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9월 영적도서 :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김대건 신부의 편지 모음
지은이 : 김대건
·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출생
· 1845년 8월 17일 사제 서품 ·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 · 1984년 5월 6일 시성
옮긴이 : 정진석
· 1931년 서울 출생
· 1961년 사제 서품
· 2006년 추기경 역임
저서 : 「우주를 알면 하느님이 보인다 」 「장미 꽃다발」외 다수
역서 : 「성녀 마리아 고레티」 「칠층산」 외 다수
<역자의 인사말>
이 책은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의 라틴어 편지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한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46년까지 21통의 편지를 쓰셨는데 편지 대부분이 사제 서품 전에 쓴 것입니다. 반면에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는 사제 서품 후에 쓴 것입니다.
동갑이요 동기동창인 두 신부님은 서양 학문을 정식으로 익힌 첫 조선인으로서 최고의 지성인답게 그 당시 조선 왕국의 국가 정세와 교회 사정 및 민생 상태에 관하여 예리하게 관찰 하였고,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유창한 라틴어로 써서 스승 신부님들께 보고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대조적인 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을 증거 한 면에서 볼 때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는 전형적인 피의 증거이고,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활동은 모범적인 땀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는 김대건 신부님의 한국어 번역 편지만 모아서 출판하는 것입니다.
나눔의 글
순교자 성월에 거룩한 김대건 신부님을 가까이서 만나 뵐(편지로나마) 수 있었다는 것은 주님의 은총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편지는 당시 세계정세, 조선의 정치 사정 그리고 한국천주교회의 산 역사를 전해주는 귀한 사적史籍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불과 20대 김대건 신부님의 21편 편지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해박한 지식과 맑은 지성이,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향한 사랑과 너무나 잘 어우러짐을 느낍니다.
「이 빈들에 당신의 영광이」 김대건 신부의 편지 모음을 읽으며, 순교자로서 김대건 신부님의 참모습을 그동안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저자신이 정말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역사는 끝없는 전쟁과 어리석음을 모르는 권력싸움에서 잠시도 평화로울 날이 없습니다. 영국과 중국의 아편 전쟁, 유럽의 각 나라마다 열띤 식민지 개척 전쟁, 시대에 만연한 제국주의 등등 복잡한 국제 정세와 당파 싸움에 휘둘리는 국내 정세 속에서 김대건 신부님은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만을 좇아 따르며,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고통을 기쁘게 순명하셨습니다.
1835년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사제인 모방(Maubant) 나羅 베드로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성직자를 양성하는 사업부터 시작하였고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 3명의 충청도 출신 소년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습니다.
세 소년은 서울을 출발하여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무려 여섯 달을 걸려 마카오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 선교회 극동 대표부의 책임자였던 르그레주아 신부는 조선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1844년 12월 15일 이전에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 과정을 모두 끝내고 삭발례를 비롯하여 부제품까지 받았으나 아직 만 24세가 안되어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1844년 12월 15일 이후에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Ferréol) 고高 주교와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고 주교는 상해에서 1845년 8월 17일 만 24세가 된 김대건 부제를 사제로 서품하였습니다. 그리고 고高 주교와 김대건 신부는 배를 타고 상해를 떠나 1845년 1월에 조선의 충청도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합니다.
김대건 신부는 안타깝게도 1846년 5월 12일 순위도에서 잡혀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겨우 13개월 동안만 사제로 살았는데 그나마 2개월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황해 바다 위에서 보냈고 또 4개월은 감옥에서 지내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사목활동은 거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의 국법대로 하면 외국인들은 죽일 수가 없고 오히려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국인 · 달단인 · 일본인들은 필요한 것을 주어 반드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들을 죽인 것은 확실히 종교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조선의 조정에서 외국인 신부님들을 죽인 것은 교황님과 프랑스 왕이 파견해서 온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여러 척의 프랑스 함선이 지나간다는 보고를 받고 프랑스인들이 보복하러 온 것으로 알고 불안에 떨었습니다. 만일 프랑스 군함이 조선에 와서도 신부님들을 살해한 사건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신자들의 처지가 더욱 참담하게 될 것입니다.”
(열두 번째 신부님의 편지글 중에서)
“저는 재판관에게 프랑스의 강대함과 관대한 관습에 대하여 여러 번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제 말을 믿는 것처럼 보였으나 프랑스 신부님들을 죽인 후에도 프랑스로부터 아무런 보복을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프랑스인 때문에 저를 죽이기를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위에 언급한 이유로 더 이상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안배가 없는 한 조선 신자들이 선교사 신부님들을 영입하거나 보호할 대책이 없습니다.
프랑스 영사가 중국 황제에게 신부님들을 죽인 것은 잘못한 것임을 설득시키고 또 중국 황제가 조선 왕에게 프랑스인들을 그렇게 함부로 죽이지 말도록 그리고 신자들에게 자유를 주도록 명령하게끔 편지를 보낸다면 대단히 좋을 것입니다. 만일 중국 황제가 조선 왕에게 그렇게 명령한다면 조선 왕은 이에 순종할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 1846년 음력 6월 8일 쓴 열아홉 번째 편지글 중에서)
“주교님께 올리는 편지의 추신 : 감옥 안에서. 1846년 8월 29일 프랑스 군함이 조선에 왔다는 확실한 소식을 오늘 들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협만하고 돌아간다면 도리어 우리 교회에 크나큰 재앙만 남게 하고 저도 그로 인해 죽기 전에 가혹한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주 하느님, 모든 일을 잘 보살피시어 좋은 결과가 있게 하소서.”
(스무 번째 편지글 중에서)
위에 세 번이나 언급된 김대건 신부님 편지글에서 마치 강대국 프랑스에게 SOS를 청하는 듯 절박하고 애절한 김대건 신부님의 마음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주님께 성모님께 간절히 청하였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하느님의 뜻을 미미한 저희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한 알의 밀알이 반드시 필요하리라.....
네 번째 김대건 신부님의 편지글 중에 옮겨온 글 :
“신부님들이 체포된 것은 거짓 신자 유다보다 더 못한 악한 배반자 김여상이 신부님들의 얼굴을 익혀두려고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신부님들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이하 생략)”
위의 편지글에 언급된 유다보다 못한 김여상 요한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다음 글은 김대건 신부님이 쓰신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 중에 ‘제2부 1839년 기해己亥박해 의 진상‘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실로 서글픈 일은 갓 태어난 교회 초창기부터 언제 어디서나 거짓 형제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에 특히 김여상은 1801년 조선 교회에 큰 해악을 끼쳤습니다. 그는 양반 출신으로 20세 때 아내와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처음에는 천주교 법규를 충실히 준수하였습니다. 그는 신앙 때문에 가족 전체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그는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아버지 집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는 30세가 되었을 때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면서 지극히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악한 생활태도 때문에 신자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1838년 11월경에 그는 포졸한테 가서 돈을 받고 몇몇 신자를 배신하여 팔아 넘겼습니다. 1839년 음력 7월경 배신자 김여상 요한은 수령들로부터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체포할 권한을 받았습니다.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간 그는 신자들에게 이루 말 할 수 없는 모욕과 지극히 포악한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성과를 거둘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나서는 그는 포졸들과 함께 묵주, 십자가, 가르멜산의 성모의 복장을 지니고 다니며 가장 신심 깊은 신자처럼 위장하고 거짓말을 하여 신자들을 꾀어냈습니다.”
(이 보고서는 김대건 부제가 1845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서울에서 작성하여 상해에 가지고 가서 그해 7월에 리부아 신부에게 발송한 것이다.)
21편의 편지글을 마지막으로 신부님과 신자들이 겪으신 순교의 간략한 묘사 그림과 설명을 보며, 글과 언어로 언급할 수조차 없는 인간이 지닌 獸性, 무한한 야만적 잔인성에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맑은 이슬처럼 스러져간 수많은 이름 모를 순교자들의 넋이여, 저희를 굽어보소서. 순교 성인 성녀들이여! 간절히 비오니 모든 악으로부터 저희를 보호하여 주소서!
지금 저희가 누리는 평화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신 우리의 슬프면서 자랑스러운 순교자들께 무한 감사드리며, 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스물한 번째 회유문을 끝으로 나눔의 글을 마칩니다.
스물한 번째 편지 (마지막 회유문) 옥중에서 (1846년 8월 말)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중략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效驗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하면 남만 못하리.
중략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矜憐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하노라.
부감목 김 안드레아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