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7. 10월 영적 독서 「성인, 지옥에 가다」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7-10-19 15:36:42    조회 : 484회    댓글: 1

세마 성당  10월 영적도서 : 「성인, 지옥에 가다」

지은이 : 질베르 세스브롱 Gilbert Cesbron(1913-1979)

·가톨릭교회의 운동과 인연을 맺고 있던 작가다. 그의 소설은 그 시대에 대두된 중요한 사회문제를 주제로 했고, 사회의 여러 문제 앞에서 정의와 사랑을 열정적으로 산 작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저서에 청소년 범죄를 다룬 「굴레 벗은 개들」, 이혼 부부의 자녀문제를 다룬 「우리가 죽이는 모차르트」, 장애인 문제를 다룬 「나도 역시 그들을 사랑했소」 등이 있다.

옮긴이 : 남궁 연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현재 가톨릭대학교 프랑스어문화학과 명예교수
역서 : 「진흙탕에서 」 「다니의 일기」 외 다수
 

 <머리글>

 이 책은 어떤 사람에게는 비위에 거슬리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직도 조심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미덕인 것일까?
 같은 언어를 가진 사람들끼리도 소통이 어렵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중재자를 죽이는 시대, 예수 없는 십자가가 군림하는 이 시대에 나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고 싶지 않다. 지도에서 사니를 찾는 것은 헛수고일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눈과 편견 없는 마음이 있다면, 파리 어느 곳에서나 이런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누군가 상처를 입게 된다면 나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또한 나는 이 책으로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생각도 없다. 누구나 자신만을 설득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이  책이 편견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니의 친구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노동자도 사제도 아니요, 가난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것을 쓸 자격이 없는 내가 쓴 이야기를··· .
 

 

나눔의 글

 

이 책은 노동자 마을에 들어가 사는 노동사제 이야기다. 프랑스 파리 교외 공장지대에 가서 스스로 공장 노동자가 되어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며 그들의 어려움과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피에르 신부의 생활을 그린 것이다.
작가 세스브롱은 현대 산업사회가 낳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숨김없이 그리고 있다. 밤마다 어린아이를 때리는 주정뱅이 마르셀, 경찰의 앞잡이 북아프리카인 아흐메드, 창녀 쉬잔····, 생활에 지친 군상이 바로 피에르 신부를 둘러싼 이웃이다. 이런 환경에서 용기를 잃고 떠나간 신부 베르나르 후임으로 온 피에르 신부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따뜻한 사랑과 헌신으로 헤쳐 나간다.
 

질베르 세스브롱 Gilbert Cesbron(1913-1979)은 머리글에서 암시하듯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운동과도 인연을 맺고 있던 작가로서 실제로 있었던 인물과 사건을 토대로 이 소설을 구성했다고 한다.


당연히 천국으로 가야 할 성인이 지옥에 가다··· 지옥에 가다니···, 「聖人, 지옥에 가다」

가난한 탄광촌에서 태어나고 석탄 더미에서 놀며 자란 노동사제 피에르 신부의 사명이 처음 시작되는 프랑스 외곽지대 빈민촌 사니 마을.


“그분은 어느 곳에나 계시다! 가장 필요한 곳에 있는 것,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 나머지는 하느님이 하실 테니까. 난 언제나 가장 어려운 곳에 있고 싶다·”
“여기야 말로 참된 교회다. 이 밑에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이 필요하다. 이들은 진정한 형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외롭고 헐벗은 예수께서 그들 사이에 계시다. 나는 그분을 찾아야 한다.”


피에르 신부의 신앙은 오로지 생각과 행동이 일치를 이루는 것이었다.

“왜 노동을 하려는 거요? 더 나은 자리를 ...”
 

그의 앞에 있는 인사과장, 자신이 선하고 하느님이 자기편인 줄 믿고 있는 외로운 이 사람에게 피에르는 연민의 정을 느낀다.

“당신은 재주를 부리려 하지 않는군. 이유가 뭐요?”
“재주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구렁텅이에서 헤어나려고 애쓰는 것 말이오.“
“구렁텅이에서 헤어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해야지요.“


가능한 한 많은 이익을 내도록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그의 의무일 뿐, 양심의 가책 없이 자기 의무를 충실히 한다고 믿는 이 사람! 그가 직업에 임하는 태도는 제도에 기대어 죄책감 없이 생활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일이면 그는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사니 마을의 노동사제 베르나르는 피에르의 몇 해 선배지만 신학교 때부터 친했다. 이곳에 사람이 더 필요하다는 베르나르의 요청에 교구에서는 피에르 신부를 보냈다.
 

어느 날, 집안이 온통 쥐로 득실거리는 가난한 노동자 페르낭드의 아기에게 기가 막히는 비극이 일어난다. 너무 쇠약해서 울지도 못하는 아기 머리를 밤새 쥐가 갉아먹었고 이 사실을 아침이 되서야 알게 되어 병원으로 아기를 데려갔지만 아기가 살아나기는 다 틀렸다는 의사 이야기에 베르나르 신부는 말없이 눈을 감는다.  


‘성소란 내가 유용한 곳에 있는 거야’라며 몸과 마음이 지쳐 노동사제단을 떠나 옛 수도원으로 돌아가려는 베르나르 신부에게
 

“우리를 부르는 곳에 있는 것이 성소라고 생각하네. 하느님이 아니라 영혼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네. 하느님이 필요한 곳,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곳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는 거야!”
라고 피에르는 단호하게 말한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야 비로소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랑의 천사 마들렌. 피에르와 함께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마들렌을 짝사랑하는 장은 갑자기 사니를 떠나버린 베르나르 신부를 비난하는 말을 마들렌에게 던진다.


“장, 베르나르 그 신부님은 기도를 더 잘 드리러  떠나갔어요. 우리를 버리고 간 건 아니에요. 우리를 늘 생각할 겁니다. 장, 당신이 조금 전 하늘에 있는 친구를 생각했듯이.”
“그래 봤자 우리한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당신네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그저 생각만 하는데 그친다면 그들은 날마다 거리에서 자야 할 겁니다.”
“피에르가 이야기하는 예수는 병을 고쳐주고 먹을 것을 주고 또 보호해 주었어요. 그는 말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더욱 베르나르는 옳지 않아요.”
“피에르가 이야기하는 그분은 또 이렇게 말씀 하셨지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세상 사람은 모두 혼자예요. 장, 당신 뿐만 아니라 누구든 혼자면서도 함께 살 수 있어야 할 텐데요···.”
 

그러나 그녀를 지독히 짝사랑하는 장은 그녀의 말, 그 어떤 것으로도 위안을 얻지 못하고 외로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하루 종일 공장기계 뒤에서만 보던 친구들이 이번에는 으슥한 곳에 모였다. 신문기자나 정당 간부들이 정치적 조직이라고 비난하는 ‘평화’의 모임은 사니의 투사들-공산당원이든 그리스도인이든 간에-에게는 차디찬 겨울 동안 기다리는 새봄의 희망이었다.


이 평화의 모임에서 앙리의 요청으로 시작된 피에르의 평화에 관한 아름다운 연설!


“전쟁과 악은 같은 것입니다. 전쟁은 악입니다. 그것도 가장 나쁜 악입니다. 저 사람이 먼저 시작했어. 내가 시작한 게 아니야 그러나 악은 어디선가 먼저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善인 평화도 어디서든 먼저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화는 우리 모두가 화합해서 친구가 되고 서로 이해타산을 하지 않고,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지내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엾은 친구를 사랑하면 그 친구는 덜 가엾게 됩니다. 악질인 사람을 사랑하면 그는 덜 악질이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부터 나쁜 사람들을 착하게 대합니다. 여기서부터 평화가 시작됩니다. 그 시작을 하는 사람이 평화의 투사입니다. 평화는 상대방이 친구든 사장이든 똑바로 바라보고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한 대 후려갈겨야 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 이유를 말 하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죄 없이 총살당하는 사람이 총 쏘는 대원들을 미워하는 줄 아십니까? 지휘관 재판관을 미워하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그는 이 사람들이 모두 도구라는 것, 나쁜 제도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가 나쁜 것이지요. 거기서 이익을 취하는 사람도 결국은 희생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을 미워해야 별 수 없습니다. 그 제도가 나쁜 것입니다. 제도를 공격 해야지요.”


피에르는 연설을 마친 후 마치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박수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파리 선교회의 화요일 회합은 성 목요일과 같은 것이다! 타원형 탁자 위에 노동사제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그들의 손만 보아도 직업을 알 수 있었다. 세탁공 앙드레 신부, 자동차 용접 일을 하는 프랑수아 신부, 선반공 미셸 신부, 넝마주이 로베르 신부, 기계 사고로 손등이 찍혀 예수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자크 신부. 단 한 사람만이 하얀 손을 하고 있었다. 가장 연장자인 그는 사창가 창녀들을 돌보는 피갈 신부였다.   
 

피에르는 행복했다. 맑은 눈동자를 지닌 사제들, 자기와 마찬가지로 걱정이 쌓인 이마와 거친 손을 한 이들과 깊은 유대를 느끼며 잠깐 동안의 휴식이 행복했다. 그들은 제각기 또다시 일터로 떠날 것이다.


몇몇 노동사제는 포장이 잘 되지 않은 길을 걸어 거대한 외곽지대인 동네를 향해 떠났다.  죽은 나무가 서 있는 길, 담배 연기가 자욱한 술집 창문이 즐비한 거리, 공장과 가스탱크와 지붕이 낮은 집들이 들어선 지대··· 이곳은 화려한 파리를 둘러싸고 있는 서글픈 외곽지대다. 또 다른 사제들은 그들의 가난한 왕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보좌신부 르부아쇠르 신부가 피에르 신부에게 마음이 기울어지려는 것을 눈치 챈 사니 마을의 본당신부는 그의 곱게 다듬어진 손을 내저으며 피에르의 말을 이었다.


“난 이 본당의 양 떼를 책임지고 있소.”
“아닙니다. 신부님은 이 마을 전체를 책임지고 계십니다. 이 마을에 만 육천 명이 산다면 그 가운데 한 사람도 신부님의 양이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분별이 있어야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가기 위해 양 떼를 놔두고 떠나는 것은 분별없는 짓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천만에, 남은 양 떼가 그동안에 충실하리란 것을 알 때는 그것도 분별 있는 처사요. 불행히도 지금 세상은···.”
“그들도 신부님을 떠날 리가 없습니다. 그들 모두와 함께 다른 영혼을 찾으러 떠나셔야 합니다. 그들은 양 떼가 아니라 군대입니다.”
“내가 여기서 내 심판자를 만날 줄은 미처 몰랐소···.”

늙은 본당 신부는 입맛이 쓴 듯 말을 내뱉었다.
“성인이라는 신부가 어떻게···?”
“전 성인으로 불리는 신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피갈 신부가 잘라 말했다.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추기경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성인 신부라고 부르는 사람은 흔히 독신을 지키는 관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어요. 나는 당신들의 열정이 필요하지 그들을 위한 병자성사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과 기도서를 읽는 것, 두 가지를 다 할 시간이 없을 때 어떻게 하겠소?’ 추기경님은 제 앞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전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거리를 지나가실 때 가슴이 아파 숨이 막히신답니다. 당신이 책임지고 있는 모든 영혼을 생각 할 때··· 본당 신부님, 신부님이 사니의 공장 앞을 지나가시거나 그 초라한 셋집에 들어가신다면···.”

“난 아직 그런 곳에 가 본 적이 없소.”
”본당 교우 4분의 3이 공장에서 일하며 셋방에서 살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난 하루 종일 못이나 박으려고 신부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피갈 신부도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저는 아이들과 축구나 하고 본당에서 파비올라 성녀 영화나 돌리기 위해 신부가 되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피에르 신부의 손 같은 노동자의 손을 하고 계셨습니다. 신부님이나 제 손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오. 하느님은 추기경 위에 계시오.”


이렇듯 같은 사제이긴 하나 본당신부님과 노동사제들의 대화는 엇갈리고 있었다.


같은 셋집에 사는 가난한 아이를 위해 부잣집 강아지의 털옷을 훔치다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매우 착한 사람, 좀 덜 착한 사람은 있어도 매우 나쁜 사람은 없었다.
 

‘오, 난 그들을 사랑한다. 정말 그들을 사랑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피에르는 그들과 함께 언제나 가장 힘든 일에 가장 가까이 있고 싶었다. ‘효과에 대해선 논하지 말자. 형제애가 무엇보다 먼저다. 난 그들을 사랑한다.’


그는 한 사람 한사람을 생각해 보았다. 죽은 사람의 얼굴같이 창백한 마들렌, 예수에게 열광했다가 갑자기 예수도 피에르도 경계하는 장, 실업자 마르셀은 술에 취해 밤마다 에티엔 (아들)을 때리며 해고당한 후 일을 얻지 못해 나타나지 못하는 마르셀···내가 먼저 찾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피갈 신부가 돌보기 위해 데려온 창녀 쉬잔,···사니의 절규를, 노동자 예수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세계, 골목동네의 아랍인, 경찰, 새집의 주인. ···
 

‘하느님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 피에르는 기도했다.

그러나 또다른 그의 마음에서 들려려오는 소리 - ‘너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이 서로 사랑하겠느냐?’


피에르는 노동자가 되었다. 경찰과 노동자들, 집주인과 셋방살이하는 사람들, 기업주와 날품팔이꾼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교회나 난방이 잘 된 안락한 아파트, 하늘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공장이나 셋집이나 감옥에서는 불가능하다. 자기 동료를 배반하지 않고는 다른 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노동자 세계의 비극이다.


예수님을 발견했지만 자기 혼자만을 위해 간직하며 아직 다른 사람들한테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장은 절망에 깊이 빠져 들었다.“ 오, 난 불행해 너무 불행해. 마들렌을 사랑하는데 마들렌은 날 사랑하지 않아.” 


피에르는 며칠째 말없이 사라진 장을 찾아 나서보았지만 장을 찾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 팔을 벌린 채 누워 있는 장을 발견 했을 때는 이미 선혈이 넘쳐흐르는 대야에서 풍기는 피비린내에 구역질이 났다. 탁자 위의 흰 종이 장의 마지막 작별 인사.-‘나의 예수님, 이젠 지쳤어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당신께 가겠어요.’


사람마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은 회복기에 접어든 환자처럼 대견해 보였다. 그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 숨은 것마저 알아보아야 했다. 인간의 사랑은 두 면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사니오 본당신부가 추기경의 메시지를 성당에서 낭독한 바로 그 주일날, 피에르는 동조위원회 회원 명단을 가지고 서명을 부탁하려 그에게 갔다. 신부들이 작업복을 입었건 수단을 입었건 세상에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오직 하느님의 교회가 존재할 뿐이다. 


본당 신부는 난색을 표하며 침울하게 말했다. 사니의 공장주들이 본당의 중요한 후원자들이니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옷과 식량과 돈을 많이 내라고 하겠소. 그리고 당신한테 그것을 전해 주겠소. 돈이 어느 주머니에서 나오든 무슨 상관이겠소?”
“신부님, 그 돈은 그들이 우리에게 빚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선물처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본당 사업들’ -본당 신부는 중얼 거렸다.


토요일 봄 날 저녁에 피에르는 콩코르드 광장에서 내려 샹젤리제를 걸어 올라가며 만나는 그들이 자기에게 웃어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밖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행복의 땅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사회에 속해야 하는 것이다. 피에르는 그들을 보지만 그들은 피에르를 보지 못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반수는 다른 반수의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자기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피에르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을 가엾은 사람들과 갈라놓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들의 접근을 막고 있는 것이다. 오늘 저녁 그는 이 조직이 얼마나 견고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조직은 그 보호를 받는 사람들도 알지 못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피에르가 지금 지나가는 자동차문을 열고 ‘오늘 저녁 당신이 쓰려는 금액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소. 당신의 자동차보다 크지 않은 방에서 여섯 가족이 사는 가정이 있소.’ 하고 외친다면 그들에게 그는 어떻게 보일까?
 

‘거주 금지’ 바로 이것이다. 피에르와 육백만의 다른 친구는 정신적으로 샹젤리제에서 거주 금지를 당하고 있었다. 열린 창 너머로 유복한 사람들의 모습과 실내장식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자 놀라서 우뚝 서고 말았다. 이들은 저녁을 먹고 계산을 끝내고 라디오를 듣는다. 식당, 아이들 침실 등 5개, 열 개나 되는 방들을 가진 유복한 사람들이 무슨 나쁜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러면 ··· 이것이 이 시대의 저주란 말인가? 편안히 살고 먹고 싶을 때 먹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 아니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평등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지금 이 거리를 홀로 지나가는 이 사람(피에르)은 사니의 수용소에서 탈주한 사람이오. 정말 현대판 수용소, 진짜 도시같이 꾸며지고 행동도 자유로운 편리한 수용소라오. 방을 얻지 못하는 것도 자유, 폐병에 걸리는 것도 자유, 먹고살 것을 벌지 못하는 것도 자유라오. 이렇게 선택의 자유가 많소. 사니의 수용소에서는 완전히 자유요. 이 남자(피에르)는 거기서 하루저녁 도망쳐 나온 거요. 수인 같지 않다고? 신부 같지도 않지요? 친구(장)가 자살한 사람 같지도 않지요? 보시오, 얼마나 잘못 보기 쉬운지를! 모든 것이 이렇게 평화롭고 당신네들의 사업은 잘 되어가고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에서 라일락 향기가 풍기는 이런 봄날 토요일 저녁에····’


우리나라 역시 지하철역에, 외진 뒷골목 거리에,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노숙자들로 넘친다. 그들을 보면서 외면하는 차가운 도시의 얼굴들···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이다. 비슷한 주제 같은 생각 ··· 한동안 EBS에서 인기리에 방송한 마이클 샌델( Michael J. Sandel)의 「JUSTICE」와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스스로 힘으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불행한 이들의 고통을 알면서도 법과 제도에 기대어 적당한 방법으로 선을 행하는 대부분의 우리는 「성인 지옥에 가다」를 읽으면 정녕 마음이 무거워짐을 알게 될 것이다.


술주정뱅이 마르셀(아버지)에게 매를 맞아 생긴 두개골의 상처로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에티엔의 생명을 위해 피에르는 그의 생명을 바치기로 했다.
 

‘저를 데려가십시오. 사니에서 한 모든 일을 바치고 대신 에티엔의 생명을 살려주십시오. 에티엔의 생명 대신 제 생명을 바칩니다.!·····’


그는 두 손을 내밀었다. 이미 자기 것이 아닌 두 손으로 고통스런 어린 머리를 잡았다. 순간 어린아이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에티엔이 눈을 떴다. 에티엔이 말을 하려고 입이 움직였다.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벌써 하늘이 아시는구나.’ 피에르는 그리스도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 세상에는 자유도 돈처럼 제한된 양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을 누리는 것은 다른 사람한테서 빼앗는 것이 되지 않을까? 오막살이에서 사는 사람도 죄수보다 행복하다. 월급이 아무리 적다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자보다 행복하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에 처해있는 사람만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렇다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최악을 벗어나려 몸부림치지 말아야 한다. ··· 그렇다면 그들을 위해 자선 사업을 하지 말아야하는가??
  
최근 몇 주 동안 추기경은 공식회견이나 일반 사무를 제쳐놓고 낡은 자동차에 몸을 싣고 파리의 외곽지대를 돌아다녔다. 어디를 가시느냐 묻는 비서신부의 질문에 ‘절망을 보러 간다.’며 추기경은 차창에 얼굴을 기대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핏기 없는 얼굴을 푸른 눈망울에 새겼다. 
 

“모두 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 이 사람들이 모두 저의 책임입니다. 주님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나는 오늘 와서야 겨우 그들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구나. 그들의 괴벽과 신경질적인 손짓, 눈까풀을 깜빡이는 버릇, 자신들도 모르는 부분까지 사랑하게 되는구나.”


죽음의 마지막 순간, 고통을 느끼며 임종을 앞두고 독백을 하고 있는 그들의 아버지인 추기경, 그는 이 날이 오기까지 그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아무도 사랑을 주지 않는 이들을. 혼자 살고 혼자 죽어가는 이들을. 아! 사람들 사이에서 높아진다는 것은 사랑해야할 사람이 더욱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추기경 그는 회환에 사로잡혔다.


‘시계를 버려라. 중요한 것은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잠은 자되 잠이 와서 못 견디게 될 때 자라. 일분이라도 소홀히 하지 마라.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고 떠나가게 하지 마라! 오 시간!··· 오, 사랑!···’
 

사니 공장에서는 날마다 승리가 있었다. 서로 화해하는 동료, 자기 집에 친구를 재워주는 사람도 생겼다.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면서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평화의 시위에 앞장선 피에르의 노동 시위로 시끄러워진 문제를 잠재우려고 파리 선교회는 피에르에게 사니를 떠날 것을 권고한다.


말없이 교구에 순명은 하지만 결국 피에르는 조용한 수도원을 거부하고 유년 시절의 마을 풍경을 추억하며 탄광촌 노동자로 조용히 돌아간다.


‘이곳이 바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의 왕국이다. 프랑스의 다른 곳에서는 아침 해가 잠시나마 빛날 것이다. 눈먼 풀포기도 돌 사이에서 돋아날 것이고 슬픈 새도 우짖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지옥의 문에서는 눈만 하얗게 드러난 시꺼먼 광부들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자신의 상복을 입은 이들, 그들의 발밑에 쌓인 석탄 먼지가 버석버석 소리를 냈다. 
 

그렇다, 여기가 바로 내 고향이다···.

댓글목록

작성자: 글라라님     작성일시:

역설적인 제목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한 번에 끌어들이는 「성인 지옥에 가다」
제목의 성인과 지옥은 독자가 각자 해석하기 나름의 여러 가지의 뜻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제목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흥미롭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 빈민촌 사니 마을을 떠나 수도원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한 피에르 신부가 돌연 탄광 노동자로 돌아가며 말하는 혼잣말 속에서 왜 질베르 세스브롱은 「성인 지옥에 가다」로 제목을 정했는지 암시를 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의 왕국이다. 프랑스의 다른 곳에서는 아침 해가 잠시나마 빛날 것이다. 눈먼 풀포기도 돌 사이에서 돋아날 것이고 슬픈 새도 우짖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지옥의 문에서는 눈만 하얗게 드러난 시꺼먼 광부들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작가는 탄광의 노동자들이 마치 지옥의 문에 살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 지옥 탄광에 성인 피에르 신부는 기쁘게 사랑과 형제애를 실천하러 간다. 그렇게 성인 피에르 신부는 현실적인 세계 지옥의 문(탄광)에 들어간다.

‘가난은 단지 불편할 뿐’이라는 말은 왠지 이 소설에서는 무색하다. 가난한 노동자 페르낭드의 아기 머리를 쥐가 밤새 갉아먹어 아침이 되어 병원에 옮겼으나 죽었다는 사실이 소설이 아니라 실제로 있있던 일이라면...

공동선共同善을 오래도록 깊이 생각하게 한 「성인 지옥에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