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8. 1월 영적도서 : 「식별」Il discernimento
지은이 : 마르코 이반 루프니크
· 1954년 슬로베니아 자들로그 출생 · 예수회 회원 · 화가
· 로마 ‘순수예술 아카데미 Accademia di Belle Arti’ 학부 졸업 후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 공부
· 현재 그레고리안 대학교 동방영성학과 선교신학 교수
옮긴이 : 오영민
· 1975년 서울가톨릭대학교 졸업 후 로마 성 알폰소 대학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
·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처 차장, 춘천교구 교육원장 등 역임
나눔의 글
‘가보지 않은 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라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었습니다.
중략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더라고.
로버트 푸르스트의 詩 ‘가보지 않은 길’처럼 우리는 날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善이든 惡이든 순간마다 선택을 해야 하는 식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식별」은 하느님을 알고 닮고 따르는 감각 그리고 그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이해하며 생각과 행동을 다듬어 나가는, 일반적인 영성생활 내지 신앙적 여정 이라는 배경 위에서 영의 식별 문제를 바라보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머리말〉
“모든 감각적 능력을 온전히 하느님께 향할 수 있는 영혼은 완전한 영혼이다”
-성 막시모 증거자-
식별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우리 주님과 구세주로 인정하는 기술이다. 이 책의 목적은 식별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통교와 상호이해의 기술로서 지니고 있는 역동적인 힘을 탐구하는 것이다. 식별은 영성생활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 속에, 따라서 사랑의 공간 속에 존재하는 실체이기에 식별의 실제적 방법을 전수 받을 필요가 있다.
식별에 대한 책들을 읽는 것이 아무리 유익하다 할지라도 식별은 그 비법을 전수해야 접근할 수 있는 실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런 비법 전수에는 이성적이고도 체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것만 아니라 훌륭한 조언자한테 식별을 배워 익혀 점진적으로 더욱더 주님과 일치해 나가는 여정의 수고가 함께해야 한다.
1부 하느님 맛들이기
1장 식별의 근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실질적인 관계가 존재할까? 하느님과 인간은 진정 서로 통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명령하시고 인간은 그저 그 명령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계명을 근거삼아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것인가? 과연 하느님의 위대하신 계획안에 인간을 위한 자율적 공간이 있는가?
영성생활의 대가들은 이러한 물음들로써 식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이 물음들은 하느님과 인간을 두 실체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성부의 사랑에 참여케 하시는 거룩하신 성령의 활동으로서 서로 관계 맺으며, 이로써 인간은 자신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고 또한 그 사랑 안에서 창조된 이웃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이같이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은, 하느님께서 더 이상 우리의 인간적 실체 밖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우리 본성의 내적 실체가 되신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참된 통교가 존재한다. 교부들은 보통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교를 가장 확실하게 표현하는 언어로 상징적 언어를 택했다. 그들에게 식별은 기도이며 성령 안에서 생활하는 참된 기술이었다.
이렇게 볼 때 식별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살아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일 뿐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자유로운 관계로, 곧 식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자신의 고유한 인격의 창조자로서 체험하게 된다.
하느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순간부터 존재하는 모든 것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 사랑의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창조의 모든 요소를 한데 결합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적 친교를 생성하는 구조적 맥락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별은 이러한 총체적 유대 관계에 유의하면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기술이며, 생명의 일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기술이다.
자유로운 관계를 통해 구현된 사랑
삼위일체로서 믿고 묵상하고 흠숭하는 하느님의 위격은 자유로운 관계와 친교의 구현으로서 드러난다.
요한이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때, 그 말에는 하느님은 자유로우신 분이며 사랑에는 자유로운 충실성과 자유로운 관계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자유로운 관계가 없다면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관계 곧 친교를 의미하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친교적인 것으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 일어난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을 알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상징적 지혜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인식은 결국 우리를 하느님을 닮는 삶으로 이끌어 준다. 곧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당신을 닮도록 해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당신 자신의 존재 방식을 인간에게 전해주신다. 이런 식의 친교가 바로 교회 공동체의 삶이다. 따라서 실로 우리는 교회를 통해 믿는 이로 태어나게 된다.
믿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의 행위는 관계적 행위로서 사랑의 행위인 동시에 자유의 행위다. 사랑이 없이는 하느님을 진실로 믿는다고 볼 수 없다. 사랑은 사람이 죄를 지은 후에 자신한테서 눈을 돌려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향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분리는 죄로 인해 초래되는 중대한 해악이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아는 것은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고 성령께 마음을 열 때만 가능하기에 회개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에서 갈라진 것은 죄 때문이다. 사랑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실현하려는 사람은 바오로가 ‘육체’라 일컫는 차원을 추종하게 된다. 우리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고 우리에게 완전성을 체험하게 해주며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자유로운 관계를 향해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사랑뿐이다.
만일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그분의 구원행위에서 경험으로 얻어진,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 대한 체험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그런 인식은 우리의 오만한 이성의 이기적 환상 또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예레미야서 31장 34절의 말씀은 주님의 자비를 체험함으로써 주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식별은 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
식별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게 어떻게 전해 주시는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시는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내 안에 실현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성령께서 그 구원을 전해 주시는지를 이해하는 영성생활의 기술이다. 식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을 내 손에 자유롭게 맡기신 하느님께 대한 자유로운 의탁을 체험하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식별은 내 안에, 모든 피조물 안에, 내 주위의 사람들 안에, 나의 개인적 역사와 더욱 일반적인 역사 안에 존재하는 모든 현실이 침묵을 깨고 내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시작하는 기술이다.
그뿐 아니라 또한 식별은 내가 속임수와 환상을 피하고 참되게 현실을 해석하여 읽음으로써 헛된 약속들로 드러나는 것들을 꿰뚫어 간파하여 거부하는 영적 기술이기도 하다. 식별은 하느님과 직접 이야기하는 기술이지 유혹과 이야기하는 기술이 아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을 피하려면
식별은 관상적 지혜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하느님을 관상하고 바라볼 줄 아는 법을 전제하는 기술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우리는 그 사랑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구현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언제나 파스카의 차원과 성령강림의 차원이 있다. 그러나 곧 희생과 부활을 통해 실현되는 사랑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다.
사람들은 대부분 파스카의 길을 피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조만간 그 온갖 노력이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참된 삶의 맛을 공허하게 만드는 환상으로 드러나고 말 것이다. 이 때문에 식별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이 길은 관상적이고 지혜로운 길이다. 아름답고 선하고 숭고하고 의로운 모든 것은 어려움과 장해와 저항의 한가운데서 실현된다. 이를테면 파스카의 차원을 취한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참된 묵상과 탁월한 식별의 기술이 필요하다. 식별은 근본주의에서 광신적 행위에 이르는 다양한 이탈에서 우리를 보호해 준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행하려 하는 것이 하느님께 자유롭게 의탁하고 그분의 뜻과 일치하여 행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 영적으로 의미 있는 일들은 결코 어떤 사람이 그것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구원사업을 수행하실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당신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셨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소명을 발견하려면
사람은 성부께서 사랑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창조되었다. 성령께서 이 사랑을 사람 안에 거처하게 하시며 성자의 모상을 박아주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창조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작품이다.
구원도 똑같은 사랑의 행위다. 구원은 사람에게 성자의 형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충만히 실현하게 하여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부자관계가 이루어지게 한다. 그 관계는 형제자매들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 사이의 일치를 통해 충만히 실현된다.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돌아가는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소명은 이러한 창조와 구원의 배경 위에서 이해된다.
우리의 소명은 사랑 안에서, 곧 우리가 창조된 대화의 원리 안에서 가장 으뜸 대화자이신 하느님과 더불어 인간성을 충만히 실현하는 것이다.
식별은 사랑이라는 나의 소명을 성취하도록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시간을 聖化하며, 파스카의 희생을 통해 사랑을 충만히 실현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삶을 충만히 실현하도록 돕는다.
나의 소명은 하느님의 눈으로 나 자신과 나의 역사를 점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 안에서 당신 뜻을 어떻게 실현하시는지를 깨닫는 것이며, 어떻게 내가 나 자신을 이 일에 개방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시기 위해 취하시고 또 그것을 통해 인간도 되시는 바로 그 인성의 일부가 될 수 있을지를 깨닫는 것이다.
교회의 전승을 좇아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느님과 이런 대화를 나눔에 있어 우리는 어느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믿는 것이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면 믿음이 참되게 실현하는 것이 공동체이며, 자유롭고 영적인 관계를 맺는 기술이야말로 믿음의 참된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교회생활에 참여하고 신앙의 아버지로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사목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교회는 전승과 전례와 교도권의 가르침을 통해 완전하고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식별하고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해 하느님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구원을 식별한다.
2장 식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인식하나
하느님과 각 사람 사이에는 실질적인 관계가 있고 그에 따라 참된 친교가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 하느님은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친밀한 실체로서 행동하시는 영이신 성령을 통해 그 사랑에 참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를 받은 생각들이나 성령께서 부추겨주시는 감정들은 사람을 충만한 자기실현으로 이끌어 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통해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의 수단으로 사용하시지 않는 생각과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과 감정이 우리를 탈선시키거나 혼란케 하거나 속일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성령에 의해 일어나지만 또한 세상과 환경과 우리 자신 그리고 악마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어떤 생각에 어떤 감정이 동반되는지, 또는 어떤 감정에서 어떤 특별한 생각이 나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어째서 그리 중요할까? 문제는 복음 중심적인 생각을 갖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쳐 따라야 할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식별의 태도
식별은 생각과 감정의 상호작용과 관계가 있다. 생각과 감정의 상호작용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유익한 이유는 생각과 의식 자체의 ‘맛’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곧 영적 의식에 동반되는 맛을 확인해서 영적인 맛과 향기에 대한 지속적인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 때까지 의식을 훈련하는 것이 곧 식별의 목표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맛들이고 그분한테서 비롯하고 그분께 이르는 생각들을 확실히 습득할 때 우리는 식별의 태도를 갖추게 된다.
사실 모든 식별 훈련은 항구한 식별의 태도를 갖추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수련으로서의 식별과, 습관과 항구한 태도로서 또 모든 기도 활동에 의해 초래되는 기도 성향으로서 습득된 식별의 태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식별의 태도는 하느님과 성령께 항구히 주목하는 상태이며,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하느님께서 당신에 대해 전해주시는 것 그리고 하느님 자신에 대한 주목만으로도 이미 근본적 회개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또한 식별의 태도는 나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당신의 자유에 따라 당신 말씀을 들려주시어 나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는 객관적 가능성을 고려함 없이는 어떤 일에 대한 나의 사고 과정에 결론을 내릴 수 없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식별의 태도는 완고해지는 것을 막는다. 곧 ‘내가 옳다’고 하는 생각에 나를 가두어 두지 않는다. 내 모든 것의 진원지는 내가 아니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영적 지혜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식별의 훈련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이 근본적 체험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 체험은 순종이라는 겸손이 함께 할 때, 곧 온전히 듣는 태도가 갖추어 질 때 항구히 기도하는 식별의 태도가 될 수 있다.
식별의 두 단계
영성 대가들은 식별의 단계를 두 단계, 곧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참되게 인식하고 자신의 역사와 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참되게 인식하는 데 집중하는 첫째 단계, 곧 정화의 단계와, 식별이 습관habitus이 되는 둘째 단계로 구분한다.
하느님에 대해 어떠한 의심이나 애매모호함이나 환상을 허락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체험은 죄에 대한 용서다.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시고, 그로 인한 화해만이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 ‘새사람’이 될 수 있다.
식별은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두 가지 오래된 식별의 예
가장 오래된 식별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반복이다. 어떤 점에서 반복이 식별의 방법이 되는 것일까? 사람은 같은 생각을 자주 반복하다 보면 자신 안에서 어떤 반응을 느끼기 시작한다. 곧 마음이 점점 따뜻해지며 창조력이 솟아나는 기쁨을 느끼게 되거나 아니면 점점 싫증이 나고 무관심해지며 짜증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옛 사람들이 사고를 검증하기 위해 사용했던 또 다른 방법은 다음과 같은 확신에 근거한다. 곧 피해야할 생각은 외부에서 온다는 것이며 또 사람이 어떤 생각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 생각에서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어떤 매력을 느껴서거나, 아니면 급하다는 압박감에 의해 야기된 조급함에서 그 생각을 택하려는 고집스러움을 갖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생각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만일 그 생각이 성령에 의한 것이라면 되돌아간다. 주님께서는 겸손하셔서 우리의 문에서 기다리시며 문을 두드리시기 때문이다. 만일 그 생각이 악마의 것이라면 공격적으로 나온다. 악마의 논리는 독단적이어서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악마에 의한 생각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저절로 약화되고 만다.
3장 식별의 첫째 단계의 力學
죄의 성향에서 벗어나기
식별의 첫째 단계는 정화의 단계다. 정화는 결국 인식에 이르게 하므로 이는 자기 자신과 하느님에 대한 인식의 단계다.
사실 죄는 자신이 사랑 밖에 있다고 이해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죄의 시각에서는 자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인식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자신을 성장 시키는 데 있지 않기에 이기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이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뿐 아니라, 오직 그들이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죄의 성향은 反-사랑적이다.
자유는 사랑의 본질적 차원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들 안에 거처하지만 그들에게 善에 따라 살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랑에서 이탈해 있으면서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의 본질적 요소로 체험되는 이러한 자유 때문이다.
이런 식의 착각에 빠지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사실상 살아 계시는 하느님, 현존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대신 그들이 미리 설정해 놓은 종교적 가치 체계 안에서 어떤 계율이나 계명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교활한 유혹의 극복
그러므로 정화의 길은 속임수와 환상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여러 가지 죄 · 사건 ·습관 · 잘못들에 대해 고백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화가 이루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은 죄를 고백하게 되면 대체로 감정적으로도 움직이게 되어 곧바로 그 죄를 거슬러 행동하거나 또는 그 죄를 기워 갚기로 결심하게 된다. 설령 그것이 전적으로 복음에 근거한 신앙상의 결심이라 하더라도 내가 나 자신에게 제시하고 부과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렇기에 자칫하면 나 자신과 나의 뜻과 자아ego를 내세우기 위한 교활한 방법일 수 있다.
사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하느님에 대해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그분에 대한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구원의 代價인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눈물로 부서진 회개하는 마음이 없다.
악마의 영은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참된 인식에 이르지 못한 채 오직 자신에만 매달림으로써, 비록 종교적 구실을 내세우더라도 실제로는 자신을 따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지내기를 바란다.
식별의 시작
사람들은 평온함, 기쁨, 내적 행복 같은 것에 매우 민감하다. 영성의 대가들이 평화의 종류를 구분하고 기쁨의 종류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경우에는 기쁨의 두 가지 형태를 매우 명백히 구분한다.
발포성發疱性 기쁨
기쁨의 첫째 유형은 매우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 안에 유혹이 뿌려져 있고 성령께서 활동하시지 않는 그런 유형의 감정이다.
들은 음악, 만난 사람, 본 영상, 내가 이룬 성공, 먹은 음식, 내가 갔던 파티 등 기쁨의 출처가 거의 언제나 내 밖에 있다. 이러한 기쁨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상대방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내 말을 듣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발포성 기쁨이 있고난 뒤에는 실질적으로 공허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무언의 기쁨
또 한 가지 유형의 기쁨은 겸손한 무언의 기쁨이라 정의 할 수 있다. 갑자기 우리는 출처가 어디인지를 모를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낀다. 만나는 얼굴들이 모두 아름답게 보이고 가고 있는 길이 가볍게 여겨지며 마음을 어둡게 하는 어떤 나쁜 생각도 들지 않을 수 있다.
이 기쁨은 매우 차분하고 평화로운 기쁨이며, 우아하고 서서히 그리고 단순하게 진행된다. 이 기쁨의 특징은 모든 것을 밝고 분명하고 아름답게 드러내는 데 있다. 무언의 기쁨 상태에서는 하느님을 기억하기가 쉬워진다.
이 기쁨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더 이상 소유하려들지 않고 모든 사람과 일치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 기쁨에 젖게 되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두려움이 사라지고 불안한 마음이 멀어지며 걱정이 줄어든다.
기본 규칙
식별의 첫째 규칙은 평화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심리적 차원에서 우리의 이성적 요소와 감정적 요소가 같은 대상을 지향할 때 평화를 느낀다. 식별의 첫째 단계에서 우리의 초점은 오직 두 대상, 곧 나 자신과 하느님에 맞춰져 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에 대한 악령의 활동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람 곧 계속해서 자신만을 추구하는 사람도 어쩌면 자신의 일상적 행동을 아름답고 경건하고 거룩한 몸짓으로 위장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기분 좋은 상태,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계속 잘못된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다.
이 경우 악마는 주로 감정을 자극한다. 좋은 음식, 영광 , 찬미, 멋진 차, 권력, 칭찬받기 등 관능적 느낌과 세속적 위로와 쾌락으로 감정을 만족시킨다.
악마는 감정을 충족시키는 한편 이성에 대해서는 무슨 짓을 할까? 악마는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많은 핑계를 찾는다. 내게 감정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을 이성적으로 확신하게 하려 든다.
곧 내가 나 자신에게 집착할 동기를 부여한다. 그 동기들을 나의 출신 배경이 되는 문화와 나의 성격, 나의 개인적 과거사에서 찾는다. 이런 동기들에는 세속적 쾌락이라는 속된 면을 감출 때 그 근본적인 태도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에 대한 성령의 활동
성령께서는 이성과 감정을 분리함으로써 그 사람의 내면에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실 것이다. 그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깊이 생각하여 자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다.
무엇보다 특히 이성에 영향을 미치신다. 그 결과 이성이 나름대로 가고 있던 방향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하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은 뭔가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감정적 요소와 이성적 요소가 같은 대상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경우 성령께서는 감정에 대해서는 영향을 미치실 수 없다. 관능적 쾌락에 만족할 때는 영적 기쁨을 생각할 여지가 없다. 우리의 이성에 영향을 미치시는 성령께서 일으키는 이런 불편한 순간들이 없다면 회개도 없을 것이다.
사목활동이 영성생활의 본질을 존중하려면 정말로 섬세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목자는 두 가지 잘못에 빠지기 쉽다. 한 가지는 때때로 사람들을 복음적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감정적 측면에 호소하려 애쓰는 것이다. 이것은 여흥 문화와 경쟁하여 사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고, 또한 자칫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회개와 성숙한 지속적 회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교우관계에 대한 욕구로 복음에 응답하게 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사목을 일반사회와 어느 정도 주고받을 수 있는 가치들에 대한 단순한 담화로 축소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감정에 호소하는 사목활동에서 담담하고 이성적이며 도덕주의적인 사목활동으로 옮겨가게 된다.
진실한 사랑의 위로를 맛보기 시작하는 영적 감정의 맛은 완전히 새로운 맛이다. 이 감정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시기 위해 성취하셔야 했던 사랑의 극적 역동성에 의해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
구세주의 수난은 그분께서 어루만지시는 사람을 위로하고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의탁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따라서 이 영적 감정이 없다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의탁이 인격적이 아닌 관념적인 것이 될 위험이 있다.
하느님을 향하는 사람에 대한 성령의 활동
성 이냐시오의 둘째 규칙. 하느님의 영께서는 이 사람 안에서 무엇을 하려 하실까? 성령의 목적은 이성과 감정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그대로 유지시켜 방향이 바뀌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하느님을 향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감정을 영적 위로로 길러 주신다. 이 위로는 관능적 위로와 달리 무언의 기쁨과 약간 비슷하다.
성령께서는 영적 위로의 상황에서 이성에 대해 어떻게 활동하실까? 인간 본성의 원수가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에 대해 활동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활동하신다. 곧 느껴지는 그 위로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려고 노력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 교회, 성인들의 생애는 매우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이용하여 나의 사고를 강화시켜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으며 왜 느끼는지를 알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성과 감정이 같은 진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나아감으로써 우리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
하느님을 향하는 사람에 대한 악령의 활동
악령은 이성과 감정을 갈라놓음으로써 그 사람의 내적 균형을 깨뜨리고, 그 사람의 감정이 어떤 곳을 향하는 동안 이성은 다른 곳에서 배회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내면에 불안감을 조장하려고 애쓴다.
어떻게 이런 그릇된 생각을 식별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언제나 내가 어떻게 될까, 내가 무엇을 할까에 대한 염려로 끝난다는 사실로 식별할 수 있다. 곧 나 자신에 대한 염려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에 의해 식별할 수 있다.
보통 그릇된 생각은 우리 영혼 안에 두려움의 씨를 뿌리는데, 그 두려움에는 대체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공포감이 서려있기 마련이다.
악마는 우리의 불안을 가중시켜 더욱 불안하게 만들려하거나, 유혹이 시작되기 전에 존재했던 영적인 평화 상태에서 우리가 느꼈던 위로의 맛과 향기를 제거함으로써 불안한 공허감을 최대한 조장하려 들 것이다.
식별을 이끄는 기도
모든 기도는 진실하다면 다 참된 기도다. 하지만 모든 기도가 다 식별로 이끌어 주는 것은 아니다. 식별에 대한 준비를 하려면 무엇보다 기도 내용을 음미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기도를 위해서 성경 구절, 순수하게 영성적인 서적, 참된 영적 비유 등을 묵상할 것을 권한다.
기도 장소, 몸의 자세, 마음가짐
기도 장소를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은 중요하다. 고정되지 않은 장소는 정신을 산란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고, 성자 안에서 하느님과의 父子관계를 깨닫는 것임을 마음의 척도로 삼을 필요가 있다.
순수한 기도
오직 하느님만이 나와 그분의 친밀한 관계에 필요한 것을 아신다. 따라서 주님께서 보시기에 내가 청한 것에 아예 맛들이지 않는 것이 나와 그분의 관계에 좋다고 여기신다면, 그것에 맛들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우리가 기도의 효과에 집착하지 않게 해주며,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들으시되 성령께서 해석하시는 대로 들으신다는 사실을 초연한 태도, 자유로운 태도, 열려있는 태도로 기도한다.
기도의 핵심
성령의 선물을 청하며 선택한 성경 대목을 기도 주제로 삼는다. 말씀은 성령에 잠겨있는 말씀이다. 내가 말씀에 귀를 기울이거나 반복하거나 단순히 주의를 기울일 때,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마음의 산란함과 유혹도 꾸밈없이 기도에 포함시켜 주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내가 이와 같이 주님께 기도하고 유혹에 대해 말씀드리면 곧바로 유혹이 떠나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감사
모든 기도를 ‘주님의 기도’로 마치면서 그 말마디 하나하나가 바로 주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긴다.
식별의 과정을 시작하는 방법
식별의 첫째 단계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규칙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식별을 지도하는 사람은 전통적인 영적 지혜에 조예가 깊어야 할 뿐 아니라 현대의 문화적 활동과 심리적 영적운동도 두루 고려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식별과정은 성경, 신앙의 본질적 주제들, 훌륭한 합리적 성경주석서로 시작된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성령으로 충만해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되새기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며 우리의 단점들을 드러내 보여주신다.
성경 구절로 며칠을 기도하게 되면 비로소 성령의 위로의 특징인 뜨거운 정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또 이로써 정화의 결정적 순간, 곧 마침내 우리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시선을 느끼는 뜨거운 참회의 순간에 이른다. 만일 우리가 때때로 이런 식으로 더욱 열심히 기도한다면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 되는 비결을 알게 될 것이다.
용서에 이르는 길
영적인 생각과 감정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이 기도의 여정을 시작하여 처음으로 내면의 움직임을 느낄 때 하느님 아버지와의 실질적인 인격적 만남을 겨냥하는 참된 식별의 과정이 시작된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성령의 활동 수단이 되는 생각과 감정은 따르고, 반대로 유혹에 굴복하여 악마가 더 쉽게 활동하게 하는 생각과 감정은 따르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사실상 진실한 겸손에 속하는 순종적 태도를 갖추어 지속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영적 투쟁을 받아들여야 하며 또한 기도할 때는 주인공 의식을 버리고 그 대신 기꺼이 받아들이고 인내할 수 있는 묵상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앞이 아니면 멈추지 마라
아마도 힘든 순간들과 영적 메마름과 절망의 순간들 그리고 과거 생활의 실질적인 잘못과 오류와 죄를 들추어내는 고통의 순간들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영적인 내적 움직임은 우리를 갈바리아로 향하게 하여, 우리 죄인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시기 위해 우리의 뜻
대로 우리에게 넘겨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만나게 한다. 인간의 낡은 육신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을 때 인간은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그리스도께서 바라보시는 것처럼 보고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이시는 것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영적 고뇌를 통하여
평화로이 마음을 열고 내면의 영적 움직임을 따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고뇌와 위로가 최고의 균형을 이루는 그런 길을 간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고뇌도 위로도 다 같이 오로지 그 여정의 지침이요 표지요 수단일 뿐 목적은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두 가지 모두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심이다.
영적 관계에 마음을 열기
영성의 대가들은 절대로 유혹과 대화하지 말 것을 한목소리로 강조한다. 어떤 생각이 나를 주님께로 향하게 하고 어떤 감정이 주님을 향한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면 흔들리지 말고 그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근본적 체험
식별의 첫째 단계는 수의에 싸여 무덤에 묻힌 라자로가 그랬듯이 우리가 밤의 어두움에 숨이 막혀 죽음의 냄새를 맡을 때 끝나게 된다. 우리는 라자로와 마찬가지로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는 주님의 소리를 듣는다. 이제부터 우리는 삶을 언제나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식별의 첫째 단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기꺼이 받아주시고 껴안아 주시도록 자신을 주님께 내맡길 때 끝나게 된다.
용서의 맛 간직하기
용서는 모든 그리스도인 삶의 토대가 되는 사건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세례로 시작된다. 용서를 청할 때 우리는 이미 실제로 하느님의 사랑에 받아들여진다. 용서를 청한다는 것은 회개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경고
비록 식별이 과장과 이탈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또 사물을 건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지혜를 보증하는 기술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가야 하는 길은 아니다.
하
느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의 하루 일과는 시작부터 다르다. 그 사람은 세상의 향기와 멋과 맛 안에서 무엇이 하느님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이 아닌지를 식별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식별의 둘째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갈망이 수많은 식별의 훈련을 통해 항구한 식별의 태도로 굳어질 때까지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식별하는 훈련을 한다.
우리는 식별의 둘째 단계의 과정을 따름으로써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과 그분한테서 오는 듯 위장한 것을 식별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정신에 이른다. 그때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은 그리스도를 닮게 해준다.
2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기
4장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방법을 식별하는 원리와 근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인식하기
둘째 단계의 식별은 그리스도를 따름에 대한 것으로 그 원리와 근거는 첫째 단계의 역동성을 따라 이르게 되는 체험에 있다.
자신을 참되게 인식하는 것, 곧 하느님이 보시듯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창조와 구원사업을 통해 당신 자신을 사랑으로서 계시하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로 체험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 관계가 입증되는 가장 중요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용서를 체험하는 순간이다. 그리스도인은 용서받는 체험을 하면 인간이 창조 때부터 살고자 했던 그러한 삶의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다.
우리 인간들과 하느님의 관계는 성자의 오심과 그분의 육화와 수난 그리고 성부께 돌아가심에 근거하여 실현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와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기억하기-식별의 원리
사람은 하느님과의 실질적인 만남인 용서를 체험하고 나면 주님께 의탁하면서 그 근본적 사건을 계속 기억하려 노력한다. 이 기억은 사랑에 근거하고 있고, 사랑에 결합되어 있는 모든 능력, 곧 이성 · 감정 · 의지 · 직관력 등과 심지어 감각기관의 지각력에까지 스며드는 사랑의 기억이다. 이 기억, 곧 고이 간직된 이 맛이 바로 식별의 참된 원리이다.
많은 옛 영적 저술가들은 이 사랑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지켜 나갈 방안으로 절제에 대한 훈련을 제시했다. 이로써 우리는 점차 어느 정도 지속적인 평화를 체험하게 된다. 절제하는 사람들, 곧 지성과 마음 모두가 ‘성자의 얼굴’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은 다른 것에 몰두하거나, 어쩌면 식상할 수 있는 다른 ‘음식들’을 찾을 필요를 못 느낀다.
근본적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금욕 생활은 단념하는 기술이 아니라 지키는 기술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보물 곧 값진 재능의 힘을 절제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교적 금욕 생활에 대해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 식별의 기본 규칙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영적 위로를 받는다. 성령께서는 무엇보다 그들이 느끼고 맛들이는 차원에 영향을 미치신다.
그러면 그들의 생각은 하느님과 관계있는 모든 것, 하느님 뜻의 성취 등을 추구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생각이 하느님께 속하게 되고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하느님께 내맡기기에 주님께서 그들 안에 활동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신다.
빛의 천사로 위장하는 악마의 속임수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는 악마도 성령도 다 같이 우리 안에 불안을 일으킬 수 있는 반면, 우리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향한 후에는 우리를 혼란케 하며 괴롭히는 것은 악마뿐이다. 정체가 드러나기에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악마는 영적인 사람의 내면에 침투하기 위해 빛의 천사로 위장한다.
악마는 영적인 듯한 생각과 정신 상태로 자신을 위장하여 곧 그 사람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자기중심적으로 만들어 자기가 주도하는 작은 세계 안에서 노예살이와 같은 폐쇄된 생활을 하게 만들려고 수작을 부린다.
5장 유혹
지금부터 다루려는 유혹은 주님과의 화해 이전에 체험하는 유혹들과는 매우 다르다. 이 단계에서 유혹은 우리가 들어선 여정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이전에 가졌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 영적 여정에서 분명한 것은 자기애와 자신의 의지에 대한 애착이 영적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사실이다.
관계로서의 믿음과 내용으로서의 믿음의 분열
악마의 목적은 그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용서와 치유를 체험하기 이전의 태도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악마는 그 사람이 다시 죄지을 마음자세를 갖추게 하는 방법으로 공격한다. 곧 자기 자신에게 의탁하고 자신에 대한 걱정에 몰두하며 격정적으로 자기를 내세우는 그런 자세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것도 각 사람의 영적 세계에 적합할 듯한 그런 생각들로 공격할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하느님 없는 신앙인이 될 것이며, 하느님이 있다 해도 자신이 영적이라고 믿고 확신하는 낡은 인간이 자신의 편의에 따라 만든 하느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성성聖性과 완전성을 자신할지 모르나 진정한 회개는 없고 사소한 삶의 변화만 있어 단순히 회개한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악마의 활동 목적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에서 확실하게 떼어놓는 것이다.
관능성官能性
만일 우리의 생각이 처음에는 하느님께 향하는 것 같았는데 끝에 가서는 자신을 향하면서 여러 가지 걱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우리 자신을 주역으로 떠오르게 하거나 아니면 영적 태만인 체념상태를 즐긴다면 그 때의 상상은 분명 악마가 몰고 온 것이다.
악마는 어떤 사람들한테는 희생자, 박해받는 자, 고통 받는 자 등으로 상상하게 함으로써 크나큰 쾌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가 됐든 결과는 늘 마찬가지다. 영신 수련 안에서 쾌락적인 것, 만족스러운 것, 관능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영성 생활의 주역이 된다는 것이다.
사명에 대한 집착
악마는 그들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서 무엇보다 자신들이 일구어 내는 성공에 관심을 쏟게 한다. 언뜻 보기에 이런 애착은 반드시 행해야 할 사명과 善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만족, 자신의 일에서 얻는 쾌감에 대한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테면 일종의 관능적 쾌락, 또는 自己愛의 형태에 속한다.
자신을 하느님의 재판관으로 여기기
악마는 그들이 스스로를 판단 기준으로 삼게 하여 누가 신앙생활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판단하게 한다. 그들을 영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에서 겸손과 사랑을 외면함으로써 더 이상 영적인 요소가 없는 다른 사람들의 ‘재판관‘으로 옮겨 놓는 데 성공한 셈이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생각하며 또 우리가 구원 활동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체험한 구원은 항구한 겸손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자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활기차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에 일치하는 생각들
우리는 우리의 역사, 기억, 받은 교육, 문화, 더 나아가 우리가 자란 환경과 지형적 상황의 결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는 현재의 처지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지각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직관한다. 우리는 최대한 체험을 활용하여 더욱더 조심스럽고 신중하고 빈틈없이 생각할 수 있는 성격을 발전시켜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 세계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영의 세계도 정신과 육체의 세계도 모두 다 아신다. 성령의 논리는 우리가 비뚤어진 것으로 보는 것들을 바르게 보고불투명한 것들을 투명하게 본다. 성령께서는 심리적인 고통까지도 영적인 가치로 전환시켜 통합할 수 있다.
곧 성령께서 우리 영육의 세계에 들어오시는 방법을 알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해야 하고 우리의 저항을 확인해야 하며 영적 성숙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을 탐구해야한다.
이 과정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인데 성령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이 목표로 이끄신다. 사랑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결합시키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연결이 사랑에 근거하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전체성 안에서, 곧 인류와 함께하는 개인으로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전체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유일한 실체다. –솔로비요프-
거짓 완전의 유혹
번번히 일어나는 또 다른 유혹은 거짓 완전에 대한 유혹이다. 곧 우리가 유혹과 싸우는 데 능숙해져서 악마의 유혹을 피하고 쉽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될 때까지 우리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유혹을 던진다.
악마의 유혹은 교묘해서 영적 갈등을 견뎌낼 수 있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매우 기쁘게 열정적으로 생활하며 은총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그들의 부요한 상태가 그들 자신이 일구어낸 것이며, 자기들의 성실함의 결실이고 자기들의 정의와 용기의 결실이라고 믿게 한다.
그들의 이야기 방식이나 주위 사람들에 대한 훈계 방식에서 그들 자신을 특별 취급하고 엘리트로 여기며, 세상을 그들 자신을 주축으로 하여 흑백으로 나누는 분리주의적 정신상태가 드러난다.
거짓 완전성 즉 자기기만에 빠진 이들은 보통 광신적 행위를 초래한다. 악마는 어렵지 않게 그들에게 특별한 사명과 소명을 부여하고 그들이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빠져있는 착각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참된 완전성의 가장 정확한 척도는 원수에 대한 사랑이다.
6장 유혹을 이기는 방법
영적 독서
영적 성장의 이 단계에서는 영적 독서가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영적 독서란 우리가 성령에 깊이 잠겨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고 우리의 영적 사고능력을 강화하며 영적 미각을 길러주는 글들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인 닮기’라는 성인들의 모범적인 예는 우리의 영적 상상력을 키워 우리가 창조력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교회
악마에게 한 가지 험난한 암초는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교회의 심장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영적 성장의 둘째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례상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전례에서 찬미 대상이 되시는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 신자는 이 둘째 단계에서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사이의 훼손된 관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시작한다.
교회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현실주의적이다. 곧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함과 죄, 완전함과 오류의 神人的, 초시간적, 역사적 현실 속에서 있을 수 있는 악마의 유혹들을 걸러내는 파스카 신비를 살아간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의 현실주의 밖으로 유도하거나 그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거나 회피하는 생각들은 모두 다 곧바로 악마의 함정으로 식별된다.
교육적 황폐
디아도코가 이름 붙인 ‘교육적 황폐’는 주님께서 인간의 마음에서 은총의 지각적 효과를 거두어들이시는 순간을 뜻한다. 실제로 인간 내면에 은총이 머물러 있긴 하지만 그 빛과 열기가 감추어진 상태다. 이때 영혼은 비탄에 휩싸이게 되는데, 바로 그 유혹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분이 주님이다.
교회를 바라보면 주로 나쁜 것들만 눈에 보이고 성인들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으며,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주님께 버림받은 것 같이 느껴진다.
그 황폐함 속에 은총은 실재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그 사람을 응시하신다.
황폐함의 이런 교육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온유하심과 그분 현존의 열기를 맛보는 것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흔히 성장은 광야에서, 황폐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에서 우리의 원의가 정화되기 때문이다.
이유없는 생각
많은 영적 교부들이 가장 영적인 생각을 소위 ‘이유 없는 생각’이라고 한다. 그것은 영적인 일에 대해 생각하거나 영적 독서를 하가나 전례에 참석하거나 또는 어떤 특별한 시간을 겪거나 하지 않는데 일어나는 생각이다.
그 생각은 주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시다면, 우리가 그분께 속해 있다면, 우리가 그분께 자신을 의탁한다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어 그분이 바라실 때마다 우리 마음 안에 생각들을 일으키실 수 있다면 가능한 생각이다.
주님이 바로 그 생각의 발단이고 주인공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자유롭게 접근하시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움직이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충만히 인식하고 그분과의 충만한 부자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신다.
‘이유 없다’라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이다. 사람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해방의 과정으로 들어가고 자유를 느끼게 된다. (예 :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복음사화)
악마는 사랑agape이 왜곡된 것으로서 정의定義상 자유롭지 못하다. 이 때문에 자유로운 모든 것은 그의 행동반경을 벗어나 있다.
7장 그리스도께 대한 자유로운 의탁의 검증
성자 안에서의 자녀들
우리는 자신을 ‘성자 안에서의 자녀들’로서 재발견한다. 인성은 창조된 인간의 인격화 원리에 받아들여져 미리 기획된 대로 창조되지만 하느님의 위격에 온전히 받아들여져 결합될 수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적-인간학적 배경에서 볼 때 인간의 영적 여정은 더욱더 아드님께 의탁하는 것임이 분명해지며, 이는 우리 인간 본성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날인이 더욱더 완전하게 박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정의를 위해 싸울 때 그리스도께서 싸우시듯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하게 하신다.
사고방식의 검증
영적 저자들 대부분은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해방되기가 가장 어렵다고들 한다. 자신의 사고방식에 매여 있다는 것은,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근본적으로는 관능적이고 무절제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참된 삶을 향한 길은 그리스도의 파스카의 여정을 따른다. 반면에 죄의 심리는 어떤 길을 가든 파스카를 피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하려고 애쓴다.
의지의 검증
악마가 설치한 진짜 덫은 자기애의 덫이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를 온전히 지향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사고방식에 집착하고 매달리는 심리가 있는지 어떤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사실 自己愛는 선한 일들과 지향, 선한 생각과 계획에 대한 집착으로 위장되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몇 시간이고 계속 기도할 수 있지만 그 기도는 그들이 자유로워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단식을 하지만 내적 자유를 신장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식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금욕 수단들을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한다 해도 본래의 목적에 맞지 않게 한다.
의지의 자유를 성취한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행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다 선하지는 않으리란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만간 참된 선은 우리 노력만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의 가장 드높은 신앙 행위는 선을 다만 생각하고 인식하고 또 실행하기를 바랄 수 있을 뿐 실제로 우리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전적으로 선을 실현할 생각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흔히 악을 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있다.
오직 우리가 자신의 뜻을 단념하고 그 뜻을, 선을 아실뿐 아니라 선 자체이시고 선을 소유하고 계시며 선을 행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내맡길 때만 우리가 행하는 것이 선일 희망이 있다.
사랑의 검증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의탁의 마지막 검증은 겸손 또는 사랑의 검증이다. 여기서는 내면 깊이 얼마나 철저히 하느님을 인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얼마나 저항하고 있는지를 다루게 된다.
영성의 대가들은 생명마저도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저버릴 구실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하느님을 인식하고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이 으뜸이시고 원천이심을 인정하며 내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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