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필터링'하라
우리 시는 지금 지나치게 이완돼 있다. 언어가 절제되지 못한 채 소란스럽거나 지루하다. 다변, 요설, 장광설, 즉흥성이 시의 시 다움을 위협하고 있다. 시인들이 표현하는 것이 감각이든 감정이든, 생각이든 이념이든 그 자신의 내면은 물론 그 언어를 마지막 단계까지 '필터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거르고 걸러서 더 이상 걸러지지 않는 결정체 금강석 같은 것, 그런 것들을 시 속에 들여 놓아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시의 언어를 마지막까지 홀로 그만의 방에서 엄격하게 '필터링'하라고 말하고 싶다.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윤동주시인의 말을 다시금 음미해 보고 싶은 것이다.
혜안으로 심연을 관하라
시를 읽는 일이 점점 더 심심해진다. 뛰어난 누군가가 있어 죽비로 존재의 안쪽을 내리치듯 '서늘한 감동'을 주었으면 좋겠다. 비슷한 언어, 비슷한 문체, 비슷한 문제의식 앞에서 갑갑한 심정이 될 때가 많다.
나는 생각해 본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그것은 생각하는 힘을 키우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지성의 부재요, 공부의 부재이다. 생각은 우리를 새롭게 한다. 생각은 공부에서 나온다. 그 공부가 교과서적인 지식 공부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 것이다. 시인은 감수성이 발달한 사람이지만, 공부와 생각이 뒷받침되지 않는 감수성은 위태롭고, 그것이 수반되지 않을 때 감수성조차 진부해진다.
나는 이 장에다 '혜안으로 심연을 관하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을 붙였다. 여기에는 실상을 보자는 뜻을 역설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금강경]을 보면 다섯 가지 안목이 나온다.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 그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시인들 역시 중생놀이 하는 중생심에 젖어 육안으로 겨우 세상을 바라보며 말을 해보는데 불과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혜안'을 들고 나왔다.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그러나 다른 눈을 뜨지 않는다면 다른 시가 창조될 수가 없다.
혼을 넣어 헌신하라
시를 발표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그 누군가가 먹어서 살로 갈 만한 하나의 언어적 세계를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말은 자기현시, 자아 우월감이나 자아 한탄과 같은 소아적 도구성을 넘어서서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우리 시가 진정 자아의 도구성을 넘어 혼과 진정성을 담은 헌신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는 주문을 해본다. 제아무리 멋진 수사와 문체를 자랑하여도 작품속에 혼이 빠져 있으면 독자는 그 작품과 깊게 만날 수 없다.
그렇다면 혼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표면만을 떠도는 세상에서 어떻게 혼을 만날 수 있을까? 어려운 질문이지만 혼은 대아적인 생명살림의 마음 속에서 탄생한다. 그 마음 앞에서 우리는 자발적인 헌신의 자세를 가지게 되고, 그것은 영성을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된다. 혼이 깃들 때 언어는 꽃처럼 피어난다. 혼이 깃들 때 시는 호소력을 가진다. 혼이 깃들 때 시인은 도모하지 않아도 독자와 하나가 된다.
-정효구 충북대 국문과교수 평론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