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월 영적 도서 : 「과학문명 시대의 기도」
지은이 : 전헌호 신부
전헌호(실베스텔) 신부는 서울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했고, 오스트리아의 Wien대학교에 유학하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5년 7월 5일에 서품을 받았다. 대구의 하양성당, 진량성당, 성 바울로 성당 주임신부로 근무했고, 가톨릭 신학회 회장으로서 한국 가톨릭 신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신학대학원 원장, 가톨릭 사상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인간과 영성연구소 소장으로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교의와 교의 신학」, 「넉넉함 가운데서의 삶」, 「코모호숫가에서 보낸 편지」, 「불완전한 인간과 힘」, 「다시 찾은 기쁨」, 「아래로부터의 영성」, 「다시 찾은 마음의 평안」, 「참 소중한 나」, 「사랑의 집」, 「교회 영성을 빛낸 수도회 창설자」, 「행복한 선물」, 「영작 삶의 샘」 외 다수가 있고 저서로는 「인간에의 연민」, 「자연환경, 인간 환경」, 「거룩한 갈망」, 「태양을 먹고 사는 아이들」, 「상대성 이론과 예수의 부활」, 「식물이 여행을 포기한 까닭은?」, 「내가 우주보다 더 위대하다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들」, 「인간, 그 전모」,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 「가능성과 한계」 외 다수가 있다.
나눔의 글
‘제6회 ‘생명의 신비상’, 제16회 ‘가톨릭 학술상’ 수상자인 전헌호 신부님은 자연과학, 인문학, 신학 등을 통합하여 ‘환경’과 ‘인간’ 그리고 ‘영성’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 활동을 「가능성과 한계」, 「인간, 그 전모」 등의 저술을 통해 발표하며 그 연구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신간 「과학 문명시대의 기도」는 그간 대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신학대학원장, 가톨릭 사상연구소장을 역임하고, 인간과 영성 연구소장으로서 연구해온 작업들을 토대로 쌓인 지식과 경험을 동원하여 ‘자연과학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드려야 할 올바른 기도’에 대해 서술하고 있으며, 이 저서는 격월간 「사목 정보」에 연재한 글 모음집이라고 합니다.
실베스텔 신부님은 ‘기복신앙의 수준으로 드리는 기도로는 실망과 허탈 나아가 신앙을 잃어버리는 상태에 빠져들기 십상이며, 날마다 엄청난 정보와 최첨단 과학 문명을 누리는 우리는 기도에서도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는 방식을 통해 좀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고 일치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21세기 과학 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숙 된 신앙인이라면 과연 어떤 기도를 바쳐야 할까? 집요한 연구와 깊은 사유를 통해 얻어진 결과물인 전헌호 신부님의 「과학 문명시대의 기도」는 그 답의 실마리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과학문명 시대와 기도
20세기에 꽃을 피우기 시작한 과학 문명은 21세기에 들어서도 더욱더 화려한 꽃을 피우며 날로 강세를 띠고 있다. 오귀스트 콩트는 과학시대가 꽃을 피우면 그보다 못한 시대인 종교시대가 극복되고 마침내 이 땅이 인류가 살아가기에 가장 바람직한 보금자리가 펼쳐질 것이라고 예언을 하기도 했다. 그의 예언 중 일부가 맞아들어, 인류는 과학 문명의 혜택에 힘입어 과거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땅이어서 이웃 나라에 가는 일도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던 지구를 하나의 마을과 같은 곳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예언 중 상당한 부분은 빗나가서 이러한 과학의 시대에도 종교의 세계가 극복되기는커녕 여전히 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가 그가 생각했던 미개하고 연약한 인간이 철없이 기대는 미신에만 그치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강한 신호이기도 하다. 현재 지구촌에서 진행되는 종교적 추이推移는 앞으로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종교적 세계 역시 강세를 지속하리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과학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를 살아가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한 존재이기에, 이 두 세계는 결코 별개의 세계가 될 수 없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극복하여 소멸시킬 수도 없는 것이 명백히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과학 문명은 인류의 일반적인 삶에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삶에도 깊이 파고들어 종교문화를 바꾸어나가고 있다. 종교적 건축, 조명, 선교, 전례, 종교 서적 출간 등 어디에서나 막강한 힘으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과학의 세계는 종교적 세계의 외부적 요소들에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 요소들, 영성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의 일반문화, 종교문화는 지극히 다양하다. 이러한 것은 지구촌에 존재하는 각 종족과 나라, 개인이 물려받은 다양한 전통과 삶의 표현이기도 하다. 각자의 상태에 따라 종교에 대한 생각도 종교생활도 다양하고 기도에 대한 생각도 다양한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기도는 인간의 종교 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서 외부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행위다.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외교인이나 초심자가 기도에 대해 물어오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막연하고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것도 우리를 당혹하게 하지만 더욱 당혹스러운 일은 하느님께서는 철저하게 말씀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라고 큰 소리로 외치시는 데도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셨다. 그렇다고 하여 하느님께서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말씀하신다면 우리를 더욱더 당혹스럽게 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저자는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자연과학적 법칙들과 기도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고찰해 보고 기도란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자연과학법칙과 기도
인문학자들 중 콩트만이 기도의 무용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칸트는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청원기도를 드리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원의를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느님의 은총을 중재하는 매개체라고 이해하는 것은 미신적 환상이다”라고 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 것은 대부분의 지식인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는 “기도는 혼자 하는 독백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인간이 스스로를 두 존재로 나누어, 자신이 자신의 마음과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신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투사하여 만든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기도도 성숙하고 독립적인 인간이 극복해야 하는 하나의 미성숙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자연의 질서는 하느님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 것을 하느님은 결코 채워줄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19세기에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이래로 무신론적 자연과학자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기도를 비롯한 모든 종교적 행위를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을 믿고 기도를 자주 하는 노인들이 그렇지 않은 노인들에 비해 혈압이 낮고 뇌졸중 발생률도 낮으며 수명도 길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자연과학자들의 수도 적지 않다. 이들에 의하면 기도 생활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람의 감정 기능을 개선하고 몸에 해로운 담배, 술, 불법약물을 멀리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 하버드대학교의 신경학자인 로버트 벤슨( Robert Benson)과 허버트 월라스( Herbert Wallace)는 많은 연구를 통해 규칙적인 기도와 명상은 생각을 평온하게 하여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뇌파가 알파파로 가라앉아 맥박과 혈압을 떨어지게 하고 혈액 속의 스트레스 호르몬의 양을 줄여서 면역체계를 강화시키는 사실을 확인했다.
듀크 대학교 해럴드 코에닉(Harold G. Koenig)교수는 “기도와 신앙에 더 많이 의존하는 사람일수록 우울 수준이 낮았고 행복 수준은 높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므로 의사들은 환자들의 믿음과 기도 생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기도 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들의 기도 생활 안에도 진리와 오류, 올바른 방법과 개선하는 것이 좋을 틀린 방법들이 공존하고 있어서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는 신앙인은 기도의 정체에 대해 바르게 알고 싶은 강한 요구를 지니고 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엄밀한 법칙들의 예외 없는 적용에 따라 생명을 받고 자라서 번식하고 사멸해가기를 되풀이한다. 사람도 근본적으로 이 법칙에 기반을 두고 이 땅 위에서 생존한다. 이 우주와 지구가 지닌 천문 · 물리학의 법칙, 화학법칙, 생물학 법칙을 근간으로 하여 태어나고 성장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은 이 법칙에 지배를 받는 육체만 지닌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만 고유한 감성, 이성, 영성으로 이 법칙을 넘어서기도 하는 존재이다. 물론 그러한 경우에도 여전히 이 법칙의 지배 아래에 있지만 다른 생명체가 이 법칙의 지배만을 받는 것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
사람은 이성으로 이 법칙을 읽어내어 지켜내고 거리를 유지할 줄 알며 나아가 응용할 줄도 안다. 사람은 믿음, 희망, 사랑과 같은 영성을 지니고 있어서 이 영성의 힘으로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작업을 할 수 있다.
사람은 믿음을 통하여 자연이 결코 인식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이 지닌 선한 마음과 의지를 알 수 있으며 하느님의 존재를 아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희망을 통해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고 이웃과의 만남과 대화를 기대할 수 있으며 하느님과의 만남을 기대할 수 있다.
사랑을 통해서는 자신을 초월하여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사랑을 위해 자기희생을 할 수도 있으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다. 나아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에 힘입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이 세상을 위한 일을 해나갈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기도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거나 바꾸기 까지 하면서 어떤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존중하고 지키면서도 믿음, 희망, 사랑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천문 · 물리학 법칙과 기도
창세기 저자는 근동지방에 떠돌던 설화와 시적 언어를 동원하여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참으로 아름답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서술했다. 인류는 오랫동안 창세기가 전하는 천지창조 이야기만으로도 해가 바뀌고 계절이 변하며 날이 바뀌는 시간의 흐름을 계산하는 일과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큰 갈등 없이 잘 유지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문명이 발전하여 좀 더 정교한 달력과 정교한 천문 · 물리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어, 상당한 정열로 노력한 결과 창세기 저자가 알지 못했던 많은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거시세계는 그 엄청난 크기로 인류의 인위적인 조작 범위를 까마득히 넘어서 있고, 미시세계는 인류의 지성이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음과 모호함으로 인류의 인위적 조작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
우리 인류가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천문 · 물리학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일이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우주 안에 만들어진 또 하나의 피조물이지 결코 창조주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 우주에 공기 분자, 물 분자 하나도 보탤 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