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21. 12월 영적도서 : 「집념의 인간 야곱」 야뽁강을 넘어서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21-12-24 22:50:17    조회 : 290회    댓글: 1

지은이 : 송봉모 신부
· 예수회 신부.
· 로마 성서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S.S.L.)취득.
·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 주석학으로 박사학위(Ph.D.) 취득.
·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 과목 강의.

저서 :
 상처와 용서」•「광야에 선 인간」•「고통, 그 인간적인 것외 다수


나눔의 글

 

예전에 즐겨 듣던 ‘From a Distance’ 팝송 가사처럼 하늘 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아름답고 그저 평화롭기만 할 뿐 여기까지는 내 땅이다라고 철조망이나 높은 담을 쌓아 나라를 가르는 국경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온 집념의 인간 야곱20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였듯이, 오늘날 유럽으로 밀려드는 난민들,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도는 불행한 난민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을 잠시 떠올리면서, 집념의 인간 야곱 요약한 내용을 올립니다.  


들어가는 글

 

우파니샤드에 인간의 욕망이 바로 그의 운명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의 욕망이 다름 아닌 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의 의지는 곧 그의 행위이고, 그의 행위는 그가 받게 될 결과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가 집착하는 욕망에 따라서 행동한다.

 

우리는 야곱이 인간적 허물과 한계를 지녔음에도 하느님 은총으로 끊임없이 변화 성숙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야곱처럼 변화 성숙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성조 야곱에 대해서 글을 쓰는 이유는 현세적 삶에 집착해서 두 주먹을 움켜쥐고 살아간 야곱을 하느님이 어떤 식으로 인도하셨는가를 밝히고, 그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은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역설하고 싶어서이다. 


하느님은 야곱의 현세적 집념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 다시 말해 일방적으로 야곱을 이끌어 가지 않으면서 그의 집념 안에서 서서히 그 무엇인가를 조각하신 분이다. 그런데 야곱의 생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이다. 


우리 또한 세례를 통해서 한 번에 완성된 신자가 되기보다 옛사람의 길과 새사람의 길을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간다. 하느님은 야곱에게 그랬듯이 우리의 현세적 집념 안에서 그것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갖고 당신의 거룩한 뜻을 서서히 드러내신다.



1: 장자권에 대한 집념

(창세 25,1927,40)

 

리브가는 아기를 낳지 못하였으므로 이사악은 야훼께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25,21).

 

이사악은 결혼하고 나서 20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갖지 못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자보다 여자가 자식을 더 기다린다. 그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부부가 자식을 갖지 못하면 그 책임은 통상 여자에게 돌렸다.

 

성서는 자주 형제간의 갈등 · 시기 · 질투를 그리고 있다. 카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사악, 야곱과 에사오 그리고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그러하다. 특히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사오가 보이는 다툼은 가장 근본적인 형제 다툼이라 할 수 있다.

 

야훼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태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억누를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25,23)


하느님이 리브가에게 들려준 이 신탁의 내용을 보노라면 운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한 민족의 운명이 하느님에 의해서 이미 영원으로부터 결정되어 버린다면 그 민족은 도대체 무슨 노력을 할 수 있겠는가.

 

정태현 신부는 하느님의 선택을 예정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예정론이란 인간 개개인의 구원과 멸망이 하느님에 의해서 이미 영원으로부터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예정론에 따르면 멸망할 자로 선정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받을 수 없는 반면, 구원받을 자로 선정된 사람은 아무리 못되게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인간과 세상을 돌보시는 하느님이 처음부터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을 구분 지을 리 없다. 하느님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인간 구원을 목표로 한다. 하느님이 누군가를 선택하면 그 선택된 자는 구원의 도구가 되듯이 하느님이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그를 구원의 도구로 삼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두 아들이 자라나, 에사오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서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성질이 차분하여 천막에 머물러 살았다. 이사악은 에사오가 사냥해 오는 고기에 맛을 들여 에사오를 더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하였다.(25,27-28)

 

야곱은 발꿈치를 움켜잡고 태어난 사람이다. 쌍둥이 형제 에사오는 야곱보다 먼저 세상에 나올 만큼 힘이 더 셌을 뿐 아니라 외모도 남자다웠다. 성서 본문은 이사악이 왜 에사오를 편애했는지 그 이유를 명백히 밝혀 준다. 그것은 에사오가 사냥해서 갖다 주는 고기에 맛을 들여서이다.

 

창세기는 이사악과 리브가가 두 아들을 사이에 두고 편애하는 모습을 직접적이고 솔직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사악은… 에사오를 더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하였다.”(25,28) 부모의 자녀 편애는 자녀들 간에 갈등을 야기시킨다. 가정은 이 세상의 축소판이다.

 

하루는 에사오가 허기져 들에서 돌아와 보니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 에사오는 야곱에게 배고파 죽겠다. 그 붉은 죽 좀 먹자하였다. ··· 야곱이 형에게 상속권을 팔라고 제안하자, 에사오는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상속권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먼저 맹세부터 하라고 다그쳐 요구하였다. 에사오는 맹세하고 장자의 상속권을 야곱에게 팔아 넘겼다. 그리고 에사오는 야곱에게서 떡과 불콩죽을 받아먹은 후에 일어나 나갔다. 이렇게 에사오는 자기의 상속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25, 29-34)

 

야곱은 평소 성미 급한 에사오가 배가 고프면 참지 못하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아주 서두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야곱은 에사오의 이 약점을 이용해서 언제든 그 기회가 오면 장자권을 움켜쥐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씨족사회에서 장자권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제도였다. 하지만 야곱은 어떤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장자권을 움켜쥐고 싶어했다. 같은 날 단 몇 분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한평생 차별을 받아야 한다니 억울할 뿐이었다.


시련이나 환란을 인내로써 극복할 수 없는 사람은 하느님의 위대한 소명을 성취할 수 없다. 팥죽 사건이 비록 어린이 장난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에사오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 상속권을 팔아버림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격하시킨 경솔한 사람이다.

 

천하장사 삼손이 블레셋 여인의 감각적 에 노예가 되어 무참하게 넘어지듯이, 야성적 사나이 에사오는 팥죽 향기에 노예가 되어 하느님이 정해 주신 장자의 자리를 대충 처리한다. 감관感官의 노예가 되어 쾌락을 추구하고 육의 욕정과 눈의 욕정(1요한 2,16)에 자신을 내맡기면서 살아간다.

 

에사오는 욕망이 생기면 두 번 생각할 여지 없이 즉시 그 욕망을 채워야 만 되는 사람이다. 그가 얼마나 본능적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지는 부모의 뜻을 무시하고 햇족 여자를,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이나 아내로 맞아들인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사람과 결혼할 수 없는 것은 이방인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방인과 결혼함으로써 계약 공동체의 순수성이 흐려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다신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유일신 신앙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질까 봐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감관의 노예가 되어버린 그는 자기 본능이 원하는 대로 행위함으로써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온 동족과의 결혼 기준을 별 볼 일 없이 대하고 부모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또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의 이방인 여자를 동시에 아내로 맞이하였다.

 

팥죽 사건을 어린이 말타기 놀이처럼 간주하더라도, 야곱이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에사오인 양하면서 아버지 축복을 받아낸 행위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아버지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장자권이 한순간에 뒤바뀌는 순간에도 한치의 주저도 없이 아버지 앞에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비열한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사악이 늙어 눈이 어두워졌다. 어느 날 그는 큰아들 에사오를 불렀다. “얘야!” “, 어서 말씀하십시오” “너도 보다시피 내가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너는 사냥할 때 쓰는 화살통과 활을 메고 들에 나가 사냥을 해다가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정성을 쏟아 너에게 복을 빌어 주리라.” 리브가는 이사악이 아들 에사오에게 하는 이 말을 엿듣고서는 에사오가 사냥하러 들에 나간 틈을 타서 아들 야곱에게 귀뜸해 주었다. “아버지가 네 형 에사오에게···복을 빌어주겠다고 하시더구나. 그러니 야곱아!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여라.”(27.1-8)


리브가는 야곱이 에사오가 되어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도록 세 가지 행위를 한다(27,8-17). 첫째, 에사오가 사냥감을 잡아와 요리한 것처럼 염소고기를 요리한다. 리브가는 에사오가 어떤 식으로 사냥감을 요리할지 잘 알고 있었다. 둘째, 눈먼 사람은 냄새에 예민하기에, 리브가는 야곱에게서 에사오 냄새가 나도록 에사오의 옷을 꺼내어 야곱에게 입힌다. 셋째, 야곱의 매끄러운 살결을 가리기 위해서 부드럽고 신축성이 있어 피부에 쉽게 붙는 새끼 염소의 가죽을 야곱의 손과 목에 감아준다.

 

말라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하느님 말씀이 나온다. 내 말을 들어 보아라. 에사오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런데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를 미워하였다.”(1-3) “나는 에사오를 미워하였다라는 말씀이 하느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어떻게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 인간을 미워한다고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하느님은 인간을 미워할 수 없다. 하느님이 미워하는 것은 인간의 죄다. 하느님이 미워한 것은 에사오가 아니라 에사오의 그릇된 행위들이다. 하느님은 에사오가 보이는 지극히 속물적인 태도, 불량기 있는 반항적 태도를 미워한 것이다. 에사오가 부모를 거스르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장자 상속권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집안의 영적 가치를 고의로 어기면서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에사오가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여 야곱을 죽이려 계획하자(27,41), 리브가는 어떻게 해서든 야곱을 자기 옆에 두려고 애쓰기보다는 멀리 친정 오빠가 있는 하란으로 보낸다.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찬란한 태양이 뜨고, 어둠이 내리면 반짝이는 별들이 밤하늘을 빛나지만, 야곱의 모습은 끝내 리브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리브가가 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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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글라라님     작성일시:

집념의 인간 야곱은 이미 4년 전  나눔의 글에 올렸던 글이었습니다.
이번에 차분하게 다시 한번 더 정독하여 12월 영적 도서로 나눔의 글을 재 편집해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