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8. 10월 영적도서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지은이 : J . 요르겐센(1866~1956)
· 덴마크의 시인 문필가
· 1866년 11월 6일 덴마크의 푼넨의 스벤드보르그에서 출생, 루터교 가정에서 성장
· 청년시절 철학과 종교에 있어 혼란기를 거쳐 1896년 가톨릭으로 개종
· 개종한 후 오랜 기간 아씨시에 머물면서 1903년 [아씨시의 순례기(Pilgrimsbogen)]를 냈고, 1906년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저술
· 1922년 아씨시로부터 명예시민으로 선정
· [시에나의 가타리나], [돈 보스코], [스웨덴의 성녀 비르짓다]와 같은 성인전과 시집 출간
<책머리 글 중에서>
오랫동안 나의 노동과 연구의 중심을 차지했던 이 책을 이제 놓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쓰는 이 글은 성인이 하시는 일입니다. 「완덕의 거울」에서 “용맹스런 원탁의 기사들은 전쟁터에서 막강하여 피땀 흘리며 죽기까지 이단자들과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 신앙을 위하여 전쟁터에서 자기들 생명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기들 행위에 대하여 말 만으로라도 사람들로부터 명성과 추앙을 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인들의 행적을 말로만 전하는 데서 명성과 추앙을 받고 싶어 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프란치스코의 이 말씀은 뜻 깊고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사람은 그가 실천하는 만큼만 아는 것입니다.” 지혜의 최종 목표는 삶을 돕고 인생을 적절하게 영위하는 데 있습니다. 지혜는 실천할 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전기 작가들의 문학적인 노력 뒤에는 실용적이며 도덕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프린치스코 성인의 현대 전기 작가로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영에 진실로 감도되어, 옛 수도원의 작가들처럼 이 말씀을 드립니다. “프란치스코에게 배우십시오, 이상理想은 반드시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1906년 아씨시의 성녀 클라라 축일에
요하네스 예르겐센
나눔의 글
‘지혜는 실천할 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간결한 이 한마디 말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거룩한 생애가 정의된다고 생각됩니다. J.요르겐센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크게 1부~4부로 엮어져있는데, 나름 정성을 다해 장문의 460p 이상의 글을 간추려 나눔의 글에 옮겨봅니다.
제1부
성당 건축가 프란치스코
1. 쾌유
아씨시의 이른 아침, 오랜 중병으로 앓던 그가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은 그가 병상에서 일어나는 날이다. 그는 성문을 나가서 길 위에 섰다. 그는 거기 서서 지팡이에 의지한 채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 한결같으리라고 생각했던 햇빛과 푸른 하늘과 녹색 벌판 등,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았으나 전과 같지 않았다. 그에게 평화를 주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이제는 아무 기쁨도 주지 못했다. 그가 길고 지루한 회복기를 보내는 동안 몹시도 그리워했던 이 모든 것들,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먼지이다, 먼지이다, 먼지일 뿐이다. 재, 죽음, 심판, 죽음의 운명, 헛됨, 이 모든 것이 헛되다! ’ 그는 한참을 거기 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회개의 첫 발을 떼어 놓은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그는 곧 자신의 실패와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깨닫자, 함께 아름다운 경치를 감탄하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그는 성문으로 되돌아가면서 자신에 대해 일종의 우월감마저 느끼며 ‘멸망하고 말 것들을 사랑하는 그 친구들이 참 어리석구나’하고 생각하였다.
2. 유년기와 청년기
오랜 병상에서 일어난 그날 아침은 프란치스코가 스물두 살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아씨시의 부자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의 맏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큰 옷감 장수였다. 프란치스코의 어머니 피카 부인은 아씨시에서 먼 고장 출신이다. 아씨시는 이탈리아의 아주 오래된 마을 중 하나이다. 15세기 이후에 나온 전설에 의하면, 피카 부인은 출산일이 되었는데도 아기를 낳지 못했다. 그런데 누가 문을 두드려 열어 보니 한 순례자가 말하기를 산모가 아름다운 침실에서는 아기를 낳지 못할 것이니 외양간으로 가서 짚단에 누우라고 하였다. 피카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외양간으로 가자 진통의 고함 소리가 그치고, 산모는 아기를 낳았다. 피사의 바르톨로메오는 14세기 말의 학자로서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삶과 예수의 삶 사이의 유사점들」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출생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성 프란치스코의 출생의 유사성을 나열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도와 가게에서 일하였다. 그는 곧 장사에 수완을 보였다. 그는 상술이 뛰어나고 적극적인 상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경제관념이 희박해서 낭비가 심하였다. 재물을 모으고 절약하는 데서 만족을 구하는 아버지와 그는 달랐다. 그는 그 마을의 가장 부유한 젊은이로서, 오늘날 말하는 사교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성 교제에 관한 한 그는 모범적이었다. 마음이 정결한 사람은 다 그렇듯이, 프란치스코는 생명의 신비에 큰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의 생활은 방정하였다. 단 한 가지 부모의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다면, 그가 친구들을 너무나 좋아해서 식사 중에도 친구들이 부르면 곧 일어나 나가는 것이었다.
한 가지 칭찬할 만한 점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마음이었다. 그의 소비 성향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에게 베푼 냉수 한 잔은 주님께 반드시 보답을 받는 다는 것을 를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프란치스코는 자연에 대하여 아주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섬세한 정서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당대의 역사
프란치스코는 전쟁 시기에 성장했다. 황제는 교황과 전쟁을 하고, 제후는 왕과 싸우고, 마을은 마을과, 시민은 귀족과 전쟁을 하였다. 당시 페루쟈 공화국은 막강한 세력을 떨치며 이웃 아씨시를 굴복시킬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도시를 지키고자, 몇몇 귀족들과 아씨시 시민들은 페루쟈 군대와 전쟁을 벌였다. 수많은 아씨시 군인들이 포로가 되었고 그중에 프란치스코도 있었다. 그는 그 귀족적인 외모 때문에 시민들이 들어가는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부르주아 계급에 관대했던 옛 프랑스 도시의 법에 따라 귀족들의 감옥에 들어갔다.
오랫동안 감옥에서 귀족들과 함께 살아온 젊은 상인은 귀족들의 생활에 더 큰 매력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감옥 생활이 끝난 후 몇 년 동안 그의 삶에서 드러난 두드러진 특징이다. 축제와 향락의 소용돌이에 빠졌던 때도 이 시절이다. 23살에 병을 앓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와서야 그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게 되었지만, 그러나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4. 프란치스코, 군인이 되다
프란치스코에게 회개의 길은 아직 멀었다. 그는 병이 회복되어 힘이 좀 생겨나자 다시 세속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변한 것은 이전처럼 그 생활이 즐겁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전보다 더 위대한 행동을 꿈꾸게 되었고, 기사가 되고 싶은 꿈이 다시 생겨났다. 그때 마침 황제와 교황 사이의 투쟁이 새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는 새 생활에 몰두하여 밤마다 전쟁과 무기에 대한 꿈을 꾸었다.
맑게 개인 어느 날 아침, 프란치스코는 풀리아로 가는 군대로 가기 위해 말 위에 올라탔다. 그 길은 로마와 남이탈리아로 가는 길이다. 프란치스코가 원하던 전쟁터까지 거의 다 온 셈이다. 그런데 이전에 그를 병석에 던져 놓고 성찰과 깨달음으로 인도하셨던 바로 그 주님이 스폴레토에서 다시 그를 붙잡았다. 그는 열병의 습격을 받아 누워 있어야만 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음성을 들었다, 이제 그는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래서 그는 사도 바오로의 말을 빌려 크게 대답하였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 음성은 대답하였다. “너의 고향으로 가라. 거기서 네가 할 바를 알려 주겠다. 네가 본 환시는 달리 이해해야 한다!”.
5. 회개
15세기 피렌체의 성 안토니노(1389-1459)는 그의 저서 「교회 연대기」에서 프란치스코가 친구들과 즐기던 생활을 떠나고 나서 지낸 한 해의 생활을 두 줄로 요약하였다. “그는 여러 곳의 은수처 동굴에 숨어 있었고, 무너진 성당 건물들을 경건하게 수리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동굴 속에서 자신만의 방을 찾았다.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그가 찾는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이었다. 길에서 동냥하는 거지를 만나면, 몸에 지니고 있는 돈을 다 주었다. 나누어 줄 것이 없을 때에는 그 거지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웃옷을 벗어 주었다.
그는 가난을 알기 위해서 직접 구걸을 해보아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아씨시에서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 순례를 계획했다. 마침내 그는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거지 옷을 입은 진짜 거지가 되어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다른 거지들과 함께 섰던 것이다. 그가 얼마동안 로마에 있었는지 모른다. 권위자들은 다만 그가 거지들과 함께 식사를 했으며, 거지 옷을 벗어주고 자기 옷을 다시 입고는 아씨시로 돌아 왔다고만 말한다.
어느 날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간청하고 있는데 대답이 들려 왔다. “프란체스코야! 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하면, 네가 지금까지 육적으로 사랑하고 탐하던 것들을 경멸하고 미워해야 한다. 네가 일단 이것을 시작하면 지금까지 달고 좋게만 보이던 것들이 모두 참을 수 없도록 역겹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네가 지금까지 피하였던 것들은 모두 아주 달고 넘치는 기쁨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은 마침내 그가 계획을 세우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가 혐오하던 것이라면 나환자보다 더한 것이 있었던가? 자신의 좋은 마음을 보여드리려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가 온 것이다. 어느 날, 길을 가던 프란치스코는 말에서 뛰어내려 나환자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프란치스코는 힘없이 내민 나환자의 손에 애긍물을 놓았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고 환자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무서운 병으로 뒤덮인 그 손에 입을 맞춘 것이다. 단맛과 행복과 기쁨이 그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는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승리 중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 자신을 이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었다. 대부분 자신의 노예인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6. 성 다미아노의 메시지
성 다미아노 성당은 아씨시 성 밖 아래쪽에 있었는데, 프란치스코가 젊었을 적에 성 다미아노는 허물어져가는 작은 경당이었다. 나환자들에게 다녀온 얼마 후 그는 성 다미아노 성당에 들어가서 십자가 앞에 꿇어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프란치스코에게 말씀을 주시는 일이 일어났다. “자,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내 집이 거의 무너지고 있구나!”.
그는 오래된 경당을 둘러보았다. 그 엄숙한 순간 그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주님,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기쁘게 하겠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일을 시키셨다. 그의 마음 안에서는 기쁨이 흘러 나왔다. 그는 길을 가면서 줄곧 십자 성호를 그었다. 십자 성호를 그을 때마다 그의 마음에 십자가의 예수님 모습이 점점 더 깊이 박혔다.
7. 집과 아버지를 떠남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문밖으로 나와 보았다. 자기 집 가까이 다가온 왁자지껄한 사람들 한 가운데 자기 아들, 그의 맏아들, 그가 그렇게 크고 많은 꿈을 꾸어왔던 그 아들, 그 아들이 지금 집으로 오고 있었다. 창백하고 쇠약해진 몰골로 머리는 헝클어진 채, 두 눈 아래에는 검은 멍이 들었고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피를 줄줄 흘리면서, 아이들이 던진 흙으로 온통 흙투성이가 된 채 온 것이다. 이것이 그의 아들 프란치스코의 모습이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자랑스럽던 아들, 그의 노년의 기둥, 그의 생의 기쁨과 행복이었던 그 아들이 이 모양이 된 것이다.
독일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마지막으로 아들의 광기狂氣를 한동안 감옥에 가두어서 치료해 보고자 하였다. 그는 아들을 어두운 감옥에 가두고 음식도 물과 빵만을 주어 아들의 약점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아들의 달콤한 식성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요지부동이었고 오히려 자신의 믿음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을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주교관으로 가서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그의 불만을 알렸다. 도시에서 아주 유명한 유지와 그의 미친 아들 간의 재판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수많은 방청객들이 몰려든 재판정에서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던 눈길을 아들에게로 돌렸다. 프란치스코 두 눈에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의 주교님, 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돈 뿐 아니라 옷까지 기꺼이 다 드리겠습니다”. 그는 옷을 다 벗은 알몸으로 금방 다시 나타났다. 허리춤에 걸친 옷감으로 몸을 가린 것 외에는 다 벗고 거기 서 있었다.
“지금까지 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지금 저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돈과 옷을 다 돌려 드립니다. 이제부터 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고운 주홍색 리넨 옷가지들과 상당량의 돈을 그의 아버지 발 밑에 놓았다.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1207년 4월의 일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게 된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굽비오로 갔다. 그는 굽비오 병원에서 나환자들의 발을 씻어 주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고, 종기를 치료해 주고, 고름을 닦아 주고, 종종 곪은 종기에 입을 맞추었다.
한편 아씨시 근처 성 다미아노에도 그가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당을 수리할 돈을 구하기 위해 그는 아씨시 장터 사람들 앞에서 은수자 옷을 입고서 음유 악사처럼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면 청중들 앞을 돌면서 구걸을 하였다. 아씨시에 정오 종이 울리고 사람들이 식탁에 앉을 때, 그는 손에 밥그릇을 들고 아씨시를 돌았다. 그는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국 한 국자, 고기가 좀 붙은 뼈다귀, 빵 조각, 채소 샐러드 몇 조각,... 온갖 음식이 다 섞인 마치 개 밥그릇 같은 음식을 받았다. 마구 토할 것 같았으나 그는 첫 숟갈을 입에 대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은 성령의 단맛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생전 처음이었다.
이리하여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은 사람들이 다 아는 거지가 되었다. 그가 늙은 거지와 함께 동냥을 다니면서 아버지를 만날 때 마다, 그 늙은 거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 저를 축복해 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향하여 말했다. “보세요, 하느님께서는 나를 저주하는 당신 대신에 나를 축복해 주는 아버지를 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성당을 수리하는 일이 그의 참 소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213년까지 그는 동정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성당을 하나 수리했고, 1216년 아씨시에 있는 성 마리아 델 베스코바도 성당 수리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1209년 2월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한 구절을 들었다. 그 구절은 그에게 새로웠다. 그날은 사도 성 마티아 축일이었다. 사제는 마태오 복음 10장 7-13절을 봉독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주어라 .........<중략>그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날의 복음 말씀이 하느님의 계시로 여겨졌다. 성당 건축가이며 은수자였던 프란치스코는 이제 사도가 되었다. 복음 선포자, 곧 회개와 평화의 복음 선포자가 되었다. 그는 성당을 나가서 즉시 신을 벗어 버리고 지팡이도 버렸다. 그는 이제 맨발로 온 세상을 다닐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치 옛날에 사도들이 떠났던 것처럼. 평화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평화를 전해 주러 갈 채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2부
복음 선포자 프란치스코
1. 첫 제자들
“나는 위대한 왕의 사신이다!”. 프란치스코가 1207년 4월 어느 날 수바시오 산의 숲 속에서 도둑들에게 한 대답이다. 이 말은 프란치스코 미래의 표어이며 목표가 되었다. 1년 전에 프란치스코가 그의 집으로 올 때 사람들이 그에게 던지던 조롱과 야유는 주교관에서 재판이 있은 후부터는 사라졌다. 그들은 그의 말을 열심히 들었다. 오히려 존경심을 갖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얼마 후에는 제자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첫 제자는 퀸타빌레의 베르나르도이다.
성직자의 설교에 비해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의 설교는 극히 단순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설교는 세련된 설교라기보다는 권고였다. 그의 말은 기교가 없었으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었다. 그의 설교는 언제나 세 가지 요점으로 귀결되었다. “하느님을 경외하라, 하느님을 사랑하라, 악에서 선으로 돌아오라” 가는 곳마다 그들의 설교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들은 많이 버렸기 때문에 많이 기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어느 전기 작가의 말이다.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형제들에게 인내가 필요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좀 모자라는 사람들로 여겨, 비웃거나 조롱하며 길바닥의 흙을 집어 던졌다. 사람들은 그들의 옷을 빼앗기도 했지만, 그들은 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람들처럼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아, 거의 벌거벗은 채로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형제들은 종종 동굴에서 자거나, 남의 집 현관 입구나 성당 창고에서 자기도 했다.
넓은 길, 세속의 길, 세 가지 욕정이 이끄는 길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육체의 탐욕, 눈의 탐욕, 그리고 세상의 교만은 끝 가는 줄 모르고 날뛰고 있었다. 어디서나 “끊임없이 잘못된 육정의 길”을 막는 일이 프란치스코의 주 업무가 되었다.
전기에 의하면 프란치스코는 이런 일을 하면서 자기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나의 악함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선하심으로 저는 모든 것에 희망을 둡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의 핵심이었다. “나의 아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너의 죄는 다 용서받았다!”. 그는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2. 수도회의 기초들
이제 매일 식사를 해야 할 식구가 적지 않았다. 형제들이 탁발하러 집을 돌면, 아씨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일종의 신비감에서 상당한 애긍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그들을 지겨워했고 친척들도 구박하기 시작하였다. “가진 것을 다 줘 버리더니 이젠 다른 사람들의 것을 얻어먹으러 다니는구나!”.
형제들이 늘어나자 그들은 포르찌운쿨라의 오두막에서 약 20분 거리의 쓰러져 가는 헛간으로 이사했다. 프란치스코가 갈망했던 것은 나자렛 예수가 원하셨던 것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조금 소유하며, 손으로 일하여 벌어먹어야 한다. 일의 보수를 받지 못할 때에는 남의 도움을 받는다. 쓸데없이 걱정을 하지 않고 사치스런 소유를 하지 않는다. 새처럼 자유로워야 하고 세속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아야 한다. 일생 동안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감사하며 산다. 하느님 작품의 아름다움을 보고 찬미의 노래를 부른다.’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써준 1221년 수도규칙의 내용과 권고는 이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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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형제들은 남의 집에서 봉사하거나 일하기 위하여 어느 곳에서든지 감독관이나 관리인이 되지 말아야 하며....오히려 같은 집에 있는 이들보다 더 낮은 사람이 되고 아랫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세우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관상 수도회가 아니다. 프란치스코의 이상은 사도적인 삶이고 사도들의 설교이다.
3. 리보토르토
프란치스코는 로마에 가기 전에 시작했던 선교 활동을 “교황의 힘에 용기를 얻어”계속하였다. 귀도 주교의 허락을 받아 그는 아씨시의 주교좌성당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자신이 먼저 실천하지 않은 것은 결코 권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침이 없었다. 예언자는 그의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옛말은 프란치스코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귀족이나 평민이나, 성직자나 평신도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이끄심에 불이 붙었고, 복된 프란치스코를 따르려 했다”.
성 프란치스코의 첫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리보토르토 움막에서의 형제들의 생활을 그림처럼 묘사하였다. 그가 쓰기를, 형제들은 각자 일을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다시 모이게 되거나 또는 낮에 우연히 만나게 되면, 사랑과 기쁨의 빛이 그들의 눈에서 비쳐 나오고 그들은 서로를 정결한 마음으로 포옹하고, 거룩한 입맞춤과 명랑한 말과 따뜻한 미소, 정다운 눈짓, 평온한 마음을 서로 나누었다. 그들은 이기심을 버렸기 때문에 서로를 도울 생각만 하였고, 그리운 마음으로 집에 빨리 돌아왔으며, 집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기쁨이 가득하였다. 그들에게 분열이란 낯선 단어였다.
이 모든 형제적인 생활의 중심점은 프란치스코였다. 어느 형제도 프란치스코에게 감추는 일이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쳤기에 형제들의 스승이 될 수 있었다. 또 모든 유혹을 영웅적으로 물리쳐야 한다는 가르침의 모범을 보였다. 그는 육욕을 이기기 위해 얼음처럼 찬 강물 속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리보토르토야 말로 프란치스코가 가장 행복했던 첫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의 연인, 가난 부인과 함께 지낸 가장 행복했던 첫 시절이었을 것이다.
4. 포르찌운쿨라와 초기의 제자들
지금도 그대로인 포르찌운쿨라의 작고 오래된 경당은 하나의 긴 방이다.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은 경당 옆에 나뭇가지를 엮어 움막을 하나 지었다. 벽은 진흙을 바르고 지붕은 나뭇가지와 잎으로 엮었다. 짚으로 만든 자루가 침대가 되었고, 땅바닥이 식탁과 의자이며 숲은 수도원 담이 되었다. 이것이 첫 번째로 지은 프란치스칸들의 집이었으며, 프란치스코는 이것이 다른 집들의 모델이라고 강경하게 가르쳤다.
새로 들어온 형제들 중 프란치스코가 ‘원탁의 기사’라고 부른 에지디오 형제에게서 프란치스코의 본래 정신이 생생하게 실현되었고 끝까지 살아 있었다. 에지디오 형제는 죽을 때까지 프란치스코의 이상인 가난, 정결, 기쁨의 덕에 충실하였다.
에지디오 이외에도 겸손한 사람이 된 마리냐노의 맛세오, 루피노,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완전히 이어받은 쥬니페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서기 겸 비서인 레오, 그리고 안젤로 탄크레디, 성인이 하는 대로 뭐든지 따라한 요한 형제, 등 이들이 프란치스코를 따르던 제자들이다.
5. 성녀 클라라와 성 다미아노
남자들은 때때로 이론의 전개에 만족하지만, 실천은 이론을 내놓지 않은 여자들의 몫일 때가 흔히 있다. 여자가 이론의 좋은 점을 깨닫게 되면 어느 남자보다도 훨씬 더 그 이상理想을 충실하게 실천한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여성 제자, 성녀 클라라는 자신을 프란치스코 형제의 작은 나무라 불렀다. 1194년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클라라는 16세 때 성 루피노 성당과 성 죠류죠 성당에서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들었다. 프란치스코를 처음 본 순간 프란치스코의 생활이 자기 생활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곧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반짝이는 드레스를 형제들에게 내어 놓고, 형제들이 입은 거친 양모 겉옷을 받았다. 보석이 박힌 벨트는 매듭이 있는 거친 끈으로 바꾸어 매었다. 프란치스코가 가위로 금발머리를 자르자, 그녀의 높고 빳빳한 모자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맨발에 나무 샌들을 신었다. 그녀는 세 가지 복음적 권고를 서약하고 형제들처럼 프란치스코를 장상으로 모시고 순명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 당시 약혼한 상태인 둘째 동생 아녜스 그리고 셋째 동생인 베아트리체도 수녀원에 입회했다. 클라라의 아버지 파바로네가 죽은 후 어머니 오르톨라나도 딸들의 뒤를 따라 입회했다.
프란치스코가 자매들을 위하여 쓴 생활양식의 거의 모든 구절은 단 몇 가지 요점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복음적 가난의 의무였다. 1215년 프란치스코의 엄명에 의해 클라라가 처음으로 성 다미아노에서 원장 직책을 맡았다.
클라라가 프란치스코 앞에서는 위로와 격려를 바라는 연약한 여인이었지만, 수녀원 안에서는 강인한 여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고 막아주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기사 가문의 출신인 것이 쓸모없지 않았다. 그녀는 엄격한 생활을 했지만 프란치스코와 달리 오래 살았다. 41년의 수도 생활 후 그녀는 60세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의 품 안에서 하늘의 여왕의 빛나는 외투에 싸여 클라라의 영혼은 영원한 영광으로 올라갔다. 숨을 거둔 성녀는 굳어져 가는 두 손 사이에 교황의 칙서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이틀 전에 도착한 것이었다. 클라라와 수녀들이 프란치스코의 이상대로 살 권리를 인정해준 최종적인 인준장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클라라는 작은 정원에 세 가지 꽃만을 심었다고 한다. 곧 백합과 제비꽃과 장미이다. 백합은 순결의 상징 제비꽃은 겸손의 상징, 장미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제3부
하느님 찬미자 프란치스코
1. 새들에게 설교하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와 그녀의 초기 동료 자매들이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조용하고 내적內的인 생활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난 뒤, 자신의 성소에 대해 다시금 의문을 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옛날의 은수자들처럼 완전히 세속을 벗어나 영혼의 행복을 위해서 홀로 지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하는 의문이었다.
프란치스코는 홀로 지내면서 사람들의 칭송을 피하려 했다. 그는 적막 속에서 심한 유혹을 받았다. 때로는 절망에 빠지는 듯도 했다. 마음 안에서는 “구원은 당신같이 자학하는 자를 제외한 사람들의 몫이라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때로는 독신 생활을 포기하고 결혼이나 해버렸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유혹에 맞서기 위해 그는 은수자들이 쓰던 오래된 방법을 취했는데, 예를 들자면 새끼줄로 된 허리띠를 풀어서 벌거벗은 등을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그래도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면 또 다른 방법을 취했다. 움막 밖에 눈이 쌓여 있었는데, 그 눈 속에 반나체로 뛰어 들어가 일곱 개의 눈사람을 만들고 나서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프란치스코! 저기 있는 저 큰 것은 네 아내이고 그 옆에 있는 것은 너의 두 아들과 두 딸이다. 추워 죽을 지경인데 빨리 뭔가를 입혀야지! 할 수 없다고? 그러면 네가 봉사해야 할 분이 하느님 한 분만 계시다는 걸 기쁘게 생각하여라”.
처음부터 십자가는 프란치스코의 모범이었다.
프란치스코가 길가의 나무들을 보니 나무에는 온갖 새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이런 일은 이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나무 아래 땅바닥에도 많은 새들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새들을 보자 프란치스코는 성령을 받아 제자들을 돌아보며 “여기서 좀 기다리십시오. 우리 자매인 새들에게 설교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프란치스코는 땅에 앉은 새들을 향해 들판으로 걸어갔다. 그가 설교를 시작하자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새들도 땅에 내려앉았다. 프란치스코의 옷자락이 새들을 스쳐도 새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 자매인 새들이여! 그대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고 있으니 항상 어디서나 그분을 찬미 찬송해야 합니다! ......<중략>. 내 자매인 새들이여, 은혜를 모르는 자 되지 마십시오. 항상 하느님을 찬미 찬송하십시오!”.
이렇게 설교를 하고 하느님께 대한 찬양을 마친 후 프란치스코는 새들 위로 십자 성호를 그었다. 그러자 모든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면서 경이롭고도 힘차게 날아갔다.
2. 선교여행
새로운 선교 여행을 이탈리아에만 국한하는 것은 프란치스코의 뜻이 아니었다. 프란치스코는 무기가 아닌 복음서를 가지고 십자군에 가담하려 했다. 신자들에게 설교하기보다는 사라센들을 회개시키려는 의도였다. 그의 제3차 선교 여행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로마에서 예전처럼 큰길이나 골목길에서 설교를 했다. 그때 수도회의 장래로 보아 훨씬 더 중요한 일은 한 부인과 맺은 우정이었다. 그녀의 남성적 성격 때문에 나중에 “야고바 형제”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프란치스코와는 1212년에 지인知人 관계를 맺고 있었고, 움브리아 전도자가 다시 로마를 방문했을 때 진실된 우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스팔라토의 토마스에 의하면 프란치스코의 설교는 설교라기보다 실천적이며 도덕적인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권고였다고 한다. 그는 잘못된 것을 보면 침묵하지 않았고, 올바르지 않은 일은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외모는 초라하였지만 그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세례자 요한과 같은 설교자의 면모가 그에게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큰 죄인에게는 끝까지 인자했으나 반대로 선한 사람에게는 엄한 시련을 주었다. 하느님께로부터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 는 그의 제자들에게 값비싼 옷을 입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진 사람들을 단죄하거나 멸시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면 언제든지 저들을 부르십니다.” 하고 말했던 것이다. 그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3. 포르찌운쿨라 전대사
우선 우리가 주목할 일은 로마 교회가 포르찌운쿨라 전대사를 허락하기 전에는 십자가를 들고 십자군에 종군하는 사람들에게만 전대사를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프란치스코가 교황으로부터 얻으려 애썼고, 또한 실제로 얻어 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가지 사료를 보면 프란치스코는 마리냐노의 맛세오 형제를 동반하고 호노리오 교황 앞에 나아가서, 성지로 가는 십자군에 허용한 것과 똑같은 대사를 포르찌운쿨라 성당에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나타난다. 기록에 따르면 “누구든지 자기 죄를 통회하고, 이 성당에 와서 죄를 고백하여 사제로부터 사죄 받은 사람은 영세한 날로부터 이 성당에 들어온 순간까지의 모든 죄와 벌에서 면죄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교황은 어떤 성당에 대해서도 로마 교황청이 그런 대사를 허락한 적이 없다면서 반대했다. 그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이 대사를 얻도록 자기를 보냈다고 말씀드렸다. 하느님의 안배가 있었음인지 교황은 이를 승낙하였다. 이를 근거로 많은 이야기가 생겨났다. 오버벡이 포르찌운쿨라 성당 벽면에 그린 “장미의 전설”도 이에 속한다.
모든 프란치스코 전기 작가들은 그가 얼마나 포르찌운쿨라를 사랑했으며, 얼마나 열정적으로 죄인들의 회개를 원했는지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그는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성당에 몰려오는 환영을 보았다. 작은 포르찌운쿨라 성당, 새로운 성지인 이 성당에서 작은 형제들은 권한을 위임받아 예전에는 십자군 전쟁에 종군한 사람들에게만 베풀던 대사를 이날 베풀었다. 이로써 죄와 벌의 골짜기에서 흐느끼던 통회자와 순례자들을 정결의 성지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총회와 관구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형제들의 공동체는 처음부터 ‘회개자와 사도들’의 수도회였고, 프란치스코 자신이 그 수도회의 원장이었다. 수도회의 규칙을 쓰고, 교황께 순종을 서약한 사람도 프란치스코였으며, 설립할 허락을 받은 것도 그였다. 다른 형제들은 그를 통하여 권한을 받았다.
최초의 형제들이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미리 일정한 날을 택하여 모두 포르찌운쿨라에서 만났다. 나중에는 일 년에 두 번 모이기로 하고 모든 형제들이 포르찌운쿨라에서 만났다. 곧 성령강림 대축일과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 (9월 29일)이다. 이 두 번의 모임은 예로부터 수도원 생활에 사용되어 오던 ‘총회’라는 말로 불렸는데, 그 중 성령 강림 총회가 가장 중요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수도규칙을 잘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토의했다”.
총회의 마지막에 프란치스코는 설교자들을 선발하여 그들을 여러 선교 지역이나 ‘관구’에 파견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복되신 동정녀이시며 천주의 모친이신 마리아를 특별한 신심으로 성모 마리아의 모든 덕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기도를 노래했다.
총회는 처음부터 상호 교육을 위한 모임이었다. 형제회는 다른 조직이 하나도 없었다. 형제회의 발전은 그에 따른 문제점들을 수반했다. 그의 군대 수가 늘어남을 기뻐했으나 그들을 받아들일 장소가 없었다. 생전에 몇 마디 말로 그가 간단히 기록한 형제회의 수도규칙은 수녀들과 기혼자들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프란치스코는 도움의 손길을 찾아 나섰다. 그는 인노첸시오 3세의 조카이며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주교인 우골리노 추기경이었다.
5. 우골리노 추기경
아나니의 백작인 우골리노 추기경은 프란치스코가 처음 만났을 때에는 거의 50세가 다된 노인이었다. 그는 교회에서 교황 다음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예언하기도 했지만, 그가 차기 교황감이라는 것은 예언자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레고리오 9세가 된 후에도 우골리노는 수도회의 진정한 벗이고 은인이었다. 프란치스코는 그를 정신적인 아버지로 삼고 자녀로서의 존경과 순종을 표시했다. 프란치스코가 결코 손상되어서는 안 될 근본 원칙으로 복음적 가난이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우골리노는 그것을 쾌히 승낙했다. 수녀원이 자리 잡고 있는 토지마저 수녀들이 소유하지 않고 교회의 이름으로 우골리노에게 속하는 것으로 했다. 같은 정신에서 프란치스코는 포르찌운쿨라를 소유하지 않고 그 땅을 계속 베네딕토회 소유로 간주하여 해마다 임대료를 지불했다.
클라라회의 생활 규칙 개요는 베네딕토회와 일치한다. 그러나 수녀들은 이 수도규칙에 구속된 것은 아니었다. 클라라 수도규칙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가난에 대한 의무였다.
‘자매들은 집이나 거처, 그 어떠한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가난과 겸손 안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신뢰심을 가지고 동냥하러 보낼 것입니다.’
이 문장 아래에 인노첸시오 교황이 로마 교회의 신성한 인장을 찍었다. 클라라의 눈이 감겨질 즈음이었다.
6. 수도규칙과 권고 말씀
프란치스코가 리보토르토에서 기록한 첫 번째 수도규칙은 아주 짧고 간단했다. 첫 번째 수도규칙의 대부분은 성경에서 인용한 것들을 조합해 놓은 것으로 특히 마태 10,9-10; 19,21;16,24 와 루카 9,3이다. 그래서 ”‘수도규칙’이란 말 대신 ‘거룩한 복음의 양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도규칙을 요약해 보면 그가 원한 것은 복음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 첫 수도규칙은 분실되었고 최근에 이를 복원해 보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리보토르토의 원 수도규칙을 추정해 보면, 서문(프란치스코가 인노첸시오 교황에게 순종을 서약함)과 제1장(세 가지 서원 ; 순종,가난, 정결), 제2장(입회와 의복), 제3장(성무일도와 단식), 제7장(일과 기도의 자세), 제8장과 9장(돈을 받지 말 것과 애긍을 청함), 제12장(여자를 멀리함), 제14장(나쁜 사람들과 여행하거나 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 일), 제19장(사제를 존경하는 일)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가장 바랐던 것은 사람을 감동시켜 하느님을 찾게 하는 일이었다.
7. 프란치스코와 학문
형제회의 최종 수도규칙이 완성되기까지는 2년이 흘렀다. 전 생애를 통해 프란치스코는 스스로를 무식한 사람이라 칭했고,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는 학문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모든 신학자들과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영과 생명을 넣어 주시는 분들로서 받들어 존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학문은 실천적인 목적을 수반해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했다. 따라서 단지 몇 권의 책만 필요했다. 프란치스코 자신은 성경을 즐겨 읽었다. 그는 항상 표양이 최고의 설교라는 하나의 생각으로 일관했다.
그는 수도규칙에서 세 부류의 형제들, 곧 설교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일하는 사람을 인정했다. 그리고 설교하는 사람들을 우선시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든 형제들은 행동으로 설교해야한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를 가장 불쾌하게 만든 것은 내면에 깔려 있는 자아의 허영심을 충족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지식의 남용, 지적 교만, 이기주의였다. 그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지식으로 장식하려는 그 자체를 싫어했다. 주교좌에서 허영심으로 가득 찬 영혼보다는, 깊은 산 속 이름 없는 동굴이나 은수처에서 무릎을 꿇고 동료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영혼이 훨씬 낫다고 보았다.
프란치스코에게 기도와 생활은 그의 형제들이 의지하고 살았던 본질이었다. 그것은 말이나 이론이 아니었다.
8. 학식 있는 회원들과 제3회
프란치스코가 반대했던 학문적 발전은 쉬지 않고 발전의 길만을 달렸다. 작은 형제회도 점점 더 도미니코회처럼 학문을 닦는 형제회가 되었다. 1224년 9월 10일 프란치스칸들이 영국에 건너간 이후 학문적 방향에서 형제회는 더 커다란 자극을 받고 발전했다. 1240년부터 1244년까지 영국인으로서 총봉사자였던 파버샴의 하이몬은 학식이 없는 사람은 형제회의 직책에 임명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제3회, 결혼한 남녀를 위해 창설한 단체, 곧 회개회라 불리는 제3회원들인 형제들의 특성은 성 프란치스코와 그 형제들의 생활양식을 세속 생활에서 본받는 데 있다.
9. 코르토나의 엘리야와 최종 수도규칙
프란치스코와 우골리노가 서로 협력하여 작은 형제회의 수도규칙을 작성한 것처럼 제3회의 수도규칙도 협력하여 작성하였다. 프란치스코가 초안한 수도규칙은 글자 그대로 실행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 장상에 대한 불순종도 허용되며 오히려 순종의 이름으로 마땅히 그러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도규칙이 장상보다 우위에 있으며, 순종 서약은 수도규칙에 하라는 것이지 장상에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골리노는 그런 허락은 형제회를 분열과 파멸로 이끄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후대의 전기에서는 프란치스코와 그 반대자들 간의 싸움을 아름다운 그림처럼 묘사한다.
10. 마지막 로마 방문과 그레쵸 동굴
프란치스코는 교황으로부터 수도규칙을 인가받으려고 1223년에 마지막으로 로마를 방문 했다. 그때 우골리노 추기경이 힘이 되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골고타로 끌려가신 예수님이 연상되어서 끌려가는 양을 풀어 주려고 항상 애썼다. 포르찌운쿨라에서 그는 오랫동안 어린양 한 마리를 길렀는데, 어디든지 따라다녔다. 성당까지 들어와서 우는 그 소리는 형제들의 노래와 한데 어울리는 듯했다고 한다.
1223년 프란치스코는 세상에서 여태껏 볼 수 없던 방법으로 성탄 축일을 지냈다. 그레쵸에 프란치스코의 후원자인 요한 벨리타가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그를 폰테 콜롬보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룩한 성탄 밤을 당신과 함께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내 생각을 들어 보십시오. 수도원 가까운 숲 속에 동굴이 있습니다. 거기에 짚을 가득 담은 구유를 마련해 주십시오. 베들레헴에서처럼 소와 나귀들도 있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얼마나 가난하고 불쌍하게 탄생하셨는가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요한 벨리타는 그의 뜻대로 모든 것을 준비했다. 그리고 성탄 전날 한밤중에 형제들은 크리스마스 축일을 지내러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횃불을 들고 형제들은 촛불을 들고 구유 둘레에 서 있었다. 나무로 뒤덮여 어둡던 곳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미사는 제단으로 사용된 구유 위에서 거행되었다.
그런데 마치 빵과 포도주의 형상에 계신 천상 아기가 육체를 가지고 그곳에 오신 것 같았다. 베들레헴 구유에서와 꼭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요한 벨리타도 한순간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를 본 듯했다. 프란치스코는 앞으로 걸어 나가서 아기 예수를 사랑스럽게 품에 안았다. 아기는 미소 지으며 조그마한 손으로 수염투성이인 프란치스코의 얼굴과 회색 수도복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요한 벨리타는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많은 이들의 마음 가운데에서 죽은 듯 혹은 주무시는 듯 계시지만, 프란치스코는 당신의 말과 표양으로 천상 아기를 소생시켰고 깊은 잠에서 깨워 드렸기 때문이었다. 토마스 첼라노는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구유 곁에 섰다.”고 전한다.
제4부
은수자 프란치스코
1. 작가
프란치스코는 이때부터 임종할 때까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살았다. 하나는 자신의 복음에 따라서 완덕에 이르고 표양으로 형제들에게 바른 길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글을 새로 써서 그가 교황의 인준을 받은 수도규칙에서 원했던 내용들과 또 미처 말하지 못한 내용들을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말년의 대부분을 리에티 계곡에서 보냈다. 이제 그는 인간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되었다. 복음에 기록된 대로 훌륭한 잔치에 초대받았어도, 어떤 이들은 소에 잡혀 있고, 또 어떤 이들은 밭에 잡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전보다도 더 큰 열정으로 산상 설교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프란치스코의 병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하자면, 그의 병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말년에 가서 그는 많은 병고에 시달렸다. 그는 요리한 음식은 잘 먹지 않았고 “재 누이는 정결하다”고 말하며 음식에 재를 뿌리게 했다. 그는 잠도 앉아서 조금만 잤으며 베개는 돌이나 나무토막이었다. 침대는 맨 바위바닥이었다. 20년에 걸친 이런 고행 생활로 그의 육신은 망가졌다. 위장에서는 출혈이 일어났고 눈병이 심해 거의 실명에 가까웠다. 형제들은 자주 성인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믿었다.
이제 그는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고픈 그의 열정을, 편지로써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생의 말기에 다섯 통이나 회람 편지를 보냈다.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형제회에 보낸 편지」, 「성직자들에게 보낸 편지」, 「보호자들에게 보낸 편지」, 「어느 봉사자에게 보낸 편지」 등이다. 여기에 「유언」과 「클라라와 그의 자매들에게 써 보낸 마지막 원의」와 마지막으로 그의 종교적인 「태양 형제의 노래」이다. 또 짧은 자필 편지인 「레오 형제에게 보낸 편지」도 빼놓을 수 없다.
2. 영성생활
프란치스코는 말로만 설교하기보다 행동으로 설교하기를 원하였다.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말과 삶이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이는 리에티에서 보낸 마지막 몇 해의 삶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가난에 전념하였다. 그는 자선을 베푸는 것은 축복받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선을 받는 것도 축복받는 일이라고 선언하였다. 구걸해서 얻은 음식은 ‘천사의 음식’이었다. 탁발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형제는 노래를 부르며 와야 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여우들처럼 동굴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는 그날 먹을 것 이상은 모으지 못하게 하였다. 수도복도 진정으로 가난하게 보이기 위해 옷 여기저기에 낡은 누더기로 꿰매기를 좋아하였다. 프란치스코의 눈에는 거지가 거룩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받으면, 언제나 그것을 자신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안락한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안락한 것을 못 견뎌 했다.
그는 어둠의 세력에 공격을 자주 당했다. 어느 날 저녁, 그가 빈 성당인지 동굴인지 혼자 기도하고 있는데 마치 누가 그의 뒤에 있는 것 같았다. 프란치스코는 숲에서 불어오는 강풍 속에서 여러 갈래의 목소리를 들었다. 악마들이 그를 보고 비웃었다. “프란치스코야, 아무리 해도 쓸데없다. 아무리 네가 기도하고 탄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