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8. 2월 영적도서 : 「나그네 생각」
지은이 : 김현
1976년 4월 출생. 2000년 부산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여 2006년 사제 서품. 2008년 이탈리아 Institutum Patristicum Augustinianum로 유학(교부학 이수)하였고 2013년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석사)을 전공. 천주교부산교구 울산대리구 청소년 사목담당, 오순절평화의 마을 부원장, 금정성당 부주임신부를 거쳐 현재 언양성당 협력사목 주임신 부로 사목활동 중.
나눔의 글
詩와 같은 수필집 「나그네 생각」을 읽노라면 어느새 울창한 숲에서 노래하는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평온함이 스며듭니다.
지친 일상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 우리를 진공상태와도 같은 잠심潛心으로 조용히 인도하는 「나그네 생각」입니다.
지나치기 아쉬운 맑고 아름다운 감성 · 지성 · 영성, 몇몇 단상斷想을 나눔의 글에 옮겨 봅니다.
밤의 커튼
하느님께서는 가버린 날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못하게
밤의 커튼을 내리시는가 봅니다.
매일의 아침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에서
또 다른 새로움을 향해
힘차게 출발해 보렵니다.
왜냐면 인간은 실존을 살아가는
존재자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남은 밤
자연의 시간을 거스르는 불빛에 홀로 잠들지 못하고
외로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구나.
빈 수레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설프게 찬 수레만이 요란할 뿐입니다.
채워지지 않은 결핍 때문에,
비워낼 수 없는 욕심 때문에
요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보시는 분입니다(1사무 16,7)
이처럼 말로써 우리의 결핍을
덮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처음의 고요함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완전히 채우든지
완전히 비워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처럼 쉽지만은 않겠지만
묵묵히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거울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고 고요할 때,
비로소 세상을 담고 비출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삶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프랑스 시인이자 비평가
폴 발레리의 말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며 생각하고 계획한 것들이
하나 둘 ‘게으름’에 의해 무너져갈 때,
문득 이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하루에 한 번은 자연과 교감하자’는
결심을 실천하고자 나른한 오후,
무조건 길을 나섭니다.
그 길 위에서 변화하는 자연을 느낍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이 상대성의 절정은 바로 ‘시간’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밤과 낮으로 구분된 반복된 흐름을 24개의 간격으로 분할해서 그것을 ‘1일’, ‘하루’라고 부르기로 여러 사람들이 정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일 것 같은 이 시간도 결국은 시간을 체감하는 사람의 상태와 환경에 따라 상대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연인과 보내는 한 시간과, 철책선의 군인이 느끼는 한 시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절대적일 것 같은 모든 것도 어쩌면 상대적일 수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분명히 기억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임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걷는다
속도와 전쟁을 치르듯 달리던 뜀박질을 멈추고,
들숨 날숨 박자에 맞춰 천천히 걸어봅니다.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던 풍경들이
선명하게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영혼의 쉼터, 숲
숲길을 걸으며,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게 묻습니다.
바람은 모든 답은 제 안에 있다고 합니다.
살아간다는 것
참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살 것인가?
참 좋은 시절을 즐기며 살 것인가?
참 좋을 것 같은 시간을 준비하며 살 것인가?
고민하다 세월만 다 흘러갑니다.
철이 든다는 것과 세상에 길들여진다는 것
비오는 월요일 ,
조그만 시골 도서관 앞에 앉아 있으니
까까머리 학창시절 생각이 많이 납니다.
‘세상에 길들여지는 것’과
‘철이 든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그 차이를 잊고 ‘길들여지기’에만
매진하고 살아온 듯합니다.
평안하냐
마음의 평안과 기쁨은 생각의 전환에서 시작됩니다.
창밖으로 바라본 세상은 갇힌 걸까요? 가둔 걸까요?
“평안하냐?“(마태 28,9)
괜찮아
한 발짝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만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자니,
모두가 안타까운 사연뿐입니다.
세상이 그들을 힘들게 만든 것인지,
그저 각자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친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괜찮아...... .
이 말이 조금이나마 그들에게 위로와 평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정 표현으로 사회적 자본 쌓기
‘감정’은 가면으로 둘러싸인 우리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소통의 언어’입니다.
소통의 언어를 잘 이해할 때,
이상적 사회의 기초인 ‘신뢰의 관계망’,
즉 ‘사회적 자본’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고
진솔하게 표현하며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분 좋은 상상을 해 봅니다.
인내천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을까요?”라고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묻습니다.
이 물음에서 아타나시우스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사람도 하느님처럼 되기 위함이다”라고
우리에게 이미 알려주었습니다.
즉, 참사람, 참된 인간의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이자,
하느님 그 자체입니다.
바로 ‘인내천人乃天’입니다.
푸른 소나무
자존심의 꽃이 떨어져야 인격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내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상대의 반응에
민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지인의 말씀이 오늘의 화두가 됩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푸른 소나무가 떠오르는 날입니다.
중독
‘나’라는 주체를 잃어버리고 살 만큼,
지금까지 무엇에 중독되어 살아왔던 것일까요?
이제 저를 구속하고 옭아매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습니다.
외로움과 고독
외로움은 고통이지만
고독은 즐거움입니다.
누군가
“지금 그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외로움과 그리움
외로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리움의 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죽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그리움에 사무치지만,
‘죽음’이라는 강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추억
‘지금’ 이 시간들이 ‘추억’으로 기억될 때까지,
우리는 이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단지 ‘지금’을 즐기고만 있을 뿐,
이 시간이 ‘추억’이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17주기를 맞은 어느 죽음을 애도하며...... .
하여가
수많은 진실은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억측과 상상 속에
각색되고 왜곡되어 잊혀 버립니다.
하지만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마태 10,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이미
과거의 잊혀버린 일, 관심 밖의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이방원의 ‘하여가’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의 흠결을 들추고 심판하려는 그대여,
지혜롭고 슬기롭지 못한 그대의 ‘정의론’으로
다른 이를 단죄하려 하기보다는,
마음을 거울삼아 자신을 먼저 돌아볼 수 있길 바랍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을 요셉 성인 역시 고발하지 않았을까요?
판단하지 마세요
‘관계의 고리’에 얽히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대방을 판단하기도 하고,
상대방에 의해 판단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판단하는 상대방은 누구입니까?
그 판단의 상대방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내가 판단하는 대상은 남이 되지만,
동시에 그 사람에게 있어서의 판단 대상은
바로 그를 판단하고 있는 나(我)이기 때문입니다.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 2,1)
따라서 판단의 대상은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거룩함과 더러움
더러움을 감싸 안을 때,
가장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연꽃과 예수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움이 수려해서 가볍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향기로움은 깊습니다.
예수는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시장에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비난과 질타 속에서도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고,
의로움이 물결처럼 흘러넘치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그는 우리 가운데 먹보요, 술꾼이 되었습니다.
지어내신 분
이 세상 안에서 당신에 대한 증거를 물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당신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 세상 전부가 당신이었다는 것을...... .
당신은 바로 저를 지어내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천국
‘지금’, ‘여기’에서
하늘나라를 살아내지 못한다면,
천국에서의 삶을 꿈꿀 수 있을까요?
주저하지 말고 실행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족보(마태오 복음 1장 참조)가 알려주듯,
예수님의 모습 안엔 수많은 사람들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만나고 스쳐 지나쳤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위로와 안식, 활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각자의 모습 속에 하느님의 모습이
하나씩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럼 제가 가진 하느님의 모습은 뭘까요?
제 곁을 스쳐 지난 모든 이들에게
비타민과 같은 상쾌한 활력이 전해졌기를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모습
사람만이 하느님의 모상이 아닙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사람과 자연계의 구성원을 모두 합칠 때,
비로소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고 가치 없는 것이 없겠지요?
하느님의 선물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이제는 동행이 되어갑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가진 것을 나누고,
먼 길을 ‘처음처럼’ 함께 걷기 위해 지혜를 담은 책을 나눕니다.
같은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만나니,
이제 받은 만큼 돌려줄 차례가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길에서 주어진 선물입니다.
화해
화해는 상처의 망각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추억될 뿐입니다.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예수의 탄생이
한 해의 끝자락에 자리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안거
스님들이 여름 내내 자신을 돌아보며 하안거를 하듯,
지나 온 삶의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고요와 평온을 누릴 수 있었고,
꿈꾸던 늘 푸른 소나무의 삶처럼,
뿌리를 굳게 내린 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나 봅니다.
여린 샛바람에도 하염없이 흔들리는
제 모습을 다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 안의 이기심과 욕심, 시기, 질투, 집착 등이
저의 자리를 빼앗아,
잎새 바람에도 뿌리째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처럼,
비움과 포기의 삶이 곧 채움의 삶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나그네적 삶
본당 신부를 라틴말로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나그네가 되기 위해 선택한 이 길,
메이고 얽히고 묶여 버려서 떠나지 못하고 돌아볼까 두려워,
오늘도 길을 나섭니다.
강론
강론은 사제의 철저한 신앙 고백문이며, 철학입니다.
사제의 강론은 강론대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자기 성찰과 고민,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춧돌 위에서,
‘신학’과 ‘철학’이라는 블록들로 이루어진 단단하고도 아름다운 구조의 결정체입니다.
강론 중의 한 구절만을 따로 떼어서 그것을 식별하고 평가하는 것은, 남천 성당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하나를 따로 떼어 성당 전체를 논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 안셀무스의 기도
오, 주 저의 하느님,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당신을 찾을 수 있는지,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당신을 발견할 수 있는지,
저의 마음을 가르치소서.
오 주님,
당신은 제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만드셨고 또 다시 만드셨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당신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만들어진 목적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찾도록 저를 가르치소서.
당신이 가르치지 않으시면
저는 당신을 찾을 수 없고
당신이 저에게 보여주지 않으시면
저는 당신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열망 안에서 당신을 찾게 하소서.
저의 탐구 안에서 당신을 갈망하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당신을 발견하게 하소서.
제가 당신을 발견할 때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세마 성당 2018. 2월 영적도서 : 「나그네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