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칼 라너
1904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출생
1924년 예수회에 입회, 네덜란드 활큰부르흐에서 신학공부
1929년 뮌헨에서 사제서품
1934~1936년 하이데거 문하에서 철학연구
1936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신학박사
1937년부터 그곳에서 신학 강의를 하면서 잘츠부르크에서도 강의
1939~1944년 나치스 치하에서 강의를 중단당하여 빈의 교구 고문 겸 사목위원으로 강연.저술
1945~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신학 강의, 아울러 뮌헨에서도 강의
1948~1964년 인스부르크 대학교 교의신학 주임교수
1962년에는 로마로부터 출판금지령을 받았다가 같은 해 교종 요한23세로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고문 신학자로 선임
1964~1967년 뮌헨 대학교에서 로마노 과르디니의 강좌를 계승, 그리스도교 세계관 및 종교철학 강의
1967~1971년 뮌스터 대학교 교의신학 주임교수로 재임하다가 정년퇴직
1971년부터 뮌헨에서 명예교수로서 철학과 신학의 접경 문제를 강의
1982년부터 인스부르크에서도 명예교수로서 신학 강의
1984년 3월 30일 ~ 31일 사이 한밤중 타계
칼 라너의 저작 색인이 단행본으로 따로 나올 정도로 방대한 저술 중에도, 철학 대논문 Gwist in welt와 열 권에 달하는 그의 사상집 schriften zur theologie 및 대사전 Lezikon fiir Theologie und Kirche는 20세기 신학의 독보적 이정표를 이루고 있음.
옮긴이: 장익 주교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해외로 나가 여기저기서 여러 해 공부하고 사제가 되어 돌아와 교구 일, 본당 사목, 교편생활 등을 두루 했다. 1994년 겨울, 춘천교구 주교로 수품 착좌하여 주교회의 일을 도왔고, 2010년 봄 은퇴한 이래 춘천 외곽 공소에 머물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나눔의 글
「일상 日常」은 일하고, 쉬고, 먹고, 자고 하는 일상의 일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비추어, 신학에 던져진 물음으로 살펴본 신학 단상神學斷想입니다.
“라너Rahner는 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얼어붙은 관념을 녹여 숨었던 것을 드러내 준다.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신을 이미 짚고 있는 만큼, 인간이란 신을 향해 절대적으로 초월하는 존재라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인간에 관해 말한다 함은 곧 신에 관해 말함이요, 신에 관해 말한다 함은 역시 인간에 관해 말함이다. <인간 중심>과 <신 중심>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두 면에서 동일 현실을 가리킨다. 인간 실존과 신앙을 이처럼 안으로부터 하나로 밝혀주는 신학이 우리들 현대인에게는 더없이 아쉬웠다.”ㅡ 역자의 말
이 책을 가장 잘 소개하고 있는 역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서 칼 라너 Karl Rahner의 「일상 日常」을 요약하여 나눔의 글에 올립니다.
일상의 신학
너의 일상이 초라해 보인다고 탓하지 말라. 풍요를 불러낼 만한 힘이 없는 너 자신을 탓하라(릴케).
여기서 시도하는 신학 묵상은, 보통으로 일상의 잡다한 일에 허덕이다 보면 주일날이나 돼야 겨우 차분히 읽거나 생각해 볼 겨를이 있을 것이다. 주일 단 하루만이라도 인간이 통째로 숨 돌리는 날로 삼아, 일상을 위해 일상의 신학에 관한 생각을 좀 해봄직도 하지 않을까.
일하고 쉬고 먹고 자고 하는 일상의 일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비추어, 신학에 던져진 물음으로 살펴본다면 어떠할까. 물론 극히 단순한 일들이기는 하나 한두 마디 짤막한 말로는 별로 밝혀질 수 없음을, 아니 가장 단순한 것일수록 실은 이론과 실천에 있어 가장 어려운 일임을 전제하고 말이다.
여기 일상의 신학 일반에 대하여 한마디 하여 서두로 삼는다.
첫째로, 일상의 신학이라는 것이 일상을 축일로 바꿀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되겠다. 이런 신학이 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일상을 일상으로 두라는 말이다. 신앙의 드높은 생각이나 영원의 지혜로도 일상을 축일로 바꿔놓을 수 없거니와 또 바꿔놓아서도 안 된다.
일상은 꿀도 타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은 채 견디어 내야 한다. 그래야만 일상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그대로 있게 된다. 즉 믿음의 터전, 정심正心의 도량, 인내와 단련, 호언장담과 거짓 이상의 건전한 폭로, 참되이 사랑하고 성실할 수 있는 차분한 기회, 슬기의 마지막 씨앗인 현실성의 입증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담박하고 성실하게 받아들여진 일상은, 바로 일상으로 머무는 이상, 우리가 하느님과 그의 숨은 은혜라고 부르는 저 영원한 불가사의와 무언의 신비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 인간이 행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있는 곳이란 곧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로 실재實在의 숨은 깊이를 드러내는 곳이다. 아울러 가장 일상적인 사소한 일도 실은 참으로 인간다운 삶에 본질적 요소로서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더없이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인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찾아 얻게 하는 것은 실상 이념이나 고상한 말이나 자아 반영이 아니라, 이기심에서 나를 풀어주는 행위, 나를 잊게 해주는 남을 위한 염려, 나를 가라앉히고 슬기롭게 해주는 인내 등이다.
누구든 인간으로서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영원의 핵심을 위해 조금이나마 시간을 낸다면, 그는 작은 것들도 가이 없는 깊이를 지녔음을, 영원의 전조임을,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온 하늘을 담고 있는 물방울처럼 그 자체 이상의 무엇이며, 자체 너머를 가리키는 상징 같은 것, 다가오는 무한성을 알리는 전갈에 스스로 휩쓸린 전령 같은 것, 본연의 현실이 이미 다가왔기 때문에 우리 위에 드리워지는 실재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래서 셋째로, 우리는 주일마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 별것 아닌 하찮은 일들에 부드러운 마음으로 응해야 한다. 일상사가 짜증을 내게 하는 것은 우리가 짜증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우리를 무디게 만드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일들이 우리 자신을 평범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옳게 이해하지도 처리하지도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하기는 일상사가 우리를 현실적이게 하고 더러는 고달프고 낙담케 하며 욕심을 버리고 주저앉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마땅한 일이다. 그것은 배우기 어려워도 배워야만 하고, 영원한 삶이라는 참 축제에 우리 힘 아닌 하느님 은혜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상의 일들이 우리를 일그러지게 하거나 냉소와 회의에 차게 해서는 안 되겠다. 왜냐하면 작은 것은 큰 것의 약속이요 시간은 영원의 생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일의 일상도 그러하다.
일하는 것
일은 우리가 평일 또는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특징적 내용이다. 인간의 숭고하고 위대한 창조력의 행사를 뜻하여 일은 복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흔히 있듯이 일을 오용하여 도피로 삼을 수도 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실존의 신비와 수수께끼로부터, 참 안정을 비로소 찾게 하는 불안으로부터의 도피가 모두 그런 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일이란 이 양자 중간에 자리한다. 일은 실존의 정점도 아니요 진통제도 아니다. 고되면서도 견딜 만하고, 평범하고 길들어 단조롭고 되풀이되는 것이 일이다. 삶을 유지시키면서도 동시에 차츰 소모시키며, 불가피하면서도 ㅡ 지나친 고역이 되지만 않는다면 ㅡ그런대로 즐거운 것이기도 하다.
일이 우리에게 마주 “맞을” 수는 없다. 제아무리 고상한 창조적 충동의 실행으로서 시작된 경우라도 영락없이 지루하게 단조로워지고, 같은 것을 지겹게 되풀이하는 회색 노고가 되며, 예측 못한 것 내지 인간이 안으로부터 행하는 게 아닌 밖으로부터 낯설게 들이닥치는 것의 무게를 받아내야 한다.
나아가 일이란 언제나 남들의 처분에, 주어진 보조에, 자기를 맞추어야 함을, 우리들 중 아무도 혼자 택하지 않은 공동 목표에 이바지함을, 즉 공동선을 향한 순종과 극기를 뜻한다.
따라서 일의 신학이 해야 할 첫마디는, 바로 일은 그대로 일이라는, 또 언제나 그러리라는 말이다. 즉, 고달프게 단조로운 것,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것, 일상적인 것이다. 일이 설령 갈수록 창작 행위의 성격을 더 띠게 된다 치더라도 인간에 있어서는 죽음에서 그 끝을 찾는 생물적 기반에 묶여 있으며, 결코 남김없이 뜻대로 처리될 수 없는 외계와의 교호관계에 놓여 있다.
성서에 나타난 대로, 우리 실존의 죄스러움의 발로, 안과 밖, 자유와 필연, 육신과 정신, 개인과 사회 사이의 실존적 부조화의 발로로 머문다. 이는 하느님만을 통해서만 초극될 수 있는 부조화이다. 그러나 고통과 죽음 등 그 자체 죄가 아닌 죄의 결과는 그리스도에 있어 구원의 구체적인 발로가 되었다. 이 점은 죄책의 가장 근본적 발로인 죽음에서뿐 아니라 신으로부터의 괴리를 들어내는 온갖 사상事象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따라서 고달프고 일상적이고 현실적으로 몰아沒我를 요구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