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7월 영적도서 : 「놓아두며 살기」
지은이 : 요한네스 하스Johannes Hass
· 1950년 출생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 신부, 사목신학자 · 교황 요한 23세의 영성과 사목에 대한 저서 및 강연 다수 ·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교회 안의 성소聖召 장려를 위한 청년운동지도 · 현재 독일 아이히슈테트 교구 가톨릭 대학생 공동체 지도신부
옮긴이 : 서명옥
·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
·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 강의
저서 : 「성경 인물에게 배우는 나이듦의 영성 」
역서 : 「안셀름 신부의 성탄 선물」 ·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 외 다수
〈한국의 독자들에게〉
1962년 가을. 쿠바의 위기, 동과 서, 러시아와 미국의 위태로운 갈등 속에 로마에서는 ‘착한 아버지’이자 ’모든 이의 형제’인 교황 요한 23세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인류는 한 가족이었으니까요.
“세상은 내 가족입니다.”
그에게는 세상 모든 이가 하나하나 유일무이하고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성령의 숨결을 믿었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했습니다.
교황 요한 23세는 밤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서 양 진영의 책임자들과 만남을 시도하고 평화를 촉구하며 그들 사이를 중재했습니다.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는 평화의 사도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 회칙인 「지상의 평화」를 썼습니다.
교황 요한 23세는 하느님을 믿었고 그 믿음을 사람들에게 선사했습니다. 그의 믿음의 열매는 바로 ‘평정’이었습니다. 그는 “오늘 하루 나는 ~을 하겠다”는 식으로 ‘평정의 십계명’을 만들어 일상에서 놓아두며 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평정의 십계명’이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 훌륭한 조언이 되길 바랍니다. ‘마치 세상에 다른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 안에서 평정을 얻을 수 있기를 빕니다.
2015년 8월 26일 Johannes Hass
나눔의 글
그의 심장이 멎었을 때,
그들이
대성당 둥근 지붕아래
목자 잃은 슬픔에 잠겨있는 백성 앞에
그를 뉘어놓았을 때,
우리는 보았네,
주님의 시계 위에서
사랑의 시간을 가리키던,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시곗바늘인 그를.
크리스티나 부스타
살아생전 이탈리아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은 선하신 교황(Il Papa Buono) 요한. 그리고 교황이 되기 전이나 후나, 실로 그 별명에 어울리게 산 교황 요한 23세.
크리스티나 부스타 시를 읽으며, 문득 실제 시계에 얽힌 사연을 바탕으로 영감을 얻은 미국의 음악가 Henry Clay Work가 작곡한 미국의 동요, 아름답고 슬픈 멜로디 ‘할아버지 시계’가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들어가며〉
1963년 성령강림 후 월요일, 그의 심장이 멎었다. 향년 82세. 고령이었지만 청년의 정신을 가졌던 그는 언제나 ‘교회의 봄’, ‘새로운 성령강림’을 꿈꾸었다. 그가 바로 안젤로 론칼리, 교황 성 요한 23세다.
사랑의 시간을 가리키던 주님의 시곗바늘.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떤 샘에서 물을 길어 올렸을까? ‘평정의 십계명’이 넌지시 그 답을 알려준다. 일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한 열 가지 실천 계획은 청소부에서 교황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해당되는 프로그램이다.
“누군가는 목자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거룩해질 수 있겠지요. 하지만 빗자루를 들고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많은 이가 ‘놓아두며 살기’를 원한다.
‘하느님의 오늘’의 한가운데서(로제수사) 또 덧없음과 영원의 한가운데서. “그대의 일상이 영원의 광채를 머금고 있거나 아니면 그 일상이 그저 시간표에 따른 관리에 불과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프란츠 베르펠)
‘평정의 십계명’은 정신적 동반이 되고 일상의 격려가 되며 오늘 가능한 것을 알려주는 용기가 된다. ‘오늘 하루’는 부담을 덜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손안에서 살아갑니다.” (요한 23세)
오늘 가능한 것이라면 자신 있게 시작할 수 있다. 오늘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은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맡겨도 좋다.
요한 23세의 평정의 십계명
1. 오늘 하루 이날을 살기 :
오늘 하루 ~ 나는 내 삶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들지 않고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
365일이 나를 향해 온다. 어떤 사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문제들이 닥칠지 알 수도 해결 할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하루하루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내게 다가오는 것을 놔두는 것이다. 모든 문제 또한 하느님이 떠맡아 나와 함께 해결하신다는 신뢰를 가지고 그렇게 교황 요한 23세도 하루하루 뚜벅뚜벅 걸어갔다.
예수님이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라고 말씀하셨듯이 설령 내가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놀라운 경험을 할 수는 있다. 오늘 그분은 나와 내 모든 근심 걱정을 돌보신다, 나와 함께 걸으신다.
일상 속에서 내게 힘을 주는 몇 가지 예 :
· 나는 문제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다. 그 문제들을 치워놓지도 않겠다. 오히려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 그러면 문제의 핵심이 분명하게 보이고 해결 방법이 떠오를 것이다.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57-1622)가 추천한 마음의 기도*를 바치면서 내 문제들을 하느님께 맡긴다.
(*화살기도처럼 짧은 문장의 기도를 일상의 모든 순간에 되풀이하여 바치면서 기도자가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미사에 참례하기
· 대화나 고해성사를 통해 내 문제를 내려놓기
· 짤막한 기도 한마디가 하루 내내, 또 한 달 내내 나를 동반 할 수 있다.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처럼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제게 주신 시간은 오직 오늘 하루뿐임을 당신은 잘 아십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2. 오늘 하루 나 자신만을 고치기 :
오늘 하루~ 나는 행동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겠다. 품위 있게 행동하고 아무도 비판하지 않으며 오직 나 자신만을 비판하고 바로잡겠다.
안젤로 론칼리는 ‘품위 있게 행동’하고 싶어 했다. ‘품위 있게 행동 한다’는 것은 외적인 관계나 형태뿐 아니라 내적 행동양식도 포함한다.
교황 요한 23세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영혼과 육신, 나에 대한 사랑과 남에 대한 사랑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한다.
“지도자는 오른쪽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왼쪽 눈으로는 대부분의 것을 널리 내다보되 화내는 일 없이 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 두 눈으로 본질적인 것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다른 이의 지도자만이 아니다. 나는 먼저 나 자신에 대해 책임이 있다. 나는 본질적인 것을 봐야 하는, 나 자신의 지도자다. 선과 악, 성숙과 미성숙을 보아야 한다. 하느님이 보시듯 그렇게 보아야 한다. 그분은 내 삶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 그분 눈으로만 내가 정말 누구인지가 명백해진다.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얼마나 참된 것이었으며, 예수님의 질문이 얼마나 새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
다른 사람을 고치기에 앞서 나 자신을 고쳐야 한다. 그렇게 회개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3. 오늘 하루 행복하게 지내기 :
오늘 하루 ~ 나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 창조되었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서도 그렇게 창조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행복하게 지내겠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교황 요한 23세는 이에 대해 그답게 대답한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행복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며 그분의 아들, 딸들이다. 처음부터 그분은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처음부터 달리 보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것이 곧 원죄의 관점이 되고 우리를 무분별하게 현혹한다.
우리 눈은 멀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귀는 어두워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며, 심장은 예감豫感을 잃어 신적인 목표를 잃고 인간적 목표만을 향해 달린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다.
우리가 창조된 본모습을 잃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의 모상으로, 모든 인간의 형제인 예수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음을 잊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현혹된 무분별에서 거듭 부활하셔야 한다. 그래야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이 어떤 분이며 우리가 누구인지 하느님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부활절은 예수님과 우리의 축제일이다.
두 세상의 행복을 위해 :
· 저세상을 위해서 :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로 나도 죽은 후에 하느님의 행복에 초대되어 부활할 것임을 확신한다.
· 이 세상을 위해서 : 예수님의 부활은 내가 죽은 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오늘 시작된다. 날마다 나는 죽음에서 삶으로 부활할 수 있다.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죽고 새롭게 시작하여 구원될 수 있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러한 부활 신앙을 확신하며 살았다.
“오늘 하루 나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 창조되었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서도 그렇게 창조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행복하게 지내겠다.”
4. 오늘 하루 나를 상황에 맞추기 :
오늘 하루 ~ 나는 상황이 내가 바라는 대로 맞춰지기를 바라지 않고 나를 상황에 맞추겠다.
많은 사람이 사월의 날씨 같은 모습을 보인다. 변덕스럽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갈팡질팡한다. 우리 모두가 이런 변덕스런 날씨 같은 지도 모르겠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도 영혼의 뜨거움과 차가움의 변덕을 잘 알고 있었다. 안젤로 론칼리 역시 인간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고 변하기 쉬운지, 또 얼마나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그도 이 모든 것을 체험했다.
일생에 걸쳐 새로운 것에 열린 태도를 견지해 온 결과, 그의 마음은 더욱 넓어졌다.
“오늘 하루 나는 상황에 나를 맞추겠다.” 그러는 가운데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는 것을 겸손하게 배웠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8 참조)
오늘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 모든 일에 내가 기준이 된다면, 그 기준 때문에 내 삶은 제한을 받게 될 것이다.
· 사람들이 내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면, 내 삶의 귀중한 것을 놓칠 수 있다. 처음엔 별로 호감이 가지 않던 바로 그 사람한테서 소중한 것을 배울 수도 있다.
· 모든 것이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곧장 막다른 골목에 몰릴 것이다. “실제 모든 삶은 만남” (마르틴 부버) 임을 고통스럽게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나와 타인, 낯선 사람, 낯선 환경과 대화하면서 나는 인생을 알아가는 것이다.
내가 맞이하는 상황이 사랑의 학교이며, 내게 맡겨진 임무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배우는 장場이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내 삶의 스승이 될 수 있다.
5. 오늘 하루 좋은 책 읽기 :
오늘 하루~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 가운데 10분 만이라도 좋은 책을 읽는데 쓰겠다. 육신을 위해 음식이 필요하듯 영혼을 위해 건전한 독서는 꼭 필요하다.
안젤로 론칼리, 그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에게서 공부는 사제들에게 여덟째 성사와 같음을 배웠다. 배움은 결코 헛돌아서는 안 된다. 공부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안젤로 론칼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질이었다. 그는 양보다는 수용력, 이성의 지식보다는 마음의 지혜를 얻는 것이 목표였다.
“적게 읽으시오. 그러나 주의 깊게 잘 읽으시오 독서에 적용되는 것이 모든 것에도 적용됩니다. 그러니 적게 그러나 잘 읽으시오.”
· 너무 많이 읽기보다는 적게,
· 읽는 것에 진을 빼기보다는 내용을 소화하도록,
· 양보다는 질을,
· 분망함 속에서보다는 고요 속에서,
· 간헐적으로보다는 규칙적으로!
교황 요한 23세는 매일 하는 독서에 가치를 두었다. 날마다 적어도 10분, 양질의 독서를 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했다.
안젤로 론칼리는 자신이 스무 살에 발견한 것을 평생에 걸쳐 심화해 나갔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신심생활 입문」에는 내게서 한 聖人의 모습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한 것들이 담겨있다. 날마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 성인의 모습은 내 안에 아름답게 자리 잡아간다.”
6. 오늘 하루 착한 일 한 가지 하기 :
오늘 하루 ~ 나는 착한 일 한가지를 하겠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선량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리 착할 수 있지, 하고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이 신비로움은 대체 무엇일까?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더욱더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는 친절 그 자체다.”
교황 23세를 두고 사람들은, 그는 착한 교황이었고 모든 이의 자애로운 아버지였으며, ‘친절한 말’로 늘 이야기했다고 한다.
‘행위는 존재에서 나온다.’
안젤로 론카리는 정통신학의 이러한 원칙을 일생 동안 자신의 지표로 삼았다. 스콜라 철학의 다음 명제도 비슷하다. ‘존재와 선은 서로 연관된다.’ 선은 존재에서 나온다. 존재는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젤로 론칼리 그의 행동 자체가 그대로 그 자신이라는 것, 그가 선하기 때문에 선을 행한다는 것이다.
교황 23세는 ‘오늘 하루’ 착한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내가 오늘 착수하는 일을 선하게 처리하고 싶다. 가능한 한 선하게 진행하고 싶다.”
모든 만남과 온갖 상황, 모든 과제 안에서 중요한 것은 선을 관철하는 것이며, 우리 사이에 호의를 일으키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있은 후 인간과의 만남이 있을 것, 먼저 하느님과 머물고, 그다음에 사람들을 만날 것. 이 같은 것을 실천했기에 그는 착한 교황, 온화한 교황, 모든 이의 형제가 되었다.
7. 오늘 하루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
오늘 하루 ~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무언가를 하겠다. 혹시 불쾌하더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하겠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도록 하는 것이다. ‘짐 말고 즐거움.’ 오늘날 많은 이가 이런 생각으로 삶의 방향을 맞추고 있다. 이 말은 고행과 극기 같은 느낌이 난다.
내 삶에는 즐거움을 주는 것들 보다는 짐스러운 것들이 더 많이 존재하고, 그것은 대부분 일상적인 일들이다. 전문가들은 하루 일과를 계획할 때 내가 바로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모든 일의 목록을 만들어보라고 조언한다. 이 경우 가장 하기 싫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것을 하고 나면 마음이 훨씬 자유로워질 테지만, 미루게 되면 마음은 계속 찜찜한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무언가 내 심기를 거스리고 화나게 할 때, 오히려 그 자리를 피해서 혼자서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그 문제와 거리를 두고 조용한 곳에 머물러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매번 알맞은 방법을 새롭게 찾는 게 중요하다. 어느 때는 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나을 수 있고, 어느 때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좋은 방법은 성령께 귀 기울이는 것이다.
비록 내가 한 일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해도, 하느님은 내가 한 잘한 일과 못한 일을 모두 알고 계신다.
8. 오늘 하루 하느님의 계획안에 나를 놓아두기 :
오늘 하루~ 나는 명확한 계획을 세우겠다. 지키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반드시 세우겠다. 그리고 ‘조급함’ 과 ‘우유부단함’이라는 두 가지 악을 조심하겠다.
계획표와 교황 요한 23세, 그는 아주 꼼꼼한 사람이었다.
“나는 많은 일을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처리하려고, 또 쓸데없는 일로 잠시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계획은 인간이 세우지만 동시에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세우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매일 한 것에 대해 하느님 앞에 책임을 졌다. 모든 때가 하느님의 때요, 모든 시간이 하느님의 시간이었다.
교황 요한 23세에게 조급함과 우유부단함은 악惡이었다. 이 두 악의 축 사이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 하느님의 섭리라는 긴 호흡 속에서 나도 일상의 숨찬 분주함을 내려놓을 수 있다.
·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 안에서 망설임을 떨치고, 오늘 나를 기다리는 일을 지체없이 시작할 수 있다.
· 정신없이 쫓길 것도, 우유부단할 필요도 없다. 하느님은 내 보폭을 아시기에 나와 맞춰 걸어 주신다. 그분은 내 가능성과 한계를 잘 아시니 내게 지나치게 힘든 요구를 하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그분의 길을 시작한다는 전제가 중요하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위해 내 계획안에 여지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9. 오늘 하루 하느님의 섭리 안에 머무르기 :
오늘 하루 ~ 나는 상황이 어떻든지 하느님의 자애로운 섭리가 마치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나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굳게 믿겠다.
마치 갓난아이가 어미젖을 빨 듯 그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신뢰’를 받아들였다. 그는 하느님의 선물을 관대하게 다루고 그 선물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법을 어려서부터 가족이 함께하는 밥상머리에서 배웠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우리 형편에 만족했고 섭리의 도움에 온전히 신뢰했지요. 식탁에 빵이 올라온 적이 없었고 고작 옥수수죽뿐이었으나, 어머니는 거지가 오면 언제라도 자리 하나를 마련했습니다.” 안젤로 론칼리는 유년시절의 기억을 평생을 두고 잊지 않았다.
그는 「영혼의 일기」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이렇게 털어 놓는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 원하는 대로,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는 대로 행하고 말하도록 내버려 두자. 나는 내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이 어떻든’ 그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그분의 계획을 신뢰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무시당하고 잊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달리 보였다. 하느님은 자신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계심을 체험했다. 그의 곁에 있으면 누구든 하느님의 비할 데 없는 소중한 존재이며 유일한 존재임을 거듭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다.
10. 오늘 하루 걱정하지 않기
1) 오늘 하루 ~ 나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겠다. 아름다운 모든 것에 기뻐하고,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호의를 믿겠다.
안젤로 론칼리는 피정 때나 생일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유언장에 이런 글을 썼다.
“비참함과 허무는 내 좋은 동무가 되어주었다. 나를 겸손하고 평온하게 만들어 주었고, 기쁨을 선사했으며, 순종과 사랑으로 내 유일한 주님이신 예수님 나라에 관심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분께는 영광이 합당하고, 나와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그분의 자비면 충분하다. 나의 공功은 주님의 자비이기 때문이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1954년 6월 29일)
“삶에서 중요한 것은 갑작스런 부름을 위해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팔십 년을 살아온 내 인생이 알려주더군. ‘모든 것을 보고 미리 배려하시는 주님 사랑에 대한 신뢰에 영원한 생명이 보장 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지.” (1961년 12월 3일 아우에게 쓴 편지)
‘호의‘는 젊은 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교황 요한 23세의 영성의 핵심이었다.
안젤로 론칼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런저런 불안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기쁨과 선에 대한 신뢰, 호의에 대한 믿음으로 이겨냈다.
2) 오늘 하루 ~ 선을 행하라고 내게 주신 시간은 12시간뿐이다. 평생 쉼 없이 선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선을 행해야겠다는 용기마저 잃게 될 것이다.
어느 영적 규칙에는 “여덟 시간 일하고, 여덟 시간 기도하고, 여덟 시간 잘 것”을 권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만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내가 선을 행해야겠다고 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고 맡기셔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선할 수 있다. 하느님이 내 가장 깊은 곳에 선을 심어 주셨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는 선을 행하되 오늘 가능한 것만을 행하고 그 외의 것은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맡기는 평정을 유지했다.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났습니다.’(티토 3,4 ) 사람들은 착한 교황을 만나면서 이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