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은 하느님께서 하시며 "주님"이시다.
능동은 나의 이성과 의지가 개입한다.
이성과 의지는 지극히 높으신분의 아름다운 선물이다.
"너희도 거룩하여져라"는 말씀을 살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거룩한 이가 되기위한 여정을 시작하고 걸어갈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다.
능동의 삶은,혹은 방식은 하느님 이외의 것을 끊고 씻어내는
십자가의 성요한의 "어둔밤" 그것이리라.
그러나 "능동의 나"는 자칫 이성과 의지가 오류를 신념화 하거나
말씀의 이해에서 자의적 해석으로 왜곡,변질 되거나
주님의 섭리안에 드는 수동의 삶에 도달할 도구로까지 인식하고
준동하면 펠라지우스의 그것을 범할 수도 있다.
적어도 내생각에 "수동의 삶"은 사실상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다.
하면서도 희망적인 것은 올바른 방향성을 갖는다면 길을 잃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마치 복음을 듣고 기뻐하지만 심중에만 품으면,이는 감동일뿐 복음적 삶은 아니듯말이다.
복음을 구체화하고 현장화하는 실천이 없다면
굳이 야고보서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이미 죽은 믿음이다.
내쪽의 능동이 나만을 위한 능동에 유폐되는 까닭이다.
독서나눔 때 팀원 모두는 수동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도,더우기 그 삶을 살아내는데에도 막막함을 이야기 했다.
교만일까.
나는 제 2.5의 인생을 제안했다.
1.5라 해도 좋다.
피조물인 우리는 "무엇"을 완성할 수 없다.
소설 "천국의 열쇠"에 나오는 내용중에 "행위를 보지 마시고 의지를
보아 심판하소서"란 구절이 와중에 떠올랐다.
수동의 삶.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삶이다.
그를 통해 하느님과의 진정한 합일을 그리스도인들은 염원한다.
그를 향하여 육적이며 이내 사라질 것에의 애집을 끊어가며본향을 갈망하는 의지를 보아주시기릍,우리의 이 행위가 종내 수동의 삶,온전히 나를 버리는 삶에
도달하지 못해도 이 행위의 불완전성을 보지 마시고의지를 보아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린다.
오,주님 나의 사랑, 교만을 떨친 혀로 찬미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