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9. 9월 영적도서 : 어둔 밤
지은이 :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 교회학자, 가르멜 수도원 개혁가, 신비가.1542년 6월 24일 스페인 아빌라 근교 폰티베로스 출생. 예뻬스의 요한.1563년 메디나 델 깜뽀의 가르멜 수도원 입회.1567년 사제 서품. 여름,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와 만나 가르멜 개혁 동참.1568년 수도명을 십자가의 요한으로 바꿈.1572년 육화의(엔카르나씨온) 수녀원의 고해신부로 부임.1577년 10월 2일 밤, 개혁 반대파 수도자들에 의해 똘레도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9개월간 `어둔밤` 체험.1591년 12월 13~14일 사이에 사망.1726년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시성.1993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스페인어권의 모든 시인(詩人)들이 수호성인으로 선포.
옮긴이 : 최민순 신부
전라북도 진안 출신으로 1935년 사제로 수품되었다. 천주교회보사와 대구매일신문 사장으로 일했으며,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교에 유학하여 2년 동안 신비 신학과 고전 문학을 연구하였다. 가톨릭 공용어 위원회 위원,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다가 1975년 지병인 고혈압으로 선종하였다. 저서로는 수필집《생명의 곡》과 시집《님》,《밤》등이 있고, 번역서로는《단테의 신곡》,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 아우구스티노 성인의《고백록》등이 있다. 이 밖에 〈주님의 기도〉·〈대영광송〉 등의 기도문을 번역하였으며, 여러 편의 성가의 노랫말을 짓기도 하였다. 1960년 제2회 한국 펜클럽 번역상을 수상하였고, 1974년 로마 가르멜회 총본부로부터 명예회원 표창장을 받았다.
나눔의 글
신자라면 한번쯤은 읽어야 하는 「어둔 밤」입니다만, 옛 고어체로 번역된 「어둔 밤」은 내용을 이해하기가 결코 만만치는 않습니다. 「어둔 밤」은 ‘제 1 편 감각의 밤을 다룸’ 첫째 노래, ‘제 2 편 영의 밤을 다룸’ 그리고 둘째 노래 제 15장 ~25장 으로 구성 되었습니다. 우리를 깊은 묵상으로, 감성 및 영성의 수동적 밤으로 이끌어 주는「어둔 밤」을 요약해서 올립니다.(둘째 노래부터 이하 생략)
- 독자에게 중에서 -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랑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합일하고자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니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주님을 위하여 온전히 섬기려는 사람은 세속의 정을 온전히 끊어야 합니다....”(비오 12세, 수도회 총장들에게, 1958년 2월 11일)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의 「가르멜의 산길」 제 1권 4장 1에서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려면 모든 것에 대한 욕慾끊기와 맛 없애기의 밤을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피조물에 대한 모든 애집이 하느님 앞에서는 어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니, 이 어둠을 둘러쓴 영혼이 먼저 어둠을 떨어버리지 않으면 티 없이 맑으신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일 수도 빛날 수도 없다. 성 요한께서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5)라고 하신 말씀대로, 빛과 어둠이 서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고전적 공식으로 표명하십니다.
“정화를 우리는 어둔 밤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신 성인은 하느님과의 합일에 있어 인간이 치러야 하는 정화, 즉 밤이란 감성 및 영성의 두 가지라 했고 그 양상 역시 능동 및 수동의 두 가지라 했습니다. 능동의 밤은 곧 “다름 아닌 끊음과 씻음으로서, 세상의 바깥일들, 육에 즐거운 것들, 의지에 맛스러운 일체를 끊고 씻어버림”인데「가르멜의 산길」은 이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이「어둔 밤」은 감성 및 영성의 수동적 밤을 소재로 하는 것입니다. 성인의 표현을 빌린다면 “능동적이란, 영혼이 밤에 들기 위한 일을 제 편에서 할 수 있고, 실제 하는 것”이지만 “수동적이란, 영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다만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시고 영혼은 수동적인 상태에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의 능동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절대 정화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손길로 다스려짐이 감성 및 영성의 수동적 밤이요,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천재가 유례없이 밝혀내는 밤입니다.
어둔 밤
사랑으로(이승에서 가능한)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데에 있어 영혼이 걸어가는 길을 노래하고 이를 풀이한다. 아울러 이 노래에 들어 있는 그러한 내용의 완전성에 도달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특질을 들어 말한다.
머리말
이 책의 첫머리에는 앞으로 풀어나갈 노래가 모두 다 있다. 다음엔 그 풀이 앞에다 실은 노래를 하나씩 따로 설명하고, 그러고 나서 구절을 낱낱이 풀어갈 터인데, 이 역시 풀이 앞에다 두기로 한다. 첫 번 두 노래에서는 영성의 두 가지 정화의 결과가 밝혀질 것인데, 이는 곧 인간의 감각적 부분에 대한 정화 및 영적 부분에 대한 정화다. 나머지 여섯 노래에서는 영적 비축과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이 자아내는 다양스럽고도 현묘한 결과들을 밝혀 나가겠다.
노래
1
어느 어두운 밤에
사랑에 타 할딱이며
좋을씨고 행운이여
알 이 없이 나왔노라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2
변장한 몸, 캄캄한 속을
비밀 층대로 든든하이
좋을씨고 행운이여
캄캄한 속을 꼭꼭 숨어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3
상서로운 야밤중에
날 볼이 없는 은밀한 속에
빛도 없이 길잡이 없이
나도 아무것 못 보았노라
마음에 속타는 불빛밖엔
4
한낮 빛보다 더 탄탄히
그 빛이 날 인도했어라
내 가장 아는 그분께서
날 기다리시는 그곳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쪽으로
5
아, 밤이여 길잡이여
새벽도곤 한결 좋은 아, 밤이여
굄하는 이와 굄받는 이를
님과 한몸 되어버린 괴이는 이를
한데 아우른 아하, 밤이여
6
꽃스런 내 가슴 안
오로지 님 위해 지켜온 그 안에
거기 당신이 잠드셨을 때
나는 당신을 고여드리고
잣나무 부채런 듯 바람을 일고
7
바람은 성 머리에서 불어오고
나는 님의 머리채 흩어드릴 제
고요한 당신의 손으로
자리게 내 목을 안아주시니
일체 나의 감각은 끊어졌어라
8
하릴없이 나를 잊고
님께 얼굴 기대이니
온갖 것 없고 나도 몰라라
백합화 떨기진 속에
내 시름 던져두고.
하느님과 사랑으로 합일하는 길에 있어 영혼이 지니는 방법과 양식을 다루는 노래의 풀이가 시작됨.
이 노래의 풀이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완덕의 상태에 있는 영혼이 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완덕이란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 영혼은 벌써 우리 구세주께서 복음에 말씀하시는 영생으로 통하는 좁은 길의 영적 수련을 거쳐, 답답하고 숨 막히는 곤경을 치른 것이다.
영혼이 하느님과의 높고도 복된 이 합일에 도달하려면 거의 항상 통과해야 하는 이 길은 어찌나 좁은지, 그리고 주께서도 말씀하시듯이(마태 7,14)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이런 길을 거쳐서 저 사랑의 완전성에 도달했음을 아슬아슬한 행복으로 알아, 이를 첫째 노래에서 읊조리고, 앞으로도 그 구절을 풀이해 나가겠지만 이 좁다란 길을 가장 그럴싸하게 ‘어둔 밤’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으뜸가는 행복이 뒤따르는 이 좁은 길을 용하게도 거친 것이 대견스러워서 영혼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제 1편
감각의 밤을 다룸
첫째 노래
어느 어두운 밤에
사랑에 타 할딱이며
좋을씨고 행운이여
알 이 없이 나왔노라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풀이
1. 이 첫째 노래에서 영혼이 이야기 하는 바는, 자기와 일체에서 뛰어나오는 데에 썼던 그 방법과 모양으로서, 그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감미롭고 행복한 사랑의 생활이 살고 싶어서 철저한 제욕으로써 자기와 일체에서 뛰어나옴을 “어느 어두운 밤”이라 일컫는데(다음에도 말하겠거니와) 여기서는 정화의 관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앞서 말한 자기 일체의 부정이 수동적으로 이루어짐이다.
2. 그리고 이 뛰어나옴이란, 앞서 말한 어두운 관상 속에서 그님의 사랑이 탈출을 위하여 마련해주신 힘과 열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여기서 말함이다. 이로써 영혼은 이른바 밤을 거쳐 항상 이 길을 막고 있는 세 가지 원수, 즉 세속과 악마와 육이 방해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성공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된 것을 썩 다행한 복으로 삼는다. 그도 그럴 것이, 정화적 관상의 저 밤이 감성의 집에 있는 모든 정과 욕구 중에 걸림돌이 되는 충동이나 욕념欲念이면 이를 모조리 잠재우고 힘없이 만든 까닭이다.
그러기에 노래는
어느 어두운 밤에,
라고 말한다.
제 1장
첫째 구절을 두고, 초심자들의 불완전을 들어 말하기 시작함
1. 영혼들이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때가 있다. 즉 하느님께서 그들을 (영성의 길에서 묵상을 하는) 초심자들의 위치를 벗어나 (이미 관상에로 접어든) 나아간 이들의 위치에 두기 시작하는 그때이니, 인간이 하느님과 영스러운 합일을 이루는, 즉 완전한 이의 위치에까지 이 길을 통하여 도달하게끔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통과하는 밤이란 어떤 것이며, 무엇 때문에 이 밤에다가 하느님께서 영혼을 두시는지를 보다 더 이해하고 천명하려면 초심자들에게 몇 가지 특징을 드는 것이 좋을 듯하고, 비록 더할 수 없이 간단하게 다루더라도 초심자들에게는 분명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2. 한데 우선 알아야 할 일이 있다. 하나의 영혼이 회심을 해서 하느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뒤이면, 하느님께서는 거의 항상 그 영혼을 영 안에서 키워 가신다는 사실이니, 사랑 깊은 어머니가 가냘픈 어린이를 가슴의 체온으로 덥혀주고, 달콤한 젖과 부드럽고 맛난 음식을 먹이며, 그 팔로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듯이 하느님께서도 그렇듯 귀여워하신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이가 커감에 따라 부드러운 사랑을 감추면서 응석을 받아 주지 않고 다디단 젖통에다는 쓰거운 노희즙을 발라, 아기를 품에서 내려놓고 제 발로 걷게 한다. 어린이의 구실은 그만하고 어른다운 큰 일에 처신을 하라 함이다. 하느님의 은총도 영혼을 재생시켜 하느님 섬김에 새로운 열과 성을 베풀 때면 꼭 그러하다.
제 2장
초심자들이 교만의 습성에서 지니고 있는 몇 가지 영적 불완전을 다룸
1. 초심자들이 영성의 일이나 신심 행위 등에 열렬하고 근면하다고 느끼면, 잘된다 싶은 마음에서 (무릇 거룩한 일들은 절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건만) 제 불완전함 때문에 은근한 교만의 싹이 타오르기가 일쑤다. 그리하여 제가 한 일과 제 자신에 대해서 약간 자만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또 부질없는 마음, 주제넘은 생각조차 이는 바람에 영성의 일을 남들 앞에서 곧잘 이야기하고 더구나 자기가 아는 이상으로 남을 가르치려든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네가 염원하는 신심 양식을 그대로 남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서, 마음속으로 비난하고 심지어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때가 있으니, 마치 바리사이가 하느님을 기리고 세리를 깔보면서 제가 한 일을 자랑한 것과 마찬가지다.(루카 18,11-12)
2. 흔히 악마는 이런 사람들을 부채질해서 되도록 그런저런 일들을 많이 하려는 열성과 욕심을 품게 만드는데, 이는 방자하고 참람한 마음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어찌나 마음이 나쁜 데까지 이르렀는지, 자기네 아닌 딴사람들이 좋게 보이는 꼴을 도무지 보려 하지 않고 기회가 닿기만 하면 말과 행동으로 남을 비방하여 제 눈의 들보는 생각지 않으면서 제 현제 눈에 있는 티끌만 보고, 남의 모기는 걸러내면서 제 낙타는 삼킨다.(마태 7,3:23,24) 자기만 잘난 체함으로써, 하려고 하는 일은 많으나 실제 하는 일은 매우 적다.
3. 많은 사람들이 고해신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남보다 돋보이려고 하는 데서 헤아릴 수 없는 질투와 불안들이 생긴다. 고해신부가 자기를 업신여길까봐 그들은 있는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는 대신 죄에 채색을 해서 되도록 그다지 나쁘지 않게 보이려하니, 이것은 고백보다 차라리 변명을 하러 가는 셈이다. 그런 따윌랑 아예 집어치우고 고해 신부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 자기를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겸손이겠는가?
4.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결점을 과소평가하는가 하면 때로는 결점에 떨어짐을 보자 성인이면 그럴 리가 없었으리라 생각하여 지나치게 슬퍼하고 자신이 역겨워서 못 견디는데, 이것 역시 하나의 불완전이다.
5. 열성의 시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초심자치고 아무런 불완전에도 떨어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같은 시기를 당해서 완덕에 나아가는 이들은 그 진행 방법이 아주 다르고 영의 성질도 많이 틀린다. 다름이 아니라 그 진보와 향상이 겸손에 달렸다 함이니, 그들은 자기의 한 일을 無로 돌릴 뿐 아니라 자기에 대한 만족은 거의 없고 다른 사람은 모두 자기보다 훨씬 나은 줄로 생각하여, 그들처럼 하느님을 섬겼으면 하는 마음에서 거룩한 부러움을 지니기가 일쑤인 것이다.
정과 사랑 같아서는 하느님을 위하여 무엇이든 다 하고 싶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이러한 사랑의 걱정이 그들을 채찍질하고 점령하고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남이 사랑을 하든지 말든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6. 그들이 고요와 겸손을 가지고 크게 바라는 바는, 어느 누가 있어 자기네를 완덕에 나아가도록 가르쳐달라 함이다. 자기가 하는 일과 그 정신을 과소평가하는 이에게 자기 영혼을 털어 보이는 경향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단순하고 순수하고 진실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영혼의 특성이다.
7. 이런 영혼들은 자신이 떨어지는 결점을 보면 겸손을 가지고 견디어 낸다. 그리고 하느님께 희망을 걸면서 온화한 마음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견딘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완덕의 길을 걷는 사람은 매우 적으리라 믿는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영혼들을 어두운 밤에다 두셔서 이 모든 불완전을 깨끗이 씻기시고 앞으로 이끌려 하시는 것이다.
제3장
어떤 초심자들이 둘째 죄종인 영적 탐욕에서 흔히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불완전을 들어 말함
1. 초심자들 중 많은 이들은 때로 영적 탐욕이 많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시는 얼이 욕심에 차지 않는 까닭인데, 영성에서 찾던 위로가 없을 때, 그들은 슬퍼서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들은 대부분이 영성적 의견이나 계명을 배우느라, 그러한 책들을 많이 사들이고 읽느라 여념이 없고, 이에 시간을 허비하는 통에 마땅히 해야 할 제욕制慾이나 영의 청빈과 같은 완전함은 닦을 겨를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마치 노리개를 찬 어린이처럼 아뉴스 데이(Agnus Dei)와 성해와 유물 등으로 몸을 장식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여기서 나쁘다는 것은 마음의 집착이다. 성물의 형이나 양 및 진귀함에 애착하는 그 마음씨이니, 영의 청빈에 아주 어긋나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심이란 마음 속 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영스러운 것을 상징하는 무엇의 본질과 진리에만 있어야 한다. 이 밖의 모든 것은 집착이요 허욕일 뿐이니 완덕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욕념을 다 없애야 한다.
2. 나는 십자가 하나를 십 년 이상 모시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 또 한 사람은 물고기 등뼈로 만든 로사리오로 기도를 했었는데 이런 이들의 정성이 하느님 앞에 가치가 덜 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신심이 물건의 만듦새나 그 값에 있지 않았음이 분명한 까닭이다. 그러기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한껏 너그럽게 베풀고 영성적인 것이든 현세적인 것이든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라면 없이 사는 것을 멋으로 아는 것이다. 이는 내적인 완전의 진실에만 눈을 주기 때문에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고 일체에 있어 자기 자신에게는 기쁨을 주지 않는 것이다.
3. 영혼은 제 나름대로, 정화의 완성을 위한 노력을 다해야만 하느님의 치료를 감히 바랄 수 있을 것이니, 영혼은 제힘으로 못한 일체를 이로써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제아무리 힘을 써보았자 하느님께서 손을 빌리지 않으시고 저 어두운 불 속에서 영혼을 정화시키시지 않는 한, 영혼은 능동적으로 - 제 힘만으로는 - 완전한 사랑에 의한 하느님과의 합일을 조금도 마련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4장
초심자들이 셋째 죄종인 사음을 두고 흔히 가지는 다른 불완전들
1. 여러 가지 불완전 말하자면 영성적 사음이라 부를 수 있는 불완전이 있다. 영적인 사음이 사실상 있대서가 아니라, 영성적인 것에서 좇아오기 때문인데 흔히 보면 심령 수행을 하는 도중에도 손 하나 쓰지 않는 채 사음의 충동과 행위가 감성 면에 일어나고 영혼이 기도에 잠겨있거나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고 있는 때에도 그런 수가 있다. 이 일들은 세 가지 원인 중 그 어느 하나에서 오는 것이다.
2. 첫째는 대개 본성이 영성의 일에서 느끼는 맛으로부터 온다. 영과 감정이 함께 기꺼운 일에 있어 사람의 각 부분은 제 나름의 특성과 분수에 따라 기꺼워한다. 이때 윗부분인 영은 하느님의 맛과 기쁨으로 즐거워하고, 아랫부분인 감성은 감각의 맛과 낙으로 움직여진다. 감성은 다른 것을 가지지도 가질 수도 없는 만큼 제게 가장 가까운 것을 가지게 되는 데 이것이 곧 부정한 감각이다.
3. 감성의 반란을 때로 일으키는 원인은 악마인데 이놈은 영혼이 기도 중에 있거나, 혹은 기도를 하려고 할 때 불안과 동요를 부채질하여 그 본성 안에 부정한 충동을 일게 한다. 이들은 하필이면 기도하는 때에 다른 때보다 잡스러운 생각이 더욱 일어나는 줄로 아는데, 사실 그렇기도 한 것이 악마는 다른 때보다 이런 기도 시간에 훨씬 더 많은 동요와 교란을 불어 넣어서 영적 작업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경우에는 이 결과로 얼마나 슬픈 생활을 하는지 ...
4. 부정한 충동이 생기고 불쑥 일어나는 셋째 원인은 사람들이 이런 충동과 더러운 환상에 대해서 일찍부터 품어오는 공포심이기가 일쑤다.
5. 그 외에 어떤 영혼들은 성격이 어찌나 연약한지, 영과 기도의 맛을 보기가 무섭게 마치 이런 악습의 맛에 자신이 삼켜진 듯이 감성에 취하고 기꺼워진다. 가령 분노가 치민다든지 소란을 일으킨다든지 심한 고통을 겪을 대에 그러한 것이다.
6. 때로는 영성인들이 영성의 일을 하거나 말하는 중에 앞에 있는 사람들이 저열한 취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데서 문득 생각이 일어 생기와 신바람이 나는 수가 있다. 이 역시 우리가 이 자리에서 다루고 있는 영적 사음으로 좇아오는 것인데 이것은 흔히 의지의 동의와 함께 온다.
7. 어떤 사람들은 영성의 길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정을 붙이는데 대개는 영에서가 아니라 사음에서 오는 것이다. 사실이 그러함을 알아낼 수가 있으니, 정붙인 사람을 생각할수록 하느님 생각과 사랑이 더하기는커녕 양심의 가책만 커질 때가 그러하다.
8. 영혼이 어둔 밤으로 들어가면, 그때 이 모든 사랑이 바로 잡힌다. 밤이 하느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정화하고 강화하는 동시에 이를 아주 끊어 없애기 때문인데 처음에는 두 사랑을 다 안보이게 한다.
제5장
분노의 허물을 두고 초심자들이
떨어지는 불완전에 대하여
1. 초심자들의 대부분이 영성에 맛을 들이려는 욕심에서 분노의 악습에 딸린 불완전을 가지기가 일쑤다. 영성의 일에 맛과 취미가 가시면 자연적으로 기분이 언짢아 져서 그 언짢은 마음을 가지고 사물을 대하고 하찮은 일에도 자꾸 성을 내니 이를 참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이런 일은 기도 할 때 어느 유쾌로운 감각적 잠심潛心을 맛본 뒤에 잘 일어난다.
2. 이런 영성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영적 분노의 다른 종류에 빠지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어 남의 잘못을 보면 성내지 않고 못 배기는 성미다. 그런지라 성화같이 남을 꾸짖으며 성깔을 부리는가 하면 더러는 자기가 성인인 것처럼 그런 짓을 할 때가 있으니 이는 다 영적 온유를 거스르는 것이다.
3.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불완전을 보았을 때 겸손은커녕 자기 자신이 못 견디게 미워서 성을 내는데, 그 참지 못하는 정도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단 하루 만에 성인이 다 되고 싶어 할 정도다.
제6장
영적 탐식에 대한 불완전들을 다룸
1. 넷째 악습인 영적 탐식에 대해서 할 말이 많으니, 초심자들이 아무리 잘 나아간다 하더라도 영적 수행이 시작될 때 맛을 통하여 생기는 이 탐식의 불완전에 떨어지지 않는 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닌게아니라 초심자 대부분은 영성 수행에서 발견하는 맛과 재미에 빠져서, 하느님이 영성의 전과정에서 보시고 기뻐하시는 영의 순결과 분별보다도 차라리 영의 맛을 얻으려 한다. 그들은 거기서 얻어지는 맛에 끌려서 어떤 삶은 죽도록 고행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약한 몸이 겹도록 아무 요량 없이 재齋를 지키다가 몸을 망치기도 한다.
2. 이들은 가장 불완전하고 철없는 백성.....복종과 순명을 육체적 고행 다음에 제쳐 놓으니 순명 없는 고행은 짐승들의 고행일 따름.
모든 극단은 덕이 아닌 악인데 이렇듯 제 뜻대로만 움직이는 사람들은 덕보다도 악덕에 자라는 것, 이런 식으로 기껏 얻는대야 영적 탐식과 교만이 있을 뿐이니 순명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생각으로는 자신이 기쁘고 만족한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고 당신께 만족을 드리는 일로 안다.
3. 한편 어떤 사람들은 냠냠하는 나머지 고해신부를 마구 졸라서 잦은 영성체를 예사로이 강요한다. 그들의 겨냥이 영성체인 만큼 고해성사야 어찌 되었든 깨끗한 마음으로 오롯이 영하기보다는 그저 영하려는 욕심뿐이다.
4. 그들은 기도드릴 때에도 마찬가지다. 기도 중에 할 일이란 오직 맛과 감각적인 신심을 발견하면 그만인 줄로 알아서 억지로라도 그 감각적인 것을 짜내느라 애쓰기 때문에 머리와 다른 능력들이 피로하고 지칠 따름이다. 사실 참다운 신심이란 자기를 믿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생각 하나로 인내와 겸손으로 무미한 속을 끝까지 버티는 데에 있는 법이다.
5. 맛에 끌리는 사람들이 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중대한 결점은, 십자가의 험한 길을 가는 데에 자못 더디고 게으르다는 것이다. 맛에만 내맡겨진 사람이니 자기 부정이라면 으레 오만상이 찌푸려지기 때문이다.
6. 영적 절제란 전연 색다른 극기와 매사에 있어서의 외경 및 순종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사물의 가치와 완성은 많은 일이나 작업의 맛에 있지 않고, 무릇 사람이 일을 하면서 자기를 부정할 줄 아는 데에 있다.
제7장
영적 질투와 나태에 관한 결함들에 대하여
1. 다른 두 가지 악습, 즉 영적 질투와 나태에 대해서도 초심자들이 적지 않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 남의 덕을 마음으로 섭섭해 하고 때로는 그 덕이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며 남이 기립 받음을 할 수 있는 대로 없애려 드니, 매사에 자기만 높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라 남이 그런 찬사를 자기에게 보내지 않으면 쌍심지가 돋는다.
2. 초심자들은 또한 영적 나태에 떨어지기 일쑤이니 그들은 보다 더 영성적인 일에는 게으름을 부리고 가까이 하지 않는다. 감각적인 구미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나태로 (완덕이란 하느님을 위하여 제 뜻, 제 재미를 없애는 길이건만) 완덕의 길을 제쳐놓고 제 뜻, 제 재미를 따라서 하느님 뜻보다도 제 뜻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구절을 보자
어느 어두운 밤에,
제8장
첫째 노래의 첫째 구절을 밝히고 이 어두운 밤을 풀이하기 시작함
1. 이 밤을 우리는 관상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영성인에게 두 가지 어두움, 혹은 정화를 마련한다. 즉 인간의 두 가지 부분을 따라 감성적인 것과 영성적인 그것이다. 그 하나의 밤 혹은 정화가 감성적인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영혼은 감성을 영에 알맞게 함으로써 감성면에서 정화를 하고 또 하나 다른 것은 영성의 밤, 혹은 정화로서 이로 말미암아 영혼은 영성면에서 스스로 정화 및 무일물無一物이 되어 하느님과 사랑의 합일을 꾀하는 것이다.
2. 첫째 정화 혹은 쓰겁고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둘째 밤은 그 무시무시하고 놀라움이야말로 어디다 비길 수가 없다. 한데 차례대로라면 감성의 밤이 먼저이고 앞서 닥치므로 우선 이에 대한 몇 가지를 간단히 처리하겠다.
3. 초심자들이 하느님의 길에 나아가는 법이 유치하고 아집과 자애로 뒤범벅이 되어 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훨씬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어 하느님을 유치하게 사랑하는 법을 지양하고 보다 높은 법으로 이끄신다. 그들은 한때 수덕의 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라 기도와 묵상을 꾸준히 하면ㄴ서 거기서 맛본 기쁨과 재미로 세상 것의 맛을 잃고, 하느님 안에서 영의 힘을 길렀으니 그 힘으로 피조물에 대한 욕을 제법 눌렀었다. 그런 만치 구태여 좋은 시절을 다시 만나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짐이나 메마름 쯤 견딜 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영성 수행 중에 맛과 기쁨을 한창 누릴 때, 그리고 하느님 은혜의 태양이 눈부시게 비친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빛을 몽땅 어둠으로 바꾸시고 전에는 마음대로 하느님 안에서 맛볼 수 있었던 영의 감로수, 그 생수 구멍을 밀폐해버리신다.
하느님께서 그들이 제법 자라남을 보시고 어린 티를 벗어나 굳세어지도록 그들을 젖가슴에서 떼치시고 팔에서 풀어놓으시면 제 발로 걸을 줄을 익힌 그들은,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가므로 자못 신기로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4. 고요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면 다른 사람들보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이런 일이 있게 마련인데 그만치 퇴보의 기회가 적고 그만치 세염世染의 욕을 끊음에 재빠른 까닭이다.
제9장
영성인이 이 밤과 감성 정화의 길로 나아감을 알 수 있는 표징들
1. 저 메마름이 흔히는 감각욕感覺慾의 정화로부터 오지 않고 죄와 결점, 혹은 나약과 미온, 아니면 어떤 언짢음이나 몸의 불편함에서 올 수 있으므로 여기 몇 가지 표징을 적어서 메마름이 저 정화에서 오는가, 아니면 위에서 말한 결함들에게서 오는가를 가려내야 하겠는데 그 중요한 것을 댄다면 세 가지가 있다.
2. 첫째는 하느님의 일들에서 맛과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피조물에서도 아무런 낙을 못 얻는 그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어둔 밤에 두시어서 감성욕을 씻어 닦게 하시므로 어느 것에든 빠지거나 맛들이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 메마름과 맛없음이 새로 지은 죄나 결점에서 오지 않음이다.
3. 옳은 정화를 알 수 있는 둘째 표징은, 하느님의 일에서 맛을 못 느끼더라도 자기가 하느님을 섬기지 않아서 퇴보함이라 믿고 행여 하느님을 잊을세라 애타게 찾음이다. 모든 맛을 여의고 관심은 오직 하느님 하나에 있는 까닭이다.
4. 이 메마름의 원인은 하느님께서 감각의 힘과 낙을 영 쪽으로 바꾸시기 때문인데 본성의 힘과 감각은 영의 그릇이 못 되므로 아쉽고 메마르고 텅 비게 된다. 말하자면 감각적인 부분은 순수한 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영이 낙을 누릴 제면 육은 재미를 잃고 일할 힘이 풀리는 것이다.
5. 하느님께로부터 쓸쓸한 사막으로 인도받은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비슷하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로서 음식을 내리셨을 때 - 성경 말씀대로 - 각자 의 당기는 입맛에 따라서 별의별 맛이 다 갖추어졌었다. 그럼에도 전에 이집트에서 먹던 양파와 고기 맛에 워낙 젖어버린 입천장이라 고기를 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민수 11,1) 우리의 탐욕은 이토록 낮은데 까지 이르는 것이나, 그러기에 이것은 우리의 비참을 욕구하면서 하늘의 바꿀 수 없는 보배를 싫어하게 만드는 것이다.
6. 그러나 이러한 메마름이 감성욕의 정화 과정에서 오는 경우 그 시초에 영이 비록 맛을 느끼지 못할 지라도, 내적 자양이 주는 그 본체에 있어 작용할 수 있는 힘과 세참을 느끼게 되는데 이 자양이 바로 감성에게는 어둠과 메마른 관상의 시초다. 이 관상은 이를 하는 사람도 모르게 은밀한 것으로서 보통으로는 감성을 비우고 메마르게 하는 동시에,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히 혼자 있으려 하고 그 길에 있기를 좋아하게 만든다. 바로 고요와 무위 속에서 내심의 진미를 은근히 맛볼 것이다.
7. 만일 영혼이 제 능력을 가지고 일할 생각을 가지면 하느님께서 그 영혼 안에서 하시려는 그 일에 도움이 되기보다 차라리 방해가 되는 것이니, 그 전에는 이와 반대였던 것이다.
8. 감성의 정화를 알리는 셋째 표징은 아무리 자기편에서 할 일을 다 해도 그전처럼 상상의 감각으로 묵상이나 추리를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기서부터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주시기 시작하시지만 그전처럼 감성을 통하지 않고 순수 영을 통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9. 이 셋째 징표에서 주의할 점은 위에서 본 기능 장애와 이에 따른 불쾌감 등이 어느 언짢은 기분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니, 기분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 기분이 사라질 때 - 기분이란 결코 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 별로 힘 안 들인 채 즉시 그전의 일을 계속할 수 있고 능력들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하나 욕의 정화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으니, 한번 이 정화로 들어가게 되면 항상 정신 능력을 가지고 추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이 밤에 들게 하심은 오직 그들을 단련시키고 겸손을 가르치시려 하심이고 영의 일에다 지나친 욕심을 부릴세라 그 욕慾을 바로 잡아주시려 하심이지 그렇대서 이 관상인 영의 길로 그들을 인도하시고자 하심은 아니다.
제10장
이 어두운 밤에 스스로 가져야 그들의 태도
1. 감성의 밤 - 하느님께서 영혼을 감성의 생활에서 영성의 생활, 즉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 주셔서 영혼은 제 능력으로 하느님 일을 추리할 수조차 없게 되는 - 그러한 밤의 메마름에서는 영성인들이 큰 고생을 하게 마련인데 메마름만이 아니라 길을 잃은 듯한 걱정 때문에 그들은 좋은 일에 맛이나 멋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셨구나, 영혼 복이 다 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제 능력을 가지고 활동하기보다 차라리 고요한 무위 속에 있기를 좋아하므로 그런 부질없는 짓은 꺼리고 싫어하는 것이다.
2. 그러한 경우 깨우쳐주는 삶이 없으면 그들은 뒷걸음질을 쳐서 길을 버리거나 혹은 고삐를 늦추거나 함으로써 적어도 전진하는 데에 지장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지나친 부지런함 때문이다.
3.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걱정할 것 없이 끝까지 인내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좋고, 순박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일이니, 당신은 그들을 그저 맑고 밝은 사랑의 빛으로 인도하시기까지 갈 길에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고,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 자격을 얻으면 영의 어둔 밤을 통하여 저 빛을 주실 것이다.
4. 감성의 이 밤에서 영성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절대로 묵상이나 추리를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인데, 때가 그럴 때가 아니라 영혼을 정적 속에다 버려두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맛보고 느끼려는 의지도 욕망도 가지지 말아야한다.
5. 기도할 때 생각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해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차라리 딴 일을 하는 게 낫다고 여겨질지 몰라도, 그저 꾹 참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오직 영의 자유해방이 있을 따름인 까닭이다. 제 힘을 가지고 정신 능력으로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하느님께서 영혼의 무위와 화평을 통하여 그 안에 박아주시고 굳혀주시는 보화를 막거나 잃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6. 그러므로 이러한 영혼은 제 모든 능력의 활동이 정지되는 것을 고려하지 말고, 도리어 빨리 꺼져버리는 것을 달갑게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하느님께서 그에게 내리시는 주부적 관상[注賦的觀想]을 고요한 속에서 가장 풍요롭게 받게 되고, 그러함으로써 이 어둡고 은밀한 관상이 이바지하는 사랑이 영 안에서 불붙게 되는 것이니, 관상이란 다른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겨운 내리심인 까닭이다. 다음 구절에서 이를 볼 수 있다
사랑에 타 할딱이며,
제11장
노래의 셋째 구절을 풀이함
1. 이 사랑의 타오름은 본성이 깨끗하지 않아서 높은 경지에 들지 못한 까닭에, 혹은 깨달음이 모자라서 영혼이 불꽃의 자리에를 마련하지 못한 까닭에, 처음에는 못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스스로 아는 바는 이따금씩 그 불꽃과 타오름이 자기 속에서 어찌나 세차게 일어나던지 사랑에 할딱이며 하느님을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
2. 다시 한번 주의해야 될 점은 처음에는 보통 이런 사랑이 느껴지지 않고 다만 (방금 말하고 있는) 메마름과 허전함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타오를 이 사랑 대신에 영혼이 메마름과 허전함 속에서 늘 지니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걱정과 조바심이라, 당신을 섬겨드리지 못함을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좋을 씨고 행운이여,
3. 하느님께서 영혼을 감성의 밤에 두심으로써 감각을 낮은 부분에서 정화시키어 영에 맞추고 순종하고 일치하도록 하시고,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하여 영을 순화시키고자 감성을 어둡게 하시고, 추리의 길을 막아서 영성의 밤에다 두시면 영혼은 (자기도 모르는 채) 대단한 이득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 밤을 통하여 낮은 부분의 감성의 올무와 조임에서 나온 것을 행운으로 알기 때문에 “좋을 씨고 행운이여”라 하는 이 시구를 노래한다.
알 이 없이 나왔노라.
4. “나왔다”함은 여태까지 영혼이 그 낮은 부분 즉 매우 취약하고 협소하고 위험한 작용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는 데 있어 감각면에 의존하였던 것에서 나왔다는 뜻이니 우리가 위의 칠죄종七罪宗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감성면은 걸음마다 무수한 불완전과 무지가 밟히었기 때문이다.
일체 피조물에 대한 욕과 정을 끊어 버림이 큰 다행이기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 바로 감성의 밤으로서, 영혼은 그리로 들어가기 위해서 스스로를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어 믿음 안에 바탕을 지우는 것이니 그것은 일체의 감성과 동떨어진 것이다.
제12장
이 밤으로 말미암아 영혼에 생기는 이익들
1. 이 밤과 욕의 정화가 비록 영혼에게 앗기움처럼 여겨질는지는 몰라도 실상은 행운이어서 많은 보배와 이익을 끼쳐준다.
2. 메마르고 어둔 관상의 밤이 빚어내는 첫 번째 중요한 이익이 바로 자기와 자기 비참에 대한 지견智見아다.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은혜를 내리실 제는 언제나 이 지견을 주시기 마련이지만 이외에도 전 같으면 풍요를 느끼던 정신 능력이 메마르고 허전하며 선행에 곤란을 발견하는 데서, 스스로의 무능과 비참을 알게 되기 때문인데 편안할 때는 전혀 그런 기미도 없었던 것이다.
일단 메마름과 외로움의 일옷을 입고 맨 처음의 빛이 어두워지면, 자아 인식의 탁월하고 필요한 덕에 있어 보다 더 참된 빛을 지니게 되어서 자기에 대해 만족은커녕 자신을 값없이 알게 되는 것이니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지 못한다 함을 보기 때문이다.
3. 첫째로 하느님과의 사귐에 있어 지존하신 분을 모실 때에 항상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정성과 공경을 다하게 되는데 재미있고 편안할 때에는 그렇지 않았었다. 욕과 맛의 신발을 벗고 나서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을 뼈저리게 느낀다.
4. 우리는 감성욕의 이 밤, 이 메마름에 있는 또 하나의 뛰어난 이익을 알아두는 게 좋을 것이다. 감성의 욕구와 맛과 도움이 사라진 다음이면 이성은 진리를 파악함에 맑고 자유롭다. 하느님께서는 어둡고 메마른 관상의 밤을 통하여 초자연적으로 당신의 슬기 안에서 가르쳐나가시는 것이니, 이런 일은 처음의 그 맛이나 기쁨을 토해선 얻을 수 없던 것이다.
5. 감성의 밤이 메마름과 외로움 속에 있을수록 하느님의 빛을 더욱 받는다. 이 욕구의 밤의 메마름과 텅 빔에서 영혼이 뽑아내는 것이 또 있으니, 즉 영성적 겸손이다. 그전처럼 자기가 남보다 낫다든가 뛰어나다든가 하는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고 도리어 남이 자기보다 나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6. 이런데서 이웃 사랑이 생기는 것이다. 남들을 알아주고 전 같으면 자기만을 감싸주고 남은 가벼이 하던 것을 이제는 판단할 수 없이 다만 자기의 비참만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남에게 눈 돌릴 틈도 사이도 없는 것이다.
7. 이런 상태는 영성의 길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만든다. 감성의 오만은 사라지고 마침내는 죄원인 영성의 교만의 일체 악습들이 차츰 싹싹 쓸리는 것이다.
제13장
이 감성의 밤에서 영혼이 얻는 다른 이익들
1. 어둡고 메마른 이 밤에서 영혼은 영적 탐욕으로 지니던 불완전을 씻게 된다. 그 탐욕이란 영성적인 것을 이것저것 욕심내는 것으로서 호기심과 맛에 끌려 이런저런 공부를 해보아도 만족할 수가 없다가 이제는 그것이 모두 가시게 된다.
하느님께서 이 밤에 들여 주시는 사람들에게는 비록 무미할망정 보통으로 겸손과 날램을 주신다. 그리하여 명령을 받은 것이면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서 하고, 다른 것은 맛을 잃어 그냥 지나게 된다.
2. 영성의 사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저 부정不淨에서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 명백하다. 그런 부정은 으레 영성에서 감성으로 흐르는 맛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3. 넷째 악습 즉 영성의 탐식에 따린 불완전들에 대해서....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람이 불완전에 떨어지게 된 것은 영성의 탐식에 있는 욕구를 혁신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제욕의 불길이 꺼지고 나면 영혼은 영의 평화와 고요 속에 사는 것, 욕정의 지배가 없는 곳에 혼란이 없고 다만 하느님의 평화와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4.여기서 따라오는 둘째 이익이 있으니 하느님께 대한 꾸준한 기억으로서, 행여 영성의 길에 뒷걸음질 칠세라 걱정과 무서움이 겸한 생각이다. 이것은 욕구의 메마름 및 정화에 있어서 대단한 이익으로서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마음이 무디고 흐려지는 욕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영혼에 붙어 있던 불완전에서 영혼을 깨끗이 씻어주기 때문이다.
5. 이 밤에 있어 또 하나 대단한 이익이 있으니 갖가지 덕이 고루 닦여짐이다. 굳셈의 덕이 여기서 닦여진다. 통틀어 말하자면 향주덕이나 사추덕 그리고 윤리덕을 막론하고 모든 덕이 메마름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마음으로 잘 닦여진다는 것이다.
6. 다시는 자신의 결점을 못 견뎌서 자기에게 성내지 않고 남의 결점 때문에 이웃에게 분노하지 않으며 하느님께 대해서도 자기를 어서 빨리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지 않는대서 성내거나 무엄하기 짝이 없는 원망을 하지 않게 된다.
7. 끝으로 여기서 영혼의 애착과 감성의 욕구를 정화하는 데서 영의 자유를 얻는데 그러는 중에 차차 성령의 열두 열매를 얻게 된다. 역시 여기서 묘하게도 세 원수, 즉 악마와 세속과 육의 손아귀에서 해방이 된다. 일체에 대한 감성의 맛과 기쁨이 가셔지므로 악마도 세속도 감성적인 것도 영에 저항하는 무기나 힘이 없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이런 메마름들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게 한다. 이 메마름의 밤에서는 하느님 걱정, 하느님을 섬기려는 열망이 커진다.
9. 영혼이 이 메마른 정화를 거쳐서 이상 열거한 크고도 값진 이익을 이토록 푸짐하게 얻었음을 알고는 “좋을씨고 행운이여, 알 이 없이 나왔노라”라고 노래함도 그럴 만한데, 앞으로 이 시구를 풀이하고자 한다. 즉 “나왔노라”는 감성적 욕구와 집착의 굴종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알 이 없이”란 위에서 말한 원수 셋이 나를 방애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10. 영혼이 꾸준한 끊음으로 기쁨, 아픔, 바람, 무서움의 네 가지 감성을 가라앉히고 끊임없는 메마름으로 본성의 욕구가 감성 안에서 잠이 들고 작업에 있어 감각과 전신 능력과의 조화를 높이고 이미 말한 대로 추리의 활동을 멈추면, 이것이 모두 영혼의 하부 구조의 거주요, 권속으로서 이를 영혼이 여기서 제 집이라 부르는 것이니,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제14장
첫째 노래의 이 끝 구절을 풀이함
1. “이미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란 감성적 정화의 다행한 이 밤을 통하여 감성이 끊기고 그 욕정은 식고 모든 욕이 잠들어 고요해 졌다는 말이니, 이때 영혼은 나와서 영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의 길이란 나아가는 사람, 나아간 사람의 길을 말함인데 이것은 달리 조명의 길(照明, Via illuminativa) 혹은 주부적 관상[注賦的觀想, Contemplacion infusa]의 길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는 하느님이 손수 영혼을 기르시고 먹이시므로 영혼은 추리도 어느 능동적 협력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이 영혼에 있어서의 감성의 밤이며 정화다.
2. 이 밤의 다른 경우에는 모독의 영이 따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생각 하나, 개념 하나를 할 때마다 차마 견딜 수 없는 모독을 거기에 집어넣어서 때로는 어찌나 힘차게 상상력을 움직이는지 모독이 입에 튀어나오기까지 하니, 이것은 그런 사람들에게 여간 큰 고통이 아니다.
3. 또 다른 경우에는 이사야가 현훈眩暈의 영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지겨운 영이 덮치는데 이것은 사람들을 빠뜨리기보다는 차라리 공부를 더 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이 영은 사람들의 감성을 아주 깜깜하게 만들어서 세심과 의혹으로 꽉 채워 놓는 바람에 사람들의 판단이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 아무것에도 만족할 수 없고, 어느 권고나 관념도 가려낼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밤의 가장 큰 충격과 공포의 하나로서 영성의 밤에 일어나는 일과 매우 가까운 것이다.
4. 이 밤과 감성 정화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폭풍과 고생을 보내주신다. 다음 다 른 밤으로 옮아갈 사람들이(모든 사람이 다 옮아가지 않아도) 이렇게 얻어맞고 닦달질을 당해서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닦아나가고 장차 받을 ‘지혜’와의 결합을 위하여 감각과 기능을 끊도록 하심이다.
5. 한데 영혼이 이런 감성의 단식과 고행을 얼마나 길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모양으로 똑같은 시련이 오지 않을 뿐 아니라 각자가 지닌 불완전의 정도에 따라 정확하게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시기 때문이다.
6. 그러나 사랑의 합일이라는 복되고 아득히 높은 자라로 올라갈 영혼들은 제아무리 하느님의 빠르신 인도를 받는다 해도 상당한 기간을 이 메마름과 시련 속에 있는 것이 보통이니 이는 경험이 증명하는 바다. 그러면 이제부터 둘째 밤을 다룰 때가 왔다.
제2편
영의 밤을 다룸
제1장
영의 어둔 밤을 다루기 시작함, 그밤이 어느 때에 시작하는지를 말함
1. 하느님께서 앞으로 이끄실 영혼은, 감각의 첫 번째 정화와 밤의 메마름과 고생을 벗어나자 즉시 이 영의 밤에 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오랜 햇수가 걸리기 일쑤여서 그동안 영혼은 초심자의 영역을 벗어나서 나아간 사람들의 위치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 위치에서 영혼은 마치 옹색한 감옥을 나온 사람처럼 처음보다, 즉 이 밤에 들기 이전보다 훨씬 더한 자유와 만족을 가지고 훨씬 더 푸짐한 마음의 즐거움으로 하느님의 일을 한다.
2. 영성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제 영 안에서 풍부하게 또 쉽게 발견하여 맛보는 그 즐거움은 과거보다 훨씬 많고 감성의 정화가 있기 전보다도 훨씬 더 감성 안에 넘쳐흐르는 것이니 맑게 씻겨 진 감성이라 영의 맛 그대로를 쉽사리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이런 사람들이 영의 밤에 들어야 할 필요성을 알아듣기 위하여 이 나아간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몇 가지 불완전과 위험을 적어보기로 한다.
제2장
이 나아간 사람들이 지니는 다른 불완전을 이어서 말함
1. 나아간 사람들이 지니는 불완전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습성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것이다. 습성적인 불완전은 애착과 불완전한 습성으로서 미처 감성의 정화가 이르지 못한 영 안에 아직 뿌리처럼 남아 있는 그것이다. 두 가지 정화가 서로 틀리는 점은 뿌리와 가지의 차이, 케케묵은 때를 벗기기와 새로운 때꼽재기를 지우기와의 차이일 것이다. 이런 것은 밤의 어려움과 쥐어짬으로 비춰지고 밝혀지고 거둬져야 한다.
2. (습성적인 아닌) 현실적 불완전은 어떠냐 하면 모든 사람이 다 불완전에 떨어지는 것이 똑같지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영성적 취향이 너무 피상적이고 감각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처음에 말한 것보다 더 큰 부조리와 위험에 떨어진다. 악마란 놈은 저 지각과 감흥 따위를 어찌나 구수하게 그럴듯하게 그려 넣는지 영혼은 그런 모든 시현示現이나 감흥을 믿음으로 끊어버리거나 힘차게 막을 만한 조심성이 없이 그만 홀딱 반해서 넘어가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헛된 시현 거짓 예언들을 믿게끔 여기서 악마가 조화를 부리기 때문인데, 이 경우 하느님과 성인들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양 씌우므로 그 사람들은 흔히 그 환상을 진짜로 믿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비참에 빠져드는 것은 이 길에 진보하기 시작할 때부터 영성의 지각과 감각에 지나치게 안심하고 자기를 내맡기는 까닭이다.
3. 나아간 사람들치고 제아무리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이미 말한 본성의 애착이나 불완전한 습성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없는 만큼 하느님과의 합일에 다다르려면 우선 정화부터 필요한 것이다.
4. 그러므로 합일에 도달하려면 영의 둘째 밤에 들어야 하니 여기서는 감상도 영성도 일체의 지각이나 맛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컴컴한 속을 순수한 믿음으로 걸어가야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