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영적도서 : 수동의 영성 제3의 인생
지은이 이제민
1980년 사제 수품
1986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기초신학 분야로 박사학위 취득
1989-1997년까지 광주 가톨릭 대학 교수
2002-2005.7월까지 독일 함부르크에서 교포 사목
현재 마산교구 명례성지에서 사목
부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수동의 영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였다. 지금까지는 우리는 능동적인 삶에 많은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참 신앙의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해준 「제3의 영성」에 감사하며 이 도서를 선정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나눔의 글 :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가치가 있고 성공할 수 있으며, 수동의 인간은 게으르다고 여긴다. ‘하다’는 인간을 무한 경쟁으로 몰고 가고 노력을 강요하며 경쟁에서 뒤진 자를 무시하고 비인격적으로 대우하게 한다.
능동의 다른 이름 ‘하는’ 것은 자기가 ‘하기’를 원하는 만큼 또 남에게 ‘하기’를 요구하기에 남이 하지 않을 때 실망하게 되고 ‘하기’를 강요하면서 ‘하지’ 못하는 자신과 남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용서의 이름으로 알게 모르게 폭력을 가하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능동) 하느님의 완전함과 자비에 이르려고 할 때, 인간은 위선자가 되고 자기가 마치 하느님이나 된 듯 교만하게 굴 수 있다. 완전함이나 자비는 결코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인생은 수동으로 시작하여 수동으로 막을 내린다. 우리는 태어남에 맡기고 고통에 맡기고, 늙음에 맡기고, 죽음에 맡긴다.
세 번째 인생의 모습은 원초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린아이-어른- 어린아이의 어린아이 단계와 같은 차원이다. 힘에 의존한 인생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온갖 형태의 틀에서 벗어나 수동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직 어떤 형식으로도 자기를 꾸미지 않은 어린아이의 단순함과 순진함으로 돌아가야한다. 어린아이의 눈이 해맑은 것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가면을 쓰지 못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이외에 다른 모습인 체하지 못하는 아름다운 무능력” ( 드 멜로) 때문이다. 구원은 무능한 아기와 함께 시작된다.
하느님이 완전하신 것은 그분이 힘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완전히 자신을 내놓으셨다. 그분은 완전히 수동적 존재이다. 그분의 창조도 그분의 수동에서 이루어졌다. 사랑과 용서와 마찬가지로 완전함과 자비는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능동의 영성은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강조하였다. 사랑과 화해와 용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기도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아니 기도는 인간 능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어떤 수단이 되기도 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너그러워지고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하여 기도를 통해 인간은 목표한 지점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지난 2천 년 동안 길들여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지닌 능력의 한계를 안다. 수동의 영성은 이런 능동의 영성이 지닌 한계를 체험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수동의 영성은 인간의 한계와 좌절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수동의 영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한동안 천대 받던 수동의 가치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실현해야한다.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곳에 감추어져 있는 영성,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영성 , 우리는 바로 그 영성에서 태어났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제1의 인생이 능동의 영성에 바탕하는 것이라면 제2의 인생은 능동의 영성이 지닌 한계를 체험하는 시기이고, 제3의 인생은 수동의 영성에 바탕을 둔 인생이다.
사실 제3의 인생은 따로 있지 않다. 제1의 인생이라고 이름한 그 삶이 있기 전에 이미 원초적 삶이 있었다. 이 삶은 나면서부터 힘의 세계에 던져져 방해를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원초적 삶을 사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제1, 제2, 제3의 삶도 없다. 수동의 영성은 우리를 원초적 인생으로 이끈다. 이 영성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동의 영성은 능동의 영성과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능동의 영성은 오로지 수동의 영성에서만 가치가 있다.
사랑이 내 몸에서 일어나게 할 때(수동의 영성), 나는 비로소 상대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사랑‘함’이 없이 사랑을 느끼게 한다. 상대에게 나는 사랑이 되고 상대에게 나는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 (어머니의 사랑을 몸으로 느끼는 아기처럼). 그 사랑의 정점이 바로 자신을 완전히 내놓은 십자가였다. 용서도 화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놔둠의 영성에 대하여- 남을 내 식으로 재단하려 들지 말고 그가 그일 수 있게 그냥 내버려두는 법을 배워라.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왜 그렇게 떨어졌느냐, 왜 그렇게 굴러다니느냐 묻지 않듯이 인생도 그렇게 굴러가게 내버려두어라. 나는 고생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상대는 고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놔둠을 가르쳐 주는 스승은 자연이다. 자연은 자기를 아름답게 꾸미려 애쓰지 않는다. 자연은 애써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인위적 노력도 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새들과 들꽃처럼 자신을 맡기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하느님 나라가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이 자연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자연의 수동적 자세를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하느님께서 세상사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일일이 간섭하신다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될까. 인간은 하느님의 무관심- 그것을 우리는 침묵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에 감사하며 거기에서 들려오는 소리, 인간에게 귀 기울이는 그분의 침묵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으로, 오직 침묵의 말씀을 하신다. 인간은 하느님의 침묵을 들어야 한다. 침묵을 듣지 못하는 자는 기도 할 수 없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자기 뜻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것처럼 위선적이며 위험한 일도 없다.
하느님은 스스로 행사 하는 바 없이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다. 하느님의 전능은 인간의 사고와 기도의 지평을 넘어서 있다. 하느님의 전능은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내버려 둔데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기에 인간의 뜻에 따라 움직이시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적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하느님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힘이 다한 곳에 자신을 드러내신다.
모든 사람은 천국의 씨앗을 자기 몸에 안고 태어나며 그 씨앗은 점점 자란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소중한 ‘나’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세상을 하나의 커다란 수도원으로 본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은 수도자요 구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