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월 영적도서 : 「집념의 인간 야곱」야뽁강을 넘어서
지은이 : 송봉모 신부
· 예수회 신부.
· 로마 성서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S.S.L.)취득.
·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 주석학으로 박사학위(Ph.D.) 취득.
·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 과목 강의.
저서
「상처와 용서」•「광야에 선 인간」•「고통, 그 인간적인 것」 외 다수
나눔의 글
From a Distance 노래 가사처럼 하늘 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아름답고 그저 평화롭기만 할 뿐 나라를 가르는 국경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도망치듯 20년 동안 고향을 떠나온 「집념의 인간 야곱」이 온갖 고생을 하였듯이 오늘날 유럽으로 밀려드는 난민들, 떠도는 불행한 민족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떠올려봅니다.
들어가는 글 (지은이의 글)
우파니샤드에 “인간의 욕망이 바로 그의 운명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의 욕망이 다름 아닌 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의 의지는 곧 그의 행위이고, 그의 행위는 그가 받게 될 결과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가 집착하는 욕망에 따라서 행동한다.
성조 야곱에 대해서 글을 쓰는 이유는 현세적 삶에 집착해서 두 주먹을 움켜쥐고 살아간 야곱을 하느님이 어떤 식으로 인도하셨는가를 밝히고, 그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은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역설하고 싶어서이다.
하느님은 야곱의 현세적 집념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 다시 말해 일방적으로 야곱을 이끌어 가지 않으면서 그의 집념 안에서 서서히 그 무엇인가를 조각하신 분이다.
우리 또한 세례를 통해서 한 번에 완성된 신자가 되기보다 옛 사람의 길과 새사람의 길을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간다. 하느님은 야곱에게 그랬듯이 우리의 현세적 집념 안에서 그것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갖고 당신의 거룩한 뜻을 서서히 드러내신다.
제 1부 : 장자권에 대한 집념
〝너의 태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억누를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리브가에게 들려준 이 신탁의 내용을 보노라면 운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한 민족의 운명이 하느님에 의해서 이미 영원으로부터 결정 되어 버린다면 그 민족은 도대체 무슨 노력을 할 수 있겠는가.
정태현 신부는 하느님의 선택을 예정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예정론이란 인간 개개인의 구원과 멸망이 하느님에 의해서 이미 영원으로부터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예정론에 따르면 멸망할 자로 선정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받을 수 없는 반면, 구원받을 자로 선정된 사람은 아무리 못되게 살아도 구원받는 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인간과 세상을 돌보시는 하느님이 처음부터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을 구분지을 리 없다. 하느님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인간 구원을 목표로 한다. 하느님이 누군가를 선택하면 그 선택된 자는 구원의 도구가 되듯이 하느님이 야곱을 선책하신 것은 그를 구원의 도구로 삼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씨족사회에서 장자권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제도였다. 하지만 야곱은 어떤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장자권을 움켜쥐고 싶어했다. 같은 날 단 몇 분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한평생 차별을 받아야 한다니 억울할 뿐이었다.
시련이나 환란을 인내로써 극복할 수 없는 사람은 하느님의 위대한 소명을 성취할 수 없다. 팥죽 사건이 비록 어린이 장난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에사오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 상속권을 팔아버림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격하시킨 경솔한 사람이다. 야성적 사나이 에사오는 팥죽 향기에 노예가 되어 하느님이 정해 주신 장자의 자리를 대충 처리한다. 감관感官의 노예가 되어 쾌락을 추구하고 “육의 욕정과 눈의 욕정”(1요한 2,16)에 자신을 내맡기면서 살아간다.
야곱은 자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를 어긴 첫 번째 성서 인물이다. 아버지가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사냥감을 잡아 왔느냐하고 두 번째로 물었을 때 그는 “어머니가 도와주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하느님의 이름을 팔면서 “아버님의 하느님 야훼께서 짐승을 금방 만나게 해주셨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는 야곱이 아직 개별적으로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자신의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삶의 고통이 필요하다.
야곱 집안에서 별나게 정직한 사람이 있다면 에사오이다. 그런데도 축복은 에사오가 아닌 야곱에게로 간다. 하느님의 축복은 진실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에게도 찾아온다. 하느님의 축복은 인간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무조건 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서 축복은 받아냈지만 에사오와는 판이하게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아버지 집에서 쫒겨나야 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보수로 착취당하면서 일해야 했고 그가 애지중지하던 아들 요셉을 10명의 아들들이 작당해서 이집트의 노예로 팔아버리기도 하였다.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축복을 상속받은 야곱은 하느님의 올바른 도구가 되기 위해서 일련의 시험들을 거쳐야만 했다.
제2부 : 20년 객지 생활
프로이트는 꿈이란 억압된 바람이 가상으로 완성되는 장소라 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꿈은 의식의 보상기능(compensatory function)을 한다는 것이다. 야곱이 꿈에서 본 층계 이야기는 성서가 처음으로 언급하는 꿈 이야기이다. 층계는 야곱의 지상적 고통에서 그를 구원하면서 초월적 세계로 그를 올려다 줄 바람을 표현한다.
베델 사건은 은총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야곱은 하느님으로부터 땅과 후손을 약속받고, 하느님이 늘 그와 함께할 것이며, 그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축복을 받는다.
야곱이 인생 밑바닥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보게 만든다. 야곱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까닭은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죄악이 그분의 사랑을 감할 수 없고, 우리의 선이 그분의 사랑을 증가시킬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야곱은 꿈을 꾸기 전까지는 하느님의 현존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꿈에서 들은 뒤로 야곱은 더 이상 죄의식과 두려움 속에서 살지 않고 꿈에서 들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힘차게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세워 석상을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그곳을 베델이라 불렀다...그리고 야곱은 서원을 하였다(28.16-20)
야곱은 돌제단 앞에서 진지하게 서원기도를 바친다. 야곱의 서원 기도는 성서에 기록된 첫 번째 서원기도이다.
야곱의 서원을 거래와 흥정으로 해석한 학자들은 야곱의 참된 회심은 이곳 베델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야뽁강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20년 타향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야뽁강에서 밤새 어떤 남자와 씨름하면서 드디어 회심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야곱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꾼 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배우게 된다. 야곱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이 난 것은 간밤의 꿈에 반응 했기 때문이다. 절대지絶對知를 갖고 있는 무의식이 꿈을 통해서
첫째, 죽어가는 인간에게 생명력을 선사해 주고
둘째, 무력감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불굴의 용기를 주며
셋째, 갈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간에게 그가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삶의 방향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꿈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지는 성서적이다. 하느님의 계시가 꿈을 통해서 인간에게 전달된다는 사례들은 성서 안에서 쉽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야곱, 예로니모, 솔로몬의 꿈)
성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아주 드물게 사랑(love)라는 단어를 쓴다. 가슴 뛰는 사랑은 길어야 2년 반이라는데 라헬을 향한 야곱의 순정은 7년이라는 긴 머슴살이를 며칠밖에 안되듯이 기쁘게 하도록 만들었다. 야곱의 사랑은 지속적 참사랑, 성서가 보여주는 가장 헌신적인 사랑이다. 나아가 그의 사랑은 순결한 사랑이다. 도덕적 순결성을 보존하면서 무려 7년을 기다렸다. 그는 남녀간의 참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성서 인물이다.
빅톨 프랭크 박사는 그의 책 「의미를 찾는 인간」에서 그는 말한다.
“사랑이야 말로 인간 실존의 최후의 것이며 최고의 것이다. “
레아와 라헬 자매간의 비극적 삶은 신혼 첫날밤에 아버지 라반이 신부를 바꿔치기하면서 비롯되었고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서 야곱은 책략꾼 라반에게 모두 14년간 노력 봉사를 착취당한다.
라헬과 레아 자매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성서 본문은 일부일처제를 주창하기 위한 본문이 아니다. 한 남편을 둘러싼 부인들 사이의 불화와 질투는 현대판 텔레비전 드라마이다.
첫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은 아담에게 한사람의 아내만을 주셨던 바, 이는 일부일처제가 하느님의 뜻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제3부 : 귀향 여정
야곱은 4명의 아내와 12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귀향길에 나선다. 이때 라헬은 아버지 라반이 섬기는 수호신들을 훔쳐 달아난다. 이어 야곱을 죽이려 달려왔던 라반이 자신의 체면을 살리고 앞날의 안위를 보호하기 위한 책략으로 자신과 야곱 사이에 공존을 위한 협상을 제시한다.
둘은 상호 불가침 협정을 맺은 뒤 돌무더기 앞에서 잔치를 벌이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야곱을 죽이려 달려왔던 라반이 노기를 풀고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야곱은 또다른 위험 에 봉착한다. 그것은 야곱이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면하고 극복해야 될 위험 곧 에사오와의 만남이 갖고 올 돌출적 위험이었다. 에사오가 야곱을 죽이려 하는 절망적 상황에서 하느님께 해결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던 야곱은 기도의 무릎 자국이 지워지기도 전에 또 다른 해결 방법을 찾아 머리를 쓴다. 자기 운명을 하느님께 의탁하기에는 인간적 집념이 강했던 야곱은 형 에사오를 기쁘게 해주고자 온갖 인간적 수단을 찾는다.
인생을 살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다. 삶이 뿌리째 흔들릴 때 이러한 확신은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야곱은 이러한 확신들이 없었다. 야곱은 집념의 인간이었지만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초지일관 하느님 약속과 신앙에 의해 살아가는 집념의 신앙인은 아니었다.
야곱의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서 한 번의 영적 체험이 단번에 우리를 성숙된 인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세상 것에 집착하여 살아온 옛 사람의 모습은 그렇게 빨리 사라지지 않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변화 성숙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배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점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우리의 굳은 결심은 오히려 우리를 냉담자로 만들 수 있다. 우리의 어두운 성향과 상처로 인하여 결심한 바를 살아가지 못하고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하여 신앙을 저버릴 수 있다. 교회는 이상적 목표만 얘기하고 그 목표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지는 별로 얘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새롭게 신자가 된 사람이 이러한 목표들을 지키려 할 때 얼마나 힘겹고 벅찬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 주지 않는다.
어떤 학자들은 야곱이 하느님을 불신하고 있다고 단정하면서 비난한다. 야곱은 여전히 하느님을 불신하고 있기에 인간적 안전장치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신이란 단어보다는 약한 신앙으로 보는 것이 올바르다. 야곱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신앙과 인간적 계산이 따로 노는 그의 모호한 모습이 바로 온전히 성화되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거센 풍랑 중에서도 뱃고물을 베개 삼아 쿨쿨 주무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왜 겁을 냅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여!”
야뽁강을 건넌 다음 야곱은 모든 가족들과 종들, 그리고 가축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 뒤 자신은 홀로 강가에 남는다. 야곱이 야뽁강 어두움 속에서 ‘어떤 남자’ 와 벌였던 싸움은 보통 싸움이 아니었다. 동이 트기전까지 계속된 치열한 싸움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신원으로 탄생하게 된다. 야곱이 어떤 남자를 하느님으로 깨닫는 것은 씨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다.
하느님과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통해서 야곱은 더 이상 지난날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도전을 받고 있다. 속임수와 교활함 거짓말과 불경한 행위들을 버려야 한다는 도전을 받고 있다. 야곱은 대결을 피하지 않았기에 강해졌다. 자신을 응시하였기에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어둔 밤 야뽁강에서 벌어진 싸움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그러면 야곱의 싸움 상대가 되었던 그 ‘남자’는 누구인가?
첫째, 그 남자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장자 상속권을 둘러싸 고 야곱과 씨름 했던 형 에사오이다.
둘째, 그 남자는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아버지 이사악이다.
셋째, 어머니 옆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오랫동안 개발하기를 소홀히 했던 남성적 세계다.
넷째, 그 남자는 야곱이 에사오가 내미는 복수의 칼날에 맞아 쓰러질 때 그를 맞이하러 올 죽음의 사신이다.
다섯째, 야곱이 움켜쥐고 의지해야 할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이다. 언급된 모든 이가 다 그 ‘남자’에 해당된다.
씨름의 대상이 모든 존재의 근거요 사물의 지평이신 하느님으로 바뀌면서 야곱은 비로서 정리된 마음, 통합된 자아를 갖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이 하느님인 것을 언제나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쉼 없이 때로는 어떤 형태로, 때로는 어떤 힘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우리를 지치게 만들던 어떤 힘이 어느 순간에 우리를 손안에 쥐고 계신 하느님이란 사실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위협이기도하고, 우리의 궁극적인 안식처이기도 하다.”
야뽁강은 우리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생의 위기는 누구에게나 다가오기에. 우리의 꿈과 관련해서, 우리의 양심과 관련해서, 우리 인간 됨됨이와 관련해서 하느님과 씨름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에 우리도 야곱처럼 치열하게 싸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