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리차드 P. 하디 RICHARD P. HARDY 옮긴이 : 가르멜 여자 수도회
책 소개(바오로 딸)
이 책은 스페인 출신인 십자가의 성 요한 수사의 생애를 그린 것이다. 성인에 관한 기존의 전기물들이 대부분 신비적 영성 생활에 대해 다루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저자는 요한 수사에 대한 초기 기록과 그의 저서, 시복, 시성에 관련된 기록들을 재조하여 성인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성인의 가족과 유년기, 수도회의 생활, 개혁과 위기, 영적 지도신부로서 그리고 필자와 가문위원으로서의 활동 및 임종 시의 육체적 고통 등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심성이란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또 만나 뵘을 의미한다. 마음과 힘을 다해 성실히 삶으로써 그가 살던 시대의 사회악에 도전하며 선을 구축한 요한 수사는 진정 하느님과 함께 산 사람이었다.
이 책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이 한 인간 안에서 육화될 수 있는지, 또 그 사랑이 얼마나 따스하게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지 보여준다. 좌절한 사람에게 삶의 긍정적인 차원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사랑에 의탁하여 살아가도록 격려해준다.
나눔의 글
개혁 반대파 수도자들에 의해 똘레도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 9개월간 ‘어둔 밤’을 체험한 십자가의 성 요한. 읽으면서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던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은 인간의 능동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절대 정화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손길로 다스려짐이 감성 및 영성의 수동적 밤이요,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천재가 유례없이 밝혀내는 밤이라고 합니다.
지은이의 소개가 안 되어 있는 리차드 P. 하디의 이 저서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 대한 전기문입니다. 「無에의 추구」 십자가의 성 요한의 생애를 요약해서 올립니다.
<머리말>
15여 년 전부터 십자가의 요한 수사의 저작을 연구하면서 나는 그에 관해 쓴 대부분의 전기들을 대할 때마다 거북함을 느껴왔다. ···
유머를 알고, 가족들을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몹시 아끼고, 이웃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즐거운 일을 좋아한 사람,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애정을 기울여 "삼라만상에 대한 로맨스"를 보여 준 사람, 성성이란 바로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만나 뵘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활 속에서 터득한 사람, 참으로 성인다운 한 사람, 십자가의 성 요한 수사, 그의 삶과 믿음과 사랑...
이 소책자에서 내가 의도하는 바는 바로 이 사람, 즉 내 나름으로 이해하게 된 십자가의 요한 수사(1542-1591)를 묘사하는 일이다. 십자가의 요한 수사를, 생활을 통해, 또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된 한 인간으로 알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이 책을 썼다. ···
하 · 나
청년 요한 예뻬
(1542~1564)
드라마가 그 종막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스페인 남쪽 지방에 자리 잡은 우베다 읍의 밤자갈로 포장된 좁다란 거리와 골목길들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날 밤, 가르멜 수도원의 수사들은 수도원 위층, 답답하리만큼 협소한 구석방으로 묵묵히 모여들었다. 방 안에는 야윌 대로 야윈 자그마한 몸집의 수사 ㅡ 십자가의 요한 수사가 누워 있었다. 기진한 이 수사가 간간이 몰아쉬는 숨결은 임종이 다가왔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
이때 돌연 수도원의 종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것은 수사들에게 새벽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귀에 익은 종소리에 요한 수사는 눈을 번쩍 뜨며 “무슨 종소리지요?” 하고 물었다. 형제들을 부르는 조과경 종소리라는 말에 그는 베개 위에서 긴장을 풀며 평온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ㅡ 형제들은 여기서 기도를 바치겠지만 자기는 영원의 나라에서 조과경을 읊게 되리라는 것을! 1591년 12월 13일에서 14일로 넘어가는 자정이 막 지날 즈음, 십자가의 요한 수사에게 생애의 또 다른 단계로 접어드는 죽음이 성큼 다가왔다.
그는 생전에 늘 그렇게 지내왔듯이, 임종 때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숨을 거두었다. 마흔아홉 해를 살아오는 동안 그는 많은 사람들을 곤혹케 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노여움을 샀고, 또 어떤 이들한테서는 환대를 받았다. 어느 쪽이든 그는 그들 모두를 사랑했다. 바로 그들 개개인은 그가 일찍이 젊었을 때 몰두하기 시작했던 저 추구追求 노정의 일부를 형성했던 것이다.
가족 · 유년기
스페인 역사에서 16세기는 가장 활기에 넘친 시대였다. 그 유명한 부부 군주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도가 스페인을 하나의 통일 국가로 만들기 위해 투쟁하여 마침내 그 목표를 달성했던 것이다. 1492년 무어Moor족의 지배에서 벗어난 그라나다는 수많은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을 공포에 떨게 한 이단 규문소로 말미암아 아직 긴장된 상태이기는 하나 어쨌든 다시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다.
지중해 연안 그라나다의 남부 항구도시들은 활기에 차 붐비었다. 스페인 본토는 태평연월을 구가했다. 스페인의 왕은 황제였다. 부가 차고 넘쳤다. 적어도 귀족들에게는 그러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이 두 계층은 나란히 공존하고 있었으나 각기 자기들 나름의 세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치고 갈라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갈라 놓은 그 깊은 골을 메워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러 완미한 인습을 대담하게 무시해 버리고 자유로이 처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곤잘로 예뻬와 가타리나 알바레즈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곤잘로 예뻬는 스페인 중앙에 있는 똘레도 지방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다. 대대로 성직자나 거상으로 행세해 온 집안이다. 대부분이 자본가로서 막대한 재산을 활용하여 제조업이나 운송업에 투자한 그들은 자연히 상류계급에 속하게 되었다. 사실 예뻬 집안은 개종자conversos, 즉 본래는 유대계로서 그리스도교로 귀의한 집안이었다. 그 당시 유대계 혈통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여러 세대가 흘렀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의혹을 사게 마련이어서 그런 가문에 속한 이들이 사회적으로나 교회 안에서나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더구나 이단 규문소는 이러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감시했다. 따라서 예뻬 일가는 그들의 조상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곤잘로의 가문은 상당히 부유했지만 그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고아가 되어 삼촌 집에서 살았다. 당연히 삼촌을 위해서 일을 해야 했고 그래서 많은 출장을 다녔는데, 특히 스페인 중부와 북부 지방을 자주 돌아다녔다.
곤잘로가 가타리나 알바레즈를 만난 것도 삼촌 대신 사업차 메디나 델 캄포로 출장을 갔다가 마드리드 바로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 폰티베로에 들렀을 때였다. 가타리나도 곤잘로처럼 똘레도 지방 출신이었다. 그녀는 양친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자기의 삶을 그 작은 마을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리라 믿고 그곳으로 옮겨 살고 있었다.
첫눈에 반한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곤잘로가 가타리나와 결혼할 계획을 식구들에게 발표하자 집안사람들은 만일 곤잘로가 그녀와 결혼한다면 그와 의절하고 그를 죽은 셈 치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그들은 가타리나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반대 이유는 아니었다. 가타리나의 출신 배경에도 비밀들이 있었던 것이다. 풍문에 의하면 그녀는 어느 무어인 노예 소생이라고도 했고, 화형당한 유대교도의 딸이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그녀와의 결혼은 신원조회를 유발시킬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예뻬 가문의 유대계 배경이 드러날 것이었다. 그래서 온 집안 사람들은 그 결혼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고, 또 그럴수록 곤잘로와 가타리나는 그대로 밀고 나갈 결심을 굳혔다.
곤잘로와 가타리나는 서로의 애정이 그들을 지켜 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1529년경 결혼했다. 두 사람은 처음 살림을 차렸을 때 만큼이나 어렵게 오랫동안 일했다. 1542년까지 그들은 맏아들 프란치스코, 루이즈, 십자가의 요한 ㅡ 아들 셋을 두었다. 가족들은 근근이 풀칠이나 하면서 사는 형편이었다. 그들은 오직 직조 기술과 고된 노동, 그리고 그들이 생산해 낸 제품의 수요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집은 작은 공장으로 바뀌었다. 나이가 들면서 요한은 베틀 손질하는 일을 도왔는데 식구 중 가장 어리긴 했지만 자기 몫의 일은 책임지고 해내야만 했다.
그러나 곤잘로(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좀 더 넉넉히 벌어 보려는 그 긴장과 과로, 친척들로부터 소외당한 비애, 거기에다 영양실조가 겹쳐 건강을 조금씩 해치게 되었다. 이런 고달픈 생활이 15년가량 계속되자 결국 그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병고에 시달리며 죽음으로 다가가는 아버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