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8. 4월 영적도서 : 「사순 길잡이 내면의 샘」
지은이 : 안셀름 그륀
1945년 독일 뢴 융커하우젠에서 태어나 1964년 뷔르츠부르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차흐 대수도원에 들어갔다. 1965년부터 1974년까지 성 오틸리엔과 성 안셀모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뉘른베르크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뮌스터슈바르차흐 대수도원의 재정 관리자로 일했다. 현재는 피정 지도와 영성 지도, 강연과 저술을 주로 하고 있다. 그는 지역과 종교를 뛰어넘어 많은 독자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우리 시대 최고의 영성 작가다.
옮긴이 : 김선태 주교
1989년 사제품을 받고 전주교구 전동성당과 둔율동성당 보좌신부로 사목했으며, 1997년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교에서 기초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주 가톨릭신학원에서 강의했고 솔내성당, 화산동성당, 연지동성당, 삼천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냈다. 2017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전주교구장 주교로 임명 받았다.옮긴 책에 「하늘은 땅에서 열린다」「안셀름 그륀의 희망 메시지」「물고기 뱃속의 지혜」「DOCAT 무엇을 해야 합니까」「내 삶을 가꾸는 50가지 방법」「위기는 선물이다」「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사랑을 그리는 숨은 꽃, 데레사」「예수 생명의 문」「예수 자유의 길」「함께 울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등이 있다.
나눔의 글
사순 시기는 외적 자극을 줄이고 단순하게 살며 일상에서 당연하다고 여긴 많은 것을 포기함으로써 일정한 욕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익히는 수련 시기라고 합니다.
「내면의 샘」은 단식을 통한 영적 훈련과 실제적인 연습들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내적 원천, 내면의 샘을 재발견하도록 이끌어 주며 치유하는 시간, 내적 자유를 수련하는 시간, 정화하는 시간, 영성을 쇄신하는 사순 기간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1부 단식에 대하여
단식은 교회에서 처음으로 생각한 건 아니다. 오히려 유다교에서 실천하는 단식과 그리스 로마 세계의 표상을 받아들여 계속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곤경과 참회는 유다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유다인에게 곤경은 늘 하느님께 불순종했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유다인은 단식하며 하느님께 돌아가길 원했다. 요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며 참된 단식을 요구하였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요엘 2,12-13
이사야 예언자는 당시에 두루 퍼져있던 단식 관행을 비판한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 58,5-7
이사야 예언자는 단식을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항상 새로워지길 요구한다. 진정한 단식은 우리 마음을 열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서게 한다.
산상 설교는 그리스도인이 단식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하는 단식은 바리사이가 하는 단식과 달라야 한다. 바리사이는 단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 보이기 위해서 기쁜 얼굴로 단식한다. 마태 6,16-18
성경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분은 바리사이들에게 단식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과 기쁨을 나누신다. 사람들이 그분을 먹보요 술꾼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루카7,34 그분의 제자들도 바리사이와 요한의 제자들처럼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혼인 잔치에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9,15
단식은 분명 슬픔의 표시이나 예수님과 함께 구원과 기쁨의 시간을 누리는 제자들은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초대교회가 기대한 단식의 세 가지 효과는 다음과 같다.
육신과 영혼의 치료제
첫째 효과는 육신과 영혼의 치유다. 이는 사람이 많은 음식을 섭취하는 동시에 악의 세력도 받아들인다는 당시의 견해와 관련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단식 규정은 사탄의 전염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견해는 특히 민간요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식으로 치유를 기대하던 병은 무엇보다도 염증과 관련된 병, 류머티즘, 감기 등이었다. 악몽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 철학은 단식으로 질병과 악마의 영향에서 보호를 받을 뿐 아니라 정신의 정화, 내적 만족, 자유와 행복 등을 기대했다. 이 교육은 단식을 삶의 목적과 관련지어 바라보았다. 예를 들어 견유학파가 추구하는 삶의 목적은 자족自足이다. 곧 실존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욕구를 포기하는 능력으로 단식은 이 목적에 이르는 방법이다. 그리고 스토아학파의 최상 목적은 내적 자유에서 오는 행복, 말하자면 감정과 비이성적인 동기로 흐릿해지지 않고 이성적 삶에서 기인하는 행복eudaimonia이다.
스토아학파에서도 넓은 영역을 차지하는 단식은 내적 자유, 이성에 따른 삶을 훈련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 철학에서 중요한 교육은 항상 인간 전체, 그 궁극적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
힌두교, 불교, 도교와 같은 위대한 종교들도 이와 비슷한 단식의 동기를 알고 있다. 이슬람은 단식 기간인 라마단에 단식의 고유한 전통을 발전시켰다.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내적 정화의 길이며, 하느님과 신적 능력에 자기 마음을 개방하는 길이다. 교부들도 고대 철학교육의 전통을 이어 받아 육신과 영혼에 미치는 단식의 긍정적 효과를 강조했다. 교부들에게 결정적인 것은 육신적 효능이 아니라 영적인 효과다. 단식은 잘못된 생각을 몰아내고, 정신이 더 분명해지는 명료성을 선사한다.
영혼의 유혹에 맞서는 투쟁
초기 수도승(4-6세기)은 단식의 영적 효능을 격정에 대항하는 투쟁에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단식을 하며 격정에 사로잡힌다. 가끔은 음식으로 분노를 가라앉히는데, 분노를 막는 이런 도구를 포기할 때 자신의 감정을 직면한다. 그러면 이 감정을 하느님께 내맡겨 정화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
수도승에게 영적 여정의 목적은 마음의 정화다. 단식은 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단식으로 자신의 참된 모습을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유혹사화는 단식이 격정과 악습에 대항하는 투쟁임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단식하신 후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이는 세 가지 근본적인 유혹으로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것이다.
첫째,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이다. 이는 우리가 배고픔을 즉시 잠재우라는 유혹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고대에서 돌은 거룩한 것이었다. 거룩한 것은 소비할 수 없다. 거룩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거룩한 것은 존중해야 하나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자신의 영성을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이다. 이것도 현대 사회에서 받는 유혹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많은 종교 지도자에 의해 영성도 상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영성이 지능을 높이고, 인간의 발전을 이끄는 지도자로 높여주고, 자아를 확장하는 것으로 판매되고 있다.
셋째, 권력을 갖고 부를 추구하려는 유혹이다. 우리는 큰 권력과 성공으로 재산을 더 늘리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많은 그리스도교 집단에서 널리 알려진 성공 이데올로기는 이런 권력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성공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이다. 단식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라고 초대한다.
기도에 집중하도록 도와줌
초대교회에서 단식과 기도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단식을 하면서 기도는 강화된다. 특히 두 가지 관점에서 그렇다. 먼저 단식으로 어떤 사람을 위한 기도를 깊이 할 수 있다. 큰 곤경에 처할 때나 누군가를 위해 집중적인 기도를 해야 할 때면 단식하면서 기도했다.
단식으로 내 무기력을 고백한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음을 고백한다.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신뢰하기 위해 단식 중에 의식적으로 내 몸을 약하게 한다. 따라서 기도하면서 하는 단식은 육신과 영혼으로 하느님을 향해 도와달라고 외치는 소리다. 진실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을 때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단식은 지속적인 기도이며 몸과 영혼으로 드리는 기도다. 단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기도해 주는 상대를 위해 존재 전체로 진력한다.
단식은 기도에도 효과가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단식하며 깨어서 온전히 하느님께 열려있다. 2세기 교부 테르톨리아노는 단식을 타보르산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와 연결한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40일 동안이나 시나이산에서 단식한 모세와 비교한다. 모세는 단식의 결과로 얼굴이 빛났다. 엘리야는 40일 동안 단식한 다음 호렙산 위에서 들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하느님을 체험했다. 단식의 목적은 거룩한 변모, 빛 안에서의 변화, 빛을 통해 하느님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기에 단식은 신비적 의미가 있다. 테르툴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증언하신 것처럼, 영원하신 하느님이 결코 굶주리는 일이 없으시면, 인간이 하느님을 닮게 되는 그때는 양식이 없어도 사는 때가 될 것이다. 「단식에 대해」,531
테르툴리아노는 예언자 한나를 실례로 들어 “자주 단식하는 사람보다 그리스도를 더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295-373)는 단식을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에 이르는 길로 이해한다. 천사는 이미 그런 관계 안에 있다.
단식은 천사의 삶, 곧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긴 자를 천사의 나라에서 살도록 하는 삶이다.
단식으로 우리 육신은 영적으로 높아지고 배 속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식은 수도승들에게 가혹한 맛이 아니라 그들을 천국 문 앞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단식은 성령의 기쁨을 통하여, 영적인 일에 관한 사랑을 통하여 영향을 받는다. 교부 필로세네스 폰 맙북은 단식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실제로 체험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2부 사순 제 1주간
단식
나는 사순 시기를 단식요법으로 시작하는데 개인적으로 유익한 수련이다. 단식 요법에 참가한 40명은 5일 동안 단식과 침묵을 한다. 함께 단식하는 것은 유익하다. 왜냐하면 혼자서 단식을 끝까지 하려면 많은 규칙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단식을 하는 영적 관점에 항상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서 단식하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내용이 충만한 주제로 단식요법을 제시한다. 단식에 잘 어울리는 주제는 이집트 탈출, 엘리야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주 등 여정 중에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이집트 탈출만 소개하고 싶다.
첫째 날 이집트에서 탈출하다
① 단식 중에 우리는 종속의 땅인 이집트에서 빠져나온다. 이집트는 안락한 삶을 충분히 보장해 주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내 자유를 다른 사람에게 판 곳이다. 나는 무엇에 종속되어 있는가?
② 최고 능률을 올리도록 나를 재촉하는 현장 감독은 누구인가? 나는 단지 현장 감독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유, 진리, 순수함을 어딘가에 팔고 있지는 않는가? 나에게 현장 감독은 자신들의 기대치를 나에게 지나치게 요구하는 외부의 현장 감독인가? 아니면 주변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며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내 안에 완벽주의라는 현장 감독인가?
둘째 날 홍해를 건너다
이집트 탈출은 홍해와 광야를 지나 이루어진다. 이때 이집트에서 억압받은 많은 일이 떠오른다.
① 새로운 것이 두렵고 낯선 자유와 무의식이 두려운가? 용기 내는 것이 두려우며 내 길을 가는 것이 무서운가?
② 우리는 하느님께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너무 적게 주시고, 진리를 피할 수 없는 광야로 인도하신다고 하느님께 반란을 일으킨다. 나는 내 실제 모습을 쉽게 피하려 하는가? 모세가 하느님께 반항하고 운명에 반항하고 고집 센 백성과 함께한 것처럼, 나도 함께 살아야하고 함께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반항하지는 않는가?
③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울부짖는다. 나에게도 그런 점이 있는가? 해결 방안을 찾기보다 계속 투덜거리고 있지는 않는가?
셋째 날 쓴 물을 만나다
① 자유와 참된 삶을 향하는 여정에서 괴로움과 완고함, 원한을 품은 감정, 가끔 몸에서 표출되는 내적인 경직성 등을 만난다. 모세는 하느님께 청하여 쓴 물을 단 물로 만들었다. 탈출 15,22-25 괴로움을 느끼는가? 기도로 괴로움을 하느님께 내맡기도록 노력해보자.
② 얼마 지나지 않아 백성은 다시 목이 말라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치자 물이 그곳에서 터져 나왔다. 탈출 17,1-7 바위는 우리 안에 있는 완고함과 경직성을 의미한다. 그대는 인정이 없는가? 상대방에게 가혹한 반응을 보이는가? 스스로 자신을 혹독하거나 무자비하게 대하는가? 그대 안에서 다시 샘솟는 물이 나온다면, 어떤 느낌이겠는가?
넷째 날 아말렉족과 만나다-중재
① 이스라엘 백성은 아말렉족에게 괴롭힘을 당한다.탈출 17,8-16우리를 훼방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신 존재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초자아의 목소리가 나타난다.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 영성적인 삶을 살려고 마음을 먹자마자, 그대의 반대편에 서는 자는 누구인가?
② 모세는 백성을 위해 기도한다. 그가 손을 들어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겼다. 집중적으로 기도하며, 그대의 내적 · 외적인 적에게 기회를 주지 말고 그대가 승리할 것임을 상상하라.
③ 모세는 백성을 대신하여 기도한다. 오늘은 모세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특히 내적 · 외적으로 억눌린 사람을 위해 의식적으로 기도하자. 단식하며 기도해 주고 싶은 사람이 떠오르는가?
다섯째 날 모세가 산 위에서 거룩하게 변모하다
① 모세는 40일 동안 하느님의 산 호렙에 머물렀다. 산 위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다음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났다.탈출34장 단식을 하면서 무엇이 밝아졌는가? 무엇이 더 명료해졌는가?
②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의 영광이 나에게 투과되는 것을 뜻한다. 단식을 하면서 거룩한 변모 같은 예감이 드는가?
③ 깊은 고요에 이르도록 노력하라. 그곳에 하느님이 당신의 빛과 사랑으로 머무신다. 그리고 걱정, 계획, 생각, 문제, 자기 단죄와 내적 독촉 등 모든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곳이라고 상상하라. 그렇기에 그대는 그대 안에서 제일 편하다.
묵상 마태 6,1-18
산상설교를 통해 예수님은 단식의 의미를 알려주신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해, 특히 신심 깊은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자선을 베푸는 것을 아주 위험하게 보신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3-4
예수님은 자선과 단식이 내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보신다. 순수한 외적 행위, 말하자면 절약하여 남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단식을 사람들과 이루는 연대로 이해하신다. 나는 단식을 하며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이 처한 곤경을 느끼려 한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6,6
신심의 셋째 형태로서 예수께서는 단식을 거론하신다. 단식은 남이 모르게 해야 한다. 단식을 하면서 자신을 정화하고 더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식을 내적 자유와 기쁨에 이르는 길로 말씀하신다.
3부 사순 제 2주간
정화
물리적인 단식은 육신의 정화에 도움을 준다. 의학에서는 이 사실을 새롭게 발견했다. 사순 시기는 모든 것이 정화되는 기간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집안에 있는 많은 물건을 치움으로써 시작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정화다. 영혼을 정화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첫째, 내 생각과 느낌을 관찰한다. 자주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가?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가? 분노, 시기, 질투, 복수, 증오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가?
정화는 내 감정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께서 당신의 영을 이런 감정에 스며들게 해주시도록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또는 이런 감정을 향해 ‘예수기도’를 바침으로써 정화가 이루어진다.
둘째, 걷기나 달리기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고요를 찾는데 이로써 우리 안에 있는 탁한 것이 깨끗해진다.
셋째, 내 감정 깊숙이 들어가 영혼의 밑바닥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묵상 중에 내 안으로 들어가서, 있을 수 있는 모든 감정과 맞서는 것을 상상한다. 이때 감정 깊숙이 들어가 영혼의 밑바닥에 다다른다. 그곳이 바로 고요한 공간이다. 거기에서 나는 순수하고 깨끗하다.
넷째, 잠깐 동안 부정적인 감정들과 격정을 바라보고 그것을 붙잡아 몸 밖으로 내던진다. 감정들, 오물, 더러운 퇴적물 등을 몸 밖으로 내던져 결국 그것에서 해방되는 것을 상상한다. 이것은 베네딕토 성인이 우리에게 권유한 방법이다.
묵상 : 마태 17,1-19
사순 제2주일에는 거룩한 변모에 관한 복음을 듣는다. 주제는 정화, 순화, 거룩한 변모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다. 이것은 사순 시기에 대한 아름다운 형상이다. 일상의 무거운 걸음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일부러 내야한다. 우리는 산 위에서 하느님과 가까이 있을 수 있으며 산 위에서 거룩한 변모가 일어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마태 17,2
기도는 정화와 순화, 거룩한 변모의 길이다.
4부 사순 제 3주간
수련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면에서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거나 얽매여 있음을 발견한다. 각자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습관, 종속, 중독이 있다. 사순 시기는 내적 자유에 이르는 수련 시기다. 나는 이 시기 동안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포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고유한 내적 자유를 명확히 드러낼 수 있다.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승들에게 사순시기에 무언가 특별한 것을 계획하라고 권고한다. 우리가 포기할 수 있는 작은 일은 많다. 나는 작은 것을 포기함으로써 내 습관들과 마주하며 내적인 자유를 느낀다.
많은 사람은 포기하는 것이 부정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강한 자아를 발전시키지 못한다.”
모든 욕망이 즉시 잠잠해져야 자유로울 수 있다면 인간은 결코 내적 자유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묵상1 : 코린 9,24-27
운동선수는 훈련으로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그리스 철학자들은 정신적 고행으로 격정을 길들이고 생각과 충동을 지배하는 훈련을 한다.
훈련의 목적은 자기 통제와 내적 자유다. 사순 시기에 하는 수련은 삶의 참된 목표의식을 갖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달리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5부 사순 제 4주간
언어
사순 시기의 중요한 계획 가운데 하나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유념하고 의식적으로 언어를 훈련하는 일이다. 초기 수도승은 육신의 단식을 언어의 단식에까지 적용하는 것에 큰 가치를 두었다. 언어의 단식이란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험담하고 그들의 잘못을 퍼뜨린다면 단식은 의미가 없다. 내가 끊임없이 어떤 사람에 대한 말을 한다면 결국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억압하고 있는 바람과 잘못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 말하더라도 참견하지 않으며 그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잘못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이 달라져서 남을 평가하지 않고 더욱 존중하는 순수한 모습이 될 때 내 주변과 사회의 일부분이 변한다. 이 주간에 하는 유익한 훈련은 말하기보다는 이야기하는 것, 잡담이 아니라 대화를 하도록 의식하는 것이다.
묵상 : 마태 7,1-5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행동을 평가하는 것을 끊임없이 들으셨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7,1-2
나 자신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그럴 때 비로소 그 사람 안에 있는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6부 사순 제 5주간 기도와 연민
기도
그리스도교 전통은 단식과 기도의 결합을 항상 일상에 적용했다. 베네딕토 성인은 사순 시기에는 평소보다 더 많이 기도하라고 수도승들에게 권고했다.
눈물을 흘리며 하는 기도는 매우 감정적인 기도, 하느님을 실제로 만나는 기도를 뜻한다. 내 고유한 모습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을 바라볼 때 눈물이 흐른다. 그럴 때 내 마음에는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차고 눈물은 영혼을 정화한다.
수도승이 하는 수행 중 둘째 적용 사항은 다음과 같다. 주변에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자. 그런 다음 그를 위해 평소보다 음식을 적게 먹고 날마다 기도하는 계획을 세운다. 또는 의식적으로 일주일 중 하루를 단식하고 그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면 기도 안에서 그와 내적으로 결합하여 있음을 느낄 것이다.
묵상 : 루카 11,5-13
예수님은 우리가 이 주간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조언하신다. 다음 두 가지 상징어로 기도의 신비를 설명하신다.첫째 상징어는 친구다. 한밤중에 어떤 사람에게 손님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손님에게 줄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자기 친구에게 찾아가 문을 두드린다. 문이 잠긴 상태고 가족 모두 잠자리에 들었어도 그는 일어나서 벗이 청하는 빵을 건네준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친구에 비유하신다. 기도 중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기도하는 것은 친구를 찾아 간 것과 같다. 친구는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분 앞에서 나는 있는 그대로 있다.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둘째 상징어는 아버지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루카 11,11-13
여기서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중재기도를 말씀하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무언가를 청한다면 그분은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 성령은 힘과 에너지며, 사랑과 따뜻함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해 주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도하는 우리에게도 성령을 주신다.
연민
예수님은 단식과 자선이 관련 있다고 하셨다. 자선이란 내가 단식하여 절약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 · 육적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이런 태도를 자비와 연민으로 묘사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는 일곱 가지 육적 자비 활동과 일곱 가지 영적 활동이 있다. 자비는 지향만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루카는 자비를 우리가 하느님 가까이 가도록 해주는 태도라고 확신한다. 하느님의 뜻은 자비와 사랑, 자기 자신에 대해 아파하는 인간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다. 그대가 자비의 이런 관점을 묵상한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나는 주변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가? 연민을 드러내는가? 방문해야 할 병자가 있는가? 상처받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묵상 : 마르 1,40-45
마르코는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치유해 달라고 청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전한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간청에 연민 어린 마음으로 반응하신다. 그런 다음 손을 내밀어 그를 고쳐주신다.
이 치유 이야기는 당신이 주변에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민감하도록 이끈다. 당신이 그를 받아들이기 이전에는 그가 완전해 질 수 없다.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려주면 된다.
7부 성주간
우리와 함께 걷는 예수님
성주간은 특별히 예수님 수난에 집중하도록 당신을 초대한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수난에 전념하는 일을 꺼리는데 그런 전념이 자신의 기분을 아래로 끌어내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중세의 수난 신비주의에서 예수님 수난에 몰두 하는 것은 예수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은 예수님 수난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내가 일부러 고통을 찾지 않아도 고통이 내게 덮친다.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은 누구신가? 고통 없는 삶이 과연 있는가? 인간은 본래 자신에게 시달리지 않는가? 우리는 자신이 고통 중에 홀로 버려진 것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 수난을 묵상한다. 그 고통은 예수님 수난처럼 목적이 있다.
성주간에 우리는 고난을 기념하며 거행한다. 정치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이를 통해 고통을 망각하려고 하는 사회의 행위에 맞서 교회가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고통을 억누르는 사회는 더욱더 무정하고 냉정하고 무감각해진다. 그런 사회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서 있을 자리가 없다. 그러기에 성주간 거행은 우리 사회의 고통 망각에 맞선 항의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고난에 관심을 둠으로써 인간 존엄에 기여한다. 말하자면 성공을 위한 발자국을 쫒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두리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든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엄에 기여한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성지주일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당당하게 입성하신 것을 기념한다. 평화의 임금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로 불린다. 성지주일 전례는 장엄한 행렬로 시작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수난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갈라놓을 수 없다는 확신을 주고자 한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수난을 이렇게 이해한다. 곧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무기력하게 당신 자신을 어둠의 권세에, 악마의 권세에 맡기셨다는 것이다. 마르코는 수난을 사랑으로 맞이하도록 초대한다.
루카는 수난사화를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 철학이 갈망한 참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제시한다. 그분은 기도하는 사람으로 죽으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첫째 말씀은 기도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23,24
둘째 말씀은 당신 오른쪽에 있는 죄수에게 하신 약속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하신 말씀은 기도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카 23,46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돌아가신다. 이로써 삶의 환난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으로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가 기도한다면 지금 있는 환난의 장소는 낙원으로 바뀐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모든 곤경에서 구해주시는 체험을 자신 안에서 할 것이다.
묵상 1
그대의 방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어보자. 만일 그리스도 이콘(우편엽서 크기 상본도 좋다)이 있다면 그 것을 앞에 세워두고 이렇게 상상하라.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 안에 들어오신다. 들숨 때에는 그리스도가 그대 마음 안에 들어온다고 상상한다. 날숨 때에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그대 몸 전체에 스며든다고 상상한다. 그대는 이 묵상을 통해 내적 평화를 깊이 느낄 것이다. 그대는 스스로는 평화로울 수 없다. 예수님이 그대 안에 들어오시도록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분은 당신의 평화와 사랑으로 그대를 가득 채워주실 것이다.
묵상 2
전례에서 봉독되는 수난사화를 천천히 읽어보자. 큰 소리로 읽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묘사되어 있는 개별적인 상황들을 묵상하라. 예수님이 겪으신 모든 고통을 그분 사랑의 표현으로 보도록 노력하라. 이렇게 수난의 신비주의가 이루어졌다.
‘나는 그분에게 소중하다. 내가 내 자신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도록 그분은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 나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은 내 삶을 건설할 수 있는 토대다. 나는 가치 있는 소중한 존재다.’
성주간 월요일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다
성주간 월요일 복음은 베타니아에서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내용이다. 예수님은 죽은 이들 가운데 다시 살아난 친구 라자로의 집에 계신다.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요한 12,2-3
이것은 요한에게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그때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이었다. 숫자 6은 불완전함과 부자연스러움을 나타낸다. 숫자 6은 다시금 변화와 완성의 숫자인 7을 향한다. 인간은 부활로 다시 창조된다. 이것이 참된 파스카다. 곧 인간이 하느님의 세계로 건너가 거룩하게 변화되어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안식일이다. 하느님을 통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여인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째, 예수님의 어머니가 나오는 카나의 혼인잔치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혼인잔치를 거행하신다. 그분의 사랑은 아무 맛이 나지 않는 물을 사랑의 포도주로 만드신다.
둘째,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다. 여기서 우리의 갈증을 채워주는 물뿐 아니라 여인에게 사랑의 갈증을 채워줄 수 없었던 여섯 남자가 이목을 끈다. 사마리아 여자는 일곱째 남자로 예수님을 만난다.
셋째,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와 만나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그녀를 단죄하지 않으신다.
넷째, 라자로의 부활 사건에서 마리아와 마르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도 죽은 이를 살리시는, 우정 두터운 사랑이 관건이다.
다섯째가 향유 사건이다. 여기에서도 사랑이 관건이다. 비싼 향유를 바르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여섯째, 예수님의 어머니가 십자가 아래에 서계시고 예수님이 당신 어머니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장면이다. 마리아는 문이시다. 바로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이 세상에 들어온다.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사랑의 완성을 증언한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받아들이라고 제자들을 초대하신다. 우리는 마리아를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세상에 흘러들어오는 문이 될 수 있다.
일곱째 장면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요한은 이 장면을 의식적으로 사랑의 아가서 3,1-6를 배경삼아 사랑의 장면으로 전한다. 요한은 숫자 7을 좋아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일으키신 구원의 일곱 가지 표징이 있다.
마리아는 자기영혼을 사랑하신 분을 찾은 것이다. 수난의 중심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사랑의 완성이다. 사랑은 계산할 줄 모르고 비이성적이다. 냉정한 이성적 인간은 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만 오직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묵상 1
묵상 중에 그대의 호흡에만 집중하라. 페르시아 시인 루미는 숨을 하느님 사랑의 향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숨을 쉴 때 하느님의 사랑이 그대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와 그대의 몸 전체를 가득 채운다고 생각하라. 호흡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그대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진다고 상상하라.
묵상 2
성주간 시작 무렵 가능하다면 그대 가족이나 친구에게 발씻김 예식을 실제로 해보길 권한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더럽혀진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사람과 접촉할 때 주로 아킬레스건, 말하자면 그의 상처 입은 부위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짐으로써 상처를 치유한다.
성주간 화요일
배반을 알림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방법은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사랑받는 제자의 방법으로서, 중세예술은 이러한 장면을 요한의 사랑으로 묘사했다. 요한의 사랑을 보여주는 놀라운 그림들 속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다. 요한에 관해서는, 그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를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이 그림을 마음에 새기고 나 자신이 예수님께 사랑받는 존재라고 생각해야 한다.
둘째 방법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방법이다. 우리도 그와 똑같은 배반을 저지를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권능을 보여주시도록 압박했다.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이 유다의 기대에 응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유다가 실망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든 것은 유다를 이해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요한 13,27
따라서 배반은 인간 유다만의 것이 아니라 사탄이 그에게 들어간 것이다. 유다는 어두운 생각과 내적 어둠에 빠져있었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에게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 마태 27,4
하지만 그들은 유다를 거절한다. 그러자 유다는 은돈 서른 닢을 성전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매달아 주었다. 그의 자살은 절망의 표현이다. 뉘우침은 그를 회개가 아닌 절망으로 몰고 갔다.
셋째 방법 또한 우리 각자 안에 있는데 베드로에게서 엿볼 수 있다. 요한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했다기보다는 부인했다고 말한다. 부인은 비겁함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다처럼 예수님을 저버리지 않는다. 다른 복음사가들은 베드로에 관해, 그가 닭이 운 후에 곧바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고 전한다. 마태26,75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베드로의 슬픈 울음을 <마태수난곡>에서 대가답게 표현했다.
우리 안에는 요한, 베드로, 유다의 모습이 모두 들어 있다. 예수님은 나를 자애로운 당신 팔로 안아주신다. 나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존재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를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많은 잘못을 범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단죄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우리가 예수님께 사랑받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예수님께 사랑받는 요한의 그림을 마음에 품는 것은 유익한 훈련이 될 것이다.
묵상 : 마태 26,69-75; 요한 21,15-19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장면과, 요한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장면을 묵상해보자. 나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한 적이 있는가? 형제나 자매, 친구 등을 부인한 적이 있는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맡겨라. 그대의 배반, 부인, 죄악 등도 맡겨라.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감출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제가 자주 당신을 배반해도 제 가장 깊은 갈망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 넘겨지심
성주간 수요일 복음은 마태오가 전해주는 유다의 배반에 관한 내용이다. 마태 26,14-25 그런데 배반의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다른 주제를 바라보고 싶다. 바로 ‘넘겨주다’이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마태 26,26
예수님은 성찬례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넘겨주신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 우리에게 양도하신다. 성찬례는 코린토에서 많은 사람이 오해한 것처럼 단순히 배부르게 먹는 만찬이 아니다. 예수님은 친히 성찬례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에게 넘겨지신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셨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마태10,21
따라서 넘겨짐과 건네줌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될 것이다. 내가 이웃을 위해 투신한다면 나 자신을 그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는데 내 힘을 들이면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신 업적에 나 자신을 건네주는 것이다.
묵상 1
그대는 어떤 전승을 따라 사는가? 그대가 따르는 전승의 핵심 바탕이 그리스도임을 그려보라. 조상, 조부모, 부모에게 그대가 넘겨받은 것이 무엇인가? 분명 그대는 교훈만 아니라 체험, 삶의 지혜, 그들의 일부를 받았고 이것으로 그대는 살아간다. 교회의 온갖 잘못과 나약함에도 신비가, 성인, 신학자, 노래, 기도와 통찰 등 교회가 그대에게 건네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그대가 받은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라. 그대는 받은 것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묵상 2
그대가 하느님께 또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어떻게 내어주는지 생각해보라.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드려 하느님께서 그대를 마음껏 도구로 이용하시도록 할 각오가 되어있는가? 아니면 그대의 삶만 생각하며 이를 실현하려 하는가?
주님 만찬 성목요일
사랑의 표징과 두려움에 가득 찬 기도
성목요일에 묵상하고 싶은 세 가지 중요한 주제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랑의 유산으로 남겨주신 성만찬, 세족례, 예수님 홀로 하느님 아버지와 대면한 겟세마니에서의 고독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당신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길 원하셨기에 거룩한 만찬을 세우셨다. 빵으로 오신 예수님의 몸을 먹으면서 이를 그분 사랑의 입맞춤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성목요일은 주님 만찬 미사를 거행할 때 세족례에 관한 복음이 봉독된다. 요한13,1-17 요한에게 이것은 이별의식인데, 예수님은 이를 통해 당신의 삶 전체를 다시한번 요약하시고 당신 활동의 깊은 의향을 표현하신다. 예수님은 지상에 사시는 동안 종이 되셨다. 당신 자신을 인간으로 낮추셨고, 당신 발의 먼지에 이르기까지 낮아지셨다.
세족례는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마지막 봉사, 말하자면 친구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한다. 이 봉사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행동을 본받으라고 명령하신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요한 13,14
성목요일의 셋째 주제는 예수님이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신 고독한 싸움이다.
그분께서는 근심과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그때에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있어라”하고 말씀하셨다. 마태26,37-38
이러한 예수님의 간절한 청원도 제자들을 깨어있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잠에 빠져들었기에 예수님은 홀로 아버지를 대면해야 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마태 26,29
우리는 성목요일 밤, 자신의 집이나 밤새도록 개방된 성당에서 하느님을 마주하며 다음과 같이 물어보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기대만을 채우려 하는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묵상 1
성찬례 거행으로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시간도 치유되길 바란다. 그대는 이날 집에서, 그대가 받은 창조의 선물을 하느님의 선물로 체험하는 단순한 식사를 행하라.
묵상 2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신 다음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때는 한밤중이었다. 그분은 사랑이 충만한 상태로 어둠을 밝히기 위해 그 어둠의 세력 안으로 들어가셨다. 여기서 첫째, 그대는 그대 마음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것도 그대를 위협할 수 없다. 둘째,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니 동산에서 고독한 싸움을 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고독을 통해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여쭈어 보자.
주님 수난 성금요일
다 이루어졌다
성금요일 전례에서 두 가지 주제를 다루고 싶다. 그것은 예수님 수난을 보여주는 장엄한 노래와 십자가 나무를 보여주고 경배하는 예식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18,36
예수님께는 세상이 맘대로 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기에 수난에 굴복하거나 부서지지 않고 수난의 길을 가실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한 가지 약속을 알려주는데 우리 또한 질병, 불행, 삶의 실패 등으로 완전히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도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러기에 세상이 맘대로 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 19,34
그리스도교 영성은 이 장면을 예수님의 열린 마음을 공경하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님 마음에서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들어 온다. 여기에서, 창세기에 잠자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를 창조하는 장면에서 사용한 단어를 똑같이 쓴다.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온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열린 옆구리에서 태어난다.
내 백성아,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무엇으로 너를 근심하게 하였더냐? 대답해다오.
묵상 1
십자가를 경배하는 다양한 몸짓을 해보자. 먼저 바닥에 누워 두 팔을 좌우로 활짝 펴고 손바닥은 위를 향하게 한다. 개방의 몸짓, 수용의 몸짓이다. 이러한 몸짓을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그대의 육신과 영혼의 모든 대립 안에 흘러든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이어서 손바닥 방향을 바꿔 손바닥이 바닥을 향하게 한다. 그대는 다른 무엇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못으로 박았다. 이제 그대 자신이 십자가다. 그대는 대립하는 자신에게서 달아날 수 없다. 이것은 대립 안에 있는 그대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초대다.
묵상 2
홀로 숲이나 정원을 산책해 보라. 돌 하나를 집어 머리에 갖다 대며 그 돌이 왕이나 여왕처럼 똑바로 가도록 그대를 이끄는 왕관이라고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반복하며 그대 자신에게 되뇐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 18,36
이 말씀으로 질병, 절망, 최근에 겪은 상처 등을 이겨낸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상처, 날카로움, 불안, 나약함 한가운데에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낄 것이다.
성토요일
죽음의 나라, 영광스러운 변화
성토요일은 고요한 날이다. 이날은 성무일도 외에는 전례를 거행하지 않는다. 성 베네디딕토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말이 더 이상 변화시키면서 뚫고 들어 갈 수 없는 고독이 있는 곳을 우리는 지옥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어떤 위로의 목소리도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버림받은 어두운 밤이 있으며, 오직 홀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문턱 곧 죽음의 문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은 궁극적으로 이 고독의 두려움이다.
성토요일 복음은 최종적인 고독에 대한 두려움 속을 뚫고 들어간다.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인 고독의 문을 빠져나가셨다.
그분은 저승에 내려가셨다. 성토요일은 인간의 고독이 극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독 속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사랑이 죽음의 영역 안으로 들어서고 그분께서 고독의 무인도에 거주한 이후부터 지옥은 극복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메시지는 우리 영혼 안에서도 해석할 수 있는데, 곧 그리스도께서 내 영혼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성토요일을 지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내 영혼 안으로, 내 영혼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것을 뜻한다. 나는 고요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많이 알고 있다.
묵상 1
예수님이 그대 손을 붙잡고 그대 영혼의 심연으로 인도하신다고 생각해보자. 그분은 그대보다 앞서가신다. 그분은 그대 안에 있는 모든 어둠을 비추시고 두려움을 몰아내신다. 예수님이 그대의 고독에 앞서 가신다고 생각하라. 그대에게는 더 이상 그분 사랑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는, 사랑스레 그대를 일으키고 동반하는 그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고독이 없다.
묵상 2
예수님이 무덤에 누워계신다. 성토요일은 그대가 이리저리 끌고 돌아다니는 많은 잡동사니를 포기하도록 초대한다. 그대가 포기하고 싶은 것, 그대의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 말하자면 자기 비난, 분노, 상처, 절망, 괴로움, 죄책감 등을 기록한 그 종이를 마당 어느 곳에 묻고 그 위에 꽃을 심어보라. 또는 기록한 종이를 불태운 다음 그 재를 묻자.
8부 주님 부활 대축일
빈 무덤
부활에는 무척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기에, 여기서는 ‘파스카’라는 단어에 한정 지어 말하고자 한다.
요한복음에서 파스카 축제는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이에 관해 세 차례 다루어진다. 그 축제에서 중요한 것은 건너감이다. 그분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안에서 밖으로, 위에서 아래로, 지상에서 하늘로 옮겨가신다. 건너감과 넘어감은 엄밀하게 예수님 수난과 부활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세상으로 건너가신다.
파스카의 건너감과 관련 있는 첫째 이야기는 성전 정화다.요한2,13-22 하느님께서 머무르시지만 그 안은 장사꾼과 환전꾼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요한은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추방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엄밀한 건너감에 대해 말하려 한다. 곧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몸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몸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 몸을 성전이 되게 하신다.
파스카 축제와 관련 있는 둘째 이야기는 성찬례의 담론과 연결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다. 요한6장 예수님은 성찬례를 통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곧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우리를 먹이신다. 성찬례는 하늘과 땅이 결합되는 장소이며, 지상에서 하늘로 건너감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리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신 빵이다. 수난과 부활은 예수님이 하느님 세계에 참되게 건너가신 사건이다. 나는 파스카 곧 지나감의 개념 안에서 부활의 신비를 묵상했다.
묵상 1
지나감을 훈련하는 첫째 방법은 걸어감이다. 그대는 괴테가 열광하던 부활절에 산책을 해보라. 가는 곳마다 꽃이 활짝 피어있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놀라운 자연 속을 걸어보라. 모든 걸음은 건너감이다. 모든 걸음은 하느님의 세계로 건너감이다. 우리는 영원히 이곳에 눌러 앉을 수 없는 순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