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슈테판 키흘레
1960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난 슈테판 키흘레 Stefan Kiechle는 1979년 프라이부르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라이부르크와 이스라엘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82년에 예수회에 입회했다. 수련기를 마치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뮌헨에서 철학 대학에서 철학을, 프랑크푸르트 성 그레고리오 철학. 신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89년에 뮌헨 사제로 수품된 그는 수련자들을 교육하며 사목활동도 했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파리 '센터 세브르 Centre sevre에서 공부하며 [로욜라의 이냐시오에게 나타나는 십자가의 추종]Die Kreuzesnachfolge bei Ignatius von Loyola 이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뮌헨 루드비히 막시 밀리안 대학 가톨릭 학생회 사목을 맡았다. 1998년 뷰토 2007년까지 뉘르베르크에서 예수회 수련장으로서 독일어권 예수회 수련자 양성에 힘썼다. 2007년 뷰토 만하임에서 상담소 '문을 열라'를 이끌면서, 그 지역 예수회 공동체 원장직도 병행했다.
'이냐시오 숨결' 시리즈 공동 편집자이며 이냐시오와 예수회에 관한 학술과 저술에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많은 강의와 세미나, 피정 지도를 하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분도),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 「권위를 행사하는 법」등 여러 책을 냈으며, 에흐터 출판사의 ‘이냐시오 영성’ 시리즈 공동 편집자로도 일하고 있다.
옮긴이 : 이규성
1961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1985년 예수회에 입회하고 1995년 사제가 되었다. 1995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루크 대학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2003년 푸랑크푸르트 성 그레고리오 철학. 신학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5년부터 서강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나눔의 글
전 세계를 변화시킨 영적 스승! 영성의 대가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삶과 업적을 소개하며 그의 영성이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밝힌 책입니다. 슈테판 신부는 독자가 하느님을 새롭게 바라보고 더욱 큰 의미와 평화를 찾아 나서길 바라며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1491년 스페인 바스크 출신의 귀족이자 기사였던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학교에서 배우듯 하느님의 현존, 그분의 역사하심을 삶 속에서 배웠습니다. 전장에 나가 중상을 입고 병상에 누워있던 그는 우연히 영성 서적을 읽으며 내적 여행을 시작하고 새로운 세상과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교육학을 바탕으로 이냐시오는 철저히 변화되어 영적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의 영성은 인간에 대한 봉사와 열정적으로 세계를 구상하는 데로 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성은 ‘행동의 신비주의’ 또는 ‘자유의 신비주의’라 불렸습니다.
이냐시오의 영적 지침은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충만하고 의미 있는 실존을 찾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대화와 공동체, 개인화와 자유, 식별과 결정, 영성과 경영,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신, 우리 세계의 첨예한 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끌 것입니다.
들어가며
포탄은 그의 다리와 삶을 부숴 버렸다. 궁정 기사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그는 건장하고 잘생기기까지 했다. 지금은 부모님의 로욜라 성 어느 병상에 누워있다. 그리고 내적 여행을 시작한다. 그는 놀라운 세계를 발견했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격렬한 내적 · 외적 싸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30년 후 그는 여전히 미약한 사람이었다. 다리를 심하게 절었으며 담석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신들린 듯 일했다. 그는 밤낮으로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었다. 전 세계에 뻗어 있는 사업을 활발히 이끌었다. 엄격하고 공정하게 처신했으며, 그에게서는 큰 자비가 퍼져 나갔다. 그는 교황과 왕들과 교류했다. 동료들은 그를 뜨거운 마음으로 존경했지만, 반대자들은 그와 격렬히 싸웠다. 그와 사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서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유럽과 세계를 변화시켰다.
바스크 출신의 귀족이자 기사인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cio de Loyola(1491-1556)는 예수회 창립자다. 예수회는 격동의 시대에 서방 교회를 개혁했고 수백 년 동안 영향을 끼쳤다. 그의 영적 메시지는 그리스도교 전체의 삶과 활동을 쇄신했다. 현대에도 그의 영성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을 도와 충만하고 의미 있는 자기 실존을 발견하게 한다.
이 책은 영성이 대가인 로욜라의 이냐시오를 소개한다. 그의 삶과 업적을 소개하며 그의 영성이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밝힌다. 이때 역사적 · 신학적 지식은 전제하지 않는다. 독자가 자신의 삶을 영적으로 숙고한 후 하느님을 새롭게 바라보고 더욱 큰 의미와 평화를 찾아 나선다면 이 책은 제 소임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를 이냐시오에게 인도하고 이 책의 출간을 도와준 예수회 형제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원고를 교정해 주신 아버지께도‧‧‧.
2001년 1월 1일, 뉘른베르크에서 슈테판 키흘레 SJ
Ⅰ
하느님의 학교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고통과 기쁨, 절망과 행운, 파괴된 꿈과 예기치 못한 기회, 고독과 우정을 체험했다. 영성의 대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냐시오도 삶과 영적 메시지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체험을 바탕으로 영성이 발전했고, 영성을 바탕으로 삶이 형성되었다. 그러니 삶을 알아야 영성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그의 영성을 풍요롭게 느끼려면 그의 삶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은 일단 교육적이다. 이 ‘하느님의 교육학’을 바탕으로 이냐시오는 철저히 변화되어 사람들의 영적 스승이 되었다.
1. 바스크의 내력
이니고 로페즈 데 오냐즈 이 로욜라Iňigo Lόpez de Oňaz y Loyola는 1491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수호성인은 부르고스의 오냐 수도원장 성 이니고Iňigo(✝1068)였다. 그의 세례문서가 본당에 보관되어 있지 않아서 유년기에 관한 확실한 정보는 많지 않다. 훗날 시복 조사를 위해 고령의 유모가 증언한 내용이 거의 전부다.
가문의 영향
로욜라家는 전통적 기사 가문으로 자부심이 강하고 호전적이었다. 로욜라가는 여러 갈등 끝에 수백 년 동안 카스티야Castilla 왕국에 충성했다. 이 가문은 인근 마을 아즈페이티아Azpeitia 본당에서 ‘교회 후원자의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로욜라 성이 있는 기푸즈코아Guipúzcoa 지방은 열네 개 귀족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다. 로욜라가는 그중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가문이었다. 이 가문이 가진 특권과 권한, 소유로 인해 이웃뿐 아니라 주교와도 싸움이 잦았다. 드잡이, 약탈, 심지어 살인까지 일어났다. 오랫동안 주교단은 아즈페이티아 본당 운영권을 탐내고 있었다. 로욜라 성은 이런 무력 충돌로 인해 요새화되었다. 집이라기보다 방호 시설에 가까웠다. 이니고는 이런 가정환경에 큰 영향을 받았다. 로욜라 성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나 아쉽게도 예수회 공동체 건물로 비좁게 둘러싸여 있다.
이니고는 딸을 포함한 적자 열세 명 가운데 막내였다. 그 밖에 서자들도 있었다. 아즈페이티아 본당신부인 이냐시오의 형도 서자였다. 이니고가 어렸을 때 삭발례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가 성직자로 정해졌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그의 가문은 종교적이고 신심이 깊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랬듯이 이니고도 자연스레 종교적 확신과 방탕한 윤리 의식이 어쩌면 그리도 거림낌 없이 연결되었는지, 지금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이는 특히 연애 사건, 무기 거래, 폭력적 논쟁 등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는 그의 소유욕과 명예욕이 큰 역할을 했다. 후에 이냐시오는 이 두 욕구를 멀리했고 이를 영적 가치로 바꾸었다.
기사도의 이상
바스크의 ‘주요 가문들’에서는 중세 기사 제도가 15~1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역사적으로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이미 사회 경제적 환경이 크게 변했다. 전쟁 방식이나 정치적 공방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러나 궁정 생활에는 여전히 기사도의 이상과 관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기사도의 이상은 구체적인 행동, 신중한 용기,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를 요구한다. 기사는 자신의 빵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고 과부와 고아들의 권리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이런 풍토에서 교육은 평가절하되었다. 로욜라가에서도 극소수만 읽고 쓸 줄 알았다. 로욜라 사람들은 행동파, 지주, 투사였다. 가부장적이고 호전적이며 허영심 많은 남성 우월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