도문의 말마디를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드리는 기도문을 생각하지 않고, 그 기도문의 의미를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으로 반복해서 그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내 손은 묵주알을 굴리고 내 입은 기도문을 외고 있지만, 내 마음은 어느 특정한 신비에 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관상기도일까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묵주기도를 드리면서 다양한 신비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주입注入 관상의 은총을 받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주입 관상이란 오직 하느님만이 베푸시는 관상의 은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관상기도에 잠기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들을 이끌어 깊은 관상기도 속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제5장
내 삶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관상함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고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을 뿐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곧 주님으로 이 세상에 현존해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성부의 계획은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님 아래에서 모든 것이 화해하고 일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아래에서 모든 것이 통합되어 일치를 이루도록 하느님께서 의도하셨으며, 그것이 바로 역사의 의미입니다.
 
관상과 삶의 통합
 
나를 위한 예수님의 계획도 성부의 계획과 마찬가지로 사랑 안에서 나를 당신과 온전히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관상기도를 하는 것이 나를 위한 예수님의 계획에 협력하는 중요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 내 삶에 담긴 모든 것, 모든 사람을 그분의 손 안에 단순하게 놓음으로써 그분께 협력할 수 있습니다.
 
기도 중의 분심이 바로 여기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집니다. 내가 염려하는 사람이거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또는 내가 하는 일이나 걱정이든, 이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내 삶의 무질서한 애착을 드러냅니다. 분심거리로 나타나는 그 관계가 점차 주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와 통합된다면, 다시는 더 분심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내 삶 속의 예수님을 내 삶의 주님으로, 내 관심의 중심으로 내 존재와 내 삶과 그분 손안에 담겨 있는 내 삶의 모든 것을 존속시키는 분으로 관상합니다. 내 마음을 잡아끌던 것은 이제 주님의 손에서 안전하게 머물게 됩니다.
 
관상 속에서 나의 모든 걱정, 선입견, 좋고 나쁜 느낌을 주님 앞에 내놓으면, 그분은 내 관상을 통해서 또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 안에서 내 삶에서 어긋나 있고 해진 것을 다시 모아들여 조용히 엮으시고, 당신에 대한 사랑 안에 나를 집중시켜 나를 통합해 주십니다.
 
관상과 기억의 치유
 
예수님은 역사의 주님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주인이십니다. 또 내 개인 역사의 주님으로 현재와 미래뿐 아니라 과거의 주인이십니다. 내 삶을 뒤돌아보며 나의 과거 삶 속에서 그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설령 내가 의시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분은 거기에 계셨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주님께서 내 기억 속에 들어오시도록 청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청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내 기억을 치유하시면서 상처받고 고통당한 과거의 그 장애물들을 없애실 수 있습니다. 상상력을 사용해서, 마음속에서 과거의 상황을 그려보면서 장소와 사람과 벌어진 일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상황 속에서 나와 함께 머무르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거기에서 무엇을 하시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바라보며 그분을 관상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 상처 입은 나의 기억을 보여드리며 치유해주시도록 맡기십시오. 예수님은 나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셔서 내가 온전히 치유되기를 원하십니다.
 
용서는 기억의 치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그들 역시 완전하지 않았기에 때로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나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나에게 상처 입힌 이를 내가 이미 용서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끊임없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계속 용서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하는 나의 행위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를 사랑하시고, 그 기억 속으로 들어가 상처를 없애고 치유해 주시는 주님을 관상할 수 있습니다.
 
제6장
기도의 여정
 
기도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나를 당신과 더 일치하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기도에서 발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더 깊은 사랑의 인격적 관계와 우정 안에서 성장한다는 말입니다.
 
기도의 여정은 관상의 여러 단계를 거쳐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이라는 높은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상적 합일에 이르는 이러한 성장 여정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해 매우 잘 묘사되었습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 정원에 물을 대는 네 가지 방법
 
성녀 데레사는 자신의 자서전인 「천주 자비의 글」에서 기도를 네 단계로 나누어, 정원에 물을 대는 네 가지 방법과 비교하면서 설명합니다. 그 네 가지 방법이란 바로 물통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방법, 펌프로 물을 퍼 올리는 방법, 냇물에서 물길을 터놓는 방법, 그리고 비가 내려 정원을 적시는 방법입니다.
 
기도의 초보자는 염경기도나 묵상기도를 하면서 기도 중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때로는 분심에 시달리기도 하고, 기도 시간을 줄이거나 포기하고픈 유혹에 시달리면서 신앙으로 맞서 싸우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은 물통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것과 같습니다. 물은 위안으로 주님과 순조롭고 편안하게 관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 단계에서는 물통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것처럼 이성으로 생각해야 하고, 의지를 활용해서 이런저런 작업을 해야 합니다.
 
둘째 단계에서는 기도 중에 하는 작업이 줄어듭니다. 기도는 점차 단순하게 생각하는 양상으로 바뀌고, 때로는 그저 단순히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펌프로 물을 퍼 올려 정원에 물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 양상의 물대는 방법은 기도의 셋째 단계를 묘사하는데, 시내에서 물길을 터 정원에 물을 대는 방법입니다. 이 단계에서 기도는 보통으로 관상적입니다. 마음과 의지는 별로 할 것이 없습니다. 어떠한 작업도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저절로 정원에 흘러 들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물 대는 방법은 주님과 친밀하게 일치를 이루고 하느님과 하나 되는 기도의 양상입니다. 정원은 내리는 빗물로 충분히 적셔집니다.
 
‘정원에 물 대는 네 가지 방법’은 기도가 어느 쪽으로 발전해 가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그 방향은 수동성과 단순성이 증가하는 쪽입니다. 기도의 성장 방향은 관상적 기도의 양상으로 바뀌면서, 하느님과 더 가까이 더 깊이 일치를 이루어 가는 쪽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 일곱 궁방
 
「영혼의 성」에서 데레사 성녀는 기도의 여정을 「천주 자비의 글」에서 묘사하는 경지를 넘어선, 명확하고 완벽하며 성숙한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성녀는 삶의 완숙기에 자신이 걸어온 기도의 여정을 뒤돌아보며 「영혼의 성」을 기술하였습니다.
 
기도의 여정은 가장 바깥쪽의 첫째 궁방에서 시작해서 각 궁방을 차례로 거쳐 마지막으로 왕이 거처하는 가장 안쪽의 일곱 번째 궁방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내면세계를 묘사하는 이러한 성곽의 비유에서, 기도의 여정은 주님과 가장 가까운 일치에 이르려고 중심에 있는 일곱 번째 궁방으로 점점 더 깊이 다가가는 내적 여정입니다.
 
첫째 궁방은 영성생활을 시작하는 초보자를 묘사합니다. 그는 좋은 지향을 지니고 있지만, 여러 종류의 애착과 세상 걱정에 둘러싸여 있어서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둘째 궁방에서 나는 정기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 궁방에서 데레사 성녀는 기도에 충실하고 하느님의 뜻에 내 뜻이 합치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충고합니다.
 
셋째 궁방에서는 기도 중에 건조함도 체험하지만 위안도 어느 정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는 아주 단순하게 되었고, 이제 조금씩 하느님의 영감으로 관상같이 되어 갑니다. 선량한 많은 사람의 기도 모습이 바로 이 셋째 궁방의 기도 양상입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충분한 시간을 바쳐 충실히 기도합니다. 죄를 피하고 덕행을 실천합니다. 데레사 성녀는 이들이 이제 겸손을 배울 때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수도자와 성직자를 포함한 많은 삶이 이 단계에 머물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선함에 깃든 엄격함이 그들을 얽매고, 그들의 강직함이 넷째 궁방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겸손과 순진함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립니다.
넷째 궁방은 데레사 성녀가 ‘고요의 기도’라고 부르는 상태입니다. 고요의 기도에서 나는 주입 관상을 체험하며, 내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기쁨도 체험합니다. 일반적으로 내가 노력해서 쉽게 주님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에 의해 쉬워집니다. 사실 수동적 정화는 이 넷째 궁방의 기도에서 이루어집니다. 분심과 건조함이 가져오는 어둠 속에서 신앙의 정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섯째 궁방의 기도를 “합일의 기도”라고 합니다. 이 단계에서 기도는 매우 쉽습니다. 때로 나는 평화와 기쁨 속에서 주님께 집중해 있습니다. 이 합일의 기도는 전환기의 상태인 듯합니다.
 
둘째 회심
 
다섯째 궁방에서 하는 합일의 기도는 ‘둘째 회심’이라고 부르는 체험과 연결된 듯합니다. 둘째 회심이라는 개념은 16세기에 초창기 예수회원에게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회원에게 첫째 회심이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 예수회원이라는 성소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둘째 회심은 몇 년 후에 주님께서 계획하시는 방식에 따라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회원이 ‘제3수련’이라고 부르는 재수련 기간이 둘째 회심을 위한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회심의 특징은 새롭게 받는 기도의 은총, 사도적 열정과 은사, 전에 없이 깊어지는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사제 및 수도자와 함께 일한 내 체험을 돌이켜 보면, 이 둘째 회심이라는 이론과 개념이 사실임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이론은 진지하게 영적 삶을 추구하는 많은 평신도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둘째 회심은 단 몇 분에서 혹은 일주일 정도의 아주 짧은 기간에, 개인기도 중에 또는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은밀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피정 지도 중에 일어납니다. 그것은 새로 태어나는 체험입니다. 기도는 더 순조로워지고 주님을 더 가까이 느낍니다.
 
여섯째 궁방은 일곱 번째 궁방을 위한 준비입니다. 이 준비를 하는 데 꽤 오랜 기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이 궁방은 안팎으로 시련을 겪는 기간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 중에 매우 심한 메마름을 체험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는 상황이 수반될 수 있습니다.
 
일곱째 궁방은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방에서 주님과 친밀한 일치에 머무르는, 일종의 영적 혼인 상태입니다. 시련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주님과 친밀하고 깊이 일치하는 데서 오는 평화가 있습니다. 병이나 타인과의 문제 등 여러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이 나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주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성장 곡선에서, 기도의 여정에서 어디쯤 있는가? 어떤 양상의 물대기에 와 있는가? 나는 지금 어느 궁방에 다다라 있는가?
수년 동안 매일매일 충실히 기도해 온 대부분의 사람은 분명 넷째, 다섯째, 여섯째 궁방에 다다라 있을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는 기도의 양상에 따라 구분되지, 결코 특별한 표지에 의해 구분되지 않습니다. 사실 황홀경이나 환청을 체험하는 사람은 무척 적습니다. 내 삶과 기도에서 내가 얼마나 주님께 집중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제7장
어둠과 빛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기도는 어둠 속을 걷거나 사막을 걷는 체험과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 중의 무미건조함과 어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두운 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관상에 관해 가르친 내용의 핵심은 어두운 밤의 가르침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밤’이란 하느님이 아닌 것에 대한 모든 애착을 싹 없애는 ‘상실’을 의미합니다. 그 ‘밤’은 나를 정화 시키고 나에게서 주님이 아닌 모든 것을 비우게 합니다. 나의 영적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이제 믿음으로 ‘바라볼’수 있게 되며, 어둠의 무미건조함과 고통은 사라져 버립니다.
 
어두운 밤은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든 이에게 이런저런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방식과 형태로 나타납니다. 나는 그 사실을 어둠이나 주님의 부재, 혹은 적어도 그분의 현존이 덜 느껴지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어두운 밤은 여러 달 또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 기도에 어두운 밤이 깃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화의 필요성, 나의 죄, 죄의 경향, 이기심, 주님이 주고자 하시는 은총에 대한 둔감함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두운 밤의 은총을 통해 나를 정화시키십니다. 때에 따라서는 가족의 죽음, 심각한 실패나 거부, 육체적 심리적 병, 무능력, 외부의 압력, 외로움 등과 같은 요소가 어두운 밤의 분명한 원인 일 수도 있습니다.
이 밤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선 주님께서 그 순간 거기에서 나를 사랑하고자 하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시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특히 당신을 신뢰하라고 부르십니다.
 
어두운 밤과 궁방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묘사하는 첫 세 궁방은 주님을 무엇보다 선택하는 은총, 온갖 죄에서 뿐 아니라 나와 주님의 일치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모든 것에서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은총의 형태를 취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두운 밤의 이 부분을 ‘감각의 능동적 밤’이라 부릅니다.
 
여기에서 능동적이란 내가 무엇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주님의 도우심으로 말입니다. 여기에서 ‘감각’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정화가 애착의 느낌과 같은 감각의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감각의 능동적 밤’은 사실 사랑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내 가슴속에 당신을 향한 사랑을 퍼부으셔서 나로 하여금 주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사랑스럽게 선택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버리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감각의 밤에서 수동적 측면은 넷째 궁방에서 시작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기도 중에 이런저런 것으로 분주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 바보처럼 멍청하고 가난하게 머물러 있는 것 외에 무엇을 하려 들면 불편해집니다.
 
이제 어두운 밤의 수동적 측면이 시작된 것인데, 내가 아니라 사실은 주님께서 내 안에서 시작하신 일입니다. 그분은 내 안에서 비밀리에 일하시면서, 기도의 ‘만족감’에 애착하는 나를 정화시키시고, 기도를 통한 당신과의 관계에서 내 생각과 느낌에 의존하려는 경향에서 나를 비워 주십니다. 그분의 도우심으로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력함 속에서 그분께서 무엇인가 하신다.’는 점입니다.
 
어두운 밤의 수동적 측면은 꽤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어두운 밤은 여섯째 궁방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아직도 나는 더 정화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오해나 다른 외부 요인 때문에 나는 매우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과 더 깊은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 나를 정화시켜 주십니다. 주님이 아닌 것에 대한 애착에서 나를 비워 주시고, 주님이 주신 위안에 의존하는 나를 해방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내적으로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이것이 영의 어두운 밤입니다.
 
내가 어두움에 익숙해지면 밤눈이 밝아져, 주님이 비추시는 불빛이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일곱째 궁방으로 이끌어 가시어 사랑 속에서 당신과 일치하여 머물도록 해 주십니다.
 
빛 속에서
 
관상의 체험은 매우 다양합니다. 기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대부분 어둠의 체험이고 기도 중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기도 중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설명할 수 없어 곤란한 처지라면, 자신만 그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합니다.
 
환상이나 환시나 이와 비슷한 체험은 관상기도의 핵심 요소가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단지 주님께서 나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실 때 도움이 되도록 주실 따름입니다. 주님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그러한 것에 애착을 가지게 된다면 큰일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요 나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주님뿐입니다.
 
기도 중에 때때로 주님에게서 오는 ‘손길’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매우 짧으나 강하고 짜릿하게 맛보는 위안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참으로 내 영혼의 가슴을 만지시는 듯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과의 깊은 일치를 간절히 ‘원해야’합니다,
 
제8장
영신식별 : 식별하기
 
이 장에서는 영신식별에 관해 다루면서, 특별히 식별의 관상적 측면을 설명해보겠습니다. 관상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기보다는 주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인가를 하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반면에 식별 역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만, 일종의 기술과 같습니다. 기술은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영신식별’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구분해야 합니다.
 
영신식별의 은사
 
‘영신식별’은 은사 중의 하나이고, 또는 그리스도교의 실천 사항 가운데 하나를 뜻합니다. 먼저 이 말이 영신식별의 은사를 의미할 때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다른 은사와 함께 이 은사를 언급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4-7) 이어서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능력,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 등 여러 은사를 열거합니다. 과연 은사란 무엇이고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이란 무엇입니까?
 
은사란 특별한 선물 혹은 은총으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을 지닙니다.
 
① 은사는 모든 이가 아닌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② 은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공동선”(1코린 12,7) 을 이루기 위한 사목과 봉사의 선물이다.
③ 은사는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이다.
 
가톨릭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실천하는 축성된 정결은 은사입니다. 둘째, 축성된 정결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주님을 위한 봉사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도록 그들을 자유롭게 해 줍니다.
 
가르침의 은사, 특히 그리스도교를 가르치는 은사 역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고, 주로 이러한 사목으로 부르심을 받고 특히 기도 중에 가르침의 은사를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은 봉사의 은사입니다.
 
영신식별의 은사도 몇몇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이는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무엇이고 성령에게서 오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악령에게서 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영신식별의 은사를 예언의 은사 바로 다음에 놓았습니다. 아마 식별의 은사는 악령의 현존을 식별해 그것을 쫓아내는 데 사용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은사를 매우 중요시 했을 것입니다.
 
모든 이를 위한 선물인 영신식별
 
신약성경은 영신식별이 은사일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식별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영의 식별이 직접 언급된 경우는 두 번뿐이지만, 사실 영신식별은 사도행전을 비롯한 신약성경 전체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힘과 악령에 대한 승리를 인식하는 데 식별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루카 1,35 참조)하느님의 활동을 식별했고 후에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마태 1,18-20 참조). 엘리사벳과 시메온도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1,41: 2,26 참조).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는 데도 식별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비유는 식별을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고통당하는 형제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식별하라고 요구하고(마태 25,31-46),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식별해서 현명해지라고 요구하며(마태 25,14-30), 모래 위가 아니라 반석 위에 집을 세우라고 요구합니다(마태 7,24-25 참조).
 
바오로 사도의 주요 식별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입니다.(1코린 12,3:23,3 참조) 요한복음과 요한의 서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신식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신약성경에서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특히 16세기의 관상가이며 예수회를 창립한 성 이냐시오의 가르침은 식별에 관한 실천적 지침으로 어느 것보다 뛰어납니다. 여기에서는 그의 가르침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영을 식별함
 
영신식별이란 사랑과 신앙의 빛 아래 자기가 한 체험의 성격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사하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의 성령에게서 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원천에서 오는 것인가?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그것을 따라 실천하고, 그렇지 않으면 피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은 “영신식별을 위한 규범들”(「영신수련」 313-336번)에서 ‘선신’good spirits과 ‘악신’bad spirits을 구분합니다. ‘선신’이란 성령과 천사를 의미합니다. 양상이 어떠하든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생각이나 충동을 이냐시오는 ‘선신’이라고 부릅니다.
 
판단을 내리기 위해 어떤 기준을 사용해야하나? 여기에는 주관적 규범과 객관적 규범이 있습니다. 객관적 규범은 나를 넘어서 내 밖에 있습니다. 주관적 규범은 내 양심과 내적 느낌, 생각, 충동입니다.
 
객관적으로 주님께서는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과 교의, 내가 따라야만 하는 교회의 합법적 권위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며 삶의 지침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나 객관적 규범만으로 내 생각이나 느낌을 판단하기에는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주관적 규범에 의존해서 도움을 얻어야 합니다.
 
주관적 이라는 말은 임의적이라는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신식별에 대한 그리스도교 전통의 객관적 지평에 뿌리를 둔 신뢰할 만한 규범이어야 합니다. 이냐시오가 제시하는 첫째 규범은 다음과 같습니다. 혹시 내가 주님에게서 멀어져 심각한 죄 속에서 살고 있다면, 분명히 악신은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이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선신은 그 반대의 방법으로 접근해서 양심에 고통과 가책을 일으켜 부정적 느낌과 불편함, 혹은 걱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선신은 나의 삶이 나아가는 방향을 ‘거슬러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요점은 ‘영적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입니다. 나는 주님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에게서 멀어지고 있는가?
 
위안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떠오른 생각이나 하고픈 행동, 혹은 내적 충동의 그 원인을 판단하는 데 최상의 기준은 이냐시오 성인이 “위안”(conscolation)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불타오를 때 창조주이신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지상의 어느 것도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될 때,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죽음 및 자신과 세상의 죄 때문에 슬픔에 잠길 때, 나는 위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갖가지 내적 즐거움이 커져 주님 안에서 내적 평화를 누리게 될 때 위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는 주님에게서 나를 멀리 떼어 놓는 것을 “고독”(desolation)이라고 부릅니다. 죄를 향한 유혹, 어떤 양상이든 내가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것, 마음속의 그늘진 우울함, 혼란스러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믿음과 희망의 부족, 사랑의 냉담함 등이 그것입니다.
 
식별을 위한 몇 가지 규칙
 
먼저 영적 고독의 시간,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고 느끼는 시기에는 위안의 시간에 정했던 목적이나 결정을 바꾸면 안 됩니다. 혹시 자신이 지닌 선량한 지향을 바꾸도록 유혹을 받는다면, 오히려 그 유혹과 반대로 행동하여야 합니다. 고독 속에서는 마음을 겸손하게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약한지, 그리고 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라도 얼마나 많이 그분 사랑의 권능에 의지해야 하는지 기다려야 합니다.
 
위안의 시기에는 다가올 고독의 어려운 시기를 대비해서 힘을 모아 두어야 합니다. 위안은 당신과 더 깊이 일치시키고 구원하기 위해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고독은 어떤 식으로든 궁극적으로 악마에게서 오는 것인데,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나쁜지 생각하게 해서 악마가 나를 증오하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를 증오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고독을 허락하실까요?
 
이냐시오는 세 가지 중요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내가 주님과의 관계와 기도 생활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기에, 내 잘못으로 위안이 떠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께서 나를 시험하시고, 시련 속에서 나를 단련시키며, 힘을 기르시도록 나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는 내가 겸손을 배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께 의존해 있으며, 나 혼자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겸손하게 인식하도록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고독은 내가 스스로의 덕과 의로움, 외견상 착한 생활이라는 모래 위에 집을 짓지 않게 해주고, 오히려 내 삶의 반석이신 주님 위에 견고하게 집을 짓도록 이끌어 줍니다.
 
가능한 속임수에 대한 문제
 
식별에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이냐시오가 이미 말한 것처럼, 악신이 “광명의 천사”처럼 위장하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떠오른 생각의 시작뿐 아니라 전개 과정, 그 끝까지 세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선한 생각이 시초의 의도와 다르게 악하거나 혼란스럽거나 덜 선한 모습으로 끝맺는다면, 혹은 평화를 앗아가 버린다면, 그것은 악신에게서 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악신도 자신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나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까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처음에 주님에게서 오는 듯한 좋은 생각과 계획을 불러 일으켜서 점차 자신의 목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위안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악신은 미리 합당한 원인이 없이 위안을 심어주지 못합니다.
 
식별 자체를 식별할 필요도 있습니다. 식별할 때 특히 식별 자체를 식별 할 때는 기도의 동반자나 정기적으로 만나는 고해 신부 혹은 영성 지도자가 도울 수 있습니다.
 
제9장
영신식별 : 결정하기
 
이냐시오 로욜라는 영신식별의 규범을 의사 결정 과정에 적용합니다. 나는 어떤 특정한 경우 혹은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이제 내가 어떤 중요한 문제에 대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하고 싶어 한다고 합시다.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나는 그분께 내 결정을 가져가 그분의 주권 앞에 그것을 펼쳐 놓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아주 짧은 관상의 시간에 그분과 함께 그 문제를 검토합니다. 이때 제기된 문제의 중요성에 따라 상대적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결론에 도달하는 게 보통입니다. 매일 몇 분 동안 한번 혹은 두 번씩 모든 가능성을 주님께 들어 올려, 각각의 원천이 선한지 그렇지 않은지 식별합니다. 가능한 하나의 결정에 관해 주님을 바라보면, 일관성 있게 옳다는 확신이 듭니다. 또는 꾸준한 평화와 조화로움을, 때로는 마음속에서 기쁨과 참다운 즐거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그 특정한 가능성이 선신에게서 왔다는 표시입니다.
 
결정 과정의 핵심
 
주님의 현존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각 가능성에 대해 얼마나 편안함을 느낍니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주님을 신뢰해야 하고 내 마음속에 계신 그분의 성령을 신뢰해야합니다. 그분은 내 머리와 마음에 있는 어떤 생각이 당신의 영감을 따르는 것인지 보여주실 것입니다.
 
식별 결정 과정의 기반
 
주님은 나의 내적 체험 속에서 무엇이 선신에게서 오고 그렇지 않은지 식별하도록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식별에 기반을 두고 당신과 의논하여 특별히 중요한 문제에 관해 결정을 내리도록 부르십니다. 영신식별을 하기 위해서 내 삶에서 이루어야 하는 특별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 더 나아가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영신식별의

댓글목록

작성자: 글라라님     작성일시:

「관상과 식별」은 하나하나 의미가 깊은 문장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요약하기가 나름 어려웠습니다. 자연히 탑재용량이 초과되었구요. 9장 이후부터는 첨부 파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