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11월 영적 독서 모임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6-11-16 15:47:13    조회 : 714회    댓글: 3
세마 성당 11월 영적도서 : 「고독 속의 명상」
지은이 토머스 머튼
옮긴이 장은영
 
Thomas Merton 소개 :
1915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8년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 컬럼비아 대학과 성 보나벤투라 대학 강단에 섰으며 1941년 켄터키 주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봉쇄 수도원에 들어갔다. 서원을 준비하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에 심취하여 「잠언과 영적 권고」를 거듭 묵상하고 기도했다.
1948년 「칠층산」을 시작으로 「가장 완전한 기도」 「명상이란 무엇인가」등 70여 권의 책을 출간하여 20세기 가톨릭 영성 작가로 자리 잡았다.
1963년 종교와 관상기도 연구에 대한 기여로 평화상을 비롯해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1968년 태국 방콕에서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칠 때까지 수사, 영성작가, 사회정의 수호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머리말
 
이 책의 단상斷想들은 저자가 하느님의 은총과 장상들의 배려로 특별히 고독 속에 명상할 수 있었던 1953년과 1954년에 쓰였다. 그래서 「고독 속의 명상」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이것은 영적 모험담으로 쓰인 것이 아니며 이 단상들은 신비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복음의 말씀을 듣는 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다. 이 귀는 어떤 내적인 고독과 침묵에 잠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자유와 결단력의 문제, 즉 자유로이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을 자유로이 받는 문제이므로 인간의 지성과 감성이 기계적 활동에 예속되어 있는 한 인간은 영적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책에서 고독에 대해 말한 바는 은수자들만을 위한 조언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사는 세계의 미래 전체에 관련이 있으며, 특히 종교의 미래에도 관련이 있다.
 
나눔의 글
 
토머스 머튼의 거울처럼 맑은 영혼에 제 모습을 비춰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수필처럼 느껴지는 그 감동을, 나눔의 글에 일부 단상斷想들을 옮겨봅니다.
 
제 1 부 영적 생활의 단면들
 
1. 우리 안의 사막
우리가 창조된 사물들을 다만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이해관계에만 관련시켜 바라봄으로써 오인하게 되는 환영幻影으로 가득 찬 거짓 현실을 포기 할 때 우리를 참삶에로 이어주는 죽음이 비로소 시작된다.
우리의 피조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피조물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또한 사물들에 집착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사물들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사물들을 놓아줄 때 우리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때에 비로소 그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 시작할 수 있다.
 
2. 우리 안의 기질적 성향
기질氣質에 따라서 어떤 삶은 거룩해지고 어떤 사람은 버림받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기질은 하느님의 선물로서 그분이 오실 때까지 늘려야 하는 달란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성 토마스는 어떤 사람의 의지가 선한 것을 좋아하면 그는 선한 사람이며, 악한 것을 좋아하면 그는 악한 사람이라고 했다. 또한 그 사람이 덕스러운 생활에서 행복을 찾으면 그는 덕스러운 사람이며, 죄 많은 생활을 즐거워하면 그는 죄 많은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때로는 본의 아니게 죄를 짓지만 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죄인이 아니다.
 
감정이 때때로 이성을 방해한다고 해서 감정이 영적 생활에 무용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금욕주의가 아니다. 십자가는 인간적 감정을 말살함으로써 우리를 성화聖化시키는 것이 아니다. 초연함은 무감각함이 아니다. 수도자들의 규칙과 금욕적 수행修行이 그들의 인간성을 모든 면에서 은총의 도움으로 풍요롭게 발전하도록 자유롭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그 인간성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왔기 때문에 수많은 수도자들이 위대한 성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성인은 완전한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위격적位格的으로 결합된 예수님의 영혼은 하느님의 명확한 통찰력과 가장 평범하고 단순하고도 내밀한 인간적 감정인 애정과 동정, 슬픔과 행복, 기쁨과 비탄, 분노와 경이, 피로와 걱정과 두려움, 위안과 평화 등을 아무런 갈등 없이, 동시에 향유享有했다.
우리에게 인간적 감정이 없다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셨던 방식으로, 즉 인간으로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수도 생활을 기질, 성격, 감정, 그리고 우리를 인간이 되게 하는 모든 요소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존중하면서 시작되고 영위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도 인격의 구성 요소이며, 따라서 성스러움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인이란 창조주의 모상을 지닌 한 인격체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드러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3. 영적 생활의 의미
영적 생활은 지적知的 생활이 아니다. 영적 생활은 사고나 감정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그의 육체, 영혼, 지성, 마음, 정신이 모두 살아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행위로 사랑과 믿음 속에서 고양高揚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사고를 통해서만 묵상하려 함은 무용한 짓이다. 인간이 육체를 떠난 정신으로만 이루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사고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은 하나이다. 산다는 것은 사고를 끊임없이 삶에 맞추고 삶을 사고에 맞추어 항상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것을, 또 새로운 것에서 오래된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 자신을 부단히 성장시키는 일이다.
 
4. 선행에의 갈망과 극기
참된 극기는 우리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극기는 진정한 자기 포기이다.
그러나 자기를 포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의지를 그리스도의 손에 넘길 수 있을 만큼 자신에 대한 충분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닿을 수 없는 것을 정복해 주실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를 정복하는 기쁨이 필요하다. 그것을 갈망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5. 영적 생활과 분별
게으름과 비겁은 영적 생활에 있어 가장 큰 적이다. 게으름과 비겁은 하느님의 사랑보다 우리 자신의 현재의 안락함을 더 중시한다.
게으름은 모든 모험을 피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열렬함으로 얻어진다고 말씀 하셨을 때 그것은 어떠한 모험의 댓가를 치르고서만 하느님의 나라를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내기를 하여, 우리가 보고 맛보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걸어 모험을 해야 한다. 그러나 덧없는 세상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 모험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6. 가난과 예수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밖에는 참된 영적 생활이란 없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안다면 우리의 모든 가난, 우리의 모든 약함, 우리의 모든 영적 비참함과 나약함을 지닌 채 그분께 가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참된 본질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가난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그분께 가기를 더 좋아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결코 우리의 고통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자비 외에는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을 때 고통은 우리에게 이득이 된다.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의 가난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처럼 자비의 눈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7. 그리스도인의 희망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앞으로 올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산다. 희망은 참된 금욕주의의 비결이다. 우리는 희망 안에서 피조물들을 즐긴다.
 
나의 하느님, 나에게는 당신의 십자가에 대한 희망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겸손과 고통과 죽음으로 나를 모든 헛된 희망에서 구하셨습니다. 당신은 현세의 헛됨을 당신 자신 안에서 죽이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모든 것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8. 하느님의 사랑과 감사
모든 죄는 하느님에 대한 무지라는 최초의 죄에 대한 벌이다. 그분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감사와 배은망덕 사이의 중립적 입장은 없다. 감사하지 않는 이들은 곧 모든 것을 불평하기 시작한다.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미워한다. 미지근함은 사랑으로 가장된 미움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인식함이다.
 
9. 보잘것없는 우리
우리가 자신이 보잘것없음을 진실로 알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또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좋은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의 무력함, 우리의 도덕적 또는 영적 비참함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우리의 결함조차도 선하다.
 
10. 인간적인 영적 삶과 하느님의 현존
영적 삶은 인간적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뿌리뽑혀져서 천사들의 영역으로 옮겨 심어진 삶이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인간으로 살 때 영적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되려면 우리는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육화肉化의 신비 자체가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시대를 통해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성화시키기 위해 그분 시대의 모든 이들이 누리는 평범한 삶을 사셨다.
영적으로 항상 살아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과 끊임없이 쇄신해야 한다.
묵상은 영적인 인간이 스스로를 항상 깨어 있게 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이다.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의 온 존재가 하느님을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11. 가난은 자유에 이르는 문
우리 자신의 가난에 만족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느님께 그만큼 더 가까이 있다. 가난은 자유에 이르는 문이다. 그분의 자비를 간청하기 위해 우리의 가난을 사용하지 않는 다면 그 가난을 인식하는 일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우리의 약함과 가난은 하느님께서 갈망의 씨앗을 뿌리는 터전이므로 가치 있는 것이다.
 
12. 통합된 영적 삶
삶은 완전히 영적이거나 전혀 영적이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당신의 삶을 영성화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갈망을 영성화하라.
 
세상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의 복합성을 밟고 일어서며,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는 단순한 사랑으로 세상을 총괄적으로 단순하게 대하게 된다.
예수께서,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사람은 생명을 잃을 것이고 하느님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생명을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13. 무소유자의 기쁨
가난은 물건을 사용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몇 가지 이점을 우리로 하여금 포기하게 만드는 어떤 태도이다.
공동체에서 가장 가난한 이는 다른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모든 이에게 이용될 수 있고 그 자신을 위해서 특별한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결코 시간을 내지 않는다.
자신을 색다르게 보이려 하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14. 육화된 말씀이신 그리스도
육화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읽을 수 있는 생명의 책이다.
 
15. 겸손과 자신에 대한 절망
우리가 참으로 겸손하다면 우리가 얼마만큼 거짓말쟁이 인지 알 수 있으련만....
끊임없이 내가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임을 나에게 보여주는 그러한 겸손을 지닐 수 있도록 가르쳐 주소서.
겸손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겸손의 끔찍한 면입니다. 이 지상에서 완전히 겸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 당신은 겸손하셨습니다.
참된 겸손이란 내가 오로지 당신 안에만 희망을 두도록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함이기 때문입니다.
 
16. 종의 일깨움
종種은 우리를 일깨워 준다. 하느님만이 선하시며 우리는 그분에게 속해 있을 뿐 이 세상을 위해 살고 있지 않음을 일깨워 준다.
일상사는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은 단지 다가올 세상의 상징이자 약속일 뿐이며, 덧없는 것들에 초연한 이들만이 영원한 약속의 실체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17. 마술을 극복케하는 하느님의 현존
나는 이제는 거짓된 자아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 아드님의 자아를 입고서 당신께 가렵니다. 그분의 성심이 나를 사로잡고 나의 죄를 부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름 아닌 그분이 나를 당신께 소개시킬 것입니다.
 
18. 하느님을 앎이 번제보다 낫다
나는 그분의 침묵을 공유하고 숭배하므로 그분을 이름 지을 필요가 있다. 그분의 침묵 속에서 그분께서도 나의 이름을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내아들‘이라고 나를 부르시는 순간 나는 그분이 ’내 아버지‘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이 인식은 내 안에서는 하나의 행위이며 그분 안에서 하나의 위격이다.
나의 삶은 듣는 것이고 그분이 말씀하신다. 나의 구원을 듣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의 삶은 침묵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침묵이 곧 나의 구원이다.
 
19. 죄의 고백과 지혜의 시작
만물에 앞서 존재하는 하느님의 지혜를 누가 헤아려 보았는가...? 하느님을 두려워 함이 지혜의 성숙이며 지혜의 열매를 보고 성숙의 정도를 알 수 있다....(집회 1,4,6,16,26참조)
주님을 두려워 함이 지혜의 시작이다. 지혜의 시작은 죄의 고백이다. 죄의 고백은 우리 영혼 안에 그분의 강력한 은총을 가져다 주어 우리 의지의 행위를 우리 지성 안의 진리와 결합시킨다.
 
제 2 부 고독에 대한 사랑
 
1. 고독의 잠재성과 실재성
고독을 사랑하고 추구한다는 것은 지리적地理的 장소를 이리저리 끊임없이 찾아다 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어떠한 외부적 환경에 처해 있건 간에 갑자기 그 자신의 불가침의 고독을 인식하고, 항상 고독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에 고독해지는 것이다. 그 순간부터 고독은 잠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 된다.
 
2.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나의 주 하느님,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을 보지 못합니다. 나는 나 자신마저 진실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길을 잃고 죽음의 그늘에서 헤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언제나 당신을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고, 나 혼자 위험에 대항하도록 나를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3. 침묵과 언어
침묵은 성화의 본질에 속한다. 성인들이 지닌 힘은 다름 아닌 침묵과 희망 속에서 다져진다(이사 30,15 참조).
우리가 침묵 속에서 세상을 만나 알게 된다면, 말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다른 이들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으로부터, 떼어 놓지 못한다. 왜냐하면 실상 우리는 실재를 담기 위해 전적으로 언어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4. 참된 소명을 따라
어떤 사람이 고독한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길 그치고 고독할 때에 비로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가 고독한 삶으로 부름을 받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혼자 있으면 있을수록 삶에 대해 더 많이 걱정하며 사는 방법까지도 잊어버린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소명을 발견할 때 비로소 사고와 삶은 하나가 된다.
 
5. 침묵 속의 하느님
하느님의 침묵을 우리 자신 안에서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안에서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소리를 듣기를 바랄 때에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우리의 희망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분은 말씀을 그치신다.
 
6. 교만한 침묵과 겸손한 침묵
오만한 사람의 말은 다른 이들을 침묵시키고 그들이 그 말에만 귀 기울이도록 강요한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이가 자기에게 말을 걸도록 하기 위해서만 말을 한다. 겸손한 사람은 적선 외에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기다리며 귀 기울인다.
 
7. 고독 안에서 활동하는 가난
침묵과 가난과 고독 속에서는 하느님이 전부시기에 하늘도 나의 기도요, 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도 나의 기도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8. 매순간 찾아오시는 하느님
어떤 사람이 정말로 하느님과 단둘이 있고 싶어 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는 하느님과 단둘이 있게 된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시골에 있든지, 수도원이나 숲 속이나 도시에 있든지 상관없고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9. 침묵의 새로운 발견
모든 침묵의 순간이 다 같기는 하지만 참된 기도 안에서는 매 순간이 새로운 침묵의 새로운 발견이며 매 순간이 영원으로 통한다.
 
10. 그 큰 사랑 내 안에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의 주님, 당신을 사랑하고 찬미함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게 하소서.
 
11. 고독한 삶의 소명
고독한 삶으로 불림을 받는 다는 것은 숲과 산, 바다, 사막의 광활한 풍경의 침묵에 자신을 넘겨주고 건네줌으로 완전히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아침에는 기도하고 일하며, 낮에는 노동하고 휴식하고, 밤이면 다시금 묵상 중에 고요히 앉아 있음이다.
우리의 소명이 무엇이건 우리는 하느님 자비의 증인이 되고 종이 되도록 불리워진 것이다.
 
12. 기도와 감사의 삶인 은수자의 삶
고독한 삶은 무엇보다도 기도의 삶이다. 아무 응답이라도 듣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응답은 하느님의 것이어야만 한다.
 
13. 광야의 삶
고독한 관상 생활은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고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독한 삶은 성부에 의해 광야로 이끌려 가서 그곳에서 예수님 외에는 어떤 영적인 양식도 없이 살아가는 이의 삶이다.
 
14. 영적인 격정의 극복
영혼의 거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 외에는 그 어떤 영상映像도 나타나 있지 않을 때 당신의 기도는 가장 훌륭한 기도가 된다. 영혼의 깊은 곳에 은총이 자리하고 있는 한 감정은 우리 존재의 표면을 흔들 수는 있지만 심층을 휘저을 수는 없다.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오직 한 가지 격정이 있다. 그것은 정열의 한가운데서도 영혼의 깊은 곳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격정이다. 이 격정은 질서 자체이며, 성소聖所부터 말씀 하시는 평화의 하느님의 권위와 목소리에 의해 우리 안에 발생한다.
 
15. 고독한 삶의 단순성
당신이 참으로 혼자일 때 당신은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된다. 고독한 삶은 본질 적으로 가장 단순한 삶이다.
공동체로부터 고독으로 도망가지 마라. 먼저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 그러면 그분이 너를 고독으로 이끄시리라.
 
16. 모든 것을 떠나는 이유
우리는 하느님을 비추는 거울인 우리 자신의 존재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믿음으로 나는 하느님 안에서 내 자신의 참된 존재를 발견한다.
하느님의 비밀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하느님 자신이다. 그분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결코 표현할 수도 없고 나 혼자 조리 있게 생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나에게 당신을 드러내려고 기다리신다. 나는 침묵 속에서 그때를 갈망해야한다. 내가 모든 것을 떠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17. 주는 내 안에 나는 주 안에
고독한 삶의 가장 훌륭한 결실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내가 고독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나는 모든 것들의 선함을 더욱 명확하게 본다.
 
18. 고독의 참된 열매
시편은 은수자의 참된 정원이며 성경은 그의 낙원이다. 성경의 내밀한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장 궁핍할 때,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분을 발견하지 못하고 둘러볼 곳도 없을 때 성경을 참된 일상의 양식으로 삼고 성경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인간이어야 하고 앞으로도 인간 이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셨다.
이것을 나는 고독 속에서 시편으로부터 배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인간인 채로 신적神的인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의 외아드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 주셨던 것이다.
나의 눈물은 육화된 당신 아드님의 마음에 깃들인 성령의 움직임에서 솟아오르기에 하느님의 눈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심信心이란 선물은 시편을 자양으로 하여 고독 속에서 성장한다. 이것을 깨칠 때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순수하고 강해진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지닌 순수성과 온화함과 내밀함을 부분적으로나마 가지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독의 참된 열매이자 목적이다.
 

댓글목록

작성자: 지푸른님     작성일시:

찬미 예수님!
어제 독서모임이 "쟁반같이 둥근 달"밤에 풍요롭게 나누어졌습니다.
함께 해주신,강기숙 아녜스님,주남숙 율리안나님,이은영 로사님,신영순 로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김명분 글라라님의 열정에도 감사드리구여.
세마 모임이 그 사이 1년을 맞이했습니다.첫 모임 이후 아쉬운 인원 감소는 있었지만,  잉크가 떨어져 번진 자욱이 참을 수 없이 멋진  그 어느 때의 앉은뱅이 소나무 책상같이 언제나 거기 있음에 틀림없는 정겨운 모임 되기를 기원합니다!

작성자: 헬레나08님     작성일시:

세마성당 독서후기 잘 읽었습니다.
앉은뱅이 소나무책상에 번진 잉크가 가을밤과 잘 어울렸으리라~

11월6일 시화바오로 독서모임 식구들은 성지에 다녀왔습니다~~^^

작성자: 지푸른댓글의 댓글     작성일시:

헬레나님,반갑습니다.
독서모임으로 본다면 성바오로팀은 호적에 먼저 오른 형님댁이십니다ㅎ
항상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더러는 모임을 함께 나누는 친교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더 풍요로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