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7.11월 영적 독서「세상 한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7-11-15 15:37:37    조회 : 505회    댓글: 1

세마 성당  11월 영적도서 :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지은이 : 송봉모 

  · 예수회 신부
  · 로마 성서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S.S.L.)취득  ·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  주석학으로 박사학위(Ph.D.) 취득  ·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 과목 강의
저서 「상처와 용서」•「광야에 선 인간」•「고통, 그 인간적인 것」 외 다수

 

나눔의 글


“어떤 사람이 정말로 하느님과 단둘이 있고 싶어 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는 하느님과 단둘이 있게 된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시골에 있든지, 수도원이나 숲 속이나 도시에 있든지 상관없고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토머스 머튼 「고독 속의 명상」 매 순간 찾아오시는 하느님 중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늘 부족한 모습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과 함께」는 <들어가는 말 – 세상을 이분二分하는 태도>에서처럼 세상을 영과 속으로 이분하는 태도를 버리게 되면 기도와 일은 조화될 수 있으며 바쁜 삶을 살면서도 관상적인 태도를 지니게 될 것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들어가는 말 – 세상을 이분二分하는 태도>

 

 교회와 세상은 어떤 관계인가? 기도와 일은 조화될 수 있을까? 관상과 활동은 통합될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이 세상을 영적(靈的)인 자리와 세속(世俗)의 자리로 구분한다. 주일 미사 참례, 기도, 성경 읽기, 레지오, 구역모임 등은 하느님과 관련된 교회 활동 · 모임은 영적인 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상에서 하는 활동 즉 직장일, 아이 돌보기, 식사 준비, 영화 구경, 장보기, 술자리 등은 모두 세속에 속한다.


 이분법적이고 바리사이적인 태도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은 우리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교회(주일)에서는 하느님을 기억하지만 평일에는 하느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산다는 얘기다. 
 영화 ‘투캅스’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양분해서 대할 때의 속물적인 모습을 과장해서 표현한다. 이른바 바리사이적 모습이다. 이 세상을 영과 속으로 구분하면서, 세속은 거룩하지 않기에 철저히 멀리하는 태도다.
 
 바리사이처럼 철저히 거룩한 신앙생활을 고집하는 이들은 대중가요는 물론 가곡과 고전음악까지도 세속 음악이라 하여 멀리할 뿐만 아니라 영화도 아무 영화나 보지 않는다. ‘십계’ 나 ‘나자렛 예수’처럼 신앙에 관한 영화만 본다. 특히 ‘ET’ ‘쉰들러 리스트’ ‘쥬라기 공원’ 등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영화는 뉴 에이지 영화라고 기피한다. 하지만 유다인 스필버그 감독은 유다인 어머니 밑에서 신앙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만든 영화를 보면 하나같이 하느님의 본질과 영역을 다룬다. 
 
 우리가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단순히 어떤 작품에서 하느님이란 말이 나오니까 좋은 것이고, 신앙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으니까 봐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너무나 미숙한 생각이다. 이 말은 형편없는 작품이라도 하느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면 훌륭한 작품으로 취급하겠다는 말이다.

 
이분법적 태도는 비성경적 · 비교회적이다


 세상을 영과 속으로 양분해서 보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그러한 태도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바오로 사도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바오로 사도의 이와 같은 행위는 우리가 흔히 세속적이라 여기는 먹고 마시는 일이었다. 그는 세상을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바오로 사도한테는 먹고 마시는 것이 모두 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이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것을 권고했다.


 장소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장소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과 우리의 태도다. 우리가 지금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가, 않는가에 따라 그 자리가 구분된다.


다음과 같은 영성시가 있다.


구도자가 술집에 들어가면
그 술집은 곧 그의 구도장이 될 것이며
주정뱅이가 求道場에 들어가면
그 구도장은 곧 그의 술집이 될 것이다.

 

성화는 성당과 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聖化는 세상 한 가운데서, 우리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그 일을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데 있다.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붙들어야 할 것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신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처럼 바쁜 삶을 살면서도 마리아의 관상적 태도를 갖기를 바라신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만으로는 부족하다. 끊임없는 훈련을 해야 한다. 붙들어야 할 삶의 양식을 붙들고, 물리쳐야 할 삶의 양식을 물리치는 훈련을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1. 기억 훈련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자하는 숭고한 열망,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과 함께하려는 지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망각忘却이다. 우리는 쉽게 하느님의 현존을 잊어버린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망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홍해바다를 갈라 건너게 하여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주시자 하느님을 찬미했다. 하지만 3일이 안 되어 물이 떨어지자 하느님을 원망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망각을 물리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며 매일을 살아갈 수 있을까?
 

수학자이며 철학자였던 파스칼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웃옷 안쪽, 심장이 닿는 곳에 실로 꿰맨 메모지를 발견했다. 파스칼이 하느님 체험을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파스칼은 은총의 체험을 적어 심장 가까이 품고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자주 메모지를 만지곤 했다.

 

그런데 특별한 은총의 체험이 없다면 꾸준히 다음 세 가지 기억 훈련을 해보도록 하자.


첫 번째 훈련 : 하루 중 자주 주님의 현존을 기억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특히 바쁠 때, 어려움을 겪을 때, 심리적으로 힘들 때, 피곤과 무력감으로 의욕이 없을 때일수록 “저와 함께 계시는 사랑하는 주님, 저에게 힘을 주소서. 저와 함께 계시는 사랑하는 주님, 제게 평안을 주소서. 저와 함께 계시는 사랑하는 주님, 제게 온유함을 주소서.”라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당장은 보이지 않는 주님을 향해 사랑을 고백하는 것 어색하고 쑥스러울 수도 있고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것은 주님과 일치해 살고 싶은 우리의 지향을 굳건히 하고,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 훈련 :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으로 십자 성호 긋기

교부 테르툴리아노가 전해준 이야기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매사에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사랑하고자 늘 성호를 그었다. 우리도 하루 몇 번씩 성호를 긋는다. 주님의 도움이 구체적으로 필요한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모든 일을 시작할 때 십자 성호를 긋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 번째 훈련 : 한 가지 일을 마친 후 잠시 멈추어 되돌아보는 스타티오 훈련

 스타티오statio 훈련은 지금까지 설명한 훈련, 곧 일을 시작할 때마다 성호를 긋는 훈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스타티오란 ‘머물고 있는 자리’를 의미하는 라틴어다. 이 훈련은 서둘러 다음 행위로 넘어가지 않고 잠시 여유를 갖고 조금 전에 한 행위를 성찰함으로써 그 행위와 하게 될 행위 사이에 공백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일에서 다음 일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했던 일을 깊이 생각해 보는 행위는 통합된 삶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 의식적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주님의 참된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성취와 경쟁을 우선하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세 가지 훈련을 정리해 보면, 첫째는 자주 주님의 현존을 기억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훈련, 둘째는 시작하기 전에 마음으로 성호를 긋는 훈련, 셋째는 한 가지 일을 마친 후 잠시 멈추어 되돌아보는 스타티오 훈련이다.


2. 기도 자리 마련하기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려면 기도할 곳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당이나 골방을 찾아야 한다. 물론 성당이나 골방은 상징적이다. 실제로 성당이나 골방에서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은 지하철 안이든, 가게나 복도 한구석이든, 어디서든지 주님과 함께하는 고독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없는 그만큼 주님과 멀어지게 된다. 주님은 우리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시는데 우리는 주님을 바쁘다며 등만 보여드리고, 마음을 드리기보다는 일을 많이 하는 것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것은 아닌가? 일이나 활동이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며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하늘 왕국을 건설한다고 하면서 어느새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이들을 본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유일한 목적은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지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신학자 챔버스(Oswald Chambers)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하려면 기도 – 활동 – 기도 - 활동의 고리가 순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마르타의 바쁜 삶에서도 마리아의 관상적 삶을 살 수 있다. 활동 후엔 고독의 자리로 돌아와 주님께 기도하면서 조금 전에 했던 활동을 반성한다. 활동에서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모으고, 성과에 치중하면서 갖게 된 욕심이나 인간관계의 갈등을 분별 · 반성한다. 그리고 이 분별을 바탕으로 다시 주님과 함께 세상에 나가 활동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힘을 받는 자리이다. 세상에서 하는 우리의 봉사는 우리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봉사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1베드 4,11)

 

주님을 위해 열심히 수고하면서도 마르타처럼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한다고 하면서도 영적 파탄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자문할 필요가 있다.
 
 · 나는 지속적으로 기도자리를 마련하는가?
 · 충실히 개인 기도를 드리는가?
 · 정기적으로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모시는가?
 · 성경 말씀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는가?
 · 하루 삶의 중간과 끝에 양심성찰을 하는가?
 ·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책을 꾸준히 읽는가?
 · 강론 테이프나 성경 강의 테이프를 꾸준히 듣는가?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물리쳐야 할 것들


관상과 활동을 통합하기 위하여 물리쳐야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마르타한테서 발견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마르타가 많은 일을 염려하면서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이요(루카 10,41), 다른 하나는 마르타가 온갖 시중드는 일로 너무 분주했다는 점이다(루카 10,40).
 마르타의 이와 같은 모습은 실상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묘비명으로 쓰면 딱 맞을 내용이다.
 “늘상 걱정하면서 일에 쫒기면서 살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노라.”


1. 걱정에 사로잡히지 말 것

 예수님은 몇 번에 걸쳐 걱정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권고가 아니라 명령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강하게 명령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걱정은 파괴적인 습관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 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인생에서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 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걱정하는 습관을 단호히 끊어버리라고 하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명령이 아니라 권고에 그치게 되면 새겨듣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하루에 6만 가지의 생각을 하면서 보낸다고 한다. 성경에서 걱정이라는 말은 정신세계가 나누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 머릿속에 하루 종일 6만 가지의 생각이 오간다면 정신 사나울 수밖에 없다.
돈 걱정, 업무, 청구서, 등등 이러한 대부분의 생각은 상상에 의한 걱정거리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며 내 삶을 주관하시고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이다.

 

헨리 나웬은 “걱정한다는 것은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않은 시간과 장소를 ‘혹시’라는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는 행위다.”라고 했다. 당시 나를 힘들게 했던 걱정거리가 며칠도 안 되어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참으로 무익하고 쓸모없는 걱정을 사서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온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세상사가 사소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면서 근심 걱정을 할 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악마다. 근심 걱정은 악마의 운동장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우리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라 해도 원수 악마가 근심 걱정으로 우리 내면을 감염시키면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피폐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의 근심 걱정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부식시킨다. 아무리 작은 100원짜리 동전이라도 눈앞에 갖다 대면 태양을 볼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작은 근심이라도 거기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태양이신 하느님을 볼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영성신학자들은 근심 걱정을 불신앙과 동일시하고, 무의식적 신성모독 행위라고 정의한다.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방법


 1) 근심 걱정이 생길라치면 즉시 기도한다. 

성경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기도할 것을 강조한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 우리의 근심 걱정을 온전히 내맡기지 않고는 평화란 있을 수 없다.

 걱정단지와 기도단지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나쁜 소식이나 불행한 사건 앞에서 걱정이 될 때 어떤 단지를 선택할 지는 철저히 우리의 몫이다.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내가 최선을 다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애지중지하던 자식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고 하자. 부모는 아이의 죽음이 확실해지자 하느님께 기도했다. “아이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 아이를 당신께 보내는 것을 슬퍼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 아이와 함께했던 시간을 감사하게 하소서.”

 

아무리 애를 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내적 평화로 지낼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고통 속에서 지낼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2) 근심에서 벗어나려면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걱정하는 신자들에게 마음에 걱정거리 대신 담아두어야 할 유용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필리 4,6,8)
 

마음에 무엇을 담아두었는지에 따라 우리 삶은 달라진다.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보다는 그 상황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가 하느님 현존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관건이다. 우리에게 덮쳐오는 외적 상황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그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가는 철저히 우리 몫이란 뜻이다. ‘우리 몫’이란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과 나의 몫이란 뜻이다.

 

바오로 사도는 어떤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늘 기뻐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가? 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의 표지요 구원 받은 자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주변 환경에서 비롯되지만 기쁨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한테서 비롯된다.
기쁨은 지금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이기에 항구하고 영속적이다. 그러므로 기쁨은 신앙 문제라 할 수 있다. 
 
3) 근심이 밀려올 때마다 의식적으로 마음에서 내보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하물며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도 저렇게 잘 돌보아 주시는 하늘 아빠께서 하물며 당신 자녀인 나를 더 성심성의껏 돌보아 주시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마음속의 근심거리를 내보내는 것이다.

 


2. 쫓기듯이 살지 말 것

 걱정과 분주함은 우리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물리치고 거듭 훈련해야 할 것 들이다.
 우리 모두는 마리아처럼 살고 싶어 한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사랑의 눈길로 쳐다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마르타처럼 살아야 한다. 마르타처럼 먹고 살기 위해 분주하게 일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덜 복잡해지고 덜 바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게다가 우리는 대부분 마르타처럼 일 중심의 사람이다.

 

나는 바쁘다. 하지만 올바른 일로 바쁜가?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자문해 보자. 일에 쫓기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후회스런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도 우선순위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영혼은 육신의 우선순위와 다르다.
 
 우리는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할 때 고인이 남긴 재산이나 그의 잘 생긴 외모에 대해 찬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인의 따스한 인품, 가족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관대함, 하느님에 대한 헌신을 기억하고 찬사를 보낸다. 죽는 그날까지 우리는 바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사회학자이며 신학자인 토니 캄폴로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면서 죽지 않고, 사랑하며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

 

분석심리학자 융(G. Karl Jŭng)은 분주함은 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악 자체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바쁘게 쫓기며 살아가는 삶은 영원을 잊고 앞만 보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일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지 못한다. 너무 바빠 시간과 운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망각한다.

 

쫓기는 삶의 반대는 여유를 가지고 사는 삶이다. 그 여유란 휴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통합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정서적인 힘과 시간을 가리킨다. 허겁지겁 바쁘게 살다보면 내면이 피폐해진다. 인내 · 사랑 · 동정 · 배려 등 온유한 마음은 사라지고 거칠고 날카롭고 공격적이고,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하게 된다.

 

 바오로 사도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의미 있게 사용할 것을 권고한다.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에페 5,15-16)
 

여기서 ‘시간’이란 그리스어로 ‘카이로스’다. 성경은 두 가지 시간을 언급하고 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다.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이고, 크로노스는 양적인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주님과 일치하여 의미 있게 살아가는 시간이고, 크로노스는 주님과 관계없이 세속에 휩쓸려 허망하게 살아가는 시간이다.

 


<나가는 말 –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낳는다.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낳는다.
습관을 심으면 성격을 낳는다.
성격을 심으면 운명을 낳는다.
        - 영국의 저술가 새뮤얼 스마일스 -

댓글목록

작성자: 글라라님     작성일시:

세마 성당 특허품? 고소한 현미 누룽지愛 이야기를 펼치면서 바람이 스산한 가을 저녁, 루카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처럼 바쁜 삶을 살면서도 마리아의 관상적 태도를 지니기 위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들, 물리쳐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함께 공감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녁 식사도 거르신 채 독서 미팅에 함께하신 홍태익 베네딕도님, 김덕숙 베로니카님, 누룽지 만드시다 말고 기꺼이 합류하신 지대균 니콜라오님, 강기숙 아네스님, 김남옥 안나님 그리고 문 요셉 신부님께서 자리를 함께 해주셨습니다. 다음 달 세마 성당 영적 도서는 「사랑하기 위하여 기도를 배운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