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토머스 머튼 옮긴이 : 조효제
토머스 머튼
1915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스물넷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컬럼비아 대학 문학박사로서 화려한 작가 생활을 했으나 스물여섯에 켄터키주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 1968년 태국 방콕에서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칠 때까지 수사 ‧ 영성 작가 ‧ 사회정의의 수호자로 살았다. 1948년 자전적 일기「칠층산」을 시작으로 70여 권의 책을 출간하여 20세기 가톨릭 영성 작가로 자리 잡았으며, 1963년 종교와 관상 기도 연구에 대한 기여로 ‘평화상’을 비롯하여 여러 상을 받았다.
침묵과 고독과 자연 속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며 관상하고 하느님께 나아간 토머스 머튼의 작품은 30여 개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국내에도「칠층산」, 「가장 완전한 기도」, 「명상이란 무엇인가」, 「구원의 빛」, 「침묵 속에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마음의 기도」, 「양심, 자유 그리고 침묵」, 「고독 속의 명상」, 「선과 맹금」, 「침묵 속의 만남」, 「신비주의와 선의 대가들」, 「새 명상의 씨」, 「영적 지도와 묵상」, 「묵상의 능력」, 「삶과 거룩함」, 「평화론」을 비롯한 다수의 서적이 소개된 바 있다.
나눔의 글
참담했던 우리나라 6.25 전쟁의 비극은 71년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현재까지도 진행형입니다. 전쟁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머튼의 평화론」을 요약하여 나눔의 글에 올립니다.
‘바오로 딸 책 소개’ :
토마스 머튼은 정치가가 아니었다. 가톨릭 수도승이요 영성가였다. 그는 침묵과 기도와 명상을 통해 세상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맑으니 더러운 것들이 더 잘 보였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거침없이 썼다. 1960년대, 냉전의 삭풍 속에서 그는 “대량살상무기의 비인도성, 일방주의적 행동의 위험성과 다자주의적 해결의 필요성, 무력한 국제기구 유엔의 한계를 꿰뚫어 보았고 선제공격의 논리 뒤에 숨어 있는 위선과 전도된 공포를 맹렬히 고발하고 비판했다”. 그 고백적 비판과 성찰의 전면에 예외 없이 자국 정부와 자국민의 무지, 억측, 오만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수도승이자 미국 시민 토마스 머튼의 양심이었다.
머튼 신부는 특히 수도자 · 성직자들이 현세의 일에 대해 예민하게 귀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고, 세상의 쇄신을 위해 분명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수도자가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전반적 쇄신은 위험에 처할 것이요 완전히 불모의 상태가 될지도 모릅니다”라고 호소한다. 바로 이 말이 머튼이 이 땅의 모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깨어 있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간곡히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나는 도대체 예수께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남을 죽이고 자신도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신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서문
짐 포리스트
여러분이 들고 있는 이 책은 원래 1962년에 출판될 예정이었다. 사십 수년이 지난 후 드디어 사랑의 결실인 이 책이 서점과 도서관에 깔린 것을 보면 토머스 머튼이 무척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과거 한때를 회상하게 하는 서글픈 추억거리가 아니라, 여전히 시의적절하게 이 시대에 적합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머튼이 안다면 그의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다.……
이제 그 책이 쓰인 지 42년, 저자가 서거한 지 36년 만에 정식 출판 서지 사항이 인쇄된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가 출간되었다. 립 반 윙클(워싱턴 어빙이 쓴 단편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로서 20년간 마법의 잠을 자고 깨어나 독립전쟁이 이미 끝나 있는 것을 알게 됨-역자 주)보다 더 오래 잠들어 있던 원고였다.
그런데 어떻게 1962년 당시의 상황을 다루는 책이, 소련이 더 이성 존재하지 않고 냉전이 역사책의 한 장으로만 다루어지는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을까? 오늘의 세계는 여러 측면에서 1962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종말의 날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을 정도다. 핵전쟁에 의한 파멸은 우리 스스로 아주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암울한 미래상 중 하나일 뿐이다.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해 보라.
실제로 강대국들은 유엔을 정치와 선전의 씨름판으로 만들었고 자기 이익에 부합된다면 언제든지 유엔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머튼의 주장 중 오늘날에도 적절한 주제 중 하나는, 전쟁을 일으키려는 나라가 추상적으로는 전시에 도덕적 자제력을 발휘해서 행동에 임하겠다고 약속하다가도 실제 전시 상황에 처하면 이런 공약은 흐지부지되고 끝내 완전히 소멸되어 더욱더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미국과 영국은 적군이 하듯이 도시에 대한 공습을 하지 않겠다고 맹약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난 후에 주저하지 않고 도시 전역을 정당한 공습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
나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여러 면에서 헐리우드의 촬영장을 닮았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앞은 멋있는 외양을 하고 있지만, 뒤는 지지대로 받치고 있는 세트장 말이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좋든 싫든 우리는 이미 포스트 그리스도교적 세상에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겠다. 즉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이상과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적 외양은 거의 속빈 강정과 같은 것이며, 과거에 ‘그리스도교 사회’라고 불리던 사회조차 오늘날에는 무늬만 그리스도교이고 사실은 완전히 유물론적인 이교도의 영향하에 놓여있다. ··· 비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 비폭력과 사랑에 관한 복음의 윤리를 ‘감상적’이라고 비하하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 머튼이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를 탈고할 때와 달라진 것도 적지 않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평화 만들기’라는 말을 1962년 당시처럼 불온한 용어로 받아들이지 않는 점이 그 한 가지 변화인데 아마 머튼은 이에 대해 대단히 기뻐할 것이다. 이것은 실로 심대한 태도 변화인데 부분적으로는 이 역시 머튼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시대 변화의 징표는 몇 년 전 뉴욕 대교구에서 도로시 데이의 시성과 성인축일 지정을 공식적으로 청원했다는 사실이다. 바티칸은 이미 그녀에게 ‘하느님의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