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8. 8월 영적도서 : 「하느님과의 만남」
지은이 : 앤소니 드 멜로 (1931~ 1987)
인도 뭄바이 출생. 인도 뭄바이 관구의 예수회 신부로 푸나에 있는 사다나 사목상담연구소 소장을 지냄. 수많은 저술과 영성 강연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그는 1987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만 『깨어나십시오』 『벗어나십시오』 『행복한 삶으로의 초대』 『하느님과의 만남』 『개구리의 기도 I, II』 『샘』 『종교 박람회』 『일분 지혜』 『일분 헛소리』 등 3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여러 책을 통해 영적 가르침의 풍요로운 유산을 남겨 놓았음.
옮긴이: 송형만
사회복지학 박사, 한국임상정신분석 연구소 교수.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순천향대학교 출강
옮긴 책: 행복한 삶으로의 초대, 우주 그리스도의 도래, 은총의 동반자, 사자와 어린양, 임상 신학 등.
나눔의 글
「하느님과의 만남」은 인도의 철학인 · 종교인 영성가들의 예를 많이 들어 다루어선지 신비로움이 다소 느껴지는 피정 강론집입니다. 그는 실상을 직시하고 과감히 참된 자기가 되도록 의문을 갖고 탐구하며 성령으로 가득 찬 은총을 끊임없이 갈망하라 말합니다.
이 피정 강론의 주제는 세 개의 기본 원리인 기도와 속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것으로 본문에 담긴 피정 강론은 총 16개의 테마로 나뉩니다. 입문으로 성령을 받음과 사도들의 피정 그리고 피정 시작을 위한 준비 자세,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등으로 기도의 법칙과 청원기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등을 주제로 한 강론을 담았습니다. 다음에는 회개와 회개의 위험성 그리고 죄의 사회적 측면을 다루었으며,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생애에 대한 묵상이 담겨 있습니다. 강론의 소중한 내용을 간추려 옮겨 봅니다.
1. 성령을 받음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
오늘날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법률, 새로운 신학, 새로운 구조, 새로운 전례가 아니다. 성령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영혼이 없는 죽은 몸과 같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건물들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위에 내려오신다. 우리는 성령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리라는 희망을 안고 이곳에 모였다.
성령을 받는 방법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성령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성령은 성부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예수께서는 “기다리라”고 하신다. 성령께서는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기도 안에서 매일매일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과 그분 말씀 앞에 내보이는 사람들에게만 성령은 주어진다. 생산 지향적인 우리의 정신으로 보자면 완전히 시간 낭비처럼 보이지만, 수많은 시간과 시간을 투자한 사람들에게만 성령은 찾아오신다.
피정에는 강의도 없고 단체 토론도 없다. 피정에는 침묵과 기도와 하느님께 자신을 보여드리는 것만 있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 : 태도
십자가의 성 요한께서는 사람은 하느님께 기대하는 그만큼 받는다고 말씀 하신다. 여러분이 조금만 기대하면 조금만 받게 되고 많이 기대한다면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개인적인 삶 안에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체험했는지, 전혀 없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아무런 기적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성령을 거스르는 죄란 그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이며, 그분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런 사람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무신론자보다 더 위험한 무신론자이다. 이 사람의 하느님은 그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실제적인 목적 때문에 죽어버린 하느님이며,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당신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그 하느님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 : 실천
루카 복음 11장 1-13절을 꼼꼼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대목을 읽고 또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내 응답은 어떤 것인가 스스로 물어보기 바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참된 신뢰를 가지고 진정으로 성령을 청할 수 있는 충분한 믿음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하느님께 청할 때는 “하느님의 뜻이라면”이라는 전제조건을 붙여서 청해야만 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런 전제조건이 붙지 않는다.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틀림없는 하느님의 뜻이며, 틀림없는 하느님의 약속이다. 부족한 것은 성령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의지가 아니라, 첫째 하느님께서 성령을 주시려고 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며, 둘째 끈질긴 청원이다.
“저희는 주님의 자녀들이오니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성령을 주소서”, 또는 “오소서, 성령이여, 오소서 성령이여” 모든 종류의 절규가 힘을 발휘할 것이니 천천히, 진지하게, 백번, 천번 만번, 기도한다. 혹은 말없이 청할 수도 있다. 간청하는 마음으로 침묵 속에 그저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감실을 바라본다.
2. 사도들의 피정
우리는 골방에 틀어박힌 관상가가 아니라 사도로서 소명을 받았다. 사도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어 드리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바라시는 그것을 채워 주신다.
원천으로 돌아감
오늘날 쇄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원천”으로 그리스도인이고 사제인 우리의 원천이신 살아있는 인간 예수에게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말일 것이다. 이러한 회귀에는 과거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살아 계신 분이며 오늘 만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도 : 스승을 사랑하는 사람
이 피정 기간 동안 그분께 모든 시간과, 주의력과 사랑을 드려야 하며, 라자로의 누나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그분께 발라 드렸듯이, 그 모든 것을 그분께 쏟아 부어 드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우리 곁에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웃과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분에게 드리는 그러한 사랑에 앞서서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을 개인적으로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 당신은 이들보다 더 나를 사랑합니까?”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 어린 양들을 먹여 기르시오.”
사도 :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
초대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사도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이어야 했다. 이것은 바울로 사도가 자신의 사도직 은사를 인정받는 데 그토록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바울로 사도는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열두 사도나 다른 사도들에 비해서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는 진정한 사도라고 주장한다.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1 고린 9,11)하고 고린토인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를 뵙지 않았습니까?”
사도행전 26장에서는 예수께서 직접 이러한 말씀을 해 주신다. “그래서 제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였더니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 보아라. 내가 너에게 나타난 것은 너를 봉사자로 삼고 네가 나를 본 것과 또 앞으로도 내가 보여줄 것들의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다.’”
사도는 증거자이다. 법정에 선 증인이 남들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는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해야 하듯이, 아니 그보다 더욱, 사도가 전하는 메시지가 확신에 찬 것이기 위해서는
풍문이 아니라 몸소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 20년 후에 참된 사도와 증거자가 되기 위한 자격요건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지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요건이다. 교회 역사상 모든 참된 사도들은 이러한 요건들을 갖추었던 것이다.
사도 :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사도행전 19장, 8장에는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사도들이 성령을 나누어 주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도들이 성령을 나누어 줄 수 있었던 중요한 관건은 그들의 기도가 지닌 힘이었다. 사도들 자신도 성령강림 전에 열심히 기도한 후에야 비로소 성령을 받았다.
우리는 사제라는 단어에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활동 -사제, 학자-사제, 예술가-사제 등. 우리 시대의 사도들은 사도직에 유용한 이런저런 전문 분야를 가지는 일에 관심을 쏟고 있다. 사도로서 지닌 소명의 가장 중요한 특성, 즉 성령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능력이 온전히 살아 있어야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좋을 수 있다.
세상은 신학을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고대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사람들에게 신학을 전해주지 않았다. 신학은 나중에 생긴 것이다. 먼저 교회는 성령과 성령의 능력에 대한 체험을 주었다.
이웃에게 성령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여러분이 말씀의 힘과 기도의 힘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그중에 기도의 능력을 통해서 이웃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도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깨어 기도하고 인내롭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며, 모든 것을 떠나서 고독과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과 또 하느님과 씨름할 용기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다. 모든 예언자들과 나아가 예수님까지도 사막으로 물러가서 오랜 동안 침묵하고 기도하고 단식하고 악의 세력과 싸웠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도 : 식별 능력을 지닌 사람
사도에게 피정이 필요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피정은 식별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피정은 우리 마음속에 침묵을 창조하고 그것을 심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도는 사명을 띠고 파견된 사람이다. 열렬한 마음과 선한 의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충동을 구별하고, 성령의 충동과 악령의 꾐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눈이 맑아야 하고, 귀는 예민해야 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들 내면에 계시는 성령의 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열어 놓고 있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도의 특성을 얻는 방법
사도직 소명을 받거나 그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는 순전히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마찬가지로 사도의 두드러진 특성, 즉 하느님을 만나고, 성령을 나누어 주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능력을 얻거나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러한 것들 역시 순수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물론 주님에게서 이러한 선물들을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첫째, 열렬히 갈망하고 둘째, 끊임없이 청하는 일이다.
주님 앞에 앉은 걸인처럼 그분께 동냥그릇을 채워 주실 때까지 계속 흔들라. 대개 우리가 얻기 위해서 조르는 선물이 그분의 선물인 경우에, 그분은 이처럼 사랑에 찬 끈질긴 태도를 사랑하신다. 마태오 복음 15장에 나오는 가나안 부인처럼 거절이나 명백한 퇴짜까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주님은 그 부인의 이러한 태도를 사랑하시고 경탄하시는지!
3. 피정 시작을 위한 준비
왜 피정을 하는가?
사람들은 다양한 기대를 가지고 피정에 참석한다. 내가 지도하고 있는 이러한 형태의 피정에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기대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과 더 깊이 더 강렬하게 만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정은 신학이나 영성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하느님에 대한 체험,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는 체험,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받는 체험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일치체험과 그 체험이 가져오는 평화와 기쁨을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면 무신론자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하느님에 굶주린 세상
한 사제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재능을 갖추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체험 없이 현대세계로 나간다면, 세상은 하느님에 대한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간단히 거부해 버릴 것이며, 그는 사제보다는 교육자 · 철학자 · 학자로서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오늘날 현대세계가, 특히 젊은 세대가 “말로만 하지 말고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인도가 우리에게 오랜 세월에 걸쳐 요구하는 것과 같다. (신학과 전례와 성서와 교회법 등 이러한 의식儀式과 언어 뒤에는 실재가 있다. 의식들은 실재를 적절하게 상징하지 못하며, 개념들은 실재를 적절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당신은 실재와 직접 만나고 있는가? 우리를 실재와 만나게 해줄 수 있는가?)
몇 가지 제안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이 하느님 체험이라면 이 피정 기간 동안 하느님 체험과 기도와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를 위한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몇 가지를 권한다.
1. 하루 종일 엄격히 침묵을 지킬 것
침묵은 혀의 훈련이라기보다는 귀의 훈련이다. 더 잘 듣기 위해서 혀를 침묵한다. 여러분의 귀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면 특히 침묵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특히 침묵을 괴로워한다. 가만히 앉아서 침묵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면 , 행동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말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지니게 될 것이며, 말과 행동은 새로운 깊이와 힘을 얻을 것이다.
2. 읽기를 피할 것
「성서」와 「준주성범」처럼 확실히 기도에 도움이 되는 책을 빼고는 모든 책을 멀리 한다. 대개 피정 동안에는 하느님을 만나는데 장애가 된다.
3. 기도에 집중적으로 시간을 쏟을 것
계속해서 가능한 한 오랜 시간을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쓰기 바란다. 이것이 피정에서 극대의 효과를 얻는 방법이다. 이것은 가장 힘들지만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하느님께 대한 열망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열렬히 갈망하는 사람을 뿌리치지 못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간절하게 갈망하지 않고 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 안에 안식처를 얻기 전에는 절대로 쉴 수 없다고 말한다.
관대함과 용기
이것은 두 번째로 필요한 준비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같은 분도 기도가 너무 지겨워져서 기도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용기를 다 동원해야 했다고 말한다. 오늘날 참으며 기도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관대함과 용기이다.
힘든 시련은 기도 자체가 아니라 기도 중에 만나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합리화의 껍질을 벗겨버리고 보호막을 부숴버리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만든다는 그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항상 즐겁고 위안을 주는 체험만은 아니다.
하느님께 다가갈 때는 조건 없이 온전히 자신을 포기하는 상태로 나아가야한다. 우리는 가련하고 연약한 피조물이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직성이다.
실제로 거룩함과 광기는 아주 가까운 것이다. 대개 이들을 구분하기란 어렵다. 위대한 성인이 되고 하느님을 위해서 큰일을 하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좋은 평판에 대한 관심을 버려야 한다.
4.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첫째 주제는 사도로서 필요한 하느님 체험이며, 둘째 주제는 침묵이다.
사도에게 필요한 하느님 체험
하느님을 느끼고 그분을 보고 있다고 참으로 주장하는 사람과 만나는 체험은 모든 것을 뒤흔든다. 모세와 같은 이런 사람에 대해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는 듯이 인내했기 때문입니다” (히브 11,27)
사도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도는 그 자신이 바로 메시지다.
신원 위기
오늘날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소위 신원 위기라는 것을 겪고 있다. 사제는 더 이상 자신이 무엇이지 모르며, 현대세계에서 자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준주성범」에는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말이 나온다. “나는 양심의 가책에 대해 정의를 내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몸소 겪었다.” 신원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의 많은 사제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자신이 사제라는 의미에 대해서 그저 말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체험했는지?
침묵
둘째 주제는 침묵이다. 내가 말하는 침묵이란 마음의 내적 침묵이다. 이 침묵 없이는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외적 침묵은 내적 침묵에 도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외적 침묵을 견딜 수 없다면, 다시 말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일을 참을 수 없다면 내적 침묵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기도 초기 단계에서는 겸손하게 정적과 침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침묵의 성인들
성인들은 침묵의 가치를 웅변적으로 역설해 왔다. 토머스 머튼의 글을 인용하자면 “진리를 사랑한다면 침묵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침묵은 햇살과도 같이 하느님 안에 있는 당신을 비추어 줄 것이며, 무지의 환상으로부터 구해줄 것이다. ..... ”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 기도의 스승이신 예수
여러분이 지상의 어떤 스승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면 그때는 직접 예수께 “주님, 제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호소하기 바란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것이고 개인적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도를 배우는 방법이다.
하느님 중심의 기도
예수의 생애가 그랬듯이 그분의 기도도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그 중심이다. 우리의 기도가 실패하는 한 가지 이유는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하신다. 물질적인 것을 포함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이런 필요를 채워주시도록 간구해야한다. 예수께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세 가지를 청하라고 명하신다. 일용할 - 사치가 아닌! -양식과 영적인 힘과 죄의 용서를.
기도 안에서 어린아이가 됨
나는 분명 기도하는 법을 알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염경기도에, 청원기도에 의지하는 것뿐으로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이기를 멈추었으며, 따라서 기도하는 법을 잊은 것이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묵상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단순한 청원기도를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5. 기도의 법칙
예수께서는 청하라, 그러면 반드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기도의 첫째 법칙 : 믿음
예수께는 믿는다면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주 엄격한 법칙이었다. 믿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사도행전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는 사도 바울로는 초대교회 안에서 사도로서 신뢰를 쌓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기적을 수행하는 능력을 드러내게 된다. 어째서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볼 수 있었던 그러한 종류의 기적들을 볼 수 없는가? 어째서 죽은 자까지도 다시 살아나는 그러한 기적적인 치유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우리에게 더 이상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모든 종교는 필연적으로 청원기도와 기적이라는 두 가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우리 삶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교회에서 기도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실험실을 만들어야하며, 자신의 재능을 믿고 약품과 그에 필요한 것들을 발명해 내야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 활동자들의 베일 뒤에서 인격적으로 사건들을 이끌고 계시는 그분의 손을 볼 수 있는 신앙 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기도의 둘째 법칙 : 용서
마르코복음 11장에서 예수께서는 기도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같은 대목에서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신다. 그것은 바로 용서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거듭거듭 강조하시는 기도의 기본법칙이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힘이 없는 큰 이유는 마음속에 원한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 용서하는 법
1. 싫어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권고하신 것이다. 기도 중에 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긍정적인 마음을 지니게 되며, 사랑하게까지 된다.
2. 자신이 당하는 모든 불의를 하느님께서 어떤 신비한 목적을 위해서 계획하고 통제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 너머에서 우리들 삶의 모든 줄을 잡고 계시는 아버지를, 우리의 선익과 세상의 선익을 위해서 이 고통을 당하신 아버지를 바라보게 될 것이며,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과 원수들을 용서하는 것이 더 쉬워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원한이 마음에 떠오르면 모든 분노와 미움을 표현하고, 원한다면 어린아이가 되어 하느님을 원망을 한다. 하느님께 신랄한 말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욥처럼 거룩한 사람도 그렇게 했다.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존경심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과 친하다는 표시이다. 흔히 분노는 사랑의 뒷면이며, 다른 형태의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의 반대는 분노나 미움이 아니라 냉담과 무관심이다.
6. 청원기도와 그 법칙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가치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과거 우리의 실패나 불충을 들여다보지 않으신다. ① 그분을 향해 울부짖고, 그분을 간절히 바라며 ②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한 도움을 아무 곳에서도 받을 수 없고, ③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분께서 해주시리라고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
기도의 힘
모든 철학적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기도에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서는, 예언자들에게 당신 계획을 자세히 계시함으로써 그들이 기도를 통해 당신의 마음과 계획을 바꿀 수 있도록 해주시는 하느님을 보여주며, 끈질긴 기도의 능력 있는 힘에 당신을 굽히시는 것을 스스로 규칙으로 삼으신 하느님을 보여준다.
가나에서 마리아가 그러했고, 모세는 출애굽기 32장에서 긴 논쟁 끝에 마침내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시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이와 똑같이 창세기 18장 16-3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청을 드린다.
청원기도의 “신학”
청원기도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형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서 전체를 통틀어 분명히 제시된 거의 유일한 기도형태이다. 기도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며 그중 으뜸은 경배이고, “이기적”형식의 기도인 청원기도는 가장 저급한 기도라는 개념으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경배와 사랑까지 포함해서, 적절하게 표현된 청원이 담기지 않은 기도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원기도는 오로지 그분께 의지하도록 가르친다.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모든 것들이 잘 이루어지게 하시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청원기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부모(하느님)는 그 아이가 행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의 존재 그 자체 때문에 부모(하느님)의 사랑과 보살핌과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는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걱정을 버린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기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 달려 있는 것처럼 열심히 일하면서, 모든 것이 주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그분을 믿는 것이다.
7. 기도를 위한 그 외의 “법칙”
1. 비현세성
예수께서는 단순하고, 사치와 부가 없는 일용할 양식, 일상적인 필수품 등 그러한 삶을 옹호하신다. 예수께서는 부가 지니고 있는 위험을 잘 알고 계시며,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인간의 마음은 그 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2. 관대함
하느님께서 관대하게 대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 사람들에게 관대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 곤경에 처한 사람, 도움과 봉사를 청하는 사람들에게 인색하면서 어떻게 주님께서 관대하시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3.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함
예수께서 “진실히 진실히 말하거니와, .......그대들이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청하면 이루어 주겠습니다......청하시오.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요한 14,12-14; 15,16 : 16,24)
4.꾸준함
예수께서는 무엇인가를 한 번 청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첫 번째 예는 루가 복음 11장 두 번째 예는 루가 복음 18장에 나온다. 마태오 복음 15장의 가나안 부인에게서 이러한 원칙에 대한 놀라운 예를 볼 수 있다.
‘.....예, 주님,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 오, 부인, 믿음이 장합니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청원기도 : 삶의 방식
이 간단한 청원기도의 양식 뒤에는 전체적인 삶의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삶은 믿음의 삶, 형제를 용서하는 삶,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삶, 비현세적인 삶,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삶이다. 오늘날 많은 사제들이 기도를 버리고 있다고 한다. 그 간단한 이유는 기도가 가져다주는 힘을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8.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오늘은 여러분이 좀 특이하다고 느낄 수 있는 기도 방법에 대해 말씀 드리려 한다. 이름 없는 러시아 순례자가 쓴 「순례자의 기도」라는 책인데, 이 책의 원고는 20세기 초, 아토스 산에 있는 수도원에서 한 수도자가 죽은 후에 그 방에서 발견 되었다.
그리스인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라고 일컫는, 기도에 관한 그리스 교부와 학자. 신학자들의 글을 발췌 · 수록한 책 「필로칼리아」 라는 책에서 순례자는 매일 그 책을 읽고서 그 가르침을 열심히 따라하게 된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도와 호흡을 연결시키는 법을 배운다. 곧 숨을 들이쉴 때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하고 말하고 숨을 내쉴 때 “이 가련한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매일 밤마다 “내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이여!” 하고 기도했으며, 카르투시안 수도회를 설립한 성 부르노는 항상 “오!, 좋으신 하느님!” 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사막 교부들도 이러한 형태의 기도법으로 그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기도문은 “하느님, 나를 살려 주소서, 야훼님, 빨리 오시어 나를 도와주소서.” 하는 기도문이었다. 이들은 하루 종일 일하는 시간과 밤을 새우는 경우에는 거의 밤새도록 이 기도문을 외웠다.
실천 방법
먼저 마음에 드는 기도문을 선택해서 하루 종일 암송해보기 바란다. 하루종일- 먹을 때, 길을 걸을 때, 목욕할 때, 심지어 제 이야기를 들을 때에나 묵상을 할 때까지도- 열심히 기도문을 암송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흐트러지게 될 것이다.
몸소 이 기도법을 체험한 영성 지도자가 기도문을 선택해 주는 것이 전통이다. 어떤 기도문을 선택해도 좋지만 그 기도문에는 어떤 형태로든 하느님의 이름이 담겨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예수 성심이여, 당신께 의탁하나이다.” 하는 기도문이다.
어떠한 기도문이라도 좋은데, 그 기도문이 첫째, 운율적이면 큰 도움이 된다. 둘째, 공명을 내는 것이면 좋다. 셋째,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한번 기도문을 선택하면 쉽게 바꾸지 않는 게 좋다.
예수의 이름이 지닌 힘
그리스도교 신자는 예수의 이름을 반복함으로써, 이슬람교 신자는 알라를 반복해서 부름으로써 같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서는 예수의 이름이 지닌 가치와 힘을 분명히 보여준다. 출애굽기 20장 7절에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그 이름은 공허한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하느님의 권능과 은총과 현존을 담고 있다.
이 기도의 배경에 놓인 “심리학적” 이유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에 관한 심리학적 측면에 관해 부언하려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기계적이고 지나치게 앵무새 같다고 생각되어 그만두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프랑스 사람 에밀 쿠라는 스스로 자기암시라고 부르는 기법을 통한 특별한 치료에 대해 발표했다. 어째서 자기암시가 효과가 있다고 말하는지, 무의식과 무의식이 지닌 힘에 대해 이야기 하려한다.
무의식은 프로이드가 대중화시킨 개념으로 무의식이 인간 인격의 주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들 내면에 가지고 있는 엄청난 암시의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 “무의식”을 성화시킬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없을까? 이 부분을 성화시키는 것은 우리들이 지닌 동기, 행동, 많은 힘의 원천을 그 뿌리로부터 성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에서 하루 종일 단어들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기도문을 자주 암송하면 무의식이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며, “기도하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여러분의 삶과 행동 전체가 이러한 기도하는 상태에 젖어들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기암시의 법칙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에 적용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불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더욱 깊이 기도하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정신과 상상력과 감정을 이용하듯이 자기암시의 힘을 이용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묵주기도
어떤 분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에 관해 내가 말한 모든 것이 묵주기도에도 완벽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간파했을 것이다. 오늘날 반복해서 드리는 묵주기도를 비웃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되었다. 이것은 라마교에서 경문을 적어 넣어 돌리며 예배하는 전경기轉經器와 같은 것이라며 ‘하느님께 자발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삶에는 인간의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더 깊은 것들이 존재한다. 인간의 정신은 똑똑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지혜롭게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감각이 필요하고, 정신을 초월하는 본능이 필요하다. 성인들은 이런 본능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회 수사였던 알퐁소 로드리게스 성인은 매일 수십 단의 묵주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들이 드리는 기도에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의 모든 원리들이 들어있다. 외견상 기도문의 기계적 암송으로 보이는 행위를 통한 “무의식의 성화”인 것이다.
9. 공동기도
“거듭 말하거니와, 그대들 가운데서 둘이 합심하여 땅에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마태 18,19-20)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공동기도에 정해진 법칙은 없다. 공동기도에 어려움을 주는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이유로 기도 모임에는 지도자가 있는 것이 도움이 된다.)
1. 사적인 기도를 하기 위해 기도 모임에 나가는 것
2. 지나친 “두뇌사용” ...생각, 반성, 영감들로 가득 차서는 안 됨
3. “비인격성”....“나” 대신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기
4. 서로의 이야기 듣지 않기
5. 우리들 마음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기
6. 기도를 길게 늘어놓기
7. 사람들이 모임에 오기 전에 개인적인 기도를 통해 미리 준비를 하지 않는 것
시작을 위한 몇 가지 다른 조언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공동기도에는 일정한 틀이 없으며, 성령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끼여들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를 사람들에게 준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을 되살릴 수 있도록 짧은 침묵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찬미가 한두 곡도 도움이 됨)
공동기도가 무겁고 끌려가는 느낌이 들 때 지도자는 간단한 찬미의 기도를 드리고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보며, 모든 것에 대해 좋은 것과 나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이 좋으신 하느님이라는 그 사실에 대해 그분을 찬미하도록 용기를 북돋우어 준다.
10. 회개
회개 :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길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은총을 받기 위한 준비는 첫 째, 그분을 만나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 둘째, 지속적인 청원기도, 세 번째 준비는 회개이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 묵시록(3,14-20)에 잘 기록되어 있다.
회개의 필요성
예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설교 주제가 바로 회개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참으로 회개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근본 자세이며, 항구불변의 자세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예수 안에서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나는 선을 원할 수는 있지만 행하지는 못합니다. 원하는 선을 행하지는 않고 원하지도 않는 악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그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로마 7, 18-25)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나는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하는 바울로 사도의 말을 체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죄에 대한 감각
오늘날 우리는 우리 죄를 상당히 가볍게 여기고 있지만, 예수께서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예수께서는 주님의 기도 안에서 오직 세 가지만을 청하라고 명하신다. (일용할 양식, 유혹에 맞서는 도덕적인 힘, 그리고 죄의 용서) 복음서들의 첫머리는 죄의 용서가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수님에게는 육체의 건강과 물질적 풍요보다도 죄의 용서가 훨씬 중요한 일이다.
회개의 의미
가장 훌륭한 회개의 공식은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힘으로, 온 정신으로 네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루가10,27)이다.
회개의 은총은 언제나 큰 기쁨과 평화를 동반한다. 예수께서는 항상 회개를 큰 기쁨과 하나로 묶으신다.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 회개가 따른다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죄인이 아니라 성인이다. 그는 하느님의 빛 안으로 나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알게 된다.
성서는 이 문제에 관한 많은 예를 제공한다. 사도 바울로는 교회를 박해하면서 자신이 하느님께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죄를 깨닫는다. 사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장 먼저 예수께서 참으로 누구신지를 알아 뵙고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외쳤다.
자캐오는 주님께서 자기 집을 찾아주신 후에 뉘우치고 회개한다(루가 19장). 루가 복음 7장에 나오는 여인은 주님을 만난 후에 사랑과 회개의 눈물을 흘린다.
11. 회개의 위험성
회개를 잘못 이해하면 죄와 벌의 두려움, 자기혐오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어 아주 위험한 것이 되어버린다.
자기용서의 거부
하느님께서는 오로지 용서하시기만을 원하신다. 우리는 죄송하다는 말조차 드릴 필요가 없다. 단지 그분께 돌아가기를 열망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용서받기를 갈망하는 것보다 더 간절히 용서하고 싶어 하신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가 “주님,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제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신약성서 안에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하느님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
하느님과 그분의 처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은 죄에 대한 묵상이 도를 지나칠 경우에 나타나는 좋지 않은 결과이다. 나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그리스도교 신자들, 특히 사제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 그 사람들은 예수께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율법의 굴레로부터 해방을 전파하신 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율법의 종교에 사로잡혀 있다.
성서학자들도 구약의 메시지와 신약의 메시지가 지닌 차이점을 설명한다. 구약의 하느님은 착하게 순종하면 친절을 베풀 것이고, 반역한다면 분노하여 멸망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다른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말하자면 그 하느님은 성인에게 친절하신 것처럼 죄인들에게도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다.
예수께서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 그 자체이심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를 짐스러운 분으로 느끼는 것
사람들은 흔히 그리스도를 선물로 체험하기 훨씬 전에 먼저 일종의 짐으로 체험한다. 그분이 주시는 것은 아무 조건이 없다는 것을, 그분이 오직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행복과 평화라는 사실을 쉽게 믿지 못한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마음속의 사랑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것을 결코 요구하지 않으신다.
12. 죄의 사회적 측면
형제들의 고통을 내가 책임져야하는가?
오늘날 세상과 교회가 겪고 있는 혼란과 혼돈에 대해 책망해야 할 사람은 자유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니다. 세상의 고통과 불의에 대해 책망해야할 사람은 자본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책망해야할 것은 죄, 바로 내 죄이다. 죄를 뿌리 뽑을 수 있다면 고통도 뿌리 뽑을 수 있다.
기아와 질병과 문맹을 퇴치해도 모든 악의 뿌리에 놓인 이기심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그런 증상들을 성공적으로 퇴치한 서양 국가들을 보라. 그들이 더 행복하고 이타적이며, 그러한 나라에는 저개발국가들 보다 고통이 적을까? 이기심과 죄를 붙들지 못하고 있다면 성취한 것이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고백성사
오래된 똑같은 죄를 고백하고 거듭거듭 찾아내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별로 개선되는 것도 없고 자신이 위선자처럼 느껴진다. 내가 정말 진지하게 회개했다면 그 죄들은 없어져야 할 것이나 죄와 결점이 사라지는 그런 일은 실제로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이 결점과 약함을 지님으로 해서 당신의 권능이 우리 약함 안에서 빛나기를 바라실 것이다. 성사의 목표는 하느님과의 화해이며, 그리스도와의 깊은 일치를 이루고 성령의 권능을 새롭게 받는 것이다.
13. 베네딕도 기도법
기도에 성서를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 곧 성서 대목을 기도로 바꾸는 한 가지 방법 즉 베네딕도 기도법을 제시하려 한다. 베네딕도 성인께서 널리 보급시킨 기도 방법이다.
이 기도는 세 단계로 되어 있는데 독서 · 묵상 · 염경기도이다.
14. 그리스도의 나라
마침내 총독 관저에서 빌라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시는 그분을 만나게 된다. “그렇습니다. 나는 왕입니다. 하지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8장)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왕이라고 드러내놓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힘없이 갇혀 있을 때를 택해서 당신이 왕이심을 공공연하게 선언하신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를 괴롭히고 조롱하며,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들의 왕 만세!” 하고 놀리면서 뺨을 때리고 가시로 찔렀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나타내는 이 얼마나 완벽한 형상인가?
우리는 주님께 까닭을 묻는다. “주님, 왜 주님과 저희는 이런 방법으로 세상을 구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왜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서기 전에 침 뱉음을 당하고 놀림을 당해야 하며, 고통과 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께서는 늘 제자들에게 고통과 죽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와 마찬가지로 약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은총을 청해야 한다.
1. 그분의 부르심에 귀를 막지 않는 은총
우리는 선택적으로 듣는 명수들이다. 오직 우리에게 맞는 것들만 듣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너라” 하고 부르시는 것을 듣게 되면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와서 죽어라”이다.
2. 이해할 수 있는 은총
이는 인간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은총이다. 이것은 순수한 은총이다. 우리가 아무리 지적으로 노력해도 하느님의 방식으로 사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에게 어리석게 보인다.
그리스도와 그토록 오래 함께 지낸 사도들조차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한 이 가르침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이 가르침을 파악하는 한 가지 방법은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될 때, 그분은 몸을 굽혀서 우리와 친한 벗이 되시고,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지혜를 주신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한테는 감추고 철부지 같은 사람들한테는 보이셨으니 찬양하나이다.”(마태 11,25).
3. 평생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은총
이 은총은 큰 고통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감을 의미하며, 단순히 힘든 일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운명을 함께함을 뜻한다.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곧 힘든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삶은 행복한 삶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5.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따름
그리스도를 앎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곧 그분을 만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 사람을 알게 된다.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만나야만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은 아무리 성찰하고 묵상해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순전히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속에서 겸손하고 끈질기게 청하는 것뿐이다. 이 은총을 얻을 수 있도록 성모님께 중재를 청하라.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끌어 주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을 주시도록 성부께 청하라. 성령께 그 은총을 청하라.
그리스도를 사랑함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자 누구입니까? 환난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주권도, 현재도 미래도, 권세도 높이도 깊이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로마 8, 35-39).
그리스도를 따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부르심은 슬픔과 우울함 속에서 당신을 따르라는 부르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로 성인은 데살로니카의 신자들에게 “여러분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고 말한다. 바울로 성인은 틀림없이 자신의 삶 안에서 십자가의 기쁨과 평화의 신비를 체험했을 것이며 그것을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16.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묵상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많은 성인이 권하는 방법은,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묵상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상상력을 활용한다. 현대의 많은 심리치료가들은 상상의 세계가 생각처럼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며, 도피나 비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으로 파악할 수 없는 현실의 깊디깊은 실재들을 보여주는 세계로서, 치유나 성장을 위해 매우 효과적인 도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알베르니아 산으로 가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환시를 보았으며, 사랑으로 그분을 십자가에서 내려드렸다고 한다. 성인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드리고, 신음하시는 그분 곁에 서 있을 때, 그것이 환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인 정신과 이성적인 신학이 이해하지 못할 침묵 속에 잠겨 있는 그 상황에서, 사랑에 의한 신비가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크리스마스 때 구유를 만드는 관습은 프란치스코 성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서, 온 마음으로 실제처럼 보이는 그 세계로 뛰어든다면 모든 환상 뒤에 놓여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환희에 찬 놀라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모든 신학적 성찰과 탐구를 넘어서는 심오한 깊이에서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아기 예수를 팔에 안아보았으며, 그분을 사랑스럽게 포옹하는 기쁨을 맛본 많은 성인들 중의 한분이다. 성 안토니오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었고, 교회학자로 선포될 만큼 뛰어난 신학자였으며, 예수께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시라는 사실을 틀림없이 알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성인께서는 자신이 본 환시 뒤에 놓인 심오한 신비적 실재를 감지할 수 있는 신비가였으며, “환상적인 실재”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그것에 온전히 승복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어쨌든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도 「영신수련」에서도 권하는 방법이다. 여러분도 복음서를 묵상하면서, 어린아이가 되어 그 환상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면,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많은 숨겨진 보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성서의 지식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에게만 가르쳐주시는 숨겨진 지혜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