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월 세마 성당 영적독서 : 생명체의 오랜 테마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8-06-13 23:47:30    조회 : 421회    댓글: 0

세마 성당  2018. 6월 영적도서 :  생명체의 오랜 테마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

                                             
지은이 : 전헌호 신부
1955년 5월 5일 출생 · 서울 가톨릭 대학교를 졸업.
오스트리아 빈(Wien)대학교에서 석, 박사 · 유학 중 1985년 사제 서품.
경북 하양 천주교회 주임 신부를 역임.
현재 대구 성 바울로성당 주임신부, 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저서로 「인간, 그 전모」, 「거룩한 갈망」, 「자연환경 인간환경」, 「상대성이론과 예수의 부활」등 다수가 있고, 역서로는 총서 「영적 삶의 샘」, 「참 소중한 나」, 「다시 찾은 기쁨」, 「사랑의 집」, 「행복한 선물」등 다수가 있다.

 

나눔의 글


“나는 누구인가? ......궁극적으로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모르는 것이 엄청 많고, 알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온갖 노력들로 지금까지 확보한 모든 지식과 체험 그리고 그 외 모든 것들은 나와 이웃의 삶에 매우 소중한 것이고 존중하여 잘 활용해야 하는 것이지만, 완전한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공간도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중력과 속도에 따라서 변화하는 상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밝혔다......”      -넷, 우주 환경 中에서-


이 책은 특별히 과학적 호기심이 넘치는 독자들에게 안성맞춤입니다. ‘넷, 우주 환경 · 다섯, 세상과 해석’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새로움으로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은 크게 5가지 주제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에 주요 내용만을 간추려 옮겨봅니다.

 

하나,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


 언제나 있어 온 말이지만, 근래에 들어 부쩍 우리 사회가 원칙을 존중하지 않아 병폐가 깊어 졌다는 말이  자주 나오고 있다.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은 인간의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오래된 테마다. 인간의 삶은 처음부터 이 셋과 더불어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원칙만 지켜서는 배고픔과 추위를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원과 숲을 멀리서 바라보면 평화로운 듯 보여도 가까이 가서 식물의 생태계를 들여다보면 처절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열심히 자라서 남보다 먼저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그렇게 하는 다른 개체에 눌려서 햇빛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러면 오래지 않아 사멸이 찾아온다.

 초식 동물이 생활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은 식물보다 어렵다. 식물들이 어렵게 합성한 생활에너지를 쉽게 내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벌과 나비같이 식물의 수정을 돕거나 새나 코끼리 같이 이동성이 없는 씨앗의 식물을 먹고 먼 곳으로 이동해서 배설을 하여 그곳에서 그 종의 식물이 번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육식 동물이 먹이를 구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원칙뿐만 아니라 변칙과 반칙까지 과감히 동원해야 한다.
 
 잡식 동물인 사람이 수집과 수렵생활을 하던 때에는 생활에너지를 확보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다른 육식동물과 마찬가지로 변칙과 반칙을 수시로 동원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때로는 호랑이에게도 덤벼들어야 했고, 이웃 씨족이나 부족과 한판 전쟁을 치르는 고통에 뛰어들기도 해야 했다. 도처에 적으로 가득한 상황에서는 믿음 보다는 의심, 원칙보다는 반칙이 우선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원칙이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 논의되고 있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상당히 진보한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제야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의 영역에 접어들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함께하는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은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있고, 서로 교묘히 조합되어 삶이 되게 하고 역동적이게 한다. 원칙만 지키고 원칙적인 말만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는 유머 감각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 삶이 빡빡하고, 창조적인 영감을 갖기 어려운 삶이 지루하게 지속될 것이다.

 

밭농사를 지을 때에도 이 셋은 함께한다. 땅을 갈아엎고 잡초를 뽑아내며 독한 농약을 치는 행위는 땅이나 동식물의 입장에서는 반칙을 범하는 것이다. 타 지역에서 우수한 종자나 새로운 품종을 들여오고, 박의 뿌리에 수박을 접붙여 키우며, 돌연변이로 생긴 뛰어난 종자를 보편화하는 것은 변칙에 속할 것이다.


 가축을 키우는 데에도 이 셋은 함께한다. 결국은 잡아먹을 목적으로 가축을 키우는 행위에는 처음부터 속임수가 들어간다. 소나 돼지에게 양질의 먹이를 주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갖도록 하여 무럭무럭 자라도록 하는 데에는 언제나 성실히 돌보는 원칙을 지키기도 해야 하고, 종자를 개량하는 변칙을 가미하기도 해야 하며, 달걀이나 우유를 모아 판매하고 마침내 가축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반칙을 감행하기도 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원칙을 지키며 정당하게 행하는 인간의 생업에 해당된다는 주장도 옳을 것이다.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원칙과 변칙 그리고 변칙이 혼재해서 오히려 흥미로운 ...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 그리고 미국 사람들이 즐기는 야구에는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이 좀 더 많이 개입되기 때문에 더 많은 관중이 몰려드는 것으로 생각된다. 공을 잘 치는 타자에게 공을 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던지는 투수가 훌륭한 투수다. 서로 상대편을 잘 속여야 하는 것이 처음부터 경기에 들어 있고, 속이는 데에 누가 어느 만큼  성공할는지 예측하기 쉽지 않은 것에 흥미가 들어 있다. 또한 타자의 방망이를 떠난 공이 어디에 떨어져서 어떻게 굴러 갈지 예측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은 것에 흥미가 있다.


예술도 가능하게 하는 원칙, 변칙, 반칙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은 예술의 세계에도 교묘히 섞여들어 있다. 규칙적으로 잘 진행되는 리듬과 멜로디가 계속 그렇게만 진행되면 기계적인 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높은 음과 낮은 음, 긴 음과 짧은 음, 조화와 부조화가 한데 교묘하게 섞여 예측하기 힘든 인생살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을 파고들 때 위안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성공과 실패도 좌우하는 원칙, 변칙, 반칙
 EBS 교육방송의 수준 높은 교양 프로그램과 좋은 강의들에 대한 시청률보다는 복잡한 인생살이를 다룬 일반 방송의 드라마 시청률이 더 높다. 드라마에서 원칙적이고 교훈적인 내용들만 다룬다면 시청자들은 식상해 할 것이다.
 
 기존의 관념과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이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은 문학작품은 작품으로서의 생명이 길지 않다. 문학이 좀 더 나은 삶을 제시하고 그곳으로 나아가도록 제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관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기에 원칙 속에 변칙과 반칙이 많이 섞인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해 내야 할 것이다.


원칙, 변칙, 반칙과 인간의 삶
 오늘날 인권의 중요성을 외치면서 자국뿐만 아니라 지구촌 모든 나라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하는 듯이 보이는 선진국들도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약소국을 침략하여 수많은 인권을 짓밟기를 예사로 했던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국가로 미국을 들어보자. 그 땅에서 살던 2천만 인디언들을 무참히 짓밟아 지금은 겨우 몇 만 명 정도만 남아 있다.
 

지금도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2차 대전 전까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영국도 프랑스도 스페인도 무력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식민지의 선량한 원주민들에게 고통을 가했다. 일본 역시 같은 논리로 우리나라와 중국, 동남아시아에 큰 고통을 주었다가 원자폭탄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손을 들었다가 다시 욕망을 추스르는 중인 것 같다.
원칙만으로 번영의 삶이 가능하기까지는 아직도 인류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득한 것 같다.


원칙, 변칙, 반칙과 신앙생활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모두 깨끗하게 다시 태어났다. 그런데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늘 우리를 따라다닌다.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생에 언제나 섞여드는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바치는 기도서가 원칙과 지혜를 강조한 잠언이나 지혜서 또는 집회서로 구성되지 않고 시편으로 이루어진 것은 시편이 원칙과 변칙과 반칙이 뒤섞인 인생의 진면목을 좀 더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50개의 시로 구성된 성서의 시편에는 슬픔과 기쁨, 고통과 환희, 호소와 찬미, 비탄과 감격 등 인생살이에서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측면이 들어 있어서 그것을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공감의 세계로 빠져들어 위안과 구원을 느끼고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게 된다.


 구약성서가 교훈적인 내용만이 아니라, 나약한 인간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닮고 있기 때문에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리라.
 
 신약성서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삶에 도전과 파국이 있고, 드라마틱한 사랑과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살이의 자취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기 때문에 강력한 매력이 있다. 그분은 파격적인 말과 행동의 변칙과 반칙 안에 언제나 사람들과 하느님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의 원칙을 고수하셨다.

 


둘, 자연 환경


환경보호의 어려움
 환경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도시화, 산업화, 인구과잉, 소비사회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는 산업사회를 이루어 인구의 85% 정도가 도시에 모여서 살고 있다. 비좁은 공간에서 소비습관에 물들어 엄청난 양의 분뇨, 오폐수, 쓰레기들을 내놓고 있다.


환경보호의 주체
 환경보호를 외치는 목소리가 때로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일종의 고발자이고 듣는 사람은 마치 죄를 지은 피고가 된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는 우리가 사는 환경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없다. 자신은 환경을 활용하여 취할 수 있는 이익을 다 취하는 한편으로 절제와 양보를 들먹이면서 훈계하는 식으로 타인에게 환경을 보호하라고 권하는 말은 우리의 환경을 또 한 번 어지럽히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환경을 보호하는 일은 바로 나로부터 출발해야 할 일이다. 남에게 말하거나 가르치기 전에 나부터 실천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환경지속지수
 최근 세계경제포럼WEF이 122개국을 대상으로 환경 파괴를 하지 않고 경제성장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환경지속지수ESI’를 발표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122개국 중에서 95위로서 탄자니아 94위, 요르단, 96위 사이에 있다. 이것은 핀란드 1위, 일본 22위, 태국 4위에 크게 뒤처지는 것이고 90위 이하의 국가는 한국을 제외하고 모두 저개발 국가이다. 
 
 세계 3위의 인구밀도를 지닌 우리나라는 외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원자원을 사다가 우리의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제품을 만들어 수출해서 먹고사는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생태계가 외국과의 교류 없이 현재 수준의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인구가 약 215만 명 정도 일 때 가능한 일이다. 외국과 교류를 할 경우에는 약 2,000만 정도의 인구가 이 땅 위에서 살 때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국가의 환경법령
 현재 환경부가 직접 관장하는 환경법은 30개에 이르고 있다. 이들 법령은 선진국의 법령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환경지속지수가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봄나물을 캐다보니...
 남들이 작업을 해서 시장에 내놓은 것을 돈 주고 산 것과 내가 직접 들에서 채취한 것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산이나 들에서 내가 직접 수집한 것은 그것들이 어디서 유래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나에게 오게 되었는지 그 전 과정을 다 안다.
 
 나는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 살기를 원하는 수많은 종류의 생명을 매일 먹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고 고귀한 의식을 지닌 인간의 일부로 부활하여 이 세상에 존재한 보람을 갖게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생명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는 나의 존귀함을 제대로 인식하고 자긍심을 갖고 있는가. 내 이웃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그들을 존중하고 있는가. 강한 자극적인 요소를 지닌 다른 것들을 더 갖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가득품고 마음의 빈곤과 허욕에 시달리고 있지나 않은가.


전문가들도 찾기 힘든 적정한 규제
 환경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규제가 지나칠 경우에는 산업시설을 유지, 가동할 수 없게 되어 실업자가 양산될 것이고, 규제가 미비할 경우에는 환경오염이 심각해져 갈 것이다. 환경오염방지를 위한 규제의 적정 수준이 어느 선인가에 대해 전문가들이 많이 연구하고 있으나, 일자리가 있는 곳에서 환경이 전혀 오염되지 않을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해 있는 환경문제는 개개인의 절제된 생활만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한 문제다.


생태계의 부양능력에 맞는 의식과 생활방식 개발
 오늘날 환경문제를 극복하려는 여러 종류의 노력에는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정신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 ‘지속가능한 개발’은 소비문화의 극복과 근검절약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결국 고통이라는 해결사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재앙, 즉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일이다.


북한의 식량문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문제의 근본 해결책은 안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남한보다 더 넓은 땅에서 남한보다 훨씬 적은 곡물을 생산하고 있는 현재의 방식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북한의 여기저기에 보인다. 그 여지를 잘 활용하지 못하여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있는 북한의 식량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재해인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남한의 식량문제
 북한의 식량문제는 북한만의 문제일 뿐이고 남한에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인가? 우리나라 현재 인구는 5,000만 명을 넘어서 식량자급율은 25%대를 유지하고 있다. 해마다 약 2%의 경작지가 택지, 공장용지, 도로, 공공시설물 등으로 잠식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30~40년 후에는 이 땅에 경작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될 것이다.

 

연간 1,500만 톤 이상의 곡물을 수입해서 먹고사는 우리의 곡물 수입 과정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곡물 시장은 미국 시카고다. 5만 톤을 화물차량 기차에 싣고 로키산맥을 넘어 서부 해안에 도착해서 다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태평양을 횡단하는데 그동안 이 엄청난 5만 톤의 곡물이 부패해서도 안 되니 방부제도 좀 들어가야 할 것이다. 썩어서 먹지 못하게 되는 것보다는 방부제가 들어가더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이 낫다. 방부제가 겁나서 전혀 사오지 않을 수는 더더구나 없다. 5,000만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다.

 

배에 싣고 태평양을 건너기까지 1개월은 족히 걸린다. 오늘날 우리는 인천항과 부산항에서 이런 과정을 거쳐 구매해 온 곡물을 주일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5만 톤급 배 한 대 분량씩 받아들이고 있다. 이 과정 어느 한 곳에서라도 차질이 생기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의미한다. 차질이 빈번하면, 재앙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차질 없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돈이 충분히 있다 하더라도 외국에서 내다파는 곡물의 양이 충분하지 않으면 큰 문제다.


식량문제의 해결방안
 식량문제의 해결방안으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먹을거리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쌀 한 톨에 들어 있는 많은 정성, 그 큰 의미를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는 먹을거리 앞에서 수도자 못지않은 단정한 마음으로 감사의 자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꼭 필요한 분량을 감사히 먹고 남으면 잘 보관했다가 다음에 먹어야지, 결코 음식찌꺼기로 내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셋, 마음 환경


환경과 나
 환경문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심각한 현상을 지적하고 염려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는 오늘 이 순간에 존재하는 기쁨과 삶의 의미를 인식하는 데에도 관심을 두어야 하겠다. 생활을 정비하고 마음을 비워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 욕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삶을 꾸려나가 누구에게 속박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나를 이 순간 이곳에 확실하게 살아 있게 하는 요소다.


조급함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요소들 중 하나가 조급함과 서두름이다. 인류는 풍요한 사회를 만들어 편안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기술문명을 발전시켜왔다. 편리한 기술문명을 익히고 그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한다. 자동차를 소유하고 운영할 수 있는 물질적 여유를 갖기 위해서도 자동차를 타고 부산히 움직이며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

 

본래 우리가 살아가도록 주어진 삶은 이런 것이 분명 아닐 텐데, 우리의 삶은 점점 더 바쁨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갖고 차분히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참으로 없는 것인가.
 
 그 길은 바로 삶을 단순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일과 모임을 줄이고, 소비하는 물건을 줄여서 단순하고 소박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여유와 풍요함을 가질 수 있는 삶일 것이다.


소박한 마음, 단순한 삶
 평범한 현대인 한 사람이 누리는 물질적 혜택 중에는 과거 어느 한 나라의 국왕이 누리던 것보다 더 풍요한 것이 많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현대인들의 마음은 더욱 더 공허하고 빈곤하기 일쑤다.

 

소박한 마음, 단순한 삶은 사물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사물과 사람을 제대로 만나게 한다. 그는 사물과 사람이 지닌 가치를 알아내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소중하게 대한다.
 
 소박한 마음, 단순한 삶은 자신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 편안하다. 그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하여 자신을 조급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소박한 마음, 단순한 삶은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을 고통스러워 하지만 불평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그것을 묵묵히 견디어 낸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강하다.

 
 우리는 이것을 우선 온전히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남녀 수도자들의 자세와 삶에서 만날 수 있다. 이들은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수도자들을 수도원에서만이 아니라 거리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심지어 나 안에서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소시민들의 작은 삶 속에 들어 있는 이 위대함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져야겠다.


절제와 무절제
 현대인이 가진 마음의 환경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절제다. 절제는 우리로 하여금 참된 성취와 소유, 만남과 소비를 하게 한다. 절제는 나의 하루가 24시간이고, 나의 몸은 눈과 귀, 팔과 다리가 각각 두 개이고 입은 하나이며, 두뇌는 한 번에 하나씩 인식하고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한다. 무절제는 이것을 거부하려 애를 쓰지만 거부할 수 있기는커녕 허망함과 참담함만을 가져올 뿐이다.


내면의 소리와 소음
 도시가 가진 특성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에서도 항상 따라 다니는 것은 소음이다. 이러한 소리들은 내안에도 존재한다. 나 스스로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여 내 마음을 번잡하게 할 뿐 아니라 이런저런 (텔레비전, 라디오, 오디오, 비디오, 컴퓨터 등)소리들을 끊임없이 찾아 듣는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고, 새 소리를 듣고,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살아 있음을 기뻐하려면 많은 소리들을 줄여야 한다.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하고 유익한 소리는 우레와 같이 다가오지 않고 들릴 듯 말 듯 고요하게 다가온다. 특히 내면의 소리를 듣고자 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명예욕
 명예욕은 우리를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매우 소중한 것이고 다른 기본 본능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 나가고 살아가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런데 이것도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자신의 명예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삶은 그것에 사로잡혀 자유와 자아를 잃게 된다.
 
 이런 사람은 또한 쉽게 완벽주의에 빠져들어 자신과 남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조금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행하려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삶에서 그 누구도 완벽하게 살아 갈 수는 없다.


 

죄의식
 융Jung을 비롯한 정신과 의사들의 임상경험에 의하면, 정신과 의사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열심한 신자들이 제법 있다고 한다. 이들이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이른 것은 잠재된 죄의식에 오랫동안 시달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완벽하게 살아가려는 노력이 그들을 소심하게 하고 작은 잘못에도 죄의식을 크게 느끼게 한 것이다.

 

그런데 완벽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교만이 깊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다. 완벽하게 살아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앞서고자 하는 욕구가 그를 지배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은 잘못된 생활에서 벗어나 올바른 삶으로 나아가기 위함이지 죄의식에 짓눌려 시달리다가 마침내 기운을 잃고 사멸하기 위함이 아니다. 죄의식은 우리를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자극을 주는 것으로 그 임무를 수행한 것이 된다. 그 이상 우리에게 남아서 우리를 움츠러들게 해서는 안 된다. 용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다.


복수와 용서
 용서는 상대편이 나에게 가한 피해를 그대로 감수해 나가는 것으로서 물질적, 심리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용서는 자아가 분명하고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복수할 능력이 없어서 포기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피해를 입고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갈 수 있는 대단히 성숙하고 수련된 사람이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존재를 예수님 안에서 본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당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던 사람들을 용서하셨다.


존재와 기쁨
 모든 존재 사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 중 하나다. 이 시각을 천부적으로 부여된 생명을 살아가는 주체의 입장으로 돌려보면,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자신이 원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다. 태어나 있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강한 본능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 땅에 던져진 존재다. 살고 싶거나 말거나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살아가야하는 존재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 선택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존재고 이 문제에 대해서도 선택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불행한 존재일 수도 있다.

 

살아가는 일은 때로 무거운 과제다. 이 과제를 수행해 나가는 데에 음식 맛을 돋우는 양념처럼 도움을 주는 것이 기쁨이다. 우리는 고달픈 삶 가운데에 쾌락과 기쁨이 간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삶을 견디어 내고, 때로는 참으로 기뻐하면서 살아가며, 이러한 삶을 영원히 살기를 원하기조차 한다.

 

우리 인간은 유일하게 이성을 가진 존재로 동물의 단순한 삶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추구한 쾌락이 기쁨이 될 수도 있고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 되도록 하자면, 경험과 배움을 통한 삶의 지혜가 많이 필요하고, 그 지혜들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용기와 자기 조절 능력이 필요하다.


기쁨을 얻는 길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여정을 두고 보더라도 기쁨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이 먼저 있고, 이것이 해소되는 과정에서 쾌락과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고통과 슬픔이 없는 기쁨은 없으며, 기쁨만 있고 고통과 슬픔이 없는 경우도 없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항상 함께 한다.
 
 기쁨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나의 삶을 주어진 대로 살아가기로 받아들일 때, 내 안에 자리 잡게 된다. 기쁨은 나와 주변의 존재를 긍정하는 데서 생겨난다.

 기쁨은 또한 자기 자신과 화해했을 때 마음속에 서서히 다가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쁨은 이웃과 화해하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했을 때 생긴다. 
 
소유와 의식
 소유한 것이 진가를 발휘하는 때는 나의 삶을 유지하고 증진시키는 일에 그것을 사용하고 소비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한 사람이 실제로 소비하는 것, 소비할 수 있는 것은 일정한 양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소유물은 삶에 대한 나의 태도에 따라 자연환경과 인간환경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기초생활이 가능한 정도로만 만족하는 소박한 생활을 통해서도 풍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많은 소비를 위해 안달하면서도 마음의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다.


나눔
 힘들여 일해서 벌어들인 것을 남에게 선 뜻 내줄 수 있는 사람은 상당히 성숙한 사람이다. 그는 내준 것만큼 다시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것을 감당 할 각오를 한 것이다. 남에게 주는 것을 몹시 좋아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삶마저 곤경에 빠뜨리고 마는 경우도 있다. 그때부터 그는 다른 사람의 나눔에 의지해야만 한다. 나눔도 뒷감당이 어려울 정도로 지나치게 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찾아온다.

 

나눔의 미덕에 대해서 가르치고 권하는 교회마저 교회의 유지와 선교를 위해 적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나눔의 미덕에 대해 가르치는 순간에도 그것을 몽땅 팔아서 나누어 주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미덕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때에는 아까워도 내주어야 하고, 어떤 때는 내주고 싶어도 자제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의 형태가 넓게 볼 때는 가짐과 나눔에 있어서 중용의 미덕을 지키고 있는 삶인지도 모르겠다.

 

넷, 우주환경


땅과 의식
 이 땅에 대한 인류의 생각은 각 시대마다 조금씩 또는 많이 달랐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이래로 이 새로운 지식은 단순히 인간의 의식세계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실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주에 대한 지식은 날로 증가하고, 이것은 우리의 의식세계와 구체적인 삶의 형태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인류는 현재 우주를 가장 정확히 관찰할 수 있는 허블 망원경보다 50배 이상 해상도가 높은 망원경을 조만간 만들어 1억 광년 떨어져 있는 별의 혹성에 산소가 존재하는지 관찰하려 하고 있다. 이들 전문 지식은 단순히 인류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의식과 세계관 그리고 신앙생활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간과 공간
 우선 나 자신이 공간적인 존재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내 몸이 공간적인 존재이고 나의 오관에 와 닿는 모든 것들이 공간적인 것이다. 나 자신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간적인 것 중에는 누군가가 독점하거나 사고팔 수 있는 것이 많지만, 그 누구도 시간을 사거나 독점할 수 없다. 한 제국의 황제에게나 걸인에게나 시간은 공평한 것이다.


시간의 정체
 시간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각기 다양하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 칸트는 “시간이라는 것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과 우리의 내적 상태를 직관하는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했다. 시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인과관계를 파악하여 삶이 가능토록 할 목적으로 인간의 뇌에 들어 있는 하나의 인식의 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현재 물리학계에서는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라고 말한다.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인간의 뇌 안에만 존재할 뿐 우주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인간의 의식 세계에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현재, 이 순간의 의미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현대문명은 과거 수천수만 년 동안의 인류의 경험과 탐구정신의 결과다. 오늘 나의 모습은 선조와 부모님이 물려준 삶의 조건과 내 노력의 결과다. 참으로 살아 있기 위해서는 현재 이 순간에 있어야 한다.


 수많은 聖人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외적으로는 그 누구 못지않게 초라했었다. 그러나 성인들은 현재, 이 순간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했다. 그들도 미래를 설계하고 걱정했지만, 몸과 마음은 언제나 현재, 이 순간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로웠고 풍요로웠으며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도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언제나 현재 이 순간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세계
 내가 이렇게 서 있는 것 자체도 객관적 세계의 일부다. 외부에 나 아닌 다른 존재인 객관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 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사항이다.
 
 아무리 외부에 많은 객체들이 존재하더라도 내가 오관을 닫고 있으면 그들은 나에게 없는 존재와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모든 것, 눈  앞에 보이는 현재의 모든 것은 나의 주관적 세계가 받아들여 재구성한다.

 우리는 객관의 세계를 인정해야하면서도, 우리 각자가 가진 이 객관의 세계에 대한 생각은 나의 주관의 세계 안에서 재구성된 나만의 세계란 것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그러면 이 세상에 왜 이렇게 많은 의견 차이와 갈등들이 있는가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겠는가에 대한 생각을 더욱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온갖 노력들로 지금까지 확보한 모든 지식과 체험 그리고 그 외 모든 것들은 나와 이웃의 삶에 매우 소중한 것이고 존중하여 잘 활용해야 하는 것이지만, 완전한 것이 아니라 아직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의 공간
 우리 은하계의 중심을 비롯하여 우주의 곳곳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중력이 대단히 센 블랙 홀Black Hole에서는 모든 것이 그 안으로 끌어 당겨져서 공간도, 시간도, 물질도 인류가 가진 현재의 인식체계로는 알지 못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블랙홀 안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여 그 정체를 밝혀내면 예수님의 기적, 부활, 그리고 승천을 좀 더 잘 규명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은 천체들이 서로 중력에 의해서 직접 끌어당겨 충돌하지 않고 자신의 중력에 의한 공간의 변화로 서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했고, 태양계의 행성들이 태양의 중력에 의한 공간의 변화로 태양 주위를, 달이 지구 중력에 붙들려서 지구를 돌고 있는 원리를 설명했다. 이러한 사실에 의해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으로 공간도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중력과 속도에 따라서 변화하는 상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밝혔다.


우주의 모습
 우주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 공간, 시간을 다 포괄하는 말이다. 천문학자들은 이 우주가 반지름이 약 150억 광년 정도 되는 것 같다고 한다. 엄청나게 큰 우주의 나이는 약 150억년이다. (우리 지구의 나이는 약 46억년)

 

스티븐 호킹과 같은 뛰어난 천문학자들이 공동으로 내린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런 우주가 여러 개 있다고 한다. 이들 여러 개의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통교하면서 유지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11차원으로 구성된 이 우주의 한 면에 붙어 있는 4차원의 세계를 가진 존재다.

 인간은 우주를 바라보고 인식함으로써 우주로 하여금 우주이게 하고 존재 가치를 갖게 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사람은 우주보다 더 위대한 존재다.

 

별, 태양계, 태양, 숨바꼭질의 명수인 수성........... 이하 생략

 

다섯, 세상과 해석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
 우주 환경에서 소개한 세계는 거시세계에 관한 것이다. 이 거시 세계의 크기는 너무도 엄청나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생각을 바꾸어 미시세계를 들여다보면, 미시 세계 안에 또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나 자신이 그렇게 작기만 한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거시 세계와 비교해서는 한 알의 모래에도 미치지 못할 내 몸은 약 60조 개의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미시 세계의 영역을 다루는 나노과학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한 알의 모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작게 볼 수 도 있고, 엄청나게 큰 또 하나의 우주로 볼 수 있다.


미시 세계와 인식구조
 우리의 인식구조가 크게 흔들린 일이 지난 20세기에 있었고 아직도 이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생활에 가장 밀접한 존재들 중 하나인 빛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뉴턴은 빛이 입자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세기 초반에 토마스 영이 간섭계干涉界 실험을 통해 빛이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아인슈타인이 빛을 어느 물체에 비추면 전자가 튀어나가는 효과를 증명하면서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이렇게 되자 과학자들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빛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물질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깊이 해 들어가면, 우리의 인식능력을 초월하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우리의 두뇌는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빛이나 전자와 같은 존재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물질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을 맹신하는 사람은 과학으로 모든 것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처럼 믿고 큰 소리들을 치지만, 그는 여기저기서 탐구의 한계를 느낀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결국 믿음의 단계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과 해석
 내 앞에 이 세상이 있다. 그런데 이 거시 세계를 채우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물질들도, 미시 세계를 채우고 있는 온갖 미세한 생명체와 원소들도 나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나의 삶이 어디서 유래하느냐, 삶의 의미는 무엇이냐, 인간은 무엇이냐, 죽음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고, 그리고 나아가 신이란 과연 존재하는 거냐고 물어보아도 아무런 답이 없다.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를 통틀어 말다운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나와 주변에 있는 사람들뿐이다.

 

우리의 인식과 마음이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객관적 사물을 현재 우리가 가진 이성과 의지와 감정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것이다.
 
 삶에 의미가 있다고 보고 싶은 사람은 삶에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고,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그러한 삶에 대한 믿음을 지니며, 하느님이 계시기를 원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신다. 나는 하느님께서도 나의 자유를 존중해주시는 자유로운 사람이며, 나의 믿음은 강요된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한 사람의 지성과 자유 그리고 인격을 동원한 중대한 결단이다.


빅뱅과 창조
 1929년, 우주를 관찰하던 허블은 우연히 은하들이 서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은하가 서로 멀어져 간다는 것은 우주가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 일부 학자들이 우주의 팽창 속도를 역으로 계산하여 우주가 시작된 연대를 약 150억 년 전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류는 우주가 시작되던 최초 수 초 동안에 이루어진 일 이후에 일어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더 탐구해 낼 수 있는데, 처음 수 초 동안에 일어난 일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늘과 하느님의 나라
 현대인은 이제 하늘 저 높은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나와 이웃 안에 있다. 그리고 그 나라에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다.


우주와 사랑
 우주의 존재와 우리의 존재에 대해 의미와 사랑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나이다. 내가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이 우주 전체가 사랑으로 가득 찬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도, 생명체들을 끊임없이 먹여 살리는 것도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모두가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의 결과가 된다.

 내 안에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 안에 사랑이 없다. 이 우주 안에 사랑이란 없는 것이고, 우주는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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