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6 .10월 영적독서 : 님 기림의 찬가, 진리에 바치는 연가「고백록 」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6-10-13 01:43:41    조회 : 727회    댓글: 0
 세마 성당 10월 영적 도서 : 님 기림의 찬가, 진리에 바치는 연가「고백록
지은이 : A 아우구스티누스 
옮긴이 : 최민순 ( 神父) 1912년 전북 진안 에서 태어나 1975년 선종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 초대그리스도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 사상가 354년 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태어나 430년 히포에서 세상을 떠남.
· 라틴 교부요 교회박사로서 고대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그리스도교를 결합하여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음.
·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중세 스콜라 학풍에 영향을 미쳤고 은총론으로 중요한 신학적 공헌을 남김.
· 「고백록」은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기 전 마니교를 비롯한 당대 사상을 두루 섭렵한 그의 삶의 궤적을 담고 있음.
· 묻는 형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저자가 「고백록」을 쓰는 독특한 수법.
 
나눔의 글

ㅡ 사라지지 않는 당신의 한줌 피조물 인간이 감히 당신을 기리려 드옵나이다. 당신을 기림으로써 즐기라 일깨워 주심이오니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ㅡ

간간이 심오한 철학적 내용으로 기술된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세네 번은 되읽어봐야 하는 어려운 점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한동안 마니교에 심취해 있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세례를 받기까지는 신심이 깊은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기도가 있었습니다. 총 13권으로 되어있는 고백록 가운데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고 싶은 것들을 나눔의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제 1권 타가스테와 마다우로에서의 어린 시절(열다섯 살까지, 354-369) 
 
내 안에 계신 주, 주 안에 있는 나 ;
내 하느님이 내게 오실 자리가 내 안에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세 1,1) 하느님, 그 하느님이 오실 자리가.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좋으시고 지극히 전능하시고, 지극히 그윽하시며 또 지극히 현재하시고, 지극히 아름다우시고도 지극히 강하신 분이여, 늘 계시되 헤아릴 길 없으시고, 온갖 것을 바꾸시되 바뀌지 않으시며, 새로움도 묵음도 없으신 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
 
내가 당신의 무엇이기에 나같은 것에게 당신을 사랑하라 명하시고 아니하면 진노하시며 엄청난 비참을 내리시리라 으르시나이까? 당신이 오시기엔 너무나 좁은 내 영혼의 집이 오니 넓혀주소서. 무너져 가오니 고쳐주소서. “먼지요 재”(창세 18,27)인 내가 당신 자비 앞에서 말하게 하소서.
 
얼마나 많은 우리와 우리 조상들의 날과 날들이 당신의 ’오늘‘을 이미 지나갔고 그에게 양상을 빌려 저마다 존재하였나이까? 앞으로 세월들도 그러하여 그같이 지나가고 빌리고 또한 존재하리이다. 그러나 당신은 매양 같으사 내일 일 그 너머 모든 것과 어제 일 그 뒤의 모든 것을 오늘 하시리이다. 오늘 하셨나이다.
 
죄는 누구나 ;
그 누가 내 갓난이적 죄악을 내게 알려 주리이까. “당신 앞엔 아무도 죄에서 깨끗한 자 없으오니 세상에 하루를 사는 아기라도 그러하거늘”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내 일, 일찍이 나는 어린이가 제어미의 젖을 두고 질투하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 했습니다. (원죄의 결과가 어린이에게도 나타난다 했다)
 
매를 맞으며 하던 글공부;
내가 어렸을 때 불행하고 딱한 일들을 얼마나 치러야 되었습니까. 올바른 생활이랍시고 철없는 것에게 제시된 것은 사회에서 출세하고, 그러려면 인간의 명예와 헛된 부귀에 종 노릇하는 웅변학이 뛰어난 만큼 이의 스승을 붙좇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나를 매질하던 그 사람(스승) 또한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같은 교사끼리 하찮은 논쟁을 하다가 훨씬 붉으락푸르락하며 질투를 이겨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모두 연기요 바람 ;
당신의 선물인 내 재주를 얼마나 허랑하게 소비했는지. 내 또래 동급생들을 젖혀놓고 내가 열변을 토했대서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게 모두 연기요 바람이 아니더이까?
 
문법과 하느님의 법 ;
보소서, 내 주 하느님이시여, 사람의 종락이란, 말을 쓰던 先代 사람들한테서 받은 문장이나 철자법을 지키기에 얼마나 열을 내며 당신한테 받은 삶의 영원한 법칙은 얼마나 가벼이 여기는지!
 
제2권 타가스테에서 보낸 한 세월(열여섯 살 때, 369-370)
 
고백록 집필동기 ;
돌이켜 지저분한 내 과거와 내 영혼의 육체적 부패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내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어서이옵니다. 오로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이같이 하옵나니 쓰거운 내 추상으로 사사스럽기 짝 없던 내 길을 되새기옵기는 당신만이 속임 없는 감미, 행복되고 변함없는 감미로 내게 맛스러우시라 함이옵니다.
 
* 2권부터 저자는 청춘기에 범한 죄를 열거하면서 자신을 죄악의 괴물로 규정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범죄라야 그때 사회에 범람하던 죄악 중에 경미한 것이었다. 성자의 양심이 너무 맑았기에 사소한 것도 크게 보였음을 미루어 짐작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침묵 ;
이러한 자들은 육체의 곤란을 당하리니 나는 너희를 애석히 여기노라.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음이 남자에게 좋으니라. 아내가 없는 자는 어떻게 하면 주께 의합할까 하고 주의 일을 생각하되 아내가 있는 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의 마음에 들까 하여 세속 일을 생각하느니라.(1코린 7,28) 이 말씀들에 정신을 똑똑히 차렸던들 나 차라리 천국을 위한 고자가 되어(마태 19,12) 당신의 포옹을 복되게 복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렇건만 가엾어라. 나는 당신을 저버리고 욕정의 충동을 따라 몸이 달아서 당신 계명을 어기며 당신의 채찍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죄의 까닭 ;
우리가 사는 이승살이는 그 어떤 매력 때문에, 그리고 지상의 가지가지 미와의 타협성 때문에 꾀는 힘을 지닙니다. 인간끼리의 우정도 여러 마음이 하나로 뭉치는 까닭에 매인 듯 달콤하여 즐거운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고차적이고 행복을 주는 선에 비겨 하잘 것, 보잘 것 없는 것이기는 할지라도 아닌 게 아니라 아름답고 매력이 있는 까닭입니다.
 
교만조차 높음을 본뜨는 것 ;
우악스런 권력자들은 남들이 두려워 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니 그 권능을 무엇이 어느 때 어디서 어디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으오리까. 호기심이 학문의 연구인양 보여도 모든 것을 가장 잘 아는 분은 당신이시옵니다.
당신을 등지고, 당신께 돌아감 없이는 얻지 못할 맑고 깨끗함을  당신 밖에서 찾을 때 영혼은 외도를 하게 되는 것이옵니다.
 
제3권 카르타고의 학생(열일곱부터 열아홉 살까지, 371-373)
 
즐거운 비극 ;
인간이란 내가 몸소 당하면 질색을 하면서도 슬프고 애달픈 것들을 구경할 제면 거기서 서러워지고 싶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구경꾼은 연극에서 오는 서러움을 실감하려 들고, 또 그 설움이 그의 쾌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혹 가엽게 되기를 누구나 싫어하는 반면, 가엾이 여기기를 즐겨하는 것이랍니까.
영혼들을 우리보다 길고 높고 깨끗이 사랑하시는 하느님 내 주시여, 당신은 아무런 시름을 느끼지 않고 한결다함없이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나이다. 그러하오나 그 누가 이에 미칠 수 있으오리까.
 
* 악마의 덫 마니교도 : 아프리카에 들끓던 마니교도들. 그들의 교주, 마니(라틴명 마니케우스)는 기원후 216년 왕족으로 태어났음. 차라투스트라, 불교, 유다교, 그리스도교에서 종교적 요소를 추려내어 새로운 교설을 창도. 교리는 선악 이원론. 종교 진리는 노아, 아브라함, 차라투스트라, 석가, 예수, 마니를 통해 계시되었고 우주는 선악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음.마니교는 식물에도 감각이 있다 하여, 농업은 식물을 살생하는 까닭에 죄업이라 했다.
 
당신께 고백하오니 진리가 아쉬움에 아득바득 허덕이며 당신을, 당신을 찾되 나를 짐승보다 뛰어나게 하신 그 영혼의 지성으로 하지 않고 육체의 감각으로 했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가장 안에 그윽히 계시고 가장 높은 내 것 위에서 더 솟아 계셨습니다.
 
마니교도들의 연막 속에서 ;
정의가 여럿이고 또 바뀌는 것이오리까? 아니오이다. 그것은 정의가 올라앉은 시간일 따름, 시간의 흐름이 같지 않사오니 그는 시간인 까닭이옵나이다.
지상 생활이 짧은 인간인지라,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옛 세상, 딴 민족의 경위를 몸소 체험한 바와 부합시킬 수 없는 반면에 한 몸, 한날, 한 집에서는 무엇이 어느 식구 어느 때, 어느 구석, 누구에게 적당한지를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기에 지난 일을 그르다 하고 이제 일만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 겸손은 영적 생활의 바탕이요 하느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인 반면, 교만은 인간을 하느님한테서 갈라놓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된 사상.
 
어머니 모니카의 꿈 ;
당신은 높은 데서 손을 드리우사 깊은 어둠 속에서 내 영혼을 끌어 내주셨으니 그때가 바로 당신께 충성된 내 어미가 초상난 집 어미들이 우는 것보다 더 애절하게 나를 위해 당신께 부르짖을 때였습니다. 그는 당신한테서 받았던 신앙과 정신으로 나의 죽음을 보고 있었으니 주여 , 당신이 그를 들어주셨나이다.
 
제4권 타가스테와 카르테고의 수사학 교사(열아홉부터 스물여덟 살 까지, 373-382)
 
여성을 두고 있었습니다 ;
떳떳하게 결혼으로 안 여자가 아니오라 지각없이 들뜬 내 정욕이 찾아낸 사람이나 그 사람 하나뿐, 그에겐 신의를 지켰습니다.
 
친구의 세례와 죽음 ;
그때 내 마음이 슬픔에 겨워 그 얼마나 슬픔에 잠겼던지, 보이는 것 마다 죽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내 영혼에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슬픔은 무엇 때문이냐 ? 그래도 대답이 나올 리 없었습니다.
 
갈래갈래 조각난 마음 ;
무릇 없어질 것에 정을 붙여 사로잡힌 마음은 다 불행하오니 그것을 잃고 갈래갈래 조각난 마음은 그제야 비로소 제 비참을, 잃어버리기 전부터의 비참을 깨닫는 것입니다.
 
* 젊었을 제 아우구스티누스가 질리던 것은 죽음의 공포였다. 그 무렵 죄악의 심연에서 자기를 건져내 준 거의 유일한 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고 말했다.
 
찢기어 피흘리는 마음을 안고 ;
사람을 사람답게 사랑할 줄 모르는 미치광이여, 덧없는 인간사에 안달하는 바보여, 그즈음의 내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당신께 들어 올려야 나을 영혼인 줄 어찌 몰랐으리까마는 그럴 힘도 그럴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일이, 내 하느님이란 당신이 아니시고 거짓된 꼭두와 내 그릇됨이었던 것입니다.
 
시간은 슬픔을 가시게 하는 것 ;
시간이란 그저 턱없이 하염없이 우리 감각을 거쳐 흐르는 것이 아니니, 마음속에 기기묘묘한 일을 해놓는 것입니다. 날에 날을 이어 시간은 왔다 가면서 색다른 희망, 색다른 추억을 내게 심어주고 어느 듯 슬픔은 가시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게도 저 슬픔이 내 맘에 사무치기는, 죽을 사람을 안 죽을 것처럼 사랑함으로써 내 영혼을 모래 위에다 쏟아놓은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었더이까. 벗 사랑도 하느님 안에서 당신을 버리는 자 말고는 여의는 법이 없사오니 당신의 율법이 곧 진리요, 진리가 곧 당신이시옵니다.
 
늙고 죽는 아름다움 ;
나고 죽고 하는 그 아름다움은 그것들이 한꺼번에 다 존재할 수 없는 온갖 사물의 부분들이라 없어지며 이어지며 저마다 한 부분으로서 전체 우주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오니다.
 
고요한 안식의 자리 ;
보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뒤이어 딴 것이 오고 이리하여 아래 세상은 이 모든 부분으로 이루어지는구나. 너 어찌하여 네 살을 좇느냐? 살이 도리어 너를 좇게 하라. 살로써 느끼는 것은 오직 부분일 따름. 너는 그 전부를 알지 못하느니라. 비록 그 부분들이 너에게 쾌락을 주기는 할지라도.
 
그분 안에서 사랑하라;
육체들이 네 마음에 들거든 그것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네 사랑을 창조주께 돌려라. 영혼들이 마음에 들거든 하느님 안에서 사랑할지니 그것들도 바뀌는 것, 그분 안에서 뿌리내려야 변함없는 것, 그렇지 않으면  가고 또 없어지리라.
 
제5권 카르타고 • 로마 • 밀라노의 교수, 마니교와 결별(스물여덟부터 서른 살까지382-384)
 
*파우스투스라는 인물 ; 로마 주교로서 신언서판을 갖춘 인격자였으며 생활이 깨끗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후에 파우스투스 논박을 남겼다.
 
저들이(마니교도) 피조물에 대해 참된 말을 많이 하나 그 피조물의 창조자, 곧 진리를 경건되이 찾지 아니하는 까닭에 발견하지 못하고, 발견한다 치더라도 하느님을 알되 하느님답게 공경하거나 감사하지 아나하고 제 생각에 스스로 지혜롭다 일컬으면서 당신 것을 자기한테 돌리나이다.
 
제6권 밀라노의 교수(서른부터 서른 두 살까지, 384-386) 생략
제7권 밀라노의 교수 ,네오플라토니즘,사도 바오로(서른 살 때,384)
 
하고많은 환상과 싸우며 ;
썩는 것이 썩지 않는 것보다 못하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은 침해받을 수 있는 것보다 낫고, 아무런 변화도 받지 않는 것은 변화가 가능한 것 보다 우세하다는 것입니다.
 
악의 원인을 캐다 ;
인간이 악을 짓기는 자유의지 때문이고 인간이 벌을 받는 것은 당신의 엄정한 심판 때문이라고 들어서 나는 이를 깨우치려고 애써 보았으나 명확한 이해를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악의 원인을 다시 캐다 ;
그렇다면 좋으신 하느님께서 그 전능은 매한가지인데 어째서 애당초 생기지도 못하게끔 막지는 못하셨을까. 그래 존재하는 것이 당신 뜻을 어겨서 생겨났단 말인가. 좋으신 분으로 좋은 것을 아니 만드는 것이 좋지 아니한 일이었다면 악한 물질일랑 걷어치워 無로 돌아가게 한 다음 좋은 물질을 지어 그것에서 모든 것을 왜 창조하지 않으셨는가.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물질을 빌려야만 좋은 것을 창조 할 수 있다면 야 어디 전능하신 분일 수가 있는가
 
* 있고도 없는 피조물 ; 없다가 있고, 있다가 없는 것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존재라야 참다운 존재다. 저자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깨침에서 永遠者의 인식에 도달했다. 그는 저서 「참된 종교」에서 어찌하여 모든 것이 덧없는가? 최상위에 아니 있는 까닭이다. ‘어찌하여 최상위에 있지 아니한가? 그를 만드신 분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겸손의 바탕, 예수그리스도 - 나는 길 • 진리• 생명 ;
당신을 누리기에 알맞은 힘을 기르고자 방법을 모색해 보았으나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 만물 위에 계시어 세세에 찬미를 받으실 하느님이신 인간 예수그리스도”(1티모 2,5; 로마 9,5)를 받들어 모시기까지는 얻을 수 없었나이다.
 
제8권 회심 (서른 두 살 때, 386)
 
선성 악성 두 개의 영혼 ;
한 사람 안에 두 가지 뜻이 서로 씨름 하는 것을 느낀다 해서 선성 악성의 두 영혼이 상반된 두 실체, 두 개의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리의 하느님께서 저들을 그르다 반박하시고 논핵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이 인간의 상위에 기껍고, 시간적 행복의 욕구가 그 하위를 붙잡고 늘어질 경우, 영혼이야 같은 하나라도 이나 저나를 원하는 뜻이 오롯하지 못한 것이니 그러하옵기 진리인 까닭에 저것을 더 좋게 보나, 습관 탓으로 이것을 놓지 못할 때 분열의 처참한 고통이 일어나는 것이니이다. 익히지 않은 선보다 버릇된 악이 오히려 내겐 더 세었던 것입니다.
 
제9권 세례, 어머니 모니카의 생애와 죽음 (서른 세 살 때, 387)
 
드디어 세례를 받고 나니 ;
“아들아 내게 있어선 세상 낙이라곤 이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가지 일 때문 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카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겠다고...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나한테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그럼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 여행 중에 먼 남의 땅에서 열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 모니카.
어미를 여기다 묻어다오 ; “무엇이고 하느님한테서 먼 것이란 없는 법이다. 세상이 마칠 때 나를 부활시킨 자리가 어디인가 모르실까봐 걱정할 것은 조금도 없다. 내 몸뚱이야 어디다 묻든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 말거라. 한 가지만 부탁한다. 너희가 어디 있든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 다오.”
 
지나가는 이승에선 나그네 ;
아, 인간은 인간임을 제 알지어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 지어다 (1코린 1,31)
 
제10권 주교가 되고 나서 하느님을 인식하기까지 기억에 대한 고찰, 하느님만이 진정한 행복, 지금의 나, 중재자 그리스도(마흔 다섯 살 때, 399)
 
행복하고 싶으냐 ;
복된 삶이란 절대 육체적 감각으로 남한테서 체험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들어, 당신을 위해, 당신 때문에 기뻐함이 이 바로 행복 행복이란 이뿐이요, 다른 것은 아니니이다. 다른 것을 행복인줄 아는 자는 참 아닌 다른 낙을 좇는 것이니이다. 늦게야 님을 사랑 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일생에 명예욕보다 더 큰 유혹은 없었다. 성자이던 그이로도 사람들의 치하 앞에 전혀 무감각하지는 않았다.
 
제11권 창조의 말씀, 시간의 철학
 
님의 세월은 가지도 오지도 않건마는 ;
당신이야말로 언제나 같으시고 그 세월은 다함이 없으리이다.(시편 102,28) 님의 세월은 가지도 오지도 않건마는 우리네 것은 오기 위해 가고 또 흘러가 버리나이다. 님의 세월은 변함없기에 다 함께 있어 흐르지 않는 까닭에, 가는 것이 오는 것에 밀려남이 없건마는 우리네 세월은 다 가고 없어진 다음에야 다 있게 마련입니다. 당신의 세월은 단 하루, 님의 날은 나날이 아닌 다만 오늘’! 그 오늘은 내일로 옮지도 아니하고 어제 뒤에 이어지지도 않는 날이니이다.
 
님의 오늘은 곧 영원! 
시간을 느낀다, 잰다 이르는 것은 지나가는 그 동안 뿐이요 이미 지나간 것은 아니 있는 것이므로 현재의 시간은 잴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하 제 12권 13권 생략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