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8. 3월 영적도서 : 「수용의 기적 두 번째 탄생」
지은이 : 콘래드 W.바스(1919-1981)
· 콘래드 W. 바스 박사는 네덜란드계 미국인으로 1946년부터 미국에서 정신 의학 분야에서 일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과 암스테르담 의과 대학에서 수학했다. 저서로 「Feeling and Healing Your Emotions」, 「I Will Give Them a New Heart: Reflections on the Priesthood and the Renewal of the Church」 등이 있다.
옮긴이 :
ㆍ김인호 신부
대전교구 사제(2003년 수품)로 이탈리아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음. 대전 삼성동 본당 주임 신부를 거쳐 현재 대전 가톨릭대학교 교수.
ㆍ장미희
충남대학교 영어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University of East London에서 상담 및 심리 치료 석사 학위를 받음
나눔의 글
존재하는 모든 선善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존재 자체나 행동에서 거기에 내포된 善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행복을 찾으려면 우선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how-to-be에 관한 책 또는 한 존재가 되어가는 방식how-to-become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개방적 태도’ 중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실용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문화에서는 애정 결핍 장애 증후군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람이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을 경험 할 때 비로소 행복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끝없이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평온한 상태에 머무르며, 수용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많은 불행에 대한 진정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가식적인 모습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본래 자기 모습(善)을 보여주며 서로가 서로에게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진실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장 당신은 있는 그대로 수용 받는 사람인가?
애정결핍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인정받아 본 적이 없는 애정 결핍 장애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장애이며 매우 다양하고 극심한 고통과 불행의 주요 원인으로 서구 사회에서는 그 발생률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인간의 소외와 인구의 제로 성장은 수용의 결핍이 가져오는 현상 중 하나이다. 애정 결핍 장애를 가진 부모는 애정 결핍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양육해 내며, 이들은 가족, 공동체, 지역 사회, 국가, 세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양극화 현상을 초래한다.
보통 사람들의 통찰 :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 사람들 곧 상식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이러한 현상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나라와 세상의 궁극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는 수용의 결핍의 악순환을 중단하고, 이미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미래 세대에 이 악순환을 물려주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전문가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다음은 이 장애의 다양한 증상들이다.
1) 사람들과 일반적인 관계, 친밀한 관계, 진정으로 사랑하는 혼인 관계 등을 형성하는 능력의 결핍
애정 결핍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도 이해받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느낀다.
2) 불확실감과 불안감
애정 결핍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종종 개인적인 사안들에 관하여 결정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 반면, 본질적으로 완전히 일과 관련된 사안들에 관하여 결정하는 데 거의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 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하므로 의미가 애매한 말이나 가벼운 무시에도 사람들이 자신의 편을 들지 않는다고 느낄 정도로 쉽게 상처를 입는다.
3) 열등감과 부적절감
불안감은 애정 결핍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자주 실패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들의 열등감을 키우는 데 한몫을 한다.
지적 능력과 관련된 강한 열등감은 자신이 학업에서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또는 실제로 그렇지 않을 때에도 시험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칼 융은 심리 치료사들에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간단한 문제처럼 여길 수 있지만,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문제가 바로 이러한 간단한 문제들이다. 현실의 삶에서 단순하고 솔직한 태도를 갖는 것은 그 자체로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예술이며,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도덕적 문제의 뿌리와 삶의 모든 철학의 중심에 놓여있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걸인에게 자선을 베풀고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것에 의심을 품어 본 적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형제들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걸인들 중 가장 가난한 사람, 잘못한 이들 중 가장 잘못한 사람, 심지어 원수조차 사실은 모두가 내 안에 살고 있으며, 따라서 나의 친절한 자산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며, 사랑받아야할 원수도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때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그런 때가 오면 나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진리가 송두리째 뒤집히는 것을 경험 할 것이다. 더 이상 사랑과 인내에 관하여 관심을 갖지 않게 될 것이고, 내 안에 있는 형제 곧 나 자신을 ‘쓸모없는 놈’이라고 부르고 자신을 단죄하고, 자신에게 분노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숨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숨겨도 내가 내 안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내면에서 하찮고 경멸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닭이 한 번 울기도 전에 그를 천 번 부인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4) 깊어지는 우울감
있는 그대로 사랑받거나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주장을 잘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차 있는데 이러한 삶의 방식은 그들의 외로움을 점점 더 크게 만든다. 그들에게는 친한 친구도 힘센 원수도 없다.
인간은 생리학적 탄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행복한 인간 존재의 뿌리에는 언제나 정신적 탄생인 수용이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행복하려면 누군가가 나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나도 타인을 그렇게 보아줄 필요가 있다.
2장 있는 그대로 수용받는다는 것
수용은 한 사람의 선함과 사랑스러움을 드러내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법이다.
수용은 행동이 아니라 존재에 관한 것이다. 많은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수용은 실제 행동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진정한 수용은 무엇보다도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과 수용을 의미하며, 이차적으로만 언어 또는 행동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다양화된 현대의 심리 치료 및 상담 현장에서 진정한 수용을 충분히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을 쓰는 이유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세상에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2) 대개의 불행은 인간이 자초한 것이다.
3)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4)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
5) 있는 그대로 수용 받지 못한 사람의 수가 매우 많다.
6) 심지어 정신 의학 전문가들도 애정 결핍의 장애의 본질과 새로운 유형의 신경증의 발생 건수에 관하여 대체로 잘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어떻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수용의 원천이 되었고,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행복의 원천이 되었는지에 대한 통찰을 더해 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수용 받는 것, 곧 두 번째 탄생 또는 정신적 탄생은 자신이 갇혀 있는 외로운 감옥의 문을 열어 주고, 얼마나 늦었는지에 상관없이 자신의 안이나 주변에 있는 모든 선에서 기쁨을 찾게 해 줄 것이다.
개방적 태도
존재하는 모든 선善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존재 자체나 행동에서 거기에 내포된 善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행복을 찾으려면 우선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how-to-be에 관한 책 또는 한 존재가 되어가는 방식how-to-become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행복은 의지의 선택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과도하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숨을 쉬려고 과도하게 애를 쓰는 것만큼 건강에 좋지 않다. 우리가 행복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오히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줄 준비가 되어 있는 행복을 단절시킬 수 있다.
수용의 과정
행복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다. 자기 자신을 선하고 가치 있고 바람직하고 사랑스럽다고 여긴다면 인간은 견고하고 강한 존재로 서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인 견고함을 지니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주는 수용af-firm-ation이라는 선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선물을 어려서 받으면 받을수록 그 사람 안에서 형성되는 견고함과 강인함은 그가 세상에 더 빨리 대처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자신의 힘을 세상을 위해 사용하고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도록 해 준다.
1) 당신이 할 수 있는 선하고 가치 있는 행동들을 자신에게 내재된 고유한 선과 가치에서 분리할 수 있는 사람, 곧 당신의 가치 있는 행동보다 이미 내재한 존재적 가치를 먼저 인식하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머물 수 있는 사람
2) 당신을 소유하거나 이용하거나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으면서 당신의 선함과 가치에 감동하고, 이끌리고, 거기서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
3)당신으로 인해 감동하고 당신에게 이끌린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그러한 감동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을 편안해하는 사람 곧 가시적 · 감각적 · 신체적 변화 등 정신 운동 반응으로 드러나는 것을 편안해 하는 사람.
이렇게 당신은 다른 사람을 통하여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느끼고 깨닫게 된다. ‘깨달음, 감동, 드러냄’은 상대방에 대한 수용의 본질이다.
아주 어린 아기는 자신을 위한 사심 없는 사랑과 엄마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한 소유적인 사랑의 차이를 실제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기는 이러한 차이를 인간이 겪는 모든 상황에 반드시 포함된 시각적 · 감각적 신체 변화들을 위해서만 감지하고 느낄 수 있다.
수용이라는 선물
수용은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하거나 요구하거나, 수용을 사려거나 속임수로 얻으려고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어렸을 때 수용 받지 못했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수용 받기를 소망하고, 수용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자신의 선과 소중한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을 친절하게 수용해 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 선하며, 그것이 당신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이 세상에 당신과 똑 같은 사람은 없다. 당신은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진정한 수용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깨달음 곧 ‘내가 지금의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사랑스럽다고 여겨진다면 불완전함을 극복한 나는 얼마나 더 사랑스러울까!’라는 무의식적인 깨달음이 한 사람을 성장의 기회로 초대한다.
내가 수용을 통하여 주는 선물은 상대방이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반영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특별하고 고유한 정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
소통과 친교
소통할 때 우리는 물질적 소유물 또는 생각 감정과 같은 심리적 경험 등 우리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존재 자체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소통할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을 통하여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이러한 수용의 과정을 통하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를 드러내고 그것을 나눔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다. 우정을 통하여 친구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친구 자신이다.
이 책을 계속 읽다 보면, 나의 행복을 완성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을 선물로 받는 것이며, 이 선물을 받고 난 후에야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한 또 다른 선물인 다른 사람과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 질 것이다.
3장 수용의 반대
존재 자체로 수용 받지 못한 사람들의 수는 수백만 명에 이르며 그 수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반적인 방식이 수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시사한다.
부정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인정이나 수용보다 부정을 선택하는 쪽이 훨씬 쉬운 것 같다. 결점을 지적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상대방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것은 상대방을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부정은 미성숙하고 불안정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수용 받지 못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악마에게 기꺼이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기고 스스로 지옥을 선택한 괴테의 작품 파우스트가 그를 찾아온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누구냐고 묻자 그는 “나는 항상 부정하는 영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와 같이 부정은 인간의 정신적 죽음의 원인이다. 부정은 상대방을 멀리 밀어내게 하므로 우리와 상대방 사이의 간격은 점점 더 크게 벌어지게 된다.
수용 받지 못한 사람은 상대방에게 좋은 점이 많이 있어도 부족함과 결점만을 부각하여 그들을 하찮게 여긴다. 수용은 다른 사람에게 진정으로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며, 그 사람의 정신적 육화의 원천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크든 작든, 어떤 공동체가 이렇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수용적 공동체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는 변함없는 기준은 바로 그 공동체의 다양성이다. 다양성이 있는 공동체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양한 피부색 · 나이 · 종교적 신념 · 인종 · 정치적 성향 등을 초월하여 진정성 있는 상호 존중과 수용을 받기 때문에 참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양극화
부정이 만연한 공동체들은 양극화 현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양극화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형태의 부정에서 비롯된다.
1) 자기 수용self-affirmation을 통하여 부정하기
2)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부정하기
a. 무시하기
b. 결점에 주의 기울이기
c. 하찮게 여기기, 험담하기, 악의적인 소문 퍼뜨리기
d. 부당하고 부적절하게 비판하기
e. 고마워하지 않기
f. 당신을 필요로 할 때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응답하지 않기
g. 상대방이 울음이나 화 또는 다른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h. 불신하기, 캐묻기, 점검하기, 몰래 감시하기
3) 대인 관계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쓰며 부정하기
(어떤 관계에서든 사실 사람은 상대방을 수용하거나 부정한다. 그 중간
어디쯤은 없다!)
4) 거짓 수용
a. 건성으로 어깨 두드리기, 피상적으로 칭찬하기.
b. 상대방의 감정을 몰라 준채 서둘러 격려하기
c. 주의 깊게 경청하지 않고 부적절하게 너무 빨리 충고하기
d.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기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당신이 절대 알지 못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에게서 장차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대할 기회를 박탈한다면, 나는 당신의 선함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당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고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e. 젊은 사람들에 대한 방임적 행동. 이러한 태도는 대부분 거짓 수용에 불과하다. 무분별한 허용적 태도는 연장자들의 합리적인 가르침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필요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f. 단기적인 효율성을 가진 다양한 테크닉들을 사용하여 참가자들의 억압된 정서 또는 발달이 지체된 정서를 속성으로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감수성 훈련 집단, 주말 치유 프로그램,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들이 제공하는 수용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거짓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g. 통솔하는 사람이 통솔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심 없이 자신의 행동 기준을 강요하는 가부장주의, 식민주의, 권위주의도 거짓 수용이다.
h. 도덕적 기준과 교훈을 하향 조정하는 것이 사람들을 더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해준다는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그렇게 시행하기. (이것은 걸어 보려고 애쓰면서 비틀거리고 넘어지는 아이를 계속 넘어지도록 격려하는 것과도 같다. 이때 아이는 일어서서 걷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I. 상대방에 대한 완전히 비이기적이고 진심 어린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사랑의 ‘치료적’제스처는 진정한 수용이 아니다.
수용 받지 못한 사람 특히 애정 결핍 장애가 있는 사람의 치유는 절대로 어떤 테크닉이나 방법들, 어른인 척 하는 상담자의 거짓 수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주로 근본적으로 진정으로 수용 받은 경험이 있는 성숙한 상담자의 진정성 있는 수용으로 이루어진다!
4장 수용 받은 사람의 초상
교황 23세 안젤로 론칼리를 직접 만난 사람들은 그분 앞에 있으면 판단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분은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고 항상 개방적이며 사심 없이 겸손하고 평온하고 여유로웠으며 자기 절제에 능했다. 그분에게는 행복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러한 자질들은 수용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직접적인 결과 인데, 성장하면서 더욱 향상하거나 쇠퇴하기도 한다.
섬세한 감수성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능력을 자극하고 성장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많은 다양한 감각적 대상들을 일찍 경험할 필요가 있다.
아이의 감수성이 발달하면서, 아이는 사물과 사람에 내재한 선을 알아보고 그러한 선에 대한 갈망을 느끼면서, 선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하는 아이의 능력도 더욱 발달한다. 요한 23세 교황의 경우와 같이 이러한 감수성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표정과 내적 외적 태도에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프레데릭 프랑크는 이렇게 말했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나는 가면을 쓰지 않은 완전히 살아 있는 얼굴, 모든 위대함을 갖춘, 거짓과 가식의 흔적이 없는 인간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이토록 완전히 아름다움을 가진 영혼을 만난 것은 바로 교황 요한 23세로 더 잘 알려진 안젤로 론칼리 교황의 얼굴을 보았을 때이다.”
개방성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개방성은 수용 받은 사람에게서 직접 나타나는 결과이다. 수용은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는 선물이다.
수용 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존재 방식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온전히 집중할 수 있고 참된 자아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몸과 정신과 감각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들에 매료되고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개방적인 존재 방식으로 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지 어떤 기대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개방성openness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열린 마음가짐’open-mindedness이라는 개념보다 훨씬 더 폭넓으며, 다음과 같은 태도로 폐쇄되거나 역전될 수 있다.
1) 자기중심적 태도
수용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갇혀 있는 외로운 감옥의 문이 외부에서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이 된다.
2) 우리 또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내재한 선에 대하여 개방적이 되고 그래서 두려움 없이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마음으로부터 믿고 신뢰해야 한다.)
3) 목적 달성과 야망의 실현을 위한 쉼 없는 노력
평온하고 여유로운 삶의 방식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존재 방식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자기 자신을 온화하고 친절하게 대하도록 해주고, 자신에게 먹고 쉴 시간을 허용해 주고, 밤에는 물론 낮에도 조용히 머물게 해 준다.
침묵과 함께 고요함은 경청의 필수 요소이다. 고요한 사람만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들을 수 있고, 고요함만이 상대방이 드러내는 것을 감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이지 않은 태도와 겸손
여유 있고 개방적이며 감수성이 섬세하고 잘 통합된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선함이 가면 아래 숨겨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 진정으로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은 상대방의 고유성에 대한 겸손한 존경심과 경이감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상대방의 고유성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온전하고 사랑스럽고 존경받을 만한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교황 요한 23세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도덕적 자기 절제
수용적인 사람은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주지 않으며, 상대방이 줄 수 없거나 할 수 없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도덕적 규범에 반하는 것은 어떤 행동이든지 절제한다.
수용적인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람에게서 발견한 기쁨을 표현할 때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큼만 한다. 이것이 사랑의 가장 높은 수준인 절제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절제하는 사랑은 감정의 억압이라는 오해를 너무나 자주 받아 왔다. 실은 절제하지 않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수용하는 사람의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손하고 보호하고 돌보는 사랑으로 집을 짓는 아버지의 사랑과 같다.
5장 무익한 자기 수용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의 아버지는 고아였다. 그는 권위적인 인물이었고 걸핏하면 화를 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히틀러는 마마보이였다. 엄마는 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히틀러는 부적절하게 수용을 받은 아이였다.
히틀러에게는 애정 결핍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행동적 표상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내면의 외로움, 열등감,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어떻게 대처하고 보상했는지 그의 행적으로 알 수 있다.
히틀러는 스스로 담배와 술을 끊고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알아서 육식을 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여러 전투에서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보고를 받을 때면 그것이 지휘관인 자신의 실수 때문인데도 “그것이 병사의 본분이다!”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떨쳐 버렸다.
이렇게 히틀러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시도했던 자기 수용의 노력은 결국 헛된 것이었으며 그러한 시도는 그 자신과 그의 조국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음이 증명되었다.
마릴린 몬로
히틀러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돌진했던 수용 받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그냥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는 편이 더 쉬울 수 있다. 똑같이 수용 받지 못했지만 히틀러와 반대의 경우가 노마 진 베이커인데,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마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9살이 되던 해에 노마는 고아원으로 끌려갔다.
먼로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수용이었다. 살면서 그녀가 누군가에게, 특히 부모와 같은 존재에게 진정한 수용을 받은 경험이 있었더라면 그녀를 성적 상징으로만 보거나 착취하거나 깎아내리려고 한 사람들에게서 받는 영향을 상쇄하고도 남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거나 거짓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에게서 먼로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었더라면, 그들이 일관성 있고 진정성 있게 수용해 주었더라면, 그것은 먼로가 자신을 찾는 데 필요했던 유일무이한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와 마릴린 먼로는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고 자신은 소중하지 않으며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느꼈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고, 두 사람 모두 그 모든 고통을 없애 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얻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존경과 두려움을 가져온 히틀러의 엄청난 권력도 먼로의 수많은 팬들과 그녀의 치명적인 아름다움도 마음의 고통을 없애 주지는 못했다. 그들 자신이라는 선물은 오직 그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고 받아들여주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자신을 죽이기 전에 다른 많은 사람을 죽였고, 먼로는 누구도 해치지 않았지만 자살로 자기 자신을 해쳤다.
이러한 것이 바로 수용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 수용을 추구할 때 생기는 비극이다. 이들이 지향하는 방식으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고통을 제거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1) 이웃이 시기할 정도로 물질적 재산을 축적해도, 백만장자가 되어도 소용이 없다.
2) 학문적으로 성공하여 학계에서 과시할 수 있어도 내적인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3) 사업 · 직업 · 성소聖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도 마찬가지이다.
4) 국가적 · 국제적 명성을 얻어도 수용의 결핍으로 인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5) 정치 · 권력 ·독재 등에서 다른 사람에게 힘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어도 내적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일반 수도자와 지도적 지위에 있는 수도자, 교사와 교수들)
6) 동성 관계든 이성 관계든 성적으로 문란한 행동을 해도 그대로 수용 받지 못한 데서 오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6장 애정 결핍에서 수용으로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행동에 앞서 항상 사람 자체가 존재한다. 특히 어릴 때는 대부분의 경우에 감정이 행동보다 앞선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행동하기 전에 차츰 더 감정이 생각과 통합되어야 한다.
다음은 수용 받지 못했을 때 집중해야 할 것들이다.
1) 당신 자신이 되는 것
이것은 자신의 감정과 의견에 정직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면을 쓴 자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결국 당신은 당신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니 이제는 아주 철저히 진정성 있게 자기 자신이 되도록 용기를 내어 보자. 그러면 당신은 진정한 당신 자신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는 자유와 다른 사람의 선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는 자유뿐 아니라, 그 사람을 수용할지 또는 심지어 수용하지 않을지에 대한 자유까지도 얻게 될 것이다.
2) 감정을 숨기거나 억압하는 것을 멈추는 용기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감정을 즉각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에는 두려워했던 감정들에 대하여 일단 편안하게 느끼게 되면 그 감정들을 표현하는 실험을 할 준비가 된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방법들보다 훨씬 더 많은 방법으로 각각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부정적이거나 나쁜 감정은 없다. 모든 감정은 좋은 것이다. 감정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특정 감정들을 느끼거나 느끼지 않으려고 선택할 수 없다.
감정은 동력이라는 것으로 감정이 존재하는 이유는 당신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곧 손발의 근육이나 말하고 쓰는 것과 관련된 근육들에 자극을 주기 위해서다.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감정과 행동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둘은 두려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과 의지로 연결되어야 한다. 감정은 도덕적 판단 영역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감정을 억압하거나 충분히 사용하지 않는 주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감정에 대한 두려움이므로 다음과 같이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다른 사람의 감정을 다치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매달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는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된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가져본 적이 없는 거짓 그리스도적 덕목일 뿐이다. 그분은 사람들의 감정을 다치게 할지라도 항상 알고 계신 것을 말씀하시고 실천하셨다.
우선 ‘상처를 입었다.’라고 말할 때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화가 났다.’는 것임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라는 감정을 습관적으로 상처를 입은 것으로 표현하게 되고, 그렇게 하는 한 당신은 ‘맞아서 쓰러지고, 무기력하게 마비되어, 누군가가 와서 구해 주기를 기다리는 자아상’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상처를 입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지배를 받고, 이 두려움에 근거한 결정을 하는 삶의 방식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화를 낼까 봐 두려워한다. 존재 자체로서 사랑받아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화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사랑이 배제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고유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유지 · 보존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쓰지 말고, 때로는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염려하지 말고, 서서히 성장 발전하는 자신의 이성과 상식의 지도를 받는 감정이라는 동력에 의존하자.
4) 자기 주장하는 법 배우기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위험하게 사는 것’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공격과 자기주장의 올바른 차이점을 이해한다면, 자기주장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먼저 미움과 사랑, 화와 용기와 같은 모든 감정들에 대하여 편안해지는 법을 배우고, 그 다음에는 장기간에 걸쳐 그러한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이성과 의지와 상호 작용을 하도록 많은 기회를 마련한다. 그러면 비로소 당신은 자신이 느끼는 화를 보여 줄지 말지, 또 보여 준다면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연습과 용기 그리고 악순환을 깰 단호함이다.
그 원인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화와 관련된 모든 감정은 이성의 지도를 받아 행동으로 표현되기 전에, 당사자에 의해 충분히 느껴지고 받아들여지고 존중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화의 원인을 어떻게 가장 효율적으로 다룰 것인지 선택하는 이성이 그 기능을 제대로 그리고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다.
5)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는 안 된다. (물론 이미 완전히 성숙하고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 주려 하고,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평화를 유지 하려고 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은 여하튼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고 애쓰느라고, 모든 감정을 편안하게 느끼는 방법 그리고 자기주장을 하는 방법을 배우고 연습하는데 훨씬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크게 낭비하게 된다.
6) 사람들을 깎아 내리거나 불필요한 비판으로 자신이 더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애쓰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에 대하여 친절한 말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습관적으로 악의적이거나 무시하는 말을 하지 말고 진정성 없는 수용이나 도움을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상투적으로 “울지 마세요.”라고 하거나 누군가가 칭찬해 줄 때 “아,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하거나 누군가가 감사할 때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라고 하지 않는다.)
수용 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 왔어도, 수용과 관련하여 자신과 사회를 위하여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부정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7) 선을 찾아내려고 항상 섬세하게 살핀다.
우리는 비수용적인 또는 부정하는 방식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대신에, 사람들 안에서 선이 아무리 잘 숨겨져 있어도 찾아낼 수 있다! 찾아내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그 사람에게 보여준다! 그렇게 하는데 전문가가 되도록 노력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며 또 해야 한다.
8) 자기 자신이 아무 쓸모도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멈춘다.
그 생각은 부모나 어린 시절에 자신에게 중요했던 사람들에게서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드는 것이다. 당신이 선하지 않거나 가치가 없는 존재여서 그들이 당신을 그렇게 대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멈춰라.
9) 아무하고나 성관계를 갖는 것으로 진정한 수용을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지 말라.
본질적으로 성관계는 이기적인 이유에 기반을 둔다. 절제를 하지 않는 것은 이기주의의 단면이며 기존의 도덕규범에 대한 무시일 뿐 아니라, 모든 행복의 상호 수용에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 자기 절제적인 사랑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기쁨이다.
10) 자신의 선하고 소중함을 자기 자신과 세상에 증명해 보이기 위해 애쓰는 것을 멈춘다.
다른 사람들만이 당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해 줄 수 있다! 다른 사람들만이 당신에게 당신을 선물해 줄 수 있다. 수용적인 사람이 그렇게 하도록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다음과 같이 기다리는 것이다.
11) 인내하며 여유 있게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은 겉보기에만 어른들의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당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당신의 고유한 삶을 살면서, 용기 있게 당신 본연의 모습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당신이 수용 받지 못했다고 해서 당신이 사회의 안녕과 행복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당신의 개방성 없이는 수용적인 사람의 사랑도 소용이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용하는 사람은 수용 받는 사람에게 의존한다! 즉 수용이란 문제에 관한 한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주체인 동시에 객체가 된다!
12)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자
자신 안에 있는 어린아이 같은 느낌들을 관대하게 대하자. 그들은 거기에 있을 권리가 있고, 이미 훌쩍 커버린 당신의 다른 부분들을 따라잡기 위하여 그 안에 머물며 성장할 권리가 있다.
7장 수용
- 우리 시대의 기적 -
다음은 이탈리아의 조각가 자코모 만추(1908~1991)가 경험한 것으로 우리 시대의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빛났던 교황 요한 23세의 수용적 영성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인간이 악에 취약한 경향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그분은 보여주었다. 그분은 피부색이나 계급, 종교 등에 상관없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세상이 사랑으로 다스려진다면 어떤 모습일지 잠깐이지만 보여 주었다.”
수용하시는 그리스도
그중 한 분이신 그리스도는 ‘수용 받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의 완벽한 모델이다. 그리스도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다. 그리스도는 시몬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배반할 것을 아셨지만, 그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나약한 면이 있는 그를 자애롭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그리스도는 마을 사람들에게 평판이 나빴던 마리아 막달레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셨다. 그리스도는 세관장 자캐오도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돌려보낸 아이들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수용하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시면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치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유다가 입맞춤으로 당신을 배반하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는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하고 말씀 하셨다. 그분은 그런 순간에도 단죄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한 토마스에게 나타나 의심하는 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신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마르타가 동생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 혼자 모든 시중을 들게 하는 것에 대하여 불평 했을 때 그리스도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루카 10,41-42)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물가에서 유다인들이 상종하지 않던 사마리아 여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다.(요한 4,7-18참조) 예수님은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라고 말씀하셨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대하여는 그녀의 상대적인 선함에 초점을 맞추심으로써 수용해 주셨다(요한 8,7-11참조).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느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은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도둑이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그리스도께 청하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호숫가에서 아침을 드신 다음에 그리스도는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 하시며 그가 당신을 수용해 줄 것을 청하셨다(요한 21,15-18 참조).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수용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성경에 등장하는 수용에 대한 첫 번째 예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매일 저녁 ‘보시니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하신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네 차례 있는 그대로 수용하셨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이다(마태 3,16-17 참조).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의 선언이다.
두 번째는 타보르 산에서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가르치는 역할을 인정해 주셨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세 번째는 겟세마니아에서이다(루카 22,39-46 참조). 예수님 가까이 죽음이 왔을 때 어떤 사람도 고뇌에 싸인 그분을 필요한 만큼, 있는 그대로 수용해 드릴 수 없었다. 제자들이 잠든 이유가 그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천사의 위로를 받으셨다. 이 위로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받는 고통의 목적이 선을 위한 것임을 확인받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당신 아들에 대한 마지막 최고의 수용은 바로 부활이었다.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새 생명을 얻으셨고, 인류에게는 진정한 생명 곧 구원의 문이 열렸다.
간디와 카스투르바이
이제 ‘수용 받고 수용하는’사람이었음이 틀림없는 두 명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이 장을 마무리한다. 그것은 성자를 의미하는 흰두교 민족주의자 정신적 지도자 간디( 1869~1948)와 그와 60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그의 아내 카스투르바이에 관한 이야기다.
“저는 당신의 삶의 동반자이자 배우자가 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자제력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감사드립니다. 평생 인도를 위해 일하면서도 저를 동등하게 여겨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 다른 많은 나라에서는 남편이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때 종종 그 아내는 버려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괴로워한다는데, 세월이 흘러 당신이 인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가 되었는데도 제게는 그런 두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수용 받고 수용하는’ 우리 시대의 또 한분의 아름다운 사람, 마더 데레사 수녀가 콜카타의 죽어가는 극빈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영감을 얻은 원천이 카스투르바이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