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 흰 바람벽이 있어

작성자 : 미리내    작성일시 : 작성일2015-07-28 11:12:59    조회 : 426회    댓글: 2


오늘 저녁 이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댓글목록

작성자: 미리내님     작성일시:

서양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있다면
우리에겐 백석이 있다네요~
<핸드폰에 글자를 맞추다 보니 읽는데 문장이 끊어지는 느낌이 드네요
이해 하시길요^^>

작성자: 헬레나08님     작성일시:

좋은 시 감사해요.
그쵸~ 우리에게 백석 시인은 축복인 거죠~~
저도 백석의 아름다운 시를 외고 다닌답니다~~~

 가령 한 여름엔 '여승'을, 눈 오는 날이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예쁜 초생달을 보면 '통영'이란 시를 외거나 베껴 쓴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