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9. 2월 영적도서 : 「본질을 사는 인간」
지은이 : 송봉모신부
예수회 신부. 로마 성서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을 받고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주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에 성서와 인간 시리즈, 성서 인물 시리즈, 요한복음산책 시리즈와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예수-탄생과 어린 시절」,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을 위한 The Lord Calls My Name, Wounds and Forgiveness 등이 있다.
나눔의 글
우리 주변에 훌륭한 가톨릭 성인들도 많이 계시는데 굳이 유명한 스님의 가르침을 자주 인용하는 신자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미사는 겨우 그저 형식적으로 참여하면서 유명하다는 스님들의 강연을 열심히 찾아 듣기까지 합니다. 겉모습만 가톨릭 신자이지 진짜 속내는 불교신자에 더 가깝습니다. 송봉모 신부님도 신학생 시절에 한동안 불교학에 심취한 적이 있었노라고 고백하십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 참 신앙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머리말’에서 송신부님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와 사랑, 행복과 지혜 그리고 자유라는 씨앗만을 파시고 그 씨앗을 키워서 열매를 맺는 책임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합니다.
신앙에 확신이 없어 이리저리 방황하는 신자들에게, 신앙의 씨앗을 키워 나가지 못하고 건조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많은 교우들에게, 「본질을 사는 인간」을 통하여 신부님의 신앙고백처럼 들려주시는 내용을 나눔의 글에 간추려 올립니다.
1.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사는 인간
’우리 종교는 감각적인 종교, 가슴 뜨거워지는 감각적인 종교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또 우리 종교가 체험의 종교, 하느님 체험과 성사聖事 체험의 종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 종교가 만남의 종교, 인격적 만남의 종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내가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예수회에 입회하던 해 신앙생활을 한 지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 전에 첫영성체 교리나 주일학교 교리, 또 이런저런 신앙교육을 받았지만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에 대해서 별로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들었는데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예수회에 입회하여 「예수회 수도생활」 지침서를 읽으면서 난생 처음으로 주님과의 인격적 사랑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인격체이신 주님을 사랑하고 체험하고 만나 뵙는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가능하다.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물이요, 신앙의 응답은 이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대한 인격적 사랑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랑을 맺을 수 없다.
우리 종교가 가슴 뜨거워지는 만남의 종교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주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 애쓰지도, 갈망하지도 않으리라.
나는 예수회에 입회하면서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지만 정작 그 만남을 절실히 갈망하게 된 것은 그 후로도 9년이 지나서였다.
신학생으로서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 나는 수도회의 허락을 받아 불교학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수도회는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해서 불교 공부를 허락했지만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깊이 체험하지 못했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교 세계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불교 사상에 젖다보니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은 물 건너간 셈이 되었고 구도적 관심이나 열정을 성서와 성교회 전통에서가 아니라 불교 세계에서 길어내게 되었다.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면서도 성서나 성인들의 말을 인용하는 대신 불경이나 선사들의 말을 인용했다.
한번은 가르멜 수녀님들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한 수녀님은 강의를 듣고 나서 이런 질책을 했다 “수사님, 성교회 안에 그렇게 성인들이 많은데 어떻게 불교 스님들 이야기만 하십니까? 그러려면 차라리 스님이 되시지 그러세요.”
그러던 나에게 사제서품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부가 되고 나서도 지금처럼 살 것인가? 신부로서 교우들에게 강론할 때 지금처럼 불교 얘기나 할 것인가?’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제서품 기념 상본에 적어 넣을 성서 구절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의 친척들이 그를 붙잡으러 나갔다.”(마르 3,21)라는 말씀을 택했다. 나도 예수에게 미쳐보고 싶어서였다.
서품 날 제대 앞에 엎드려 있는 동안 내내 나는 예수께 미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그 후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성서에 대한 사랑, 주님에 대한 사랑이 용솟음치게 된 것이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우리 인간 편에서 하느님 체험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없다면 주님도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내적 인식을 주실 수 없다.
하인리히 뵐은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신학은 막달라 마리아 같은 정情의 신학”이라고 말한다. 정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은 까딱 잘못하면 감상주의로 빠질 수 있지만 가슴으로 인간의 진실 되고 순수한 모습을 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종교는 본디 만남의 종교, 체험의 종교였다.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모세 · 다윗 · 이사야 · 예레미야 등 구약의 인물들은 하느님과 친밀한 만남을 가졌다. 그들은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아버지와 자녀가 이야기하듯이, 남편과 아내가 이야기하듯이 하느님과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신약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막달라 마리아 · 베드로 · 바오로 · 마리아 · 마르타 · 하혈병에 걸렸던 여인 · 사마리아 여인 · 자캐오 · 실로암 못가의 중풍병자 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했던 이들이다.
이렇게 우리 종교는 감상을 바탕으로 한 체험의 종교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성을 바탕으로 한 교리 중심의 종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신앙의 지성화와 신학의 조직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변질된 것이다. ‘신앙 없이도 신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성 중심의 종교가 된 것이다.
교리를 통해서 하느님과 인격적 만남을 이룬다는 것은 쉽지 않다. “교리를 주입시키는 일은 불에 달군 쇠붙이로 소에다 낙인烙印을 찍는 것과 같다. 그런 낙인은 소가죽에다 표지를 남길 뿐 소의 내면에까지 닿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열렬히 사랑하고,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다.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 성령 기도회나 피정 등을 갔다 온 신자들에게서 비로소 주님을 만났다거나 새롭게 거듭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을 것이다. 세례를 받은 지는 오래 되었지만 이제야 회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앙의 지성화와 신학의 조직화 작업이 낳은 또 하나의 영향은 신앙 체험이 교회 안에서 있는 그대로 표현되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절제되면서 엄숙하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수학자이며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가슴 깊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나서 하느님을 비롯한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라고 단언했다.
하인리히 뵐이 주장한 ‘情의 신학’은 그동안 신앙의 지성화와 신학의 조직화를 통해서 교리 중심으로 흘러왔던 교회가 다시금 영靈의 종교로 되돌아가서 주님과 인격적 사랑을 나누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허하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은총으로 주님을 체험하고 “아, 당신은 정말 제게 뜻 깊은 분이시군요.”라고 말하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구원에 대한 확신 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가.
“영적 체험은 하느님이 주도하는 만남에서 형성되는 파장의 충격으로 인해 응집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충만한 인간이 되는 체험이다.” 이병호 「신앙인의 사색」 1988 에서 인용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를 한마디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불교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줄 수는 있으나 가슴 따스한 체험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종교는 불교와 달리 위격적인 만남이기 때문에 마음 차분함이 아니라 마음 벅참을 선사해 준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깨달음이라면 그리스도교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만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갈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요구이다. 우리에게는 종교적인 본능, 영적인 본능도 있다. 곧 신비에 대한 갈망, 하느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는 것이 그것이다. 신비에 대한 갈망이 충족될 때에 우리는 뜨거운 감동을 맛보게 되고 살맛을 누리게 되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종교 용어로 ‘거듭 난다’는 것이다.
2. 신자의 본질을 사는 인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말해보라고 하면 대개 행위 차원에서 말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라는 식이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은 봉사활동을 강조한다.
물론 이웃을 위한 봉사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웃 사랑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타종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가儒家에서도 그리스도교의 사랑에 해당하는 인仁을 강조하고 있고, 불가佛家에서는 사랑에 상응하는 자비慈悲를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는 행위 차원에서보다는 인격적 관계 차원에서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도, 곧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란 행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에 기초한 것이다.
마태오복음 마지막에 보면 예수께서 구원 사업을 다 마친 뒤 하늘로 오르시기전 열두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 ...”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기에 열두 사도를 비롯한 초대교회 신자들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세상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 결과 지금 우리도 주님의 제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제자 직분의 두 가지 본질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곧 제자 직분의 본질이다. 구체적으로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는지 분명하게 알려주는 성서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는 열둘을 뽑아 사도(apostoloi, 파견받은 자)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이것은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귀를 쫒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주님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에서이고, 두 번째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여 복음을 전하고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 곁에 (함께) 있는 자’는 제자를 가리키는 또 다른 말이다. 한편 요한복음 저자는 제자를 ‘주님과 함께 머무는 자’로 표현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과 항구하게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이하생략(요한 15,4-8)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만으로 함께 있는 내적 일치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함께 있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예수님과 함께하는 구체적 자리,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구체적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소명은 내적 침묵과 고독, 명상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불러주신 것은 우리를 파견하여 복음을 전하고 봉사활동을 하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만 그분의 파견 명령을 알아들을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다면 언제 주님이 우리를 파견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직접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든(복음 전파와 봉사활동) 간접적으로 참여하든(자녀 양육과 생업) 제자 직분의 본질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3. 함께 있음과 파견 받아 활동함
두 가지 제자 직분 곧 ‘주님과 함께 있음’과 ‘주님으로부터 파견 받아 활동함’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첫째 직분이 언제나 둘째 직분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함께 있음’에서 파견이 오기 때문이다. 주님과 일치가 이루어져야 주님으로부터 봉사활동에 필요한 힘과 권위를 받아서 나아갈 수 있다. 주님과 일치가 없는 파견은 제대로 된 파견이 아니며 파견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한 파견은 스스로 파견된 것에 불과하다.
나웬(Henry Nouwen)에 따르면 먼저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으로부터 파견 받아 활동하기 위해서는 ‘비즉응성非卽應性, unavilability’이 필요하다. 비즉응성이란 사도직 요구(복음 전파와 봉사활동)가 들어왔을 때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는 것이다.
나웬은 사도직 활동이 아무리 하느님 나라 건설에 관련된 것이라 해도 즉시 응답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대신 그 요구를 주님 앞에 갖고 가서 아뢰어야 한다. 만약 무슨 부탁이든 그때그때 즉각적으로 응답한다면 하느님의 일을 내 일로 만들어 버리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비즉응성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제자직의 두 가지 본질 즉 ‘주님과 함께 있음’과 ‘주님이 파견해서 활동하게 함’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살고 있다. 나웬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하느님과 성령께서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더욱 적어질 것이다.”
비즉응성의 원칙을 가장 모범적으로 살아가신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하느님께 파견 받아 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는 자주 조용한 곳으로 물러나시어 하느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지셨다. 자주 외딴 곳으로 물러가시어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찾았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신 예수께서는 먼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있기 위하여 비즉응성을 사셨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비즉응성을 살아야 한다.
비즉응성을 살아가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첫째, 만약 비즉응성을 살아가지 않는 다면 우리는 파견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칭 파견된 사람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둘째, 비즉응성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내적 상태는 무질서함과 피곤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사도직 수행에 필요한 힘과 권위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주님과 함께 고독 속에 머물며 그러한 힘과 권위를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의 소명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4. 파견받은 자가 되기 위한 비즉응성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 꼭 해야만 하는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 주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먼저 주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부탁받은 일이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인지 아닌지를 분별한다. 그는 주님의 뜻이 기도 안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비즉응성은 우리를 하느님 뜻에 따라 파견 받는 자로 만들어 준다.
헨리 나웬은 비즉응성을 살아가지 못하고 정신없이 복음 전파와 봉사활동에 몰두하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구원 도착증倒錯症에 걸린 사람’이라고 평한다. 구세주 콤플렉스savior complex에 걸린 사람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병에 걸린 사람은 모임이란 모임에는 다 나가 한 말씀하고, 자기를 필요로 하면 즉시 뛰어간다. 아무리 몸이 피곤하더라도 아무리 정신이 지쳐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언뜻 보면 그는 파견 받은 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구원 도착증倒錯症이란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조차도 당신 생애 동안 온 세상을 다 개종시켜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서 모든 자리, 모든 모임에 참석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팔레스티나에서만 활동 하셨다. 온 세상의 구원은 성령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이루시도록 남겨 놓으셨다.
구원도착증에 걸린 사람은 신부, 수녀 등 일선 사목자뿐 아니라 종종 열심한 평신도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구원 도착증에 걸린 사람들은 순수한 봉사 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지 않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기에 복음이 분주함 속에 숨 막혀 죽어버리고, 남은 것은 사업가 정신뿐인 경우가 많다. 예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활동하기보다는 일 중심, 이해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자칭 파견된 사람’은 무엇인가를 할 때 확신을 갖고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면 쉽게 낙담하고 무너진다. 사도직을 수행하는 힘이 하느님 능력이 아니라 자기 능력에서 오기에 어려움이 생기면 극복할 힘이 없는 것이다.
파견된 사람은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안다. 세례자 요한은 파견된 사람의 태도를 누구보다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파견 받은 사람은 주님께서 그에게 허락해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해서 할 뿐이다. 어느 누가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갖추었다면 그 능력 역시 주님을 위해 크게 봉사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천지창조를 작곡한 뛰어난 음악적 소양을 갖고 있던 하이든은 파견 받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매번 작곡할 때마다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고 한다.
“하느님! 당신이 저에게 지혜를 주시어 제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작품이어야 합니다. 저는 제가 만든 음악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아 파견된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에 최선을 다할 뿐 그 무엇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대중의 인기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사부師父 이냐시오 성인의 봉헌기도가 나 자신의 기도가 되도록 훈련받아 왔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시에 증거 할 수는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잘났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것을 동시에 말할 수 없다.
파견 받은 사람은 자신의 수고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 수고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자기의 수고가 언제나 주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지 판별할 줄 아는 능력뿐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파견 소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던 사람이다. 세례자 요한의 말 -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에서 우리는 파견 받은 자의 자유로움을 본다. (시기와 질투, 쓸쓸함과 초라함, 그리고 상실감과 우울감에서)
5. 영적 힘의 재충전을 위한 비즉응성
제자직의 첫 번째 본질,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결여된 채 계속해서 제자직의 두 번째 본질 곧 봉사활동에만 바쁘다면 우리 영적 상태는 머지않아 황폐한 뜰처럼 될 것이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뛰어다닐 때 육신의 피곤은 물론 내적 무질서 · 영적 공허감 · 좌절감 · 원망 · 상처 · 열정의 상실 등이 오는 것이다.
진이 빠졌다는 것은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는 영적 힘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가리킨다. 진이 빠졌을 때는 반드시 쉬면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도록 해야 한다. 영적 차원에서 산후 조리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비즉응성은 영적 산후 몸조리를 하는 시간이다.
나는 피정이나 강연이 끝난 후에 가능한 한 빨리 회복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예를 들면 강연 후 있는 인사치레용 축하식에는 참석하지 않는다든가, 주일날 본당에서 활동한 경우에는 월요일 오전 동안은 전화도 받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고 홀로 내적 고독 속에 머물면서 운동도 하고 기도하는 시간도 갖는다.
영적 힘이 고갈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편하지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곤하고 짜증스런 모습으로 변해간다. 쉬지 않고 활동은 하지만 툭하면 화를 내고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 ‘활동에 지쳐서 살아가는 자’처럼 되어버린다.
봉사활동이 끝나면 즉시 고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영적 파탄 상태를 면하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거닐며 내면의 영적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이다.
모든 교회 봉사활동에는 주님과 함께하는 개인적 기도의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야 한다. 기도 - 활동 - 기도 - 활동이란 고리가 지어져야 한다. 기도를 함으로써 봉사활동을 하면서 갖게 된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모으고 일에 치중하면서 갖게 된 인욕人慾이나 갈등의 요소들을 분별하고 반성하게 된다.
맺음말
그리스도교와 신자 됨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하기위해서 무척 중요하다. 교회마다 냉담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이라 해도, 은혜로 주어진 신앙의 씨앗을 잘 키워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은 드물다. 주님과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면서 제자가 되어 살아가는 이들도 드물다. 잘 먹고 잘 사는 현세적 축복, 이른바 기복 신앙 무속 신앙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신자 됨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는 것은 알찬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스도교는 가슴 뜨겁게 주님을 만나는 인격적 사랑의 종교요, 신자가 된다는 것은 사랑으로 불러주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아 세상으로 나아가는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깊이 알고, 열렬히 사랑하고, 충실히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승이 되신 그분의 바람은
단순합니다.
그분을 닮는 것입니다.
그분의 눈길을 닮고
그분의 기운을 닮고
그분의 마음을 닮고
그분의 발걸음을 닮는 것입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입니다.
스승의 길은 바로 제자의 길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