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4월 영적도서 :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지은이 : 조앤 치티스터 Joan D Chittister
· 1936년 미국에서 출생 · 베네딕도회 수녀
· 40년간 평화, 인권, 여성, 교회 쇄신을 주제로 다룬 세계적인 강연자이자 영성작가
· 미국 베네딕도 여자 수도회 협회 회장과 미국 여자 수도회 지도회 대표 역임
· 현재 현대 종교 연구소인 ‘베네트 비전’의 이사
저서 : 「시련, 그 특별한 은혜」, 「내 가슴에 문을 열다」, 「세월이 주는 선물」 외 다수
옮긴이 : 박정애
나눔의 글
제자가 스승인 랍비에게 물었다.
“저처럼 미천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모세처럼 살 수 있습니까?”
스승은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가 죽을 때, ‘너는 왜 모세처럼 살지 못했나?’ 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네. ‘너는 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했나?’ 라는 질문을 받을 걸세.”........「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맺음말 중에서
심오한 Joan D Chittister 의 코헬렛서 묵상은, 마치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때를 남이 아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며, “의미 없는 순간이란 없다” - 인생의 16가지 순간에 관하여 들려주는 듯합니다.
머리말 : 인생의 시기
구약 성경의 지혜서 중 하나인 코헬렛서는 목적이 없어 방향 감각을 상실하거나 계속되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한다. “역경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보다 불행한 삶은 없다.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은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것이다.” 라는 속담처럼 우리는 코헬렛서를 통해 인생이 각자가 경험하는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모자이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삶의 순간들을 잃어버리기 전에 이해하고, 놓치기 전에 누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1. 태어날 때 : “운명은 기회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태어날 때’가 있다. 우리가 태어나는 이 시대는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시대이고 우리가 축복을 받아야 할 시대다. 테러와 전쟁, 인종 차별과 성차별, 불공정한 국제 무역 등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우리의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면, 운명은 기회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성취를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의미
코헬렛서에서는 그것이 이 시대가 자신이 태어난 때임을 인식하고, 운명은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인 의식이라고 한다. 헝가리의 파벨, 남아공의 만델라, 아일랜드의 메리 로빈슨이 그랬다. 이들은 모두 불가능한 일에 맞서 일어난 이들이었다.
우리 안에서 자신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냉소적인 태도이고 둘째는 개인적 편안함, 셋째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가 이 시대를 자신이 태어난 특별한 때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면, 관습의 사슬에 저항하는 데 필요한 내면의 자유와 자존감을 얻을 수 있고, 내면의 자유와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기준과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다.
2. 잃을 때 : “하느님이 아담에게 준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권리였다.”
화가 존 어거스트 스완슨은 코헬렛서의 내용을 그리면서 ‘잃을 때’를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아담과 하와가 신처럼 완벽하게 행동하지 못했기에 하느님의 벌을 받았다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인간이고 인간의 주변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단순한 삶에는 너무도 많은 상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그러나 상실은 분명 또 다른 선택으로의 초대다. 지금 우리는 실패의 미덕을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실패의 창조력을 파괴했다.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순환을, 창피와 죄책감과 분노로 바꾸어 놓았다.
충만하고 생기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에덴동산의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배움의 좋은 기술이다.
3. 사랑할 때 : “사랑은 생명과 죽음을 잇는 유일한 다리다.”
세계 어디서나, 어느 영역에서나 실제로 사랑이 아니면서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섹스 문화, 아동 학대, 성차별 등등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차별이 넘쳐난다.
진실한 관계 위에 세워진 사랑
진정한 사랑은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낭만적인 경지가 아니라 아름답고 진실한 경지로 우리를 고양시키며 동등한 만남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힘든 현실에 처했을 때, 애정 어린 손길이 필요할 때 진실한 관계를 찾는다. 진실한 관계가 없는 곳에는 진정한 대화도, 신뢰할 만한 대화 상대도 없다. 그저 허공을 떠도는 말과 잠깐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인생에 진실한 관계가 없다면 영혼은 메마르고, 그로 인해 삶이 비틀거릴 것이다. 진실한 관계는 결혼 생활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진실한 관계없이는 결혼 생활이 유지되기 힘들다.
사랑이 보여 주는 것들
사랑의 영적인 효과는 대단히 크다. 사랑을 아는 것은 자유로운 신뢰를 아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준다.
사랑은 내면에 있는 작지만 좋은 것을 보게 하고, 모든 것을 용서한다.
4. 웃을 때 : “유머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위로다.”
코헬렛은 ‘잃을 때‘가 있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웃을 때’도 있다고 말한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니 언젠가 웃을 때도 있을 것이다.
코헬렛은 억누르기 힘든 생각에서 영혼을 환기시키는 힘이 웃음이라고 말한다. 웃음은 세상의 모든 규칙이 무용지물이 되고, 계급과 신분이 평등해지며, 힘없는 이들이 이기는 순간을 주목한다.
웃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기분을 고양시킨다. 웃음이 있는 삶은 불가능한 것이 없고, 어려울 것이 없으며, 어떤 것에도 패배하지 않는다. 웃음은 항상 인생을 더 즐겁게 하는 은총인 것이다.
유머를 어려워하는 이들
어떤 사람들은 유머를 어려워한다. 그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머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치열하게 사는 엄숙한 사람들로, 인생에서 어떠한 어리석은 짓도 용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어리석은 짓도 참지 못한다.
웃음에도 장애물이 있다. 장애물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이것이 미덕으로 통한다. 바로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들은 성당에서 어린아이들에게 겁을 주고, 즐거운 파티에서도 판결을 내린다. 그들은 스스로 분노의 신의 전령이 된다. 이러한 사람들의 거룩함은 열정이라기보다는 병에 가깝다.
코헬렛은 거룩함을 다르게 생각했다. 그리고 성경을 꼼꼼하게 읽었다면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심을 알 수 있다. 웃음은 인생의 심각함을 견딜 수 있게 해 주고, 막막함을 풀어 주고,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성인들을 지나치게 엄숙한 사람들로 보는 견해는 오히려 세상을 죄 짓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하느님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잠언의 저자도 웃었다. 웃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웃음을 가로막는 두 번째 장애물은 완벽주의에 대한 집착이다.
인생에서 웃어야 할 때
·사람들이 농담할 때 웃어라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볼 때 웃어라
·실수했을 때 웃어라
·어린아이들과 함께 웃어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보고 웃어라
·잘난 척하는 사람을 보면 웃어라
·세심하게 준비한 모든 계획이 틀어질 때 웃어라
건강한 정신을 위한 기초 세우기
결국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이상 모든 일에 대해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비법은 삶은 그저 삶이고, 죽음 또한 그저 죽음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온 세상은 광대들의 낙원이 되어, 우리는 그 속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것을 보고 웃게 된다. 그렇다면 인생의 흠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밀스러운 선물 일 수도 있지 않을까?
웃음은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만드는 구심점이며 건강한 정신을 위한 기초다. 웃는 사람에게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고, 세상은 선한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이중성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자신의 남루한 모습에 거부감도 없다. 오직 다정한 손길과 모든 사람을 끌어안으려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웃고 즐기는 법을 배우면, 우리와 함께 웃고 즐기시는 하느님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과분한 선물을 약속하시는 하느님은. 비웃음을 당해도 웃으시는 분이시고, 모든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웃으시는 분이시다. 천국에는 오직 하느님의 웃음소리만 울려 퍼진다.
5. 전쟁의 때 : “우리는 황무지를 만들고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세계가 스스로 파는 무덤
미국은 전쟁을 여러 차례 일으켰다. 어떠한 국제적 관여를 했든 간에 미국은 진정한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자신들의 부모와 아이, 집, 도시, 국가, 미래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주요 수출 품목은 무기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종말을 사고팔고, 이 세상의 무덤을 만들고 있다. 무기의 최고가 입찰자에게 죽음을 팔아놓고서는 그것을 ‘안전’ 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대학살을 애국심으로 위장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싸움을 해야 할 때다.
전쟁의 추악한 속내
전쟁은 그 원인을 제거해야만 막을 수 있다. “하느님을 위해”,“ 조국을 위해”라고 하면서 전쟁을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전쟁을 받아들이게 하는 마음속의 폭력을 제거하는 것이 전쟁과 싸우는 것이다. 심지어 한꺼번에 250개의 도시를 겨냥하여 파괴할 수 있는 크루즈 미사일 시스템을 갖춘 핵잠수함에는 ‘코퍼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을 파괴할 무기에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신성 모독이다.
로마의 시인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황무지를 만들고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낙태를 반대할 때처럼 성직자들이 핵무기에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전쟁은 군대의 몫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비폭력 저항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국은 이제 자기 자신과 전쟁을 하는 국가가 되었다. 아이들의 피가 거리에 흐른다. 그들에게 폭력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잘 무장된 국가지만 동시에 가장 안전하지 못한 국가이기도하다. 인종 집합체인 미국 사회는 항상 일촉즉발의 상태다.
변명에 묻힌 평화
우리 안에는 외부의 어떤 적보다 크고 강한 적이 있다. 그 적은 우리가 평화를 알기 전부터 우리를 길들인다. 그것이 바로 이익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다. 이익과 권력에 대한 탐욕은 모든 차원에서 나라 전체에 파고들어 영혼을 서서히 병들게 만드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적이다.
우리는 경제와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지구를 파괴하는 것도 필요하고, 또한 우리를 전쟁의 노예로 만드는 방위 산업이 자유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국가의 잘못된 행보도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제는 전쟁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때다. 그것은 과학 기술의 광기다. 대량 학살을 평화라고 부르지 않는 한, 전쟁은 더 이상 효과가 없다.
필요한 전쟁이란 없다. 그것이 진리다. 전쟁은 우리 안에 있는 야만성, 폭력성, 타락한 마음과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6. 치유될 때 : “슬픔이 있는 곳에 거룩한 땅이 있다.”
상처와 치유의 상관관계
코헬렛서에서 ‘치유될 때’에 관한 내용에는 두 개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첫 번째 메시지는,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다른 사람의 괴로움에 대해 신경을 쓸 때가 있는데, 그 때 우리가 그들의 괴로움을 줄여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누구나 자신의 깊은 상처가 치료될 때가 있는데, 이 과정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고통의 목적은 아픔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시련과 상처는 강인해지고자 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기회며 필요한 도구다. 그리고 치유는 우리 각자의 안에서 때를 기다린다.
분명한 치유의 과정
치유를 막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 첫째는 고통에 대한 집착이다. 고통을 붙들고 있으면 치유될 수 없다. 우리가 느끼는 억울함을 버려야 한다. 배신, 부정, 조롱 등 어떤 부당한 경험을 했든, 우리가 어디에서 상처를 받았든, 인생에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 있다. 결국 치유의 첫 번째 단계는 장애물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기쁨을 찾는 것이다.
치유의 두 번째 단계는 새로운 인생관을 찾는 것이다. 안정, 사랑, 믿음 등 이전의 인생관에서 벗어나 이제는 새롭게 찾아야 한다.
치유의 세 번째 단계는 우리가 누구도,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 자신을 타인에게 의탁하는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이 마음의 장애물을 뛰어넘어, 타인 안에서 자신에 대한 수용과 이해를 발견하며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할 때, 치유가 시작된다.
또한 스스로 반복해서 자신의 상처를 꺼내 놓음으로써 상처에 둔감해질 때 치유가 이뤄진다.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은 이해받기를 원한다.
7. 뿌릴 때 : “지금 승리 하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실패하는 길보다, 지금 실패하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승리하는 길을 택하겠다.”
기다리기만 하면 오지 않는 변화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변화만이 영원하고 계속되며 불멸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변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불 듯 앞선 것에 뒤이어 온다. 변화는 간절한 상황들이 끊임없이 축적되어 일정 수준에 도달했을 때 얻을 수 있다.
인종 차별 폐지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틴 루서 킹이 평등을 얻기 위해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도심을 행진했기에 가능했다. (여성의 참정권 획득, 베를린 장벽의 무너짐 등)
환경뿐만 아니라 영혼을 바꾸는 진정한 변화는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느리고 힘들고 고통스럽다. 오히려 대가와 고통스러운 헌신을 요구한다.
씨 뿌리는 사람
코헬렛은 준비 과정에 헌신하는 것에 매우 분명하게 말했다. 곧 인생은 변화에 관한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각 세대의 역할은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준비하는 것이다. 미래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 씨를 뿌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예언자, 혁명가, 성인이 꿈꾸는 미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외롭고 고독한 과정
씨를 뿌리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며, 영혼의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 결과를 볼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는 끈질긴 인내심의 영성이 있다. 그는 지금 없는 것을 추구한다. 씨 뿌리는 사람은, 씨 뿌리는 역할이 부질없어 보일 때에도 씨를 뿌린다. 씨 뿌리는 즉시 결과를 보기 원하는 문화에서 씨를 뿌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수양이다.
지금 실패해도 언젠가 반드시 승리할 길
씨 뿌리는 것은 그 자체로도 영적 열매를 맺게 한다. 믿음이 씨 뿌리는 사람의 마음에서 불꽃처럼 튄다. 믿음과 버리기는 씨 뿌리는 사람의 특징이다. 냉철한 확신은 씨 뿌리는 사람의 영혼이 정화되는 과정을 진행해 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씨 뿌리는 사람은 하느님과 동행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안다. 지금은 씨를 뿌려야 할 때다. 미래가 어떻게 되든 바로 지금 씨를 뿌려야 할 때다.
8. 죽을 때 : “어떤 이들은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여 삶을 시작하지도 않는다.”
삶의 가치에 대한 물음
“삶의 이유가 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참으로 무거운 질문이지만 그러나 인생에 관한 더 본질적인 질문은 “목숨을 내놓을 만큼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이다.
삶의 가치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 중에는 무가치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 어떤 이에게는 교황에 대한 충성이, 어떤 이에게는 국가에 대한 맹신이, 어떤 이에게는 가문의 명예였다. 또 어떤 이에게는 베트남 전쟁이, 어떤 이에게는 독재자의 정치 체제, 권력을 위한 투쟁이었다.
덧없는 이 모든 것들은 기억되지 않거나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것은 모두 인간의 비참한 실수였으며, 또 다른 영웅에 의해, 또 다른 독재자에 의해 대체되었다. 결국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혼란을 준다.
코헬렛은 이런 헛된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코헬렛은 죽음에 관해 질문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목숨을 내놓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자기 안에 죽여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작은 죽음
오늘을 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을 비우고 스스로를 희생할 때 내일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우리는 잃는 것이 너무 두려워 죽음을 미루는 일을 ‘생명’ 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인종 차별과 성차별, 군국주의의 기반 위에서 번성했으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폐해를 찾아내지 않고, 독소를 드러내지 않으며, 더 나은 무언가가 우리 안에서 자라나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우리는 권력 앞에서 몸을 숙여 굽실거리고 허물어지면서 마음속에 있는 어둠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고는 사회 구조의 독성이 묻은 열매를 먹는다.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해 허우적대면서 우리 안에 있는 그 질병을 질병이라 부르지 않는다. 지금껏 알았던 세상의 모든 종류의 악을 참고 그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국가의 핵 무장화를 ‘애국정신’이라 부른다.
우리는 국가나 이념에 대해 도덕성을 숙고하기보다는 단순히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이를 신성시 한다.
코헬렛이 말한 진정한 죽음은 작은 죽음들에 의해 준비된다. 살아 있기는 하나, 자신 안에 있는 비인간적인 것을 직시할 때까지 온전히 인간일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주위에 있는 죽음의 일부를 인정할 때까지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낡은 생각과 말라 버린 목적에 덧씌운 가면을 벗겨 태울 때까지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다. 작은 죽음은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누가 고통 받는 이의 편에 있는가? 누가 사회 구조 때문에 고민하는가? 사람이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은 죽음은 지금 우리의 모습에 이르게 한 것들을 잘라 내는 것이다. 관례적이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우리 안에서 없애기 시작하면, 그 과정이 끝난다. 이름은 그대로지만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사람이 된다.
9. 죽일 때 : “내가 만난 적은 바로 나 자신이다.”
죄에 대한 새로운 시선
누군가 세상을 바꾸고 옛 지배방식을 고쳐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에 관해 쉽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를 제외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자신을 제외한 것이다.
우리 안에는 세상의 모든 악이 존재한다.
삶은 일련의 배움의 과정이다. 중세 교회의 신비가 노리치의 율리아나 복녀는 죄에 관한 환시를 보고 “죄도 쓸모가 있다.”라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죄는 인간 발전의 도구로써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아무 생각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악함
우리는 인색, 시기, 음욕, 교만, 나태, 분노, 탐욕을 칠죄종이라고 부른다. 이 죄악들은 우리가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하며 무기력하게 만들고, 선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며, 내적인 갈등을 일으킨다.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르쉬는 “우리의 모습이 세상의 모습이다.”라고 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이 세상에도 있을 수 있다.
코헬렛은 우리 안에 있는 사악함을 ‘죽일 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이제는 스스로를 아무 생각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악함을 잘라 버려야 할 때다.
완벽주의에 빠진 완벽할 수 없는 사람들
우리는 왜 죄에 얽매이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완벽주의에 빠진 채로 신앙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실수를 봐줄 여유가 없다. 완벽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는 결코 사과도 속죄도 후회도 하지 않는다. 이미 영혼이 병든 상태인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으면 실수의 가치에 집중하기보다 실수를 제거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죄는 나약해서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할 수 있게 해 준다. 결국 죄는 우리가 겸손하고 스스로를 자각하게 한다. 이것이 죄의 가장 좋은 결과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인생에서 우리가 피해야할 것은 죄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죄를 짓고도 결백을 주장하는 뻔뻔스러움이다. 바로 이것이 큰 죄다.
10. 지을 때 : “우리의 원대한 사명은 먼 곳에 있는 희미한 것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는 분명하게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한 때
혁명은 우리에게 승리에 대한 큰 성취감과 함께 승리가 깨지기도 쉽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혁명의 진정한 모습은 옛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에 시작된다. 혁명은 말하기는 쉬워도 행동하기는 어렵다.
노아를 떠올려 보자. 노아는 홍수에 대비하여 방주를 만드는 것도 어려웠겠지만, 폭풍우 속에 방주를 띄우는 일도 아주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이 살던 세상을 떠나는 것도 엄청난 도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이들보다 앞서 무언가를 한 적이 있다면, 노아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기쁨을 위한 확고한 인내
진보주의자들은 다시 짓는 이들이 너무 느리다고 말한다.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이 너무 빠르다고 말한다. 교회의 정통주의자들은 이단이라고 말한다. 다시 짓는 이들의 삶은 너무나 외롭다. 결국 실패한 메시아처럼 배척당할 수 있다.
다시 짓는 사람들은 노아의 눈으로 무지개를 본다. 그들에게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구하려는 마음이 있다. 그들 덕분에 인류가 큰 실패를 거듭해도 인류의 영혼은 성장했다.
11. 끌어안을 때 : “부드러운 감정이 있어야 두려움 없이 다른 이를 끌어안을 수 있다.”
한계를 뛰어 넘는 힘
성경에는 상반되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 모세의 어머니와 파라오의 딸,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젊은 마리아와 늙은 엘리사벳의 이야기가 그런 경우다. 성경은 반대편에 서 있는 다른 사람을 끌어안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들은 서로 닮지 않았고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들은 서로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이러한 끌어안음으로 인해 세상이 변한다.
잘못된 이성주의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이야기다. 우리는 이보다 훨씬 더 이성적이다. 우리 안에 인간성을 격하시키고선 그것을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을 반역자라 부르고, 핵무기를 인류의 자살 도구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우주를 향한 계획’ 이라고 변명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할 줄 알면서, 같은 인간에게 비인간적인 잣대를 들이밀며, 이를 합리화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타인의 아주 작은 잘못도 허용하지 않으며, 한쪽에서는 육체적인 굶주림으로 다른 쪽에서는 정신적인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지만, 그저 보고만 있다. 이러한 우리는 코헬렛서의 교훈을 하나하나 꺼내어 볼 필요가 있다.
비이성적으로 보일 만큼 이성적인 우리는, 감정보다 제도에 더 관심을 두면서 우리의 인간성을 누른다. 학교에서 전쟁의 이점 중 하나가 ‘인구조절’이라고 배운 날을 기억한다. 아마 여러 세대의 아이들이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작가 버나드 쇼는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춘다. 이성적이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끈질기게 노력한다. 따라서 모든 발전과 변화는 비이성적인 사람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감정’
우리는 개인에 대한 존중과 이기주의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사랑의 능력을 상실했다. 끌어안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끌어안을 줄 모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끌어안음’의 영성이 필요하다. 감정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끌어안음’의 영성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을 때,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감정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잘못된 이성과 관념에서 벗어날 때 생긴다.
12. 수확할 때 : “우리는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을 의식하며 걸어야 한다.”
성공과 성취에 대한 잘못 인식
성취의 결과를 성공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인생의 성공은 어떤 대가를 치루든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이 되는 데에 달려 있다.
정신적인 풍요보다 가시적인 이익에 열중하는 사회는 성공의 개념을 왜곡한다. 이러한 사회는 즉각적으로 확실한 수익을 거둘 수 없는 것은 모두 중단하려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 수확을 방해하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 하나는 불평하며 미루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인생의 각 단계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다.
수확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공은 단지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성공은 과정 그 자체다. 그래서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간에 자신을 내던질 가치가 있는 목표를 갖는다.
수확을 방해하는 또 다른 장애물은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다. 젊음을 지나 찾아오는 노쇠한 육체와 정신을 거부한다. 결국은 노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노인을 차별한다. 노인을 차별하는 것은 언젠가는 늙을 운명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그러나 수확하는 사람들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삶의 가치가 줄어든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리에 더 가까워진다는 것을 안다. 노년이 수확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수확의 영성은 성공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에 있다. 수확의 영성은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다가올 다음 순간을 맞이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불완전한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기 위한 은총이다.
또한 수확의 영성은 미소와 신뢰로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가도록 한다. 수확하는 사람은 인생의 여러 시기를 거치면서도 늘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한순간도 멈추지 마세요. 매순간 꽉 찬 삶을 살아가십시오.”
13. 울 때 : “감정이 없는 강함은 가짜다.”
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무감각하게 하는 요령을 터득한 모양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고통과 불행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불행도 회피한다. 그토록 필사적으로 고통을 피해도 눈물은 떨어진다.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서 우는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온 사방에서 들린다.
안타깝게도 우는 것을 영적 선물이나 하느님의 계획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우는 것은 매우 신성하며 생명을 품는 일이다. 또한 사회에 대한 경고이자 발전을 위한 신호이다. 개인적으로 이 구절이 코헬렛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잘 울지 못하는 사람은 주위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울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사람이 되지 못한다.
눈물의 신호
울음을 참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장 잘 보여 주는 지표가 바로 우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우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고, 그런 예수님께 세상의 죽음이 드리웠다. 예루살렘이 변화될 수 없을지라도, 예루살렘을 변화시키기 위해 당신 안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불꽃을 피우며 죽음 앞에서도 담대했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다. 눈물은 슬픔 그 이상의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우는 것은 삶에서 무언가가 변해야한다는 신호다. 눈물이 없으면 고통을 직시할 수 없고 치유의 희망도 사라진다.
눈물은 우리를 과거에서 해방시킨다. 코헬렛은 우는 것이 해방의 길임을 알았다. 눈물을 쏟아 낼 때 우리를 억압했던 것이 힘을 잃는다.
인간은 눈물을 흘리며 성장한다. 자신의 고통에 눈물을 흘릴 줄 알면, 다른 이의 고통을 보듬을 수 있는 인간적인 사람이 된다. 또한 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강해진다. 감정이 없는 강함은 가짜다.
14. 삼갈 때 : “본질적인 자유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보다 무언가를 하지 않을 자유다.”
선한 것을 악하게 만드는 인간
코헬렛은 하느님의 기적을 보고도 금세 잊어버리고,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 안의 욕구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우리에게 금지된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사람의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만족스러워 보이고 좋아 보여도, 그 껍질 안에는 불만족의 씨앗이 있음을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인생의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었을 때 온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거기에 몰두하는 것만큼이나 절제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국의 사회 철학자 에릭 호퍼는 이렇게 말했다. “본질적인 자유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보다 무언가를 하지 않을 자유다.”
절제의 자유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진정한 비법이 된다. 로마의 철학자 에픽테투스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자기가 아닌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절제의 영성은 균형의 영성이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먹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우리가 더 적게 원할수록 신을 더 닮아간다.” (소크라테스)
15. 얻을 때 : “우리는 일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고,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과 삶을 나눈다.”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필요는 없다. 또한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신만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존재가 이 세상에 이익이 되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의미와 목표에 대한 망각
오늘날 사람들은 일 자체를 위해 일하지 않고,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일을 한다. 자신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한다. 이에 따라 일과 생활이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왜 그것을 하는가? 내가 하는 일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고 누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가? 이 일이 하느님 나라가 오는 일에 도움이 되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존재 의식이 없는 우리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한다. 우주의 쓰레기, 바다의 쓰레기, 매립지의 핵페기물 등 우리는 온갖 쓰레기를 만들어 놓고, 처리하는 것은 다음 세대에 넘긴다.
산업화로 이해 맹렬한 속도로 전산화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어떤 일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일이 거의 없다. 더 이상 일의 과정을 다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의 결과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거대한 기업을 위해 극히 작은 일을 하는 한 명일 뿐이다. 그저 거대한 시스템의 하수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며, 나아가 우리가 만들어 낸 결과에 대해 무감각하게 된다. 기업이 어떻게 환경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착취하는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일의 영성은 우리 손으로 하는 일을 하느님의 일로 거룩하게 만든다는 의식에 바탕을 둔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을 聖化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을 함으로써 우리가 성화된다.
우리는 일의 영성으로 인해 자신의 창조성을 발견한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기억하며, 그들과의 공존을 의식하여 일한다.
16. 평화의 때 : “침묵은 평화의 시작이다.”
분쟁을 물려주는 시대
분쟁이 지속 되는 민족들 곧 나후투족과 투치족,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아이들은 모두 태어남과 동시에 어른들의 적을 물려받아서 서로를 증오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아이들이 실제로 물려받은 것은 적개심과 잃어버린 인간성이다.
부족한 자원 때문에 충돌이 생기고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우리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평화의 진리를 알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안에는 평화가 부족하기 때문에 충돌을 일으킨다.
침묵에서 찾는 답
블레즈 파스칼은 “사람의 불행은 한 가지다. 그것은 방 안에서는 평화롭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침묵과 고독은 진정한 평화를 위해 반드시 이겨 내야 할 내면의 전쟁을 직시하게 한다.
침묵은 평화의 시작이다. 침묵을 통해 삶에는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름다움과 진리 그리고 미래는 오직 침묵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침묵 가운데 자신의 내면을 돌아봄으로써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게 된다.
침묵은 고독의 가치를 알 때 가능해진다. 외로움은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상태인 반면에 고독은 마음의 평정을 찾은 상태다.
고요함과 외로움을 구부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문화에서는 고요함이 일종의 공포가 되었다.
침묵은 이 사회가 잃어버린 예술이다. 과거에는 침묵이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풀과 나무와 바람의 소리를 듣고 여유를 즐겼다. 침묵은 친근한 것이었고 박탈이나 무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침묵은 각성하는 영혼이다. 침묵은 내면의 치열한 논쟁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나아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우리의 부족함과 마주할 때, 다른 사람에 대한 인색한 판단과 속 좁은 평가는 끼어들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더 부드럽게 대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비난에 무뎌지고, 타인에게 관대하며, 자신의 확신을 맹신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무의미하게 자기의 신념에 몰두하지 않는다. 이때 침묵은 사회적 미덕이 된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 조용히 앉아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은 평화의 영성의 핵심이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고로 나는 자유롭다.”(카잔차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