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7. 6월 영적독서 「아주 특별한 순간」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7-06-14 18:14:14    조회 : 643회    댓글: 1

세마 성당  6월 영적도서 : 「아주 특별한 순간」

지은이 : V. 안토니오 사지 VC

  · 1977년 인도에서 출생
  · 신학교 과정을 인도와 동아프리카의 케냐에서 수료                                          

  · 2006년 12월 29일 빈첸시오 수도사제 서품 

   · 故 요셉 빌 신부의 침묵치유피정 사목 후임자로 임명됨

옮긴이 : 류해욱 신부(예수회 · 영혼의 쉼터)
  · 1955년 충북 제천 출생, 예수회 입회 사제가 됨
 저서 : 「그대 안에 사랑이 머물고」 · 「모든 것이 당신 것입니다」
 역서 : 「일상 삶 안에서의 영신수련」 · 「할아버지의 축복」 외 다수
 

옮긴이의 글

이 책은 인도 빈첸시오회 소속 안토니오 신부의 피정지도 내용을 엮은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 안토니오 신부에 앞서 요셉 빌 신부를 소개해 드립니다. 안토니오 신부 자신은 늘 요셉 빌 신부의 후계자로서 피정지도를 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요셉 빌 신부는 인도 케랄라와 아프리카의 빈첸시오회 소속 사제로서 헌신적이고 탁월한 피정 지도자였습니다. 요셉 빌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치유를 직접 체험하고 나서 치유자가 되신 분입니다.
빌 신부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6일간의 침묵치유피정과 함께 치유미사와 대중설교를 했습니다. 자신의 피정은 성령쇄신피정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께 마음을 열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육체를 모두 치유 받도록 도움을 주는 피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는 故요셉 빌 신부의 마지막 몇 주간을 함께 지내며 임종을 지킨 분으로, 요셉 빌 신부의 침묵치유피정 사목을 이어받을 후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님이 매년 한국에 오실 때 신부님의 피정 내용은 은총이 넘치며 아무런 강의 준비 원고도 없이 성경 하나만 들고서 강의하는 모습에서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피정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분에게서 성령의 은총이 넘치는 것을 체험한다고 증언합니다.


「아주 특별한 순간 : 안토니오 신부의 치유피정」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정통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아주 역동적이며 영감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깊은 묵상과 관상을 통해 나온 내용이기 때문에 단순히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자 스스로 깊이 성경 안으로 들어가서 묵상이나 관상을 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이 책은 일상 삶에서 피정을 하기 위한 안내서입니다.

 

나눔의 글
   

「아주 특별한 순간 : 안토니오 신부의 치유피정」은 모두 25회 피정강의록으로 일상 삶에서 침묵 중에 혼자 스스로도 피정을 할 수 있으니 삶에 지친 우리 영혼의 치유에 유용한 강의록입니다. 아무런 강의 준비 원고도 없이 성경 하나만 들고 하는 강의라니 성령의 은총은 정말 신비롭습니다.


첫 번째 강의 : 씨앗과 농부, 땅
예수님의 말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1-9)는 흙과 씨앗의 비유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땅은 우리의 마음이다. 땅에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 마지막으로 좋은 땅이 있다. 좋은 땅에서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우리는 교회의 구원의 연장을 사용하여 좋은 흙(땅)을 준비하여야 한다.
교회가 갖고 있는 구원의 연장 즉, 성체성사와 고해성사 같은 보화를 사용하여 씨를 받을 좋은 비옥한 흙(우리 마음)을 준비를 해야 한다.

 

두 번째 강의 :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편견 없이 바라보아야 한다. 루카복음서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처럼 과거는 과거일 뿐 누구든지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에 의해 존엄한 가치를 지니고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창세기 3장 11절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이것이 처음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신 대목으로 우리가 하느님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면 알몸이라고 느낄 것이다. 열등감이 생길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우리 마음이 슬퍼지고 고통이 생긴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것만 들으면 우리에게 슬픔이 사라진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 우리에게 하는 험담은 다 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삶에 예수님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모든 성인은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인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습니다. 모든 죄인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비록 과거에 넘어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놀라운 아들 딸 들입니다.


세 번째 강의 : 믿음은 성경에 바탕을 둔다
피정의 아름다움은 침묵을 지키는데 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에 대해 신경을 쓰지 말아라. 그렇게 되면 슬퍼진다. 침묵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성체조배를 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분이 우리의 고통을 가져가신다. 조용히 침묵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다. 이 피정에서도 침잠 안으로 들어가려면 최소한 이틀이 필요하다. 피정을 잘 하기 위한 세 가지 요건은 첫째 잘 먹는 것, 둘째 잘 쉬는 것,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보화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느님의 영,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 신앙의 바탕은 성경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할 때 우리에게 믿음이 생겨난다.


네 번째 강의 : 믿는 자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 성경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성 그레고리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연애편지를 쓰셨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라고 말했다.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부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를 낳아주신 아버지의 사랑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느님이신 아빠 아버지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나 육신의 아버지의 사랑에는 때로는 조건이 붙는다. 우리는 이것을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된다. 거짓 아버지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떠나 세상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거짓 아버지는 혼자가 되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도움 없이 세상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몰두하게 만든다. 우리가 부모를 떠나거나 예수님을 떠나면 서서히 세속에 빠져들게 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모토는 “믿는 자는 혼자가 아니다.” 이다. 나약한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우리는 아버지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하다. 


다섯 번째 강의 : 물동이를 버려두고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나누는 길고 아름다운 대화(요한 4,5-26)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안과 밖을 다 보고 계신다. 우리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내밀한 방을 보고 계신다. 그것을 다 아신다. 예수님께 우리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숨기면 죄책감이 커지고, 우리는 점점 더 슬픔에 빠지게 된다.


치유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의 부서진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여인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치유가 일어났고 우물가에 물동이를 그대로 놔두고 마을로 달려간다. 우물가의 물동이 즉 옛 습관은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고통 받는 사람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고통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받는 사람이다. 


여섯 번째 강의 : 야곱과 에사우-축복
하루는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 그때 에사우가 허기진 채 들에서 돌아왔다. .....그는 먹고 마시고 나서는 일어나 나갔다. 이렇게 에사우는 맏아들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창세,25,29-34)
이사악에게는 야곱 에사우 아들이 둘이 있었다. 야곱이 처음에는 자기 머리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획대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야곱은 하느님께 의탁하기 시작 한다. 회심이 일어난 것이다. 자기의 지적 능력을 믿지 않고 하느님께 신뢰를 둔다.
 

오늘날 아직도 세상에는 야곱의 죄가 계속된다. 여전히 자기의 능력, 자기의 힘을 믿고 있으나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맏아들 권리는 하느님의 축복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에사우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사우는 장자권을 야곱의 불콩죽 한 그릇에 팔아넘긴다. 에사우가 먹은 불콩죽 한 그릇은 우선의 안전, 물질을 상징한다. 그것이 영원한 행복을 줄 수 없다. 잠시의 즐거움만 느끼게 할 뿐이다.


일곱 번째 강의 : 교회가 우리 영혼의 정비소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기 위해서 학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단순함과 겸손함이다.
우리가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하다. 우리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그분만이 하실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은 세상의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고 했지만 세상의 것으로 채우면 채울수록 마음은 더 메말라진다. 
 

우리는 원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에게로,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곧 정비소이다. 하느님께서는 나쁜 것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른 세 그룹이 있다.
첫째는 사도들 : 예수님께서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 오늘날 수도자와 성직자들
둘째는 제자들 : 예수님과 온전히 삶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 성경에서 니코데모, 자캐오, 마리아, 마르타 등 포함 , 오늘날 바로 교우 여러분
셋째는 군중 : 치유를 위해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우리는 어느 그룹에 속하는가? 우리는 제자들의 그룹에 속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여러분의 사랑이 구현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우리 삶, 거기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은 메시아, 구원자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해해 주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분의 제자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한 구원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여덟 번째 강의 :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어떤 일
고해성사는 주님의 이해를 잘 받게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사랑의 성사라고 부른다. 요즘은 은행도 도산 할 수 있으니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하늘에 보화를 쌓아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보화가 무엇인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면 그분께서는 곱절로 여러분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마더 데레사의 삶은 가난한 사람에게 투자를 하는 것이었다. 여러분도 작은 마더 데레사가 되어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어떤 일을 해보라.


아홉 번째 강의 : 믿음은 경험이 아니다
믿음 없이 살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한다. 믿음이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을 다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삶의 매 순간 회개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회개한 상태인가?’ 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에게 짐이 아니다. 믿음을 지니고 사는 것은 완전한 금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건강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믿음이 경험의 차원에서 머물 수 있다. 경험은 우리가 신체적이든 심리적이든 정서적이든 건강할 때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병이 들거나 위기가 생기면 더 이상 성당에 나오지 않는데 그들은 믿음으로 성당을 다닌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다닌 것이다.


믿음의 특징은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상관없이 지속 하는 것이다. 한결같은 것이다.

마더 데레사는 50년 동안 하느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놀라운 일을 하도록 한 것인가? 마더 데레사는 하느님을 느끼지 못했지만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인간적인 약점, 약함을 가지고 있다. 그 약점 때문에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하고 청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이다.


열 번째 강의 : 겨자씨와 누룩
예수님께서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커다란 진리를 말씀하신다. 겨자씨와 누룩,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순한 매일의 삶에서 보는 일상적인 것을 가져다가 큰 진리를 가르치신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씨를 뿌리면 크게 자라 온갖 종류의 새가 날아든다. 겨자씨는 모든 국가, 모든 종교의 믿음을 상징한다. 하느님을 섬기는 다른 모든 방법들을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 가톨릭 전례, 동방에는 동방 전례의 예식이 있고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에는 에티오피아식 예식이 있다. 기본 내용은 같지만 전례 예식이 다르다. 루마니아 예식, 그리스 가톨릭 등 여러 예식들도 있다.

본질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모든 방식들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이 비유에서 알아들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점차로 커지는 것이다. 사람들을 다 모아야 한다.


두 번째로 누룩을 살펴보자.
누룩을 작은 밀가루 반죽에 넣으면 점점 부풀어 오른다. 시작은  작은 곳에서 이루어지지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마더 데레사는 한 사람의 나병 환자를 데리고 와서 돌보아 주었다. 그 다음 두 사람의 행려 환자를 데려오고 그다음에는 10명의 병자를 데려와서 치료해 주었다. 

예수님이라는 누룩은 사회를 혼란시키는 요소이다. 여러분이 신앙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혼란을 느끼거나 방해를 받으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큰 희망이 된다.


열한 번째 강의 : 죄의 특징
우리 삶을 잘 보아야 한다. 스스로 죄책감이나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 바오로와 성 빈체시오는 자기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고해성사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때만이 우리는 우리의 얼룩을 보게 되고 고해성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죄책감과 회개는 다르다. 베드로와 유다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둘 다 죄를 지었다. 유다는 예수를 배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런 죄를 지은 후 둘 다 울었다.
유다는 죄책감 때문에 울다가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울면서 회개했다. 그의 눈물은 그를 죄책감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었다. 유다의 죄책감은 부정적인 감정이다. 반면 베드로의 회개는 다르다. 긍정적이다. 새 생명으로 나가도록 해준다. 가던 길을 돌아서 유턴을 하는 것이다.


열두 번째 강의 : 십계명-영혼의 길잡이
어떤 화가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로 했다. 아주 절망하고 우울증에 빠진 유다를 그리기 위한 모델을 찾다가 마침내 거리의 어느 구석에서 그런 사람을 찾았다. 그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슬프고 너무나 절망적인 모습으로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전혀 씻지도 않아 지저분했다.
 

그 사람은 모델료의 선금으로 오랜만에 돈이 생기자, 머리를 깎고 새 옷을 사 입고 말쑥한 차림으로 다음날 작업실에 나타났다. 화가가 나와서 누구냐고 물었다.
“나요, 당신이 모델이 되어달라고 한 그 사람이오.”
화가는 그를 보고 내쫒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원래 모습을 원했는데 왜 그렇게 바꾸어서 내 일을 망치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신에게 오기를 원하신다. 우리 마음속에는 절망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향수를 뿌리고 잔뜩 멋을 낸다. 겉모습만 바꾸어 가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이 바뀌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회심이다. 형식적인 고해성사를 통해 회개를 살 수는 없다.


빛으로 나가는 길잡이를 위해 우리에게 십계명이 있다. 십계명을 열 가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한 10개의 알약이라고 할 수 있다. 십계명이 우리 삶에 가장 좋은 내비게이션이다. 십계명은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도와준다.


열세 번째 강의 : 용서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십계명에서 셋째 계명이다. 그러니 성당에 가서 미사 참례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왜 주일에 꼭 성당에 가야하는가? 우리의 신앙은 함께 있을 때 자란다. 혼자 있으면 우리의 원수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둘이나 셋이 모여 있는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셨다.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모든 행위는 죄이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용서가 되지 않을 만큼 큰 죄는 없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많은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23-35)


예수님께서는 좋은 심리학자이시고, 좋은 요리사일 뿐 아니라 좋은 수학자이시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신 분이다. 그분이 우리의 빚을 다 갚아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 망신을 준 사람이다. 용서를 하면 우리 마음 안에 무거운 돌이 없어지고 자유로워진다. 용서는 그를 잊는다는 게 아니라 기억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기억하면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고 축복해 주는 것이다.


증오는 영혼의 병이다. 어떤 약으로도 치유할 수 없다. 은총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의 예수에게서 배울 뿐이다.
인간에게 특징이 있다면, 첫째는 사랑 둘째는 용서이다. 용서는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 있을 때만 용서가 가능하다. 

 

열네 번째 강의 : 저는 당신 손에 들린 연필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한다.....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어주어라.”(마태 5,39-40)

이것은 깊은 의미의 용서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모든 사도들과 성인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 했는가?
마더 데레사는 “저는 다만 하느님 당신 손에 들린 연필입니다. 원하시면 연필로 글씨를 쓰십시오. 원하시면 글씨를 지우십시오. 글씨를 쓰시든 지우시든 저는 다만 당신의 손에 들린 연필입니다.”라고 말했다.

성 베드로는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할 때 “나는 주님처럼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힐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를 거꾸로 못 박아 주시오.”라고 말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의미는 “중요한 것은 나의 얼굴이 아닙니다. 나의 발을 보십시오. 이것은 나의 구세주께서 씻어주신 발이고 나의 구세주께서 입 맞추어주신 발입니다.”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열다섯 번째 강의 : 착한 목자와 생명의 강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나는 문이다.....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19)


이 복음 내용 안에 두 가지 요점이 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라는 것, 둘째는 그가 오신 이유이다. 우리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신 것이다.

시편 23편은 구약이 배경이지만 착한 목자의 본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 이하 생략 )


예수님께서 좋은 삶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우리의 좋은 삶은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차를 가지고 있다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의 ‘생명’ 이나 ‘삶’을 의미한다.

에제키엘서 47장은 우리에게 생명이 흐르는 강에 대해 들려준다. 미래의 성전 모습을 그린다. 그 성전에 제대가 있고, 그 제대 밑으로 생명의 강이 흐른다.

 

열여섯 번째 강의 : 내적 치유
가톨릭교회 안에 있는 전통적인 신심행위 몇 가지에 대해 말하자면 첫째 십일조이다. 우리는 수입의 십분의 일은 교회 건설을 위해 써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드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우리는 사회, 정치적인 책임과 의무뿐 아니라 종교적인 책임과 의무도 있다. 주님께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인이고 열심히 성당에 나가고 성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데 왜 굳이 내적 치유가 필요한가?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나 마음 안에 큰 빈 공간이 있다. 내적 치유는 이 텅 빈 공간을 채울 때 일어나는 것이다. (텅 빈 공간의 예를 들자면 어릴 적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 결핍이다)


인간은 텅 빈 부분을 다른 무엇으로라도 채우려한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이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으면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된다. 마약이나 알코올 등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우리의 텅 빈 부분을 채우려 하면 안 된다.


열일곱 번째 강의 :  고해성사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의 마음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런 편견이나 두려움 없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분께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고해성사’이다. 교회에서 고해성사는 치유를 가져오는 역할을 한다. 고해소는 가톨릭교회의 병원이다.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 토머스 톰슨은 “하느님께 대한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는 분이시니까. 그런데 신경체계에 대한 죄를 지으면, 신경체계는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신경체계에 저지른 죄는 무엇인가? 마약, 부도덕한 삶 등이다. 우리가 신경체계를 약하게 하면 신경체계는 우리를 용서해 주지 않고 약한 그대로 남게 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이 말씀을 통해 사도들의 죄 사함의 능력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미리 알려주셨고, 부활 후에 처음 제정하신 고해성사이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사절이다. 고해소 안에서 사제 앞에 있을 때 그리스도 앞에 있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제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계속하신다.


성사를 본 후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성사를 통해 기쁨을 누리게 되는데 그것에 감사하며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야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24-26)


성사 후에 우리 마음을 감사로 채우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성사 후에 우리 마음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다시 자기만 아니라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와서 자리를 잡는다. 악이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늘 감사로 채워야 한다. 


열여덟 번째 강의 : 엠마오로 가는 길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어찌 이리 꿈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격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 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13-3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시나 그들은 완전히 예수님을 이방인 취급 한다. 예수님께서 겨우 3일을 떠나계셨는데 3일 후에 예수님을 못 알아볼 뿐 아니라 이방인 취급을 하는 것이다. 슬픔이 그들을 눈멀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락 없이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의 허락 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는 없다.”라고 재미있는 말을 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방문을 열어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신다.

우리는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다. 고통을 느끼면 성사생활을 그만두고 싶어지는 유혹  즉 예루살렘을 떠나고 싶어진다. 엠마오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 곁에 그분이 걸어가고 계셨음을 기억하라.

 

열아홉 번째 강의 : 욥기
욥기는 어느 문학서에 속하는지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시편은 시문학서에 속하고 열왕기나 역대기나 그리스도교 초기 삶을 다룬 사도행전 등은 역사서에 속하고 예언서들은 예언문학서에 속한다.
 

요한 묵시록이나 다니엘서 일부와 같은 묵시문학서들이 있다. 묵시문학서의 성격이나 특징은 과거의 역사에 일어난 일과 관련하여 미래의 일을 이야기한다. 이 문학서도 단순히 읽고 이해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또 하나 중요하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은 문학서가 지혜문학서이다. 욥기는 지혜문학에 속한다. 잠언, 코헬렛, 지혜서, 집회서 등이 지혜문학서이다. 


욥기는 왜 무죄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지혜의 답은 그 사람이 잘못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무죄한 사람도 고통을 당한다. 그래서 지혜문학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를 비춰 준다.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를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혼자만의 지혜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없었고, 다른 현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지혜문학서는 모두 현자들의 지혜를 모아서 만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지혜는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다. 지혜문학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일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지혜문학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이유가 없어졌다.


욥기는 지혜문학서에 속한다. 
욥기의 내용 안에 고통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기는 고통에 끝이 있다고 말한다.
욥은 올바른 사람이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지혜를 믿어서 자기가 착해서 그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통을 겪으면서 전통적인 지혜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된다. 초기의 욥과 후기의 욥은 다르다.

하느님이 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자 사탄이 하느님께 내기를 하자고 청한다. 사탄이 욥에게 가서 그를 친다. 온몸의 고약한 부스럼과 고름에서 나오는 악취가 진동한다.
 

욥의 아내는 도망을 갔고 자식들은 다 죽었다.
욥은 차라리 태중에서 죽었더라면 하고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는다. 그는 물음을 던질 뿐이다. ‘왜 내가 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왜 저입니까?’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당신께서는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42장 2-6절)


그가 하느님을 만났을 때 이제 내 눈으로 하느님을 뵈었다고 감격스러워한다. 욥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자기가 불평 없이 그가 겪는 고통, 그의 병고를 받아들인다.


욥기의 결론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고통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고통에 대한 해결책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나는 하느님을 뵙고 싶다.” 그 갈망을 잊지 말라.


스무 번째 강의 : 성령 1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는 신비이다. 아드님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나는 다만 아버지의 말을 가르칠 뿐이다.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아버지의 일이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두지 않고 아버지께 청하여 다른 협조자 곧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성령에 대한 많은 몰이해가 있다. 왜 성령이 왜곡되는가? 성경적 삶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을 전해주었지만 사람들이 잘못 다루었다. 이 모든 잘못은 부, 명예, 교만에서 오는 것이다.

사랑에 관한 한 예수님은 너무나 이기적이다. 우리가 더욱더 사랑할수록 더 좋아하신다. 남김없이 사랑을 드리기를 원하신다.


성령의 열매는 영적으로 더 성장하도록 이끌어 준다.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더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 느끼는 것이다.

 

스물한 번째 강의 : 성령 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의 행동, 그의 사람됨, 그의 열매를 보면 안다.
 

성령의 첫 열매는 사랑이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온다. 아가페,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다음은 평화이다.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 평화가 있으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욕해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는다. 거룩함을 지니게 된다.

셋째는 기쁨이다. 예수님께서는 늘 기쁨에 차셨다. 기쁨으로 당신의 삶을 사셨고, 기쁨으로 당신의 죽음을 맞으셨다. 내적 기쁨이다.


넷째가 인내이다. 성령의 열매 인내는 다른 이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인내 없이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없다.

다섯째는 선함이다. 형제자매들과의 관계 맺음 안에서의 선함이다. 이 선함이 다름 사람들에게서 선함을 찾도록 도와준다. 성령께서는 철학자 칸트보다 위대한 분이시다. 칸트는 노란색 색안경을 쓰면 모든 게 노랗게 보인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 안에서 부정적인 것을 보면 선의를 위해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볼 수 있게 기도해야 한다.


여섯째는 호의이다. 친절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호의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 열매 호의를 지니고 있으면, 사자처럼 공격하던 사람이 고양이가 된다.

일곱째는 성실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수도 삶을 살거나, 가정생활을 하거나 우리는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에서 하지 않았다면 연극을 한 것이라는 것을 자기가 잘 안다. 그러면 기쁨이 없다.


여덟째 온유이다. 온유함으로 행동하면 늘 품위를 지니게 된다. 온유함을 지녀야 신사 숙녀인 것이다. 온유함이 우리 영혼의 장신구이다.
 
마지막으로 절제이다. 모든 삶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스물두 번째 강의 :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행전 17장 28절)
우리에게는 보호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주님과 함께 시작하고, 예수님 안에서 움직이고,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한계가 있다고 어리석게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청할 때 그분이 오신다는 사실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라면 너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스물세 번째 강의 : 가정 성소
우리 교회 안에 4가지 다른 성소가 있다. 4가지 모두 거룩한 부르심의 성소이다. 가정 성소, 사제 성소, 수도 성소, 독신 성소이다. 이 4가지 다른 성소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4가지 다른 방법이다.
 

요셉이 지닌 마리아에 대한 확신은 세상의 모든 험담을 극복할 수 있었다. 요셉은, 마리아가 하느님이 자기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확신과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분은 남편이, 아내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완벽한 사람을 찾는다. 그렇게 되면 재난이 시작된다.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지닌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스물네 번째 강의 : 카나의 혼인 잔치
‘카나의 기적’의 깊은 의미는 무엇인가?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 카나의 기적은 카나에서만 일어나는 기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기적은 오늘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야 하는 기적이다. 우리 가정에 포도주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부족하다. 가정 안에 사랑이, 일치가 부족하다.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도 있다.


우리에게 메마름이 올 때, 우리가 빈 물독이라고 느낄 때, 성모님께로 가야 한다. 그분께 전구를 청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성모님의 역할은 우리의 기도를 전구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이것은 성경 깊숙이에 바탕을 둔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학적이기도 한 것이다. 
 

묵주기도는 성경적인 기도라고 했는데 2002년 빛의 신비가 보충됨으로써 완벽하게 성경적 기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예수님을 잉태하심, 엘리사벳을 찾아보심, 예수님을 낳으심,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 카나의 기적을 행하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 거룩하게 변모되심, 성체성사를 세우심, 피땀 흘리심, 매 맞으심, 가시관 쓰심, 십자가 지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 천상모후의 관을 씌우심.

묵주기도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다.


스물다섯 번째 강의 :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 하셨다.” (마르 8,22-26)


우리는 지난 한 주 동안 피정을 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실은 이제 집으로 가면서 진짜 피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한 주 동안 우리가 피정을 한 것은 우리의 사명을 위해서이다. 이제부터 우리의 사명이 시작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하시는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를 치유하신 후에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일어난 일이다.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를 만난 후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이것은 동방박사에게도 일어난 일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길은 무슨 의미인가? 다른 삶을 사는 것을 상징한다. 옛 삶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래된 습관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진리를 보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에게는 현명함, 사려 깊음 , 분별이 필요하다.


빛이시여! 저희를 인도하소서!

댓글목록

작성자: 글라라님     작성일시:

소담한 잔디정원이 내다 보이는 곳에 마련된 멋진 새로운 공간 ‘책,사색하며 삶을 노래하라’에서 6월 13일 화요일 저녁 미사 후 6월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날 홍태익 베네딕토님,김덕숙베로니카님,김남옥 안나님 3분이 새로 들어오셔서 모임에 활력소가 되어주셨습니다. 환영합니다.
6월 도서- 아주특별한 순간 25회 피정강의록은 시간을 낼 수 없어 피정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유용한 도서임을, 곁에 놓고 또다시 읽고 싶은 도서임을 공감하였습니다.
문 요셉 신부님, 강기숙 아네스님, 신영순 로사님, 유성수 아델라님,지대균 니콜라오님 언제나처럼 함께하셔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