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3월 영적도서 : The Woman at the Well (우물가의 여인)
지은이 : 아드리안 반 카암 신부
· 1947년 사제서품 · 1954년 미국 듀케인 대학 심리학과 교수 생활 시작 · 현대 가톨릭 영성의 결정체 ’형성 신학‘ 창시 · 1963년 ‘형성과학 연구소’설립 · 종교와 심리학 분야의 기여로 미국 심리학회가 수여하는 제 1회 윌리엄 블레어 상 수상
저서 「형성적 영성 총서」•「영성적 정체성을 찾아서」 외 다수
옮긴이 정영식 신부
· 1985년 서품 · 1988년~1990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 영성지도 신부 · 1990~1993년까지 미국 듀케인대학 영성신학 전공 · 1994~2002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 심리학 영성신학 교수 · 현재 군자 본당 주임신부
글 머리에 (지은이)
요한복음은 특히 내적 변화를 갈망하는 신앙인들에게, 오늘날 참 진리에 대해 목말라하는 현대인들에게 적합한 성경이다.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여인과 만나는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요한복음 전체를 반영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우물가의 여인에 대한 묵상이 예수님의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나눔의 글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 곧 세리, 창녀 마리아 막달레나, 예수 옆에서 죽어가던 두 죄인,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까지... 예수께서 이들에게 자신을 사랑으로 전해주시는 이유는 모두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겸허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회개와 낮추임 속으로 몸소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아름다운 詩語로 느껴지는 묵상기도는 마음의 물결을 잠재우며 고요하게 합니다. 평화•기쁨이 넘치는 아드리안 반 카암 신부님의 요한복음 묵상을 조촐히 간추려 옮겨봅니다.
마실 물을 다오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 했다...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요한복음 4, 4-7)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 모두에게 영원하신 분과의 만남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때에 일어난다. 여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장소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와 예수님의 만남도 그렇게 온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길에서 고통 받는, 가장 미천한 형제자매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누가 예수께서 오시는 날과 시간을 알겠는가?
오늘도 고통 받는 사람들 안에서 나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신다. 이때 예수님의 청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연민의 마음(영)이다. 우리는 대부분 이기적인 연민을 가지고 있다. 연민은 바라지 않아야 한다. 상대방에게 내가 한 것만큼 똑같은 것을 해 달라는 그런 이기적 내어줌은 연민이 아니다. 진정한 연민에 바탕 하는 참된 내어줌은 영적인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다.
은총과 저항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요한복음 4, 9)
나그네의 부드러운 요청에 사마리아 여인은 정중한 태도를 거부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변호하거나 수비적인 자세로 나오지 않으셨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리 마음의 상처를 받더라도 부드럽게 양보해야 할 때가 있다. 정당한 수비적 자세마저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서, 가혹하고 완고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도록 불리워졌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편안한 은총의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지나치게 서둘거나, 안달을 내는 열의, 교묘한 압력, 또는 영리한 갖가지 이론적 조치들을 피해야 한다.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 다르다. 예수님은 인간의 자기 방어를 참으로 부드럽게 감싸주신다.
사마리아 여인의 퉁명스러움은 우리가 이웃에게 대하는 방식, 예수님께 대하는 방식, 그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삶의 배경, 성격, 인종, 윤리적 또는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쉽게 공감하지 않고 배격한다.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청하십니까?”라는 편견을 우리도 늘 안고 살아간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편견이 하느님의 모습까지도 가려버릴 만큼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의 불친절, 베푸는 선물에 대한 상대방의 거절 등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 품에 안겨 우리의 선의를 그분의 손에 맡겨 드리기만 하면 된다.
은총과 수용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 10)
내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은 그분과 그분의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웃에게 무엇인가를 주기 위해선 우리가 먼저 성령으로부터 사랑과 덕, 부드러움과 힘, 지혜와 통찰력을 받아들여야 한다.
참다운 하느님 안에서의 수용하는 마음은 연민의 마음으로 이어진다. 그럴 때 우리는 이웃의 모습 속에서 살아계신 예수님께 마음을 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다. 요란한 선행이 아니라 조용한 연민으로 죄를 기워 갚게 된다. 우리는 고통 받는 지체들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가득한 예수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게 된다.
은총과 함께 머묾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요한 4, 11-12)
우물가의 여인은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다. 일상의 지식에 빠져 눈이 멀어있다.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세상의 것에 너무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많은 지혜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 지혜와 세속적 지식은 그 유용성을 넘어 더 높은 것을 향해 살아 숨 쉬도록 해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갈증을 회피하려다 보니 우리는 일반적으로 바쁘게 살아간다.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것에 매몰되려고 스스로 노력한다. 그렇게 우리는 내면의 공허함을 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래서 바로 옆에 예수님이 계시는 데도 마치 맹인처럼 그냥 지나치고 있다. 우리는 이 땅의 샘에서 세상의 물을 마신다. 원하는 만큼 마신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내적 갈망을 채워줄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은 다르다.
은총과 변모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 14)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증을 갖도록 창조됐다. 인간이 자기 충만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하든, 영원하신 분이 인간 마음속에 만들어두신 그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때, 그럴 때조차도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신 이 공허함은 다시 고개를 쳐든다.
우리는 흐트러진 욕망 속에서 매몰되어 사는 삶과 영원함을 갈망하는 삶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새로운 삶의 시작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 4, 15)
여전히 여인은 예수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알아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면전에 두고 대화하는 우물가의 여인도 그러할진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더더욱 어렵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교묘하게 섞여 있는 자기애를 드러낸다.
오늘날의 대부분 영성생활 초심자들처럼, 우물가의 여인도 자신의 내적 감정과 동기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아이와 같은 환상, 지상에서 편안한 물질적 천국을 발견하려는 희망 속에 매몰돼 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갈망이 아니다. 이기적인 갈망이다.
여인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과 너무나 똑같다. 우리 대부분의 내면에는 은총에 대한 갈망이라는 황금 덩어리와 낡고 끈적거리는 자기중심적인 욕망들이 뒤섞어 있다.
그러나 거꾸로 우리는 이런 내적 나약함을 오히려 겸손의 덕을 쌓을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은총과 이탈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요한 4, 17-18)
주님은 여인이 자신의 이전 남편들 각자가 우상이었음을, 그리고 지금의 남편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들로부터 충만함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것임을 보여준다. 충만함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참으로 많은 결혼을 했다. 명예, 영광, 쾌락, 권력, 돈, 성공과 결혼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어떤 결혼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수도 있다.
경배의 은총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 4, 20-24)
주님은 사마리아나 유다인의 편협한 종교 사상들과는 다른, 여기서 경배는 전 인류가 함께 바칠 수 있는 경배를 말한다.
경배의 삶은 우리가 예수와 함께 아버지라 부르는 만물이 기원하는 그 신비 자체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 전체에서 말하고자 하는 영성생활의 뿌리이다. 더 나아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주님께 경배가 되어야 한다.
경배는 근본적으로 영성적이다. 영적 경배가 핵심이다. 우리는 경배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부여받는다. 본성을 함께 나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진실로 우리의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영원한 말씀과 참되게 한 가족이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자녀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 신비체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을 때, 우리를 위해 완전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신다. 이것이 바로 이 책 전체에서 말하고자 하는 영성생활의 요체다.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예수의 자기 계시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 25-27)
여인은 자신이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아가 지금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인은 준비가 되어 있다. 메시아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 말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예수님은 내적 은총이 여인의 영혼을 꿰뚫고 들어가 당신의 위대한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켜 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우물가의 여인이 단순하고 죄 많은 사람이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그녀는 유다인 지도층 인사가 아니었다. 유다인들 사이에서 저명한 니코데모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니코데모 역시 우물가의 여인처럼 개인적으로 예수님과 만났고, 예수님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았다. 하지만 니코데모는 독선적인 유다인의 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사마리아 여인은 많이 배우지도 않았고, 독선적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여인은 유다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물가의 이 비천한 여인은 학식 높았던 니코데모보다도 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다. 독선과 자부심은 은총이 쉽게 스며들 수 없게 하는 장막과도 같은 것이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당신의 위대한 계시를 드러내신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 누추한 사마리아 시골마을에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선포하신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오래 간절하게 기대해온 기쁜 소식을 직접 전해주신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엉망진창의 삶을 살아온 한 여인을 선택해 당신의 가장 장엄한 가르침을 직접 받도록 해주셨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수없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죄인, 세리, 창녀 마리아 막달레나, 예수 옆에서 죽어가던 두 죄인, 그리고 여기 사마리아 여인까지... ,이 모두 이들은 죄 없는 이들이 결코 받지 못했던, 예수를 통한 계시를 직접 받는다.
예수께서 이처럼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자신을 사랑으로 전해주시는 이유는 그들의 죄가 불쌍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더 겸허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없이 자신을 낮추었고, 예수님은 그 회개와 낮추임 속으로 몸소 걸어 들어가셨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복음 4, 28-34)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모든 다른 것들을 잊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간다. 물동이를 버린 것은 자신이 경험한, 나아가 사람들을 예수께로 데려오도록 해야 할 부르심을 방해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버린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참된 제자들은 자신이 가진 설득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참된 제자라면 ‘스스로 찾는 것’을 희망한다. 그래서 훌륭한 언변이나 강론의 기술이 필요 없다.
예수의 제자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아 저 사람이 보고 느낀 것에 분명히 대단한 것이 있다”라고 느끼게 해야 한다.
직무와 영성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요한복음 4, 35-38)
제자들에게는 지금 예수님을 뵙기 위해 달려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독한 편견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부유함, 지위, 학식, 능력, 매력, 권력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지나친 관심을 갖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중요하게 판단한다. 우리 각자가 받은 고유한 축복받은 소명과 존엄성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가난한 사람, 나이 들고 병든 여인, 지체장애 아이, 소외된 사람, 외국인 등 우리 삶에 동참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거만하게 내려다본다.
주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 사람들 또한 소중한 존재가 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 안에서 각자 고유한 몫을 하도록 불리웠기 때문이다.
우물가의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예수께서는 놀라운 희망의 불씨를 지피셨다. 이교도인이라도 구원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만약 내가 씨 뿌리는 사람이라면 말씀과 함께 해야 하고, 수확하는 사람이라면 성령과 함께 해야 한다. 씨 뿌리는 사람의 쟁기는 말씀이고 수확하는 사람의 낫은 성령이다.
우리는 그저 종일 뿐이다.
<묵상기도>
주님 안에서 씨 뿌리는 사람, 수확하는 사람
당신께선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중략
발육이 늦은 어린아이나
병든 노인,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
또는 더듬거리는 외국인이나
중략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눈에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의 피로써 구원받았고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나라에서 자기 몫을 할 것입니다.
이하 생략
신앙의 은총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일을 모두 알아 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요한복음 4, 39-42)
예수와 여인과의 피날레는 감동적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제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선포한다.
이 아름다운 결말은 우물가 여인의 증거로부터 시작된다. 많은 사마리아인들은 그녀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예수를 직접 찾아가 뵈었고 역시 우물가 여인처럼 은총의 감화를 받았다.
사람을 회개로 이끄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인격적 매력이나 탁월함, 평판이나 학식이 아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학식은 많지 않았고, 죄는 많았다. 하지만 그는 탁월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소명을 실천했다.
우리들도 종종 그런 경우를 만난다. 우리도 대부분 신앙을 성장시키는데 있어서 이웃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런데 신앙을 성장시키는 그 사람이 반드시 聖人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평판이 나빴던 우물가의 여인이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인도한 사실을 상기해 보라. 주님의 메시지를 받기 위해선, 평판 나쁜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는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선택 사항이다.
우리는 자칫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불완전함에 지나치게 주의를 기울일 때가 있다. 신부님이 어떻고, 수녀님이 어떻고 한다. 하지만 이럴 경우 우리는 메시지 자체를 놓치고 만다.
예수님은 지금도 많은 이웃들을 선택해서 나에게 수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다.
내가 우물가의 여인일 수 있다. “설마 죄 많은 나를...”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주님은 당신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나도 쓰실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를 전해야 한다. 우리의 갈망은 예수 그 자체이어야 한다.
“하느님은 불현듯 들어오신다. 그분은 그렇게 들어와 나와 함께 이 세상의 슬픔과 괴로움의 빵을 드시고, 나와 함께 당신의 사랑과 기쁨, 힘의 빵을 드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