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다가간 만큼 보인다 / 사윤수
한 때 '아는 만큼 보인다'는 구호가 유행했었다. 그 땐 고전에서 빌려온 참신한 표어로 각광 받았으며 세인들의 글줄에 즐겨 오르내리곤 하였다. 한데 '아는 만큼'이라는 표현에는 뭔가 권위적이며 모르는 사람을 기죽이는 이면이 있는듯 하다.
살펴보건데 그 구호의 기원은 조선 유학자 유한준이 미술품 수집가 김광국의 화첩에 발문으로 써준 것으로, "알면 진정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간절히 보기를 원한다."라고 한 것으로부터시작된 것이다.
그렇다 간절히 보기를 원한다면 우선 다가가야 한다. 물론 어느 정도 앎이 선행되면 좋겠지만, 머뭇머뭇 먼저 다가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가감이 사랑하게 됨이 아닌가.
에릭 프롬은 "사랑이란 존재에 대한 진지한 탐구며 적극적인 참여"라고 했다. 사랑을 하기도 전에 상처입지 않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자꾸 자꾸 만나면서 그 사람을 알아가듯이 예술도 마찬가지다. 일단 작품이나 공연을 자꾸 만나고 접하다 보면 예술과 친해지고 또 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예술이라고 하면 낯설고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예술은 무조건 어렵고 복잡한 것이라고 외면한다. 이런 현상을 아트 포비아(art phobia)라고 하는데 그 무엇을 사랑하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 다른 것도 바라지 말아야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오래된 버전이지만 몬드리안의 원색 사각형 구성을 보고 우리 동네 논 하고 닮았네 라고 했다던 노인의 에피소드처럼 어떤 작품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건 자신만의 소중한 자유다. 이제 예술이 아주 가까운 곳,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나머지 절반은 자신의 보폭으로 채우면 된다.
다가가간다는 것은 곧 열정이며 예술의 출발이다. 예술가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재료와 대상에게 다가가고 관객은 만들어진 작품을 향해 다가간다. 예술과 연애하듯이 그렇게 시작하고 다가가다 보면 어느 순간 예술도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아름답고 깊은 앎은 그때 비로소 생겨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