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20. 6월 영적 도서 「불완전한 나에게」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20-06-27 19:27:00    조회 : 239회    댓글: 0

세마 성당 2020. 6월 영적 도서 불완전한 나에게

지은이 : 파올로 스퀴차토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마을 베이나스코에서 태어나 1998년 사제품을 받았다. 코톨렌고사제회 소속이며 드루엔토에 있는 평신도 영성 교육 센터 Mater Unitatis 책임자다. 여기서 평신도의 영성 생활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옮긴이 : 이창욱

 

 나눔의 글

 

지금의 시대는 완벽을 원합니다. 마네킹을 닮은 외모부터 인성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을 요구합니다. 완벽해지려고 할수록 작은 실수 하나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죽을힘을 다합니다. 매일 그렇게 우리는 전쟁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며 경쟁의 시대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삶 뒤로 슬픔, 절망, 회의, 허무, 아픔, 눈물을 숨긴 채.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약함의 논리를 확인시켜 준 것처럼완벽한 사람이 아닌 불완전한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신 하느님의 역사가 이 책에서 펼쳐집니다.

 

하느님 눈에 우리 모두는 다 불완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무조건 윤리적으로 완벽한 존재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세상의 요구에 맞춰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불완전한 내 모습에 하느님 은총이 찾아올 빈틈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영성 에세이로, 요약글을 올립니다.

 

 

1. 한계의 풍요로움

 

상처를 진주로

변화시키기

 

빛나고 귀한 진주는 조개가 상처를 입을 때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 불순물이나 모래가 조개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조개는 방어력이 없는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외투막(진주층)을 분비해 불순물을 감싸고 감싼다. 그 결과 빛나고 가치 있는 아름다운 진주가 만들어진다. 진주는 조개의 상처가 아물면서 만들어지기에, 만일 조개가 상처를 입지 않는다면 결코 진주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 내면에는 얼마나 많은 상처와 불순물이 있는가? 한계, 약함, , 무능력, 부적합, 심리적 · 육체적 연약함···. 우리의 관계 안에도 많은 상처들이 있다. 우리는 늘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유일한 길은 사랑으로 감싸는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본질적인 것이다. 자신에게 들어온 불순물을 성장의 계기로 삼는 유일한 방법은 진주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약함 때문에 그들에게 원한을 품든,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 죄책감(우리가 느껴서도 안 되고 다른 이에게 느끼게 해서도 안 된다)으로 계속 자신을 괴롭히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불순물 없이 단순한 빈 조개’, 한마디로 순수한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한 번도 상처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 상처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거나 이해하고 고통을 사랑으로 변화시킬 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안팎의 관계에 존재하는 한계, 상처, 어두운 그림자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복음적 메시지에 비추어,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내적 세계도 그림자와 한계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풍요로워지고, 그 지점에서 구원을 체험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버려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모든 것이 은총이고, 죄까지도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 받아들이고 나누기 위해 성적인 상처와 신경증까지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상처들을 경멸하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처들을 잘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모두가 성화를 이루기 위한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면, 이는 우리 안에 참된 회심, 복음적 메타노이아(회개)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약함과 죄가 없는 순수의 상태가 구원이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구원과 성성이란 우리가 상처받고 한계가 있으며 약한 존재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찾아주시고 우리 안에 머물기 위해 오시는 하느님의 어리석은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거룩함은 완전함과 그다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완전함의 반대다. 완전함은 죽음의 망가진 여동생이다. 거룩함은 있는 그대로의 삶이 지닌 강한 묘미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기뻐하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이다. 크리스티안 보뱅 Cristian Bobin

 

한계를 지닌 모든 것은 실현 가능한 것조차 자기 안에 가둬버린다고 복음은 계속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네가 버리고 싶은 너의 부분을 사랑하라. 그 부분을 사랑으로 감싸라. 그러면 마침내 너는 네 안에 소중한 진주를 품고 있음을 알게 되리라. 상처를 인식하고 사랑으로 감싸면, 네 안에 간직하고 있는 보물을 느끼게 될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한계와 연약함을 한가운데 두도록강력히 권고한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마르 3,3: 루카 6,8 참조), 중풍 병자(루카 5,19 참조) 이야기가 그 예다. 우리의 어두운 부분을 한가운데 둔다는 것은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비추어 볼 때 그 어두운 부분이 우리의 인간성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힘과 약함 중 우리는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의 부당함과 약함은 하느님의 힘을 지니고 있기에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힘이 세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이 진리가 그리스도인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미 말한 대로, 복음서 무대의 중심에는 늘 병들고 상처 입고 약하고 깨지기 쉬운 인간이 있다. 따라서 공동체의 중심에,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중심에는 혼자 결정하고, 행하려는 독단, 거룩한 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강박, 윤리적으로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생각 등이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 오직 약함만 있어야 한다.


한계상황과

화해하기

 

우리는 한계를 지닌 현실을 극복해야 하는 동시에 한계상황을 수용해야 한다. 우리는 정해진 만큼만 살 수 있다. 우리는 주변 세상과 구별되는 육신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공간에 매여있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더 많이 사랑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고 싶어 하지만, 우리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역사, 심리구조, 성격, 내적 병력이 주어졌음을 날마다 혹독히 경험한다. 우리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와 다르다는 점에서, 타인은 우리가 바라는 모습의 사람이 아니기에, 우리는 타인을 한계가 있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이처럼 서로 다름은 존재하며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서로 다름이 공포를 만들 때, 그것은 늘 싸워야 하고 섬멸해야 하는 대상인 원수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한계를 다소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한계는 우리에게 압박, 장애, 난관을 의미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선과 악의 테두리를 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악습과 죄는 과잉에서 비롯되었고, 덕과 선은 중용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표현으로 말한다면, 극단적 한계들 사이에 덕과 선이 있는 것이다.

사실 고대의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큰 오류는 교만, 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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