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9. 12월 영적도서 :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20-01-05 00:43:26    조회 : 381회    댓글: 0
세마 성당 2019. 12월 영적도서 :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The Bible and the Human7
 
지은이 : 송봉모 신부
예수회 신부. 로마 성서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을 받고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주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에 성서와 인간 시리즈, 성서 인물 시리즈, 요한복음 산책 시리즈와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예수-탄생과 어린 시절」,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을 위한 The Lord Calls My Name, Wounds and Forgiveness 등이 있다.
 
 
 
나눔의 글
 
이 책은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일곱 번째로, 시편 23과 시편 1의 구절을 묵상함으로써 신앙이 무엇인지 깨우쳐주고, 참된 길이신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성스런 인간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첫 번째 단락인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에서는 묵상의 이해를 돕기 위해 팔레스티나의 자연환경을 설명하고 시편 23을 주석학적, 인간학적 이해라는 측면에서 이끌어가십니다.

시편 23은 신앙과 그 신앙을 갖고 굳세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의 두 번째 단락인 인간의 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길로 걷도록 초대받았고, 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그 길이 곧 복된 길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송 신부님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겠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착한 목자가 되시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이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여명이 트기까지 깨어 기다리는 것이 신앙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많은 가톨릭 성가 중에서 유독 마음의 평화를 느끼며 즐겨 애창하는 성가는 50번(시편 23)인데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감회가 깊었습니다. 시편 23의 깊은 의미를 일깨워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1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

☘머리말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
 
우리가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성서는 어떻게 해야 인간이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지 말해준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히브 11,6) 신약성서를 읽다 보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동하시면서 크게 칭찬하시는데, 그 경우는 모두 주님께 놀라운 신앙을 보여드렸을 때이다.
 
놀라운 신앙을 보였을 때 나오는 정형적定形的문장은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크게 감탄하시며”라는 문장이다.
 
바오로 사도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었다.
 
믿음의 싸움을 잘 싸워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오.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1디모 6,12)
 
성서는 말한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 11,1)
 
성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신앙과 그 신앙을 갖고 굳세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많은 성서 구절들이 이 주제를 보여주지만, 특별히 시편 23만큼 이 주제를 잘 보여주는 글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시편 23을 가리켜 ‘시편의 나이팅게일’ 또는 ‘시편의 진주’라고도 한다. 그만큼 아름답고 신앙적인 시이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는 길 언제나 바른 길이요
나 비록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시편 23 1-4)
 
 
 
팔레스티나의 자연 환경
 
시편 23은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로 시작하여 “푸른 풀밭”과 “물가”가 언급된다. 이 시편을 천천히 읊노라면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는 하늘 아래 푸르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가고 양떼들이 평화로이 풀을 뜯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왜 이 시편을 장례미사 때 부르는 것일까? 우리의 삶은 늘 불안하고 위협받기에 이 세상에서 시편 23을 노래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지만 저 세상에서는 적당하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영혼은 이제 하늘나라에서 아빠 아버지 품에 안겨 편히 쉬고 있기에,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를 쓴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래적 인생관이 아니라 현실적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던 이들이다. 그들의 꿈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다가 많은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축복해주고 편안히 죽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를 쓴 저자는 하늘나라를 상상하면서 쓴 것도, 장례식에서 노래하라고 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 시가 쓰여진 팔레스티나 지방의 환경을 생각한다면 시편 23은 장례식장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암송되고 노래 불러져야 할 시이다. 왜냐면 이 시는 생의 위협과 위험이라는 삶의 조건을 전제하고 쓰여진 어떤 것보다 현실적인 시이기 때문이다. 생의 위협은 그들이 살아가던 광야와 유목민이라는 삶의 조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팔레스티나 지방은 대부분이 광야이다. 따라서 목동들이 양떼를 치는 곳도 푸른 풀밭이 아니라 광야이다. 모세가 양을 치다가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하느님을 만난 곳도 광야요( 출애 3,1-2), 다윗이 양을 쳤던 곳도 광야이다((1사무 16,11 참조). 성지를 순례하다 보면 이러한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목자들이 광야에서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광야가 그들에게 삶의 기본요소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광야는 안정된 삶보다는 불안정과 변화가 계속되는 자리이다. 광야에서는 비가 쏟아지면 갑자기 길이 사라지고 급류가 쏟아지는 위험한 계곡으로 변해버린다.
 
이스라엘인들이 양을 치는 곳은 바로 이러한 광야다. 양들은 날씨가 아주 덥지 않은 한 물을 마시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동물이다. 양들은 이슬만 먹어도 서너달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광야에서 양을 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팔레스티나 광야는 바위가 많고 덤불이 많은 땅이다. 그런데 이 광야에 비가 내리면 순식간에 시냇물 즉 와디(wadi)가 흐르고 풀들이 자란다. 비가 내리는 겨울이면 푸른 풀들이 돋아나고, 또 비가 내리는 봄이면 풀 외에도 노란 들꽃들이 무수히 피어난다.
 
그러나 비가 그치고 태양이 뜨면 와디는 즉시 마르고 풀과 꽃들은 시들어 버린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자주 “우리네 생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풀꽃 같은 인생”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시편 90,5-6 ; 102, 4 ; 103, 15-16 참조) 이 풀꽃들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 년생이나 한 계절 피는 그러한 풀꽃이 아니라 비가 그치고 태양이 작렬하기 시작하면 즉시 시들어 버리는 꽃들이다.
 
우리의 인생이 찰라적刹那的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또 성서에서 “주께서는 물이 마르다가도 흐르고, 흐르다가도 마르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도랑같이 되셨습니다.”(예레 15,18)라는 구절이나, “주께서 강물들을 사막으로 바꾸시고, 샘구멍을 막아 마른 땅이 되게 하신다.”(시편 107,33)는 구절은 팔레스티나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반영시킨 표현이다.
 
비가 그치고 태양이 빛나면 다시금 생의 조건이 말살되어 버리는 자연환경 안에서 이스라엘인은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온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인간적인 어떤 노력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절대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 무조건적인 신뢰는 유일한 피조물이 깨쳐야 할 진리이다. 생의 위협 안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들만이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는 기도를 진심으로 바칠 수 있다. 빈손으로 살아가는 자들만이 하느님을 무조건 신뢰하며 이 시편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팔레스티나의 열악한 조건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가. 일상의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어둠, 피곤함, 그리고 불확실성이다. 우리도 이스라엘인들처럼 하느님에게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께 절대적인 의존을 할 때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시편 23의 주석학적· 인간학적 이해
 
야훼는 나의 목자
 
시편 23은 야훼 하느님을 목자牧者로 인간을 그분의 양떼로 묘사한다. 성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사용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가 목자와 양이다. 하느님을 목자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위와 자비로운 통치를 나타낸다. 이점을 에제키엘 예언자가 잘 보여준다.
 
주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보고 내가 돌보리라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내 양떼를 쉬게 하리라......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하리라.(에제 34,11-16)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도 목자로 불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양떼로 불린다. 나아가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착한 목자라 칭하신다.
 
목자와 양떼의 관계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목민관牧民官이라 불렀고, 백성을 다스리는 법을 목민법牧民法이라고 했다. 정약용 선생이 쓰신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일종의 정치학 원론이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은 물론 우리 문화에서까지도 백성과 그 백성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관계가 목자와 양으로 제시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시편 23을 쓴 이는 다윗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목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젊은 시절 양을 키우며 살았던 사람이다.
 
다윗이 하느님을 목자로, 인간을 양으로 표현한 것은 목자와 양은 깊은 인식과 철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계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목자는 양들 하나하나를 알고 있고 그 각각의 특성까지도 알고 있다. 예수께서 이 점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요한 10,14)
 
예수께서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라고 했을 때 안다는 것은 당신이 우리를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들, 긍정적 · 부정적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목자와 양, 상호간의 깊은 인식은 양떼들 편에서도 이루어진다. 양들도 목자를 잘 알고 있기에 목자가 아닌 도둑이나 삯꾼을 따라 나서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 점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신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요한 10,16)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듯이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것 같지 않다. 켈러(Phillip W. Keller)에 의하면 양보다 더 우둔하고 완고한 짐승은 없다고 한다. 좀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양들은 바른 길만 빼고는 어떤 길이든지 가는 완고한 짐승이고, 길을 잃어버릴 줄은 알아도 집을 찾아서 돌아올 줄은 모르는 우매한 짐승이다. 이 완고함과 우둔함은 사실 우리 인간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모습이다.
 
 
양은 뒤로 벌렁 넘어지면 혼자서는 일어날 수가 없다고 한다. 뒤로 넘어진 양이 일어나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힘이 빠져서 일어날 수 없게 된다. 만약 태양이 뜨거울 때 양이 뒤로 넘어졌는데 목자가 알고 얼른 일으켜주지 않는다면 그 양은 죽게 된다. 특히 새끼를 밴 양은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자주 뒤로 넘어지는데 이때 양을 일으켜주지 않으면 어미 양은 물론 뱃속에 있는 양까지도 죽게 된다.
 
팔레스티나 광야의 자연은 양의 목숨을 더 철저히 목자에게 의존하도록 만든다. 팔레스티나 광야에는 여기저기 절벽으로 떨어지는 동물이 많은데, 그러한 곳에 양이든 사람이든 빠지면 남의 도움 없이는 빠져 나올 수 없다.
 
사해 근처 쿰란에서 많은 성서 두루마리들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발견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목자가 양을 잃어버려 혹시 양들이 동굴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싶어 동굴마다 돌멩이를 던져보았다. 그렇게 돌을 던지는데 한 동굴에서 “쨍그랑” 하며 항아리에 돌멩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서 들어가 보니 거기에 엄청난 고사본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양이 목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우리의 험한 인생길에서도 양인 우리는 목자이신 예수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목자와 양으로 표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양들을 위한 목자의 헌신 때문이다.
 
양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착한 목자의 모습 앞에서 잠시 목자, 사목자라 불리는 사제들의 복장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은 로만 칼라(Roman collar)를 착용한다. 로만 칼라를 한 신부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펭귄이 연상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에서는 영명축일 때 심심치 않게 로만 칼라를 한 큰 펭귄 인형을 선물하기도 한다. 그럼 외 신부들은 로만 칼라를 하는가? 그것은 펭귄의 삶이 희생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펭귄은 암놈이 알을 낳으면 (보통 두 알) 그 알을 품고 부화시키는 책임은 수놈에게 있다고 한다. 수놈 펭귄이 알을 품고 있는 동안 암놈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먼 바다로 사냥을 떠난다. 그동안 수놈은 알을 품고 40일 남짓 혹한과 눈보라에도 꼼짝 않고 서있는다. 멋쟁이 신사처럼 보이던 검은 깃털이 다 빠지고 먹지 못해서 아사할 지경이 될 때야 새끼들이 태어난다. 그리고 사냥 나간 어미 펭귄이 뱃속에 먹이를 가득 채우고 돌아온다.
 
돌아온 어미 펭귄은 뱃속에 저장해 온 먹이들을 반추反芻해서 먹이는데 막 태어난 새끼들만 먹이고, 40일을 알을 품어준 아비 펭귄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 수놈은 새끼들이 어미 펭귄에게서 음식을 받아먹는 것을 바라만 보다가 기력이 다하여 나뒹굴다 때로는 죽는 놈도 있다고 한다.
 
펭귄 아비와 같은 존재가 바로 神父이다. 신부란 한자어를 우리 말로 풀이하면 ‘영적 아버지’란 뜻이다. 신부는 신자들의 아버지다. ‘어느 사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Nemo sacerdos sibi).’ 본당 신부들의 주보 성인인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는 자신이 200명이나 되는 신자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늘 두려워 떨며 그들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 했다.
 
신부들이 로만 칼라를 하게 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펭귄의 모습을 닮은 것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신부가 착용하는 로만 칼라는 목자의 옷이다. 에밀 브리에르는 양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난하게 사는 사제, 환경이 요구하는 대로 기꺼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사제, 성령께 마음을 여는 사제, 주님 앞에 완전히 발가벗은 채로 나서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묻는 사제, 이기적이지 않은 사제, 비평과 오해를 인내로써 마음에 새기는 사제 그리고 자기 연민 없이 서서히 그리스도께 백성을 데려가는 사제.
 
목양牧羊의 책임을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베드로 사도는 다음처럼 사제의 깨달음과 자비의 모습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양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잘 돌보되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하며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떼를 지배하려 들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목자의 으뜸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월계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1베드로 5,2-4)
 
아쉬울 것 없노라
 
야훼 하느님께서 목자이기에 아쉬울 것이 없다는 말에서 “아쉬울 것이 없다.”란 말은 우선 부족함이 없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목자가 살신성인의 자세로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돌보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팔레스티나의 양들이 언제나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자주 먹을 풀이 없어서 빌빌대고 영양 부족으로 털도 빠진다. 하지만 아쉬울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비를 내려주시고 풀도 주시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태양만이 내리쬐고 메마른 잡초들만 있을 뿐이지만하느님께서 비를 내려주시면 천지에 생명이 넘쳐흐르기에 아쉬울 것이 없는 것이다. 나아가 착한 목자가 목숨을 바쳐가며 돌보아 주는데 어찌 부족함을 느낄 수 있겠는가?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이 구절에 나오는 두 가지 혜택은 양떼들이 목자를 완전히 신뢰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가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면서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다닌다면 안식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양들의 실제 상황과 관련해서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란 구절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자. 양들은 겁이 많고 까다로운 짐승이라서 쉽게 눕지 않는다. 아무리 파아란 풀밭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고 해도 다음 몇 가지 조건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양들은 눕지 않는다.
 
첫째, 일체의 두려움이 제거되어야 한다. 둘째, 양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질서에서 오는 마찰과 갈등이 제거되어야 한다. 셋째, 배가 불러야 한다. 이상 세 가지 걱정거리에서 자유로워져야만 양들은 누워 쉴 수 있다.
 
우리는 조그마한 두려움이라도 밀려오면 얼마나 빨리 평화를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는가! 우리의 실존은 무척 불안하고 나약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가, 성서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주님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께서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기에 혼으로 들어야 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할 때 아무것도 무서워할 것이 없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 무엇에도
너 마음 설레지 마라
그 무엇도
너 무서워하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님만이 가시지 않나니
인내함으로 모두를 얻느니라.
님을 모시는 이
아쉬울 것 없나니
님 하나시면
흐뭇할 따름이니라.
 
양들이 푸른 풀밭에 누워 쉬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양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질서에서 갈등들이 해소되었을 때이다. 일반적으로 양들 사이에서 두목이 되는 양은 살찌고, 힘세고, 지배적이며, 교활한 암양이다. 그리고 그 밑에는 중간 두목들이 있다. 그러니까 먼저 두목격인 암양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난 다음에 중간 두목이 되는 양들이, 그 다음에 그 외의 양들이 풀밭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우리 인간 사이에서 흔히 발견되는 모습이다. 양과 인간을 모두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양의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란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을까? 하느님께서는 그래서인지 다음과 같이 경고하신다.
 
주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나의 양떼이다. 나는 이제 양과 양 사이.........시비를 가려주리라. 너희 가운데는 그 좋은 초원에서 풀을 뜯는 것만으로 부족한지 남은 초원들을 짓밟는 것들이 있다. 맑은 물을 마시고 나서는 첨벙첨벙 흐려놓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약한) 양떼는 짓밟힌 풀을 뜯어야 하고, 흐려놓은 물을 마시게 되었다. 그래서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몸소 살진 양과 여윈 양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리라 .......(에제 34,17-21)
 
세 번째 양들이 풀밭에 편히 누워 쉬려면 배가 불러야 한다. 그런데 풀이 넉넉한 목초지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광야가 대부분인 팔레스티나 땅에서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는 것은 목자들이 땀 흘린 결과 때문이다. 목자들이 돌을 골라내고, 덤불과 나무뿌리를 제거하고, 땅을 갈아 양들이 먹을 식물의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해 주어야 비로소 풀밭이 생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엄청난 수고를 하시면서 우리에게 넉넉한 삶의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
 
물가로 나를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몸에 생기가 넘친다
 
주님은 목마른 우리에게 맑은 물,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신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 나올 것이다.”(요한 7,37-38)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처럼(“오, 주님. 우리 영혼은 당신 안에서 쉼의 자리를 찾기까지 불안해하나이다.”) 주님 안에서 생명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우리 영혼이 편히 쉴 수 없건만 우리는 세상이 주는 탁한 물을 마시려 애를 쓴다.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바른 길이요
 
목자가 양떼를 인도하는 길은 언제나 바른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편안한 길, 안락한 길을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말 공동번역성서에는 ‘바른 길‘이 아니라 ‘곧은 길’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곧은 길로 번역한 데는 주님이 착한 목자시라면 당신의 양떼를 이리저리 끌고 다녀 고생시키지 않고 지름길로 인도할 것이란 기대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자이신 주님께서 당신 양떼를 인도하실 때 지름길로 인도하시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무려 40년이란 긴 세월을 시나이 광야를 헤매야 했는가? 왜 주님께서는 3, 4일이면 갈 수 있는 해안 길을 두고 돌아가야만 하는 광야 길로 이스라엘을 인도했는가? 물론 주님은 착한 목자이시다. 이스라엘이 걸었던 광야 40년은 분명 바른 길이었다. 그 길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수백 년간 익숙했던 이집트의 삶을 벗어던지고 하느님 백성으로 정화, 단련될 수 있었다.
 
너희는 지난 사십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키신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중략.....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2-3)
 
하느님은 곡선으로 직선을 그리시는 분이다. 이스라엘이 빙빙 돌아갔다고 생각했던 광야의 길은 그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양성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길이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이 세상의 편안한 삶 중에서 하느님이 어느 삶을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는가? 영원한 생명인가, 언젠가는 스러질 목숨인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항상 바른 길이다. 때로 주님께서 우리를 고생시키시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신다면 그 길은 우리에게 선이 되는, ‘바른 길’이다. 그러니 우리가 원하는 바를 청하기보다는 하느님이 올바르다고 보는 바를 하시도록 청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인간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표현을 넘어서는 것이다. 참 신앙은 가파른 길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시고 돌보고 계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흔히들 신앙의 삶이란 마치 10미터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는 것과 같다고 한다. 온전히 내어 맡기는 의탁의 마음이 없이는 허공에서 손을 놓을 수 없다. 신앙의 신비는 바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의탁 안에 존재한다.
 
 
나 비록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지금까지 시편 저자는 주님과의 관계를 삼인칭으로 고백해 왔으나 이제부터는 일인칭을 사용해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주어는 ‘야훼’였지만 이제부터는 ‘나’이다. 낮시간 동안은 야훼께서 푸른 풀밭과 시원한 물가로 나를 이끌어 쉬게 하셨으니, 야훼의 수고에 대한 응답으로 지금 밤시간 ‘나’는 비록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지만 야훼를 신뢰하겠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주님과 양, 상호간 인식과 응답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게 한다.
 
“어두운 골짜기”에서“어두움, 캄캄함”은 음산함의 이미지이고 다시 음산함은 죽음의 이미지로 발전된다. 실상 죽음과 어두움은 연결되어 있으니 “나 비록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지라도”는 “나 비록 어두운 골짜기를 걸어가며 그 어두움 속에서 죽음을 체험한다 하더라도”가 된다.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양떼는 마실 수도, 먹을 수도 없다. 밤시간은 양들에게는 죽음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그러니 양들은 목자에게 어두운 골짜기 대신 밝고 평탄한 길을 요구하기보다 목자가 자기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힘을 내야 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말은 ‘비록’이다. ‘비록’이라는 신앙고백이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비록’은 시련 앞에서 그 시련을 적극적으로 대면하려는 우리의 태도를 드러낸다.
 
우리의 인생길에는 반드시 어두운 밤이 있다. 질병 · 경제적 어려움 · 이별 · 상실 · 좌절의 아픔 · 외로움 · 배척당함 등등.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이 어려운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특별히 신앙인들은 절망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움이 짙었던 날에 거룩할 聖자를 붙인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였던 금요일을 성금요일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부활 때문이다. 부활이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의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개인적인 성금요일의 어두움으로 여기며 희망의 부활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어두운 골짜기’와 관련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언급한 ‘영혼의 어둔 밤’을 잠시 논할 필요가 있다. 영혼의 어둔 밤이란 한 마디로 영적 공허감과 무기력의 상태이다. 성서를 읽어도, 미사를 드려도, 기도와 찬미를 하여도 하느님 위로를 느끼지 못하고 구도적 열정도 시들해진 상태이다. 성서에는 신앙인들이 어둔 밤을 겪으면서 울부짖는 탄원의 기도가 많다.
 
야훼여!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 시편 13,1)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느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하느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느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언제나 임 계신 데 이르러
당신의 얼굴을 뵈오리까?
“네 하느님이 어찌 되었느냐?”
비웃는 소리를 날마다 들으며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
이것이 나의 양식입니다.( 시편 42,2-3)
 
영성학자들은 모든 신앙인들의 영적 여정에는 반드시 어둔 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어둔 밤이 영적 여정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주님께서는 처음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많은 위로를 베풀어 주신다.
 
루이스(C. S. Lewis)에 따르면 주님은 새로이 신자가 된 사람들을 각별한 은혜로써 돌보아 준다 하였다. 부모가 온 정성을 다해 아기를 돌보는 이치와 같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하느님은 그에게 메마르고 고독한 시간을 허락하시어 그들의 신앙을 정화하고 단련시킨다. 이 정화와 단련의 시기가 바로 ‘영혼의 어둔 밤’인 것이다.
 
어둔 밤을 겪는 영혼은 자신과 타인과 하느님에 대한 참된 이해와 자유를 얻기까지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신적인 모습을 갖추기까지 정화되고 단련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 안에서 당신 얼굴이 맑게 비쳐질 때까지 우리를 단련시킨다. 우리 영혼에 붙어 있는 불순물들을 고통을 통하여 정화, 제거시키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은처럼 불속에서 녹여내고, 고생의 도가니 속에서 너희를 단련시켰다.”(이사 48,10) 그리고 신앙인들은 다음같이 말한다.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욥 23,10)
 
어둔 밤은 신앙의 위기를 초래할 만큼 하느님 부재不在를 체험하는 시간이기에 무조건 인내할 필요가 있다. 위로가 없어도 계속 기도하고, 성서를 읽고, 미사에 참례하여야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 자기 혼자만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하루에도 수십 번 들겠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착한 목자가 되시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여명이 트기까지 깨어 기다리는 것이 신앙이다.
 
어둔 밤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굳이 그것을 물리치려 하지 말라. 그들은 안다. 별을 보려면 어두움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이사야 예언자는 말한다. “한 가닥 빛도 받지 못하고 암흑 속을 헤메는 자가 있거든 야훼의 이름에 희망을 걸 일이다. 자기 하느님을 의지할 일이다.”(이사 50,10)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신앙이란 신비스런 체험이나 환시,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은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하느님은 참으로 존재하시는 선하신 분이고, 그 하느님이 나를 사랑으로 창조하셨으며, 나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특히 어두운 시간에 나를 안아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영성 중에서 가장 보배로운 영성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신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태 1,23) 임마누엘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그러니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시련의 시기에 가장 큰 보호자를 갖게 되는 것이다.
 
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가 얼마나 강한 인간인가?”가 아니라 “우리의 하느님이 얼마나 강하신 분인가?”이다.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생의 굽이굽이에서 우리를 돌보고 계심을 믿는다면 한결 안심하게 될 것이다.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지팡이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이다. 목자에게 지팡이는 팔의 연장으로, 위기상황에서 목자의 힘을 보강시켜 주는 무기가 된다. 또한 지팡이는 양을 길들이고 교육시키는 훈련도구이다. 어느 양이 제대로 따라오지 않으면 막대기로 양의 허리를 가볍게 두들겨 주면서 따라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처럼 목자와 양이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면 지팡이는 앞의 일반적 기능 이외에 다른 기능도 발휘한다. 어두운 밤, 더구나 달도 뜨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목자가 양들을 몰고 가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 목자는 양들을 앞장서 가면서 탁탁 지팡이 소리를 내면 양들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안심하고 어두운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지팡이는 목자의 현존을 가리킨다. 우리 삶에 짙은 어두움이 몰려오고 목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을 때, 즉 하느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라도 지팡이 소리로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절망 가운데서도 우리를 돌보고 계심을 알려주기 위하여, 또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기 위하여 지팡이 소리를 내신다.
 
어둠이 짙으면 우리는 잘 볼 수 없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느낌이나, 보이는 것에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하여야 한다. 비록 주님을 볼 수 없어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만 굳게 믿으면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인생의 어두운 밤에서 우리가 의존해야 할 유일한 지팡이는 하느님의 손에 있는 지팡이이다. 그러나 사람이 고통의 순간에 하느님의 지팡이가 아닌 다른 지팡이에 의존해서 일어서려 애쓰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정말 괴로운 일이 있으면 성체 앞에 나아가서 여러 시간 머물러 있는다. 성체 앞에 나아갈 때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 아무리 마음이 괴로워도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즉 나의 두 무릎이 가죽끈으로 묶여 있어서 정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풀리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결심에 충실하면서 몇 시간 요지부동하다 보면 감실 안에 계신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안정을 되찾고 나아갈 길을 찾게 된다.
 
인간의 지팡이가 아닌 하느님 지팡이에만 의지하면서 어두운 골짜기를 거친 사람은 말로 표현키 어려운 주님과의 합일을 맛볼 것이요, 고통을 통해서 내적인 인간, 성숙한 인간, 자비로운 인간이 되어갈 것이다.
 
어두운 골짜기를 거쳐온 덕분에 자신이 땅의 인간임을 잊지 않고 타인을 자비롭게 대할 것이다......신앙이란 철저히 수동적인 것임을 깨달을 것이요, 인간의 의지가 영점(零點, zero point)이 되는 시점에서야 비로소 주님의 생명력이 피어오르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의 의지가 사라져 버리는 바로 그때에 주님의 은혜로써 눈부신 비상飛翔을 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시편 23을 가지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묵상했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두 가지 실제적인 지침과 한 신앙인의 고백을 제시한다.
 
첫째, 시편 23은 매일매일 언제든지 읊을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기도서가 없어도 언제든지 마음을 들어 올려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는 말씀 하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특별히 긴장하거나 흥분 상태에 있을 때, 성령의 인도를 따르기 위해서 즉시 반성해 볼 수 있는 하느님 말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시편 23은 누구나 쉽게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씀이다.
 
우리는 삶이 힘겨울 때 이 시를 애송하면서 용기를 내고 평정을 되찾아야 한다. 브라질에서 성직자로서 일하다 감옥에 갇히게 된 모리스(Fred Morris)는 감옥에 있는 동안 쉬임 없이 이 시편을 외우면서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둘째, 우리는 시편 23을 눈떠서부터 잠들기까지 하루 종일 삶에다 적용할 수 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1절(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를 묵상해 보면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오늘 하루의 삶도 풍성히 해줄 것이란 기대에서 절로 감사함이 든다.
 
한평생 신앙으로 살아온 조지 뮬러는 주님 사랑으로 고아들을 돌보았던 분이시다. 그는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단 한 번도 돈 걱정, 식량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쌀이 떨어질 만하면 주님 앞에 나아가 그 사정을 아뢰면 그 누군가가 쌀을 갖다 주거나 돈을 갖다 주는 체험을 하였다. 그에게 신앙이란 감히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는 영혼의 배짱이었다. 그분의 신앙고백을 들어 보자.
 
우리의 연약함은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크면 클수록 그분은 당신의 힘을 나타내고자 가까이 오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마음을 그분 앞에 쏟아붓는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시간에, 당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2
인간의 길
 
어찌 내 유일한 인생을
 
아침이면 피었다가
한낮이면 사라지는 나팔꽃도
한껏 피었다 지거늘
어찌 내 유일한 이생을
꽃피우지 않으랴!
 
우리 유일한 인생을 활짝 꽃피우며 살아갈 수 있는 길과 영성이 있다면 어떠한 노력을 들여서라도 획득해야 하리라. 20세기 뛰어난 영성가 토머스 머튼 신부는 가장 엄격한 봉쇄 수도회의 트라피스트 회원으로 평생을 살다 가신 분이다.
 
절대적 침묵과 고독 안에서 구도생활을 한 머튼 신부가 가르치는 영성은 놀랍기 그지없다. 그에 의하면 영성은 세상과 격리된 봉쇄 수도원이나 고요한 피정 집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시정市井 한복판,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을 찾고, 이 자리에서 고통과 기쁨을 겪으며 살아가면서 영성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찾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 참 자신(true self)을 만나고, 세상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세상 일들, 곧 우정을 맺고 정의롭게 살고 비신자 사이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머튼 신부에게 참 자신과의 만남은 곧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우리가 참된 자아를 만나게 될 때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물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을 찾고, 자기 자신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곧 ‘지금 이 순간의 성스러움’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름하여 日常道를 살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이 일상도의 하느님이란 점은 그분의 이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야훼라는 이름은 ‘나는 있는 자로서이다’. ‘나는 있는 자로서이다.’이신 하느님은 어제와 내일은 모르시는 분이다. 오늘만을 아시고, 지금 이 순간만을 아시는 분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의 길을 좀더 깊이 알기 위해서 시편 1편을 묵상 해보자.
 
복되어라, 사람이여.
악인의 조언을 걷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머물지 아니하고
교만한 이들의 모임에 앉지 않는
사람이여!
야훼의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 같아서
잎사귀 시들지 아니하고
철 따라 열매를 맺으리.
그가 무엇을 하든 잘 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다리를
세우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하느님이 의인의 길은 보살피나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른다.
 
시편 1편을 열고 닫는 단어는 ‘길’이다. “죄인의 길에 머물지 않으며”가 처음에 나오고, “하느님이 의인의 길은 보살피나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른다.”로 끝을 맺는다. 각 종교는 불교이든 유교이든 그리스도교이든, 그 종교를 믿는 신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분명히 제시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길을 걷도록 초대받는가? ‘인간의 길’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걸어가야 할 길이 인간의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시편 1편을 한 구절 한 구절 묵상하면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복되어라, 사람이여
 
‘복된 인간!’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는 바다. 복된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일까? 시편 1편이 얘기하는 복된 사람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냥 사람이다. 그냥 사람이지 “의인이여!”나 “성인이여”가 아니다.
 
사람이 복된 것은 단순히 사람이기에 복된 것이다. 그에게 무엇이 있고 무엇을 뛰어나게 잘하기 때문에 복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는 그렇지 않다. 세상에서는 가난한 이들,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이들, 못생긴 이들, 장애인들은 복된 인간도 못 될 뿐 아니라 인간 대접도 못 받는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복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자기 존중감이 낮아서 자학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에 집착하는 이들은 이 진리를 내면화시켜야 한다. 자기 존중감이 낮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귀하고 복되다는 것은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느님 작품이다.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모든 사람이 복되다는 태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로 복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관이요, ‘신학적 인간학’의 핵심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당신께 오는 모든 이를 받아들였다. 간음하다 붙들려온 여인(요한 8,11),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구걸하던 장님, (마르 10,46-52) 38년간 중풍에 걸려 누워있던 실로암 못가의 병자, 나병 환자.....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단순히 병만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 때문에 일어난 단절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분의 부드러운 손길로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회복하고, 하느님 아버지와 온전한 일치를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복되다는 진리는 인간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는 인간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악인의 길이 따로 있고 의인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지닌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뿐이다.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다.
 
그러니 “복되어라! 사람이여”는 생명이 충만한 인간을 정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길과 인간의 길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기 인간으로서 상식적인 삶조차 살지 못하면서 주님 사랑 운운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 제자직의 길은 물론이고 인간의 길도 제대로 걷지 않는 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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