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12월 영적독서 모임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7-12-15 23:01:59    조회 : 458회    댓글: 1

세마 성당  12월 영적도서 : 「사랑하기 위하여 기도를 배운다」

지은이 : 자크 필립 

· 1947년 프랑스 로렌 지방 출생
 · 1976년 베아티튀드 공동체에 입회 · 4년간 이스라엘에 머물며 유다주의 공부   · 1981년부터 로마에서 신학과 교회법 공부   · 1985년 사제 서품
  · 1994년 프랑스 및 해외에서 공동체 양성 · 프랑스와 해외에서 피정 지도

저서 「평화 안에 머물러라」•「내면의 자유 」•「소화 데레사 사랑의 엘리베이터」 외 다수

옮긴이 : 추교윤 신부
· 가톨릭대학교 졸업
·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 취득
· 현재 행주성당의 주임신부 
저서 「내적인 삶으로의 초대」•「한국 천주교회의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역할」외 다수

 

나눔의 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기도를 배운다」는 “1장 기도의 목적, 2장 열매 맺는 기도의 조건, 3장 하느님의 현존, 4장 개인 기도를 위한 제안들, 5장 전구轉求” 로 구성되어 있으며, 막연히 알고 있던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소중한 내용들을 간추려 옮겨봅니다.  


〈들어가면서〉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그의 삶에 자유롭게 개입하시고 활동하셔서, 당신의 은총으로 놀라운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매우 가정적이고 자기 일에 충실한 평신도들이 날마다 20분간 기도하면서도 하루에 5시간 기도하는 수도자들과 같은 은총을 받는다. 
 이 책을 통해 기도 생활의 궁극 목적이신 하느님과 깊고 친밀하게 만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장 기도의 목적

충실하고 끈기 있게 기도하려면 분명한 동기가 필요하다.

“기도 안에서 영혼은 죄에서 정화되고 애덕이 자라며 믿음이 깊어지고 희망은 강화된다. ... 슬픔은 사라지고 감각은 새로워지며 미지근한 마음이 사라지고 악덕의 녹은 불살라진다. ....”
  -프란치스코회 수사이며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수도회 개혁에 중대한 도움을 준 피에르 달칸타라 성인이 쓴 ‘기도와 묵상에 관하여’ 내용 중에서-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하느님과 친구가 된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머무시게 된다. 기도로 실현되는 이러한 상호관계와 사랑의 교환이 없다면 그리스도교는 속 빈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고, 복음 선포는 선전 활동일 뿐이며, 인간 구원을 위한 투신은 인간 조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하는 자선사업일 뿐이다.


기도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

 기도생활에 들어가도록 촉구하고 격려하는 첫째 요소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도에 초대하신다는 사실이다.
‘끊임 없이 기도하라’ (루카 18,1), ‘늘 깨어 기도하라’ (루카 21,36), ‘간구하며 깨어 있으라’ (에페 6,18)고 말씀하시는 부르심에 있다.
 
 기도를 바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원하기 때문도, 기도생활에서 유익을 기대하기 때문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바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가 예상하고 바라고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어선다.

 기도생활을 이끄는 주된 동력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제안하시는 것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신앙이다.
 이익을 얻으려고 기도한다면 어느 순간 절망할 것이다. 그런 이익은 즉각적이지도 않고, 얼마나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측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생활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태도에 토대를 둘 때 더욱 풍요롭고 유익하다. 기도에 대해 실리주의적인 생각을 하면서 효율성과 이익의 논리에 갇혀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부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해 ‘시간을 버리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사실로 충분하다.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풍요로워지는 잃음’ 인 것이다.

기도생활에는 무상성無償性이라는 매우 중요한 특성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보상을 바라지 않는 기도일수록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기도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별다른 이유를 요구하지 않고 행할 정도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기도를 피하는 사람은 좋은 것을 모두 피하는 사람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삶의 첫 자리에서 모셔야 할 하느님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을 중심에 두었을 때만 완전한 균형과 아름다움을 갖출 수 있다.
기도에 충실하지 않다면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이 마음뿐이거나 착각일 수 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인격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ego를 교묘하면서도 확실하게 삶의 중심에 둔다.

 하느님께 첫 자리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무관심과 게으름에 떨어지거나 집착과 애착, 산만함과 불필요한 걱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보상 없이 사랑하기

 충실하게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상성의 정신을 간직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느님을 위해 시간을 내드리는 것이다. 결국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의 태도이다.
 기도는 다만 함께하는 기쁨을 맛보려고 무상으로 하느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기도는 사랑하는 것이다.
 기도는 단순하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을 가르쳐 준다. 꾸준한 기도는 이웃에 대한 관심을 배우는 가장 아름답고 효과적인 길이다.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봄

 기도는 하늘나라를 미리 맛보게 한다. 기도생활을 하다보면 갈등과 어려움, 건조함을 만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꾸준히 기도하면, 형언할 수 없는 행복과 평화, 천상낙원을 미리 맛보는 만족을 누릴 때도 있다.
 현세에서 이미 영원한 세상에서 하게 될 활동과 기쁨이 될 것을 배운다고 할 수 있다. 흠숭과 경배,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능력은 해보지 않아 묻혀있기 일쑤이지만 기도를 통해 이를 배우게 된다.

 주목해야 할 멋진 사실은, 기도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면, 하느님의 창조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관상은 창조적 능력과 창의성을 길러준다.
 렘브란트, 요한 세바쓰찬 바흐와 같은 예술가처럼 신앙과 기도를 쇄신할 때만 참된 창조성의 근원을 재발견하여 인간에게 참으로 필요한 아름다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자신을 아는 것

 기도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과 자신에 대해 점점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다.
 교육이나 문화에서 물려받은 이념에 만족하면서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하느님이나 심리학적인 투사로 만들어진 하느님이 아니라 참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빛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을 아버지로 드러내신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예수께서 기뻐하신다는 루카복음 (10,22)으로 미루어 보아 계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께 받은 것이며, 그것도 순전히 은총의 힘으로 받은 것이기에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고, 자기 것이라 주장할 수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우리에게 근본적인 정체성을 주는 것도 바로 이 사랑이다. 내 정체성은 나의 역사와 유전적 요소, 내가 체험한 것과 내린 결정에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부분은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부분은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만 드러나고 펼쳐진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나의 정체성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을 벗겨내고 내 인격의 핵심인 참 자아에 다가가게 한다.

 내 인격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나를 위한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과 그분에 대한 나의 특별한 사랑이다. 나는, 단순하지만 끝없이 풍요로운 이 두 가지를 차츰차츰 발견해 가야 한다.
 내가 고유한 방식으로 사랑받는다는 확신과, 약하고 한계가 있음에도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확신은 기도가 가져다주는 실로 소중한 은사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 정체성의 가장 깊고 탄탄한 핵심이 형성된다.
 물론 이는 우리가 자랑스레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는 것으로서, 깊이 겸손하고 가난하게 살아야만 맛볼 수 있다. 또한 그것을 소유했다고 들먹이며 자랑 삼을 대상이 아니라 신앙과 희망의 대상이다.


기도는 이웃에 대한 연민을 낳는다

 기도의 아름다운 열매 가운데 하나는 이웃 사랑의 성장이다.
 진실한 기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고 그분과 일치하게 한다. 그러면 우리는 피조물에 대한 그분의 끝없는 사랑을 알아보고 그 사랑에 참여하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신비주의 대가이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온화하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영혼이 하느님과 사랑으로 깊이 일치하면 할수록 이웃에 대한 동정심이 커간다는 것은 분명하다.
    -십자가의 성요한-

 

자유의 길인 기도

 기도에 충실 할 때 우리는 차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기도는 우리가 끝없고 영원한 사랑, 평화, 안전, 행복과 같이 우리가 갈망하는 본질적인 것들을 하느님 안에서 찾도록 가르쳐 준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중심에 모셔야 하고,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으며 가난한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구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실재로부터 기대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우상숭배라고 한다.
 
 우리가 기도에 충실할 때, 참된 보물은 우리 안에 있고 하느님의 나라와 행복도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차츰차츰 경험하게 된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세상 재물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고, 소유에 과도한 집착에서 해방되며, 우리를 복잡하게 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 뿐인 물질적인 것들로 삶을 채우려는 모든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삶을 통합하는 기도

계속해서 충실하게 기도해 나가면 기도는 삶을 ‘통합하는 훌륭한 중심’으로 자리매김한다.  행복한 상황이든 아니든, 좋은 선택이든 아니든,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리’되면서 은총이 된다.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니면서 사랑을 성장시키는 길로 통합된다.

 

2장 열매 맺는 기도의 조건

내적 평정심을 가져오는 기도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 한다면 우리는 더욱 겸손하고 온유하며 인내롭고 더 잘 신뢰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가 갈라티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로 언급하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가 기도를 통해 삶 안에서 조금씩 자라난다.
 애덕愛德은 기도생활의 열매인 동시에 참된 기도생활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최종 척도이다.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코린도 13,1-3)-사도 바오로-

 기도할 때 대체로 평정심이 느껴진다면 기도생활은 총체적으로 보아 우리 인격 안에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이 평온함의 근원은 하느님이시다.
 또한 기도생활의 소중한 열매 가운데 하나는 마음의 순수성(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그분 뜻을 행하려는 열망으로 신뢰하면서 온전히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열매 맺는 마음 자세

 첫 번째로 기도할 때의 마음 자세는 충실성을 기도의 중요한 특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잘하라고 하시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하신다.
 악마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영혼이 충실성에서 돌아서도록 온 힘을 다한다. ‘그래봤자 아무 소용없다. 시간 낭비다, 차라리 오늘보다 내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이런 악마의 속삭임에도 불구하고 기도에 충실한 영혼은 악마로부터 벗어난다. 비록 수없이 넘어지지만, 넘어질 때마다 더욱 높이 올라가는 은총을 얻는다.

신망애信望愛 삼덕으로 고무된 기도

 기도생활에서 열매를 가져다주는 것은 어떤 기술이나 특별한 형식이 아니라 내적 자세이다. 기도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방법을 사용할 때 그 모든 것의 바탕에 신망애 삼덕이라는 자세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신앙의 문

 신앙은 기도 안에서 표현되고 새로워지며 순수하고 확고해진다. 기도하는 순간부터 이미 신앙 행위를 하는 것이다.
 모든 기도에는 암묵적이지만 근본적인 신앙 행위가 있다. 이 신앙 행위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음을 깨달을 때 큰 힘이 난다.
 
영혼이 믿음을 많이 가질수록 더욱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 십자가의 성요한 -


기도생활에서 감각이 하는 역할

 인간의 감성은 매우 소중한 능력 가운데 하나로서 느끼고, 감동하고, 내적인 떨림을 갖게 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자들은 감성적인 요소가 교회 안에서 홀대받는 것 때문에 자주 고통을 겪었다. 오늘날 비어가는 서구 교회의 모습은 전례가 장황하고 냉정하며 지루하기만 할 뿐 그 밖의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에 일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생활에서, 특별히 전례에서 아름다움과 감각적인 열정이 드러나고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감각의 한계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하느님은 무한히 위대하시고,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을 한없이 넘어서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의 현존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감각이 비어 있는 듯하고 건조하고 메마를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메마른 데도 기도에 충실하고 기도 속에서 신앙을 다져나갈 때 우리는 감각과 관련해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현대 문화는 사람들을 오직 감각에만 지배되도록 떠미는 문화이다. 이는 미성숙한 상태, 심지어 노예상태로 귀착될 뿐, 오로지 감각적 느낌을 위해서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사람은 아주 유치한 수준에 있는 것이다. 참된 자유는 다른 이가 내게 기쁨을 주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를 사랑하는 데 있다.  

 
지성의 역할과 한계

 지성은 인간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믿는 것을 더욱 잘 이해할수록, 신앙은 우리에게 더욱 큰 힘과 빛이 된다.
 그런데 지성에도 한계가 있다.
 하느님에 관해 이해한 모든 것이 하느님 자신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은 지성이 인식하고 지각하는 것을 넘어서는 한없이 크신 분이다. 어떤 개념도 하느님 자신과 전적으로 합치될 수 없다.

 지성은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지만 하느님께 이르지는 못한다. 오직 신앙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떤 순간이 되면 지성은 입을 다물고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교회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 할 수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생애 말년에 자신이 기록한 모든 것이 단지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를 거쳐야 한다. 지성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겸손해지는 순간을 겪지 않으면 인간적이거나 영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과 삶의 깊은 진실에 접근하게 하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신앙이며, 비록 지성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해도 신앙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과 접촉하기

 신앙은 영성생활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하다. 신앙을 통해 신비스럽지만 실제로 ‘하느님을 만질’ 수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지시도록 할 수 있으며,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분 은총에 힘입어 조금씩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와 희망
 
 기도는 희망의 행위이다. 희망 행위는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태도에서 비롯된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작고 초라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기대합니다. 따라서 나의 가난함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기회가 됩니다.’
 기도생활은 반드시 가난을 경험하게 한다.
 구원의 문은 겸손과 희망이라는 두 가지 태도 안에 있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의 한계와 잘못을 냉철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신뢰와 희망을 우리의 성격이나 착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두는 것을 배우는 데 있다.
 하느님이 들으시는 유일한 기도는 가난한 이들의 기도이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시편 130,1 )


겸손의 힘

 겸손의 힘을 참으로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우리의 비참, 무능력, 실패들을 가장 소중한 보물로 여길 것이다. 겸손은 자신의 가난과 약함을 고통스럽게 대면하고 인간적 자만을 없애며 ‘자아’의 이기적인 요구를 모두 내려놓을 때 얻을 수 있는 열매인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자기 자신에게로 내려감
 
 기도에 충실하다 보면 마음에 있는 심리적 상처나 죄와 오점 등 괴로운 것들과 대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도덕적인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도에 충실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그 현존이 마음껏 활동하게 하면서 정화되는 것이다.
 기도의 결과인 내면화는 단순한 잠심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면화는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생각과 행동의 원천이 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그 현존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행위인 기도

 기도는 한마디로 하느님과 사랑을 배우는 학교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기도는 하느님께 우리의 삶인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이다. 특히 이웃을 위한 전구는 이웃을 의식적이고 분명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행위이다.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에 특별히 마음을 쓰는 기도가 아닌 단순한 흠숭 기도에서조차 진실한 이웃 사랑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는 실제로 기도를 통해 평온해지고 진정되며 겸손하고 자비로워져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여정에 보내시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선익을 끼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이다.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학교이며 기도는 자신에 대한 올바른 사랑을 가르치는 탁월한 방법이다.

 

3장 하느님의 현존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선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현존하시는 동시에 숨어계신다는 것이다. 현존에 다가가고 현존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신앙, 곧 삼위일체의 마리아 수녀의 표현을 빌린다면 ‘사랑이 스며든 신앙’뿐 다른 모든 방법은 아무런 효과가 없지만 신앙과 사랑은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자연 안에 계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첫째 말씀은 당신의 창조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함과 능력, 지혜를 표현하신다.
 얼마나 많은 성인이 세상의 아름다움 앞에서 경탄하고 창조된 것들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를 알아보았는지 놀랍기 짝이 없다.
 자연과 접촉할 때 우리는 삶 안에 하느님의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현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고, 사랑과 신뢰를 살찌울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계시는 하느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하느님이 인간과 함께하시는 근본적인 방법은 그리스도의 인성이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강생 신비를 통해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셨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접하게 해주는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맞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겸손하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분 생애의 사건들을 묵상하는 것, 그분의 태도와 말씀을 묵상하는 것, 성화와 십자고상을 바라보는 것, 성체조배와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 등 이다.

마음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기도생활과 관계되는 가장 결정적인 하느님 현존의 양상 가운데 하나는 마음 안의 현존이다.
 하느님께서는 감춰지셨으나 실제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라고 선언하신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몸은 “성령의 성전”(1 코린 6,19) 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중세의 어떤 그리스 수도자는 “그대가 성전이니, 다른 곳을 찾지 마시오!” 라고 말했다.

 기도의 본질적 차원 중 하나는 잠심과 내면화의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움직임을 통하여 자신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만나게 된다. 현존은 경험이나 감각적 대상이 아니고 신앙의 대상이다. 우리가 신앙을 지니고 기도하면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과 만나기 위해 우리 안으로 잠심하는 노력을 자주 기울인다면 이 같은 신앙은 차츰차츰 현존을 경험하게 할 것이고 우리 안의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께서 평화·거룩함·순수함·행복의 마르지 않는 샘으로서 충만한 은총으로 함께 머물고 계심을 확인시켜 줄 것이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 때로 사물과 사람을 떠날 줄 앎으로써 우리는 가장 효과적으로 사물과 사람과 일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 영혼은 행복하여라. 세상 전체를 얻은 것보다 더 행복하다네.


말씀으로 기도하기

 하느님 현존의 또 다른 방식, 곧 말씀 안의 현존은 기도생활에서 본질적이다. 그러므로 기도하기로 마음먹고 그 시간을 어떻게 잘 사용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면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부터 하라고 권하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느님과 친밀해 지는 것이다.


말씀과 식별

하느님 말씀이 지닌 식별의 힘은 히브리서구절에 잘 나와 있다.
사실 하느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4,12-13

성경의 보물은 학자나 지식인에게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복음으로 회개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점이다.

 

4장  개인기도를 위한 제안들

기도시간 밖에서

 개인기도의 질質은 기도 시간 밖에서 어떻게 생활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분명하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애쓰지 않는다면 기도 시간에도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 없다.
 기도 시간과 삶의 나머지 시간 간의 상호 관계에 대해 두 가지를 강조하면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기’와 ‘애덕의 실천’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감사기도의 재료가 되고 걱정거리는 청원기도의 재료가 되며, 어려운 결정은 성령의 빛을 구하는 기도의 재료가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신과 함께 있기를 바라신다.

 하느님과 함께하기 위해 하루 종일 교회에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마음을 경당으로 삼아 때때로 그곳으로 물러나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다.

 이웃사랑의 결핍, 이웃의 필요에 무관심,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이나 고통을 고의로 간직하는 것, 용서에 대한 거부는 기도생활을 아무 의미 없게 만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기도하는 동안 감각적인 기쁨 없이 메마르고 지루함만 느껴질 때가 있다. 때로 이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을 애덕 행위 안에서 찾으라는 부르심일 수 있다.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뜻이고, 우리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리듬에 따르기

 인간 존재는 리듬을 따른다. 호흡의 리듬, 낮과 밤의 리듬, 주간 연간의 리듬.
 기도에 충실하기를 원한다면 기도가 삶의 리듬 안에 자리 잡게 해야 한다.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하고, 한 주간의 특정한 때에 하느님께만 특별히 바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기도가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일에 매여 있어 날마다 10분 정도밖에 기도할 수 없는 사람에게나 (그 일이 그에게는 하느님의 뜻이다) 하루에 5시간 기도하는 수도자에게나 똑같은 은총을 주신다.


기도의 시작과 끝

 기도의 시작이 중요하다. 특히 진정으로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무는 행동은 때때로 노력이 필요하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께 주의와 사랑을 쏟으려면 근심이라든가 머릿속의 상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기도 초기에 하는 몇몇 통상적 의식은 하느님 현존 앞에 머무는 것을 도와준다.(성화 앞에 있는 초에 불을 붙인다거나 절을 한다거나 성령을 부른다거나 좋아하는 시편을 암송한다거나 성모님에게 기도하며 기도 시간을 맡겨 드리는 등)
 
 기도의 마침은 첫째로 기도에 할애하기로 한 시간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기도 시간을 엄수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충실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드리기로 결심한 것은 번복하지 말아야 한다.

본격적인 기도 시간

 가장 본질적인 것은 기도에 뛰어들어 지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뜻을 가지고 충실하게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 더욱 잘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온전히 신뢰해야 한다. 인간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서 잠심을 활용하거나 (잠심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이완과 수용의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온전히 향하고 있는 실재에 집중하는 상태이다) 또 하나는 영적인 차원의 것이다.

 기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긴장을 풀고 맡겨드려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방식에 따라 하느님의 현존에 더욱 깊이 집중해야 한다. 성당에 있다면 침착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현시된 성체에 주의를 집중하고, 방에 있다면 적당한 곳에 앉아 조용하고 편안하게 복음을 읽으면서 복음이 나에게 건네는 말씀을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인다.

 특별한 은총을 받지 않고서는 완전한 잠심에 도달하기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잠심으로 나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서는 내 능력에 따라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는 능동적인 잠심을 말한다.
 능동적인 잠심에서는 몸과 마음의 긴장을 푸는 것이 중요하다.(이완된 자세와 의식적으로 부드럽게 들이마시는 호흡, 몸과 마음으로 온전히 현 순간에 머무는 것)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수동적 잠심의 은총을 받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때의 잠심은 전적으로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하느님 은총의 결과이기에 ‘수동적’ 이라고 불린다.
 영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저런 방법이나 실행 방식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다. 곧 믿음, 신뢰, 겸손, 자신의 약점에 대한 수요, 사랑하려는 갈망 등이 중요하다.
 몸의 자세에 대하여는 기도는 고행 훈련이 아니므로 너무 불편한 자세는 끊임없이 몸을 의식하게 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잠심에 도움이 되면서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더 이상 ‘뭘하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때

 우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커갈수록 ‘뭘하지?’라는 질문을 덜 하게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제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또 다른 상황은 하느님께서 관상기도의 은총으로 이끌어 주시기 시작하는 때이다. 
우리가 이런 상태에 있다면 그대로 머물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수동적인 기도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움직임을 따르는 것이 내가 할 유일한 행동이다.

능동적 노력이 필요한 경우

 자발적인 대화를 통해서든 관상적 잠심의 은총을 받아서든 기도가 저절로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는 좀 더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는 성경 묵상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한 형태의 반복기도이다. 

성경 묵상

 우리는 여기서 매우 오래된 레시오 디비나 전통과 만나게 된다. 레시오 디비나는 하느님을 만나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자신을 여는 데 목적을 둔 성경 읽기이다.

그 시간과 그때
 레시오 디비나를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아침이다.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삶에서 가장 시급한 일임을 증언한다는 점, 신선하고 더 잘 준비되어 있으며, 걱정에 사로잡히는 일도 덜하기 때문이다.

어떤 본문을 묵상해야 하는가?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한 텍스트( 복음서 중 하나, 바오로 서건 중 하나, 다른 성경 테스트)를 매일 묵상할 수 있다. 교회가 매일 미사에서 제공하는 본문을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가?
 렉시오 디비나의 결실은 방법의 효율성이 아니라 내적인 태도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테스트에 곧바로 뛰어들기보다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신앙과 갈망으로 기도하려는 바람직한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 때마다 하듯이 정신을 집중하고 하느님 현존 앞에 머무는 것으로 시작한다. 걱정과 염려를 내려놓고 오직 필요한 한 가지를 한다.
 예를 들면, 독서를 시작하기 전에 눈을 감고, 몸과 마음으로 모두 현 순간에 머물며, 긴장을 풀기 위해 어깨와 근육을 이완시키는 등 육체적인 준비를 하는 것이다.     
 
 준비가 잘 되면 눈을 뜨고 선택한 본문을 읽어 나간다. 관심을 끄는 성경 구절들을 여러 번 되풀이해 읽고 이 구절을 통해 하느님께서 오늘날 나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알아듣는다.
 그러나 렉시오 디비나 시간을 지성적인 연구 시간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를 격려하는 구절에는 감사드리고 어려움이 예상되는 회개로 초대하는 구절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도움을 청한다. 어떤 순간에 은총이 주어지면, 독서를 멈추고 좀 더 관상적인 기도 자세 안에 그대로 머문다.

 레시오 디비나의 4가지 단계는 곧 렉시오(독서), 메디타시오(묵상), 오라시오(기도), 콘템플라시오(관상)이다. 처음 세 가지는 인간의 활동에 속하는 것인 반면, 넷째 것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다. 넷째 것은 우리가 바라고 갈망하는 은총의 선물이지만 언제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가끔은 성경보다는 오히려 우리 삶의 어떤 순간에 특별히 와닿는 영적인 작품이나 성인들의 글을 묵상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과 직접 만나는 것도 계속해야하는데 성경은 때때로 더 어렵지만 감동을 주고 여느 인간의 작품보다 훨씬 풍부한 보물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기도를 향해

 성경 묵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상기도에 접근하는 길은 예수기도, 묵주기도와 같은 다양한 전통의 반복 기도를 통한 길이다. 이 기도들은 아주 단순하고, 기도 시간뿐 아니라 기도 시간 외에도 활용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반복기도에 대해

 지속적인 기도를 위해 특별히 수도원에서 사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성경에서 영감을
받거나 추려낸 짧은 문구를 활용하는 것이 있다.
하느님, 어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4세기 이집트 수도자들이 반복했던 시편 70,2)

 오늘날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반복하는 것은 그다지 환영받을 일은 아니다. 삶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들이 의미를 잃어버린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반복은 어떤 의미에서 기계적이고 타성적일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복은 본질적으로 삶과 관계가 있다.(반복되는 심장 박동, 호흡 등)
 앞에서 언급했듯이, 리듬은 인간 실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진정 시키는 효과가 있고 에너지를 낭비하거나 고갈시키지 않고 오랫동안 보존하게 해준다.

 따라서 기도 시간에 반복기도를 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특히 피곤한 순간이나 지성을 동원하기 어려울 때, 또는 묵상보다 가난하지만 더 단순하고 본질에 가까운 기도를 하도록 성령의 충동을 받을 때 반복기도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 
 반복하는 리듬은 잠심 상태로 들어가게 한다.

 단순성이라는 장점 말고도 반복기도는 습관을 들이면, 정해진 기도 시간 외에 하루 중 아무 때나 기도할 수 있는 소중한 원천이 된다는 좋은 점이 있다. 자동차에서, 산책하는 동안, 졸음이 올 때, 활동하면서,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작업을 하면서 기도할 수 있다.

예수기도

 예수기도의 바탕에는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오래되고 아름다운 영성이 있다. 예수님 자신이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

 6세기 이집트 수도자 마카리오의 글 “우리가 계속해서 이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그 이름을 음미한다면, 그분은 우리 영혼 안에 부드러움을 가져오고 천상의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처럼 때로는 오로지 이름 자체만 부르는 단순화된 기도방식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다.
                  
묵주기도

 묵주기도는 예수기도와 매우 다르지만 단순한 반복기도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마음만 잘 준비되어 있으면 묵주기도도 하느님과 나누는 깊은 친교와 관상기도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겸손한 간청 외에도 성모송은 찬미와 감사를 포함하고 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의 도움으로 그리스도 신비의 풍요로움을 모두 섭렵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묵주기도에서는 단어를 반복하는 리듬, 묵주알을 굴리는 손, 편안한 자세와 고른 호흡이 중요하다. 단순한 문구를 사용하는 묵주기도는 지성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묵주기도는 지성을 그 한계와 본질적 역할, 곧 받아들이는 능력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묵주기도는 단순하고 가난하기에 매우 강력한 기도이다. 마리아의 어머니다운 손길을 통해 기도생활을 풍부하게 만드는 신앙, 겸손한 희망, 단순하고 충실한 사랑과 같은 근본적인 자세를 갖추게 하기 때문이다.

 


5장 전구轉求

 청원기도는 우리가 가장 자연스럽게 바치는 기도다. 물론 우리의 기도가 이런 것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전구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기도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요한 14,13)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것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바치는 전구는 교회 직무의 근본이다. 하느님의 친구라는 자격으로든,그분 배우자나 자녀라는 자격으로든,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보이시도록 끊임없이 간청해야한다.
 우리는 중개자의 역할을 한 도미니코 성인과 소화 데레사 수녀와 같은 성인을 많이 볼 수 있고, 그들의 삶에서 영적인 부성과 모성을 증거 하는 단면들도 발견한다.


영적 투쟁과 성장의 길인 전구

 전구轉求는 성장과 개인적인 정화의 길이기도 하다. 전구하면서 은총과 기쁨을 맛볼 뿐 아니라, 영적 투쟁을 겪고 회개를 체험한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전구하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좁은 울타리에 갇힐 수 있다. 우리 마음은 하느님 마음의 차원으로 넓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고자 하시는 또 다른 차원의 전구에 열려있어야 한다.
 전구한다는 것은 단지 우리 삶과 직접 관계있는 사람들을 위해 간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 인간의 온갖 필요를 끊임없이 말씀드리는 예수님의 전구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을 때

 이는 마치 믿음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것이라는 복음 말씀과 모순되는 것만 같다. 이러한 무응답은 살아가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하느님의 지혜에는 언제나 신비로 남는 부분이 있으니 이 신비를 존중하면서 우리가 드린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다.

 우리의 기도는 조만간 응답을 받는다. 어쩌면 우리가 상상한 때와 형태로는 아니더라도, 우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이 원하시는 때와 방식으로 응답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하느님을 조종하려는 것은 모든 이교異敎가 시도하는 바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빚지신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은 역설적이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드는 다정하고 친밀한 관계를 갖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분의 초월성과 지고의 자유를 절대적 존경으로 대할 때만 그 친밀함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우리가 좋은 활동을 한다고 해서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어떤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절대적으로 거저 주어진다는 확실한 의식이 유익하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관계는 왜곡될 것이고, 사랑의 논리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계산 관계로 전락할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의 자격과 자질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와 사랑의 무상성 때문에 우리에게 응답하신다.

 감사드리는 것만큼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은 없다.

 주님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아멘. 

댓글목록

작성자: 계희hall님     작성일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꼭 구입해서 읽어야겠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다른이들 보다
먼저 사랑하기 위해
성경공부도 하고
영적독서로
기도까지 배워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