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영적 도서 : 침묵 지은이 : 엔도 슈사쿠
지은이 엔도 슈사쿠는 192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열 두살 때 세례를 받았다. 1943년 게이오 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1950년 프랑스로 건너가 리옹 대학에서 현대 카톨릭 문학을 공부 했으나 결핵으로 2년 반 만에 귀국하여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침묵」「숙적」「그리스도의 탄생」외 다수가 있으며 그리스도교 토착화와 죄와 악의 문제를 깊이 다루었다. 저자는 「침묵」에서 약자에 대한 신의 자비를 구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약자의 심경을 나타내는 한편 이웃을 향한 끝없는 사랑,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배교를 하느냐 아니면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거꾸로 매달려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의 양자 택일의 궁지에 몰린 신부가 신자의 죽음을 도저히 묵과 할 수 없었던 인간애를 통해 드러나는 이웃 사랑을 보여 준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차츰 차츰 나도 모르게 논픽션의 느낌으로 이 책을 읽고 있었다.
종교의 자유가 없던 시대- 17C 로마 교황청에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된 33년간 관구장이라는 최고의 고위 성직자인 페레이라 신부가 ‘구덩이 속에 달아매는’고문을 받고 배교를 맹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로드리고 신부는 일본의 신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신앙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의 안부를 확인할 목적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나라 일본으로 밀항한다.
나라마다 오랜 전통과 문화와 종교는 소중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서로 다름이 종종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금의 이슬람권의 IS 와 같은 전쟁이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덱거는 ‘진리란 경험의 총체’라고 하였다. 우리가 참이라 믿는 것 결국 경험의 총체가 국가의 제도와 법, 생활의 전통 문화 등등으로 되어 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역사의 흐름에서 얼마나 많이 바뀌어 내려왔는지 ... 인류 역사 속에서 과학은 인간의 전통과 문화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선도해 나가고 있다. 지금 오늘 내가 참으로 믿고 따르는 법과 정의가 몇 백년 몇 천년 뒤에는 또다른 새로운 정의로 바뀌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런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위해서 나와 너, 나라와 나라가 서로 미워하고 다투는 어리섞음을 행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보다 더 큰 영원한 진리 - 태초의 시작 인류는 아담과 이브의 한 자손이었음을 깨닫고 ‘사랑 ’안에서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법은 없는 것일까?
자기와 다른 종교를 악으로 간주하던 16C 일본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도 그 당시 정치 사정과 유교 문화와 전통에 어긋난다하여 천주교 박해가 엄청났었다. 때문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줄을 이었다.
「침묵」 에서 나오는 고문들 - 바닷가에 매달아 밀물 썰물에 잠기어 고기의 밥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수책형’,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기’- 귀 뒤에 구멍을 뚫고 한 방울 한 방울씩 피가 떨어지게 하면서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이 고문으로 마치 고문 받는 이들의 신음 소리가 로드리고 신부 귀에는 심하게 코를 고는 듯한 소리로 착각을 하며 같은 시공간에서 코를 골며 편안히 잠든 사람들과 고통에 잠못드는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며 고독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나 큰 오류였는지... 신부가 어둠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동안 누군가는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리는 고문으로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로드리고 신부는 그것도 모르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도 드리지 않고 웃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는 그 소리를 우스꽝스럽다고 소리내어 웃기까지 했다. 로드리고 신부 자기만이 이 밤, 그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괴로워하고 있다고 오만하게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보다도 더욱 그분을 위해 고통을 받고 있는 자가 바로 곁에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한계와 불완전성이 여기에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볼 수 없으니 진실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고 그리하여 서로 오해가 쌓이고 미움이 다툼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로드리고 신부를 관아에 밀고하며 여러 번 배교를 하는 기치지로의 모습, 양심은 살아 있으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 질팡하는 ‘유다’역의 나약한 인간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려 처참히 죽어가는 신자들을 볼모로 하는 교활한 이노우에 앞에서 페레이라 신부는 물론 로드리고 신부마저 배교를 하게 된다. 교회보다도 선교보다도 더욱 큰 것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못한 가장 괴로운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며 페레이라 신부는 로드리고 신부의 어깨에 위로하며 손을 얹는다.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의 행위로 성화판에다 발을 올려 놓았다-목판 속의 그 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 ‘밟아도 좋다, 밟아도 괜찮다, 너희들에게 짓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하고 있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 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하여 십자가를 졌다.’
정말 그랬다.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주님과 같이 ‘사랑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민족 일본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생각할 힘도 갖고 있지 않으며 인간과 동일한 존재를 신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이 아니다. 20년 동안 이 나라에서 파악한 것이 그 뿐이니 일본이라는 늪지대에서 묘목의 뿌리째 썪어가고 있었다 ’라고 말하는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말에 ‘그리스도 교회는 모든 나라와 토양을 초월한 진리입니다’하고 대답하는 로드리고 신부의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
히틀러의 무참한 600만명 학살 앞에서 이 세상에 신은 없다 라고 절규한 어느 유대인 이야기, 캄보디아 킬링 필드 등등 ... 역사 속 전쟁에서 죄없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인간들, 그럼에도 신은 왜 계속 침묵을 하는가?
「침묵」의 이야기 속 로드리고 신부는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을 끊임없이 원망하고 있었지만 모른 척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괴로워하고 계시다는 것을 결국 깨닫는다.
하느님의 침묵에 대하여 나름 대로의 해석- 하느님의 세계는 너무 광활하고 시간 또한 느려서 1000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하셨다. 그러니 우리의 인간의 개념으로 하느님은 오래도록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 아닐까. 깊은 하느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로드리고 신부는 선교회에서 추방되고 신부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성직자들로 부터는 부끄러운 오점으로 간주되고 있을지 모르나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나의 마음을 재판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 뿐이라고 입술을 꼭 깨물면서 고개를 흔든다. 포르투갈에서 있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로드리고 신부의 선교란 아주 그 나라 사람으로 되어버리는 것 곧 일본에 가서 일본인 신자와 동일한 생활을 할 작정이었지만 배교 후에는 일본에서 성직자가 아닌 평범한 일본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로드리고 신부의 마지막 독백으로 이 글의 끝을 맺는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지금도 최후의 그리스도교 신부다. 그리고 그분은 침묵하고 계셨던 게 아니다. 설령 그분은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날까지의 인생이 그분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