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19. 10월 영적도서 : 「상처입은 신앙」
지은이 : 토마시 할리크
1948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 카를 대학에서 사회학과 철학,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산 정권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면서, 1978년 동독에서 비밀리에 사제 서품을 받고 지하 교회에서 활동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 정권 붕괴 후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외부 자문단으로 일했고, 체코 주교회의 총대리로 봉직했다.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교황청 비신자대화평의회(현 문화평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에서 실천신학 교수 자격증을 취득했다. 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하버드 대학 등 세계 여러 대학에서 초빙 교수를 지냈고, 현재 프라하 카를 대학 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저서들은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독일에서 유럽 최고의 신학 서적(2009/2010)으로 선정되었다. 종교 간 대화, 저술 및 교육 활동, 영적 자유와 인권 보호 증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14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 2010년 로마노 과르디니 상 등 여러 저명한 상을 수상했다.
그의 저서들은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독일에서 유럽 최고의 신학 서적(2009/2010)으로 선정되었다. 종교 간 대화, 저술 및 교육 활동, 영적 자유와 인권 보호 증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14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 2010년 로마노 과르디니 상 등 여러 저명한 상을 수상했다.
나눔의 글
『상처 입은 신앙』은 부활한 예수에게 꿰뚫린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달라고 하는 토마스 사도의 의심을 모티브로 삼아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과 그로 인한 신앙의 상처에 대해 논합니다. 예수에게 상처를 보여 달라고 말할 용기, 예수의 십자가 고통과 죽음, 그 어두운 밤을 지난 부활이 우리의 신앙 여정에 주는 의미에 대해 말합니다.
“신앙을 위해서는, 토마스 사도의 불신이 믿는 제자들의 신앙보다 우리에게 더욱 유익합니다.” - 대 그레고리우스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은 ‘상처 없는 신앙’이 환상임을 증명합니다. 예수 자신도 상처 입었고 십자가 죽음의 고통스러운 밤을 지났습니다. 저자는 신앙의 위기 혹은 의심이 신앙이 살아 있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흠 없는 신앙, 고통을 지나지 않은 신앙은 환상이며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예수는 모든 작은 이와 고통받는 이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이들, 세상과 인간의 온갖 고통은 ‘그리스도의 상처’다. 살갗이 벗겨진 피투성이 상처, 전쟁이나 기아, 테러로 인한 처참한 광경 앞에서 우리는 눈을 돌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상처를 보고 만져야 한다. 그 상처들이 바로 예수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함으로써 믿음을 증언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누군가 교회가 제공하는 전통적인 환경, 강론, 미사와 교리에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없다면, 그들을 위한 다른 가능성도 늘 열려 있다. 사람들이 고통받는 그곳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늘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신앙을 예리한 시각으로 새롭게 뒤돌아보게 하는,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의 「상처 입은 신앙」을 요약해서 올립니다
책 속에서
나는 피 흘린 적도, 상처 자국도, 흉터도 없는, 상처 입지 않은 신, 이 세상에서 내내 춤만 추는 신들과 종교들을 믿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늘날 종교 시장에서 그들의 휘황찬란한 매력만 보여 주고 싶어 한다.
나의 신앙은 가파른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좁은 문을 지나 하느님께 나아갈 때, 가난한 자들의 문, 상처 입은 자들의 문을 지날 때 의심의 짐을 내려놓고 내적 확신과 고향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부자, 배부른 자,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자, 아는 자, ‘보는 자’, ‘건강한 자’, ‘경건한 자’, ‘지혜롭고 신중한 자’는 그 문을 지날 수 없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16쪽).
‘믿는다는 것’이 항상 시급한 문제들의 짐을 벗어 던지게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때로 믿는다는 것은 의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또한 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충실히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의 힘은 ‘신념의 확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과 불분명함을 견디고 신비의 무게를 버텨 내면서 충실함과 희망을 잃지 않는 능력에 있다.(25쪽)
“신앙이 살아 있는 한, 신앙은 늘 상처 입고, 위기가 내던져지고, 가끔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우리 신앙은 - 좀 더 가볍게 말해 지금까지의 신앙 형태는 - 다시 깨어나기 위해 냉담해질 때가 있다. ‘못 자국들’을 볼 수 있는 상처 입은 신앙만이 믿을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다. 십자가의 밤을 지나지 않고 심장이 꿰뚫리지 않는 신앙은 이러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눈이 멀어 본 적 없는 신앙, 어둠을 체험하지 않은 신앙은 보지 못했고 보지 못하는 이들을 결코 도울 수 없다. ‘보는 자들’의 종교, 바리사이적이고,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고, 상처 입지 않은 종교는 빵 대신 돌을, 믿음 대신 이데올로기를, 증언 대신 이론을, 도움 대신 충고를 주고, 사랑의 자비를 보여 주는 대신 지시하고 명령한다”(229쪽)
1
상처 입은 자들의 문
그리스도교 신앙은 복음과 우리의 삶을 끊임 없이 연결하는 데 있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는’ 용기에 있다.
마르티노 성인에게 한번은 사탄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성인은 속지 않았다. 성인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상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영적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계 없는 관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토마스 사도와 마르티노 성인과 함께 ‘신의 죽음’ 이후 또는 우스꽝스러운 우상들의 몰락 이후 주인 잃은 왕좌를 차지하려는 모든 것에게 묻는다. “우선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시오!” 나는 더 이상 ‘상처 입지 않은 종교’를 믿지 않는다.
수년 전부터 나는 존중과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종교적 여정을 연구하는 데 전력했다. 나는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은 ‘양자택일’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고집하게 하지 않았다.
만일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르다면, 최소한 한 사람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논리 말이다. 누군가 나와 다르게 말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가 나와 다른 입장과 관점 그리고 전통 또는 다른 경험에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관점과 표현의 차이가 나나 상대의 진리에 대한 주장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상대방과 나의 진정성과 성실성에 의문을 제기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인식이 편리하고 체념한 듯한 상대주의(‘각자 자신만의 진리를 갖고 있다’)로 이끌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서로 대화하고 자신만의 경험을 서로 나눔으로써 불가피하게 경계가 그어진 지평을 넓히고 다른 이와의 대화 속에서 자기 자신 또한 알아 가려는 노력으로 이끌어야 한다.
나는 사람들을 삶의 궁극적 신비로 이끄는 다양한 길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모든 인간의 아버지, 한 분 하느님을 믿는다. 그는 한 인간도 아니며 ‘종교기관’이나 그들의 대표자들이 ‘독점’하는 존재도 아니다. 그분은 여기저기서 휘돌고 있는 강물이 최종적으로 만나는 강어귀다. 각자의 전통의 빛, 각자의 진리를 향한 갈망, 삶의 궁극적 신비를 성실하게 추구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그들의 양심과 인식의 빛에 이끌려 온 이 모든 이의 길들이 다양한 종교 체제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결국 그분에게서 만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그들의 개인적 신앙에 대해 단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나의 권한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서 ‘다른 이의 하느님’이 결국 ‘나의 하느님’이라는 희망을 앗아 갈 수 없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또한 내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고백할 것이 있다. 나에게는 상처 입은 손과 꿰뚫린 심장에 의해 열린 바로 그 문 말고 그분께 가는 다른 길이 없다. 심장까지 파고드는 그 상처를 보지 않고서는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 라틴어 ‘믿다’(credere)라는 말은 ‘심장을 내어 주다’(cor dare)에서 왔다. 그렇다면 나의 심장과 나의 신앙은 오직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는 하느님께만 속한다고 고백해야 한다.
나의 신앙과 나의 사랑은 하나이고, 나를 사랑하신 그분의 응답인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한 사랑을 아무도 나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겠는가?(로마 8,35 참조) 나는 그분의 상처를 보지 않고서는 ‘나의 하느님’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다! 강렬하게 빛나는 종교적 환영에 직면하더라도, 그것에서 ‘못 자국’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그것이 환상은 아닌지. 내 소망의 투사는 아닌지, 심지어 그리스도의 적과 관련된 것은 아닌지 분명히 의심할 것이다. 나의 하느님은 상처 입은 하느님이다.
나의 신앙과 나에게 신앙으로 제시된 것은 ‘마르티노 성인의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이다. 나는 피 흘린 적도 상처 자국도, 흉터도 없는 상처 입지 않은 신, 이 세상에서 내내 춤만 추는 신들과 종교들을 믿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늘날 종교 시장에서 그들의 휘황찬란한 매력만 보여 주고 싶어 한다.
나의 신앙은 가파른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좁은 문을 지나 하느님께 나아갈 때, 가난한 자들의 문, 상처 입은 자들의 문을 지날 때 의심의 짐을 내려놓고 내적 확신과 고향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부자, 배부른 자,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자, 아는 자, ‘보는 자’, ‘건강한 자’, ‘경건한 자’, ‘지혜롭고 신중한 자’는 그 문을 지날 수 없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참조).
예수는 모든 작은 이와 고통받는 이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모든 이, 세상과 인간의 온갖 고통은 ‘그리스도의 상처’다. 세상의 상처에서 도망가거나 그 상처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우리는 그 상처를 보고 만져야 하고, 그 상처에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내가 상처에 무관심하고 냉담하고, 상처받지 않은 채로 있다면,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고, 보지 않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1요한,4,20 참조)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을 정말로 보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고통을 단순히 ‘사회 문제’로만 국한해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어떤 힘이다. 죽음을 이기고 꿰뚫린 손으로 죽음의 문들을 부수는 유일한 힘이다. 어쩌면 예수는 토마스 사도가 상처를 만짐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다시 깨우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고통받는 곳에서 나를 만난다. 이 만남을 피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불신하지 말고 믿어라!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타인의 짐도 기꺼이 나누어질 때, 세상의 상처 자국이 우리에게 어떤 부름이 될 때 우리는 그분의 외침을 알아듣는다.
2
간극 없이
사도들은 각자 사명을 받았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양 떼를 돌보았고, 바오로 사도는 이방 민족을 향해 멀리 길을 떠났다. 토마스 사도는 무엇을 했을까?
신앙의 힘은 ‘신념의 확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과 불분명함을 견디고 신비의 무게를 버텨 내면서 충실함과 희망을 잃지 않는 능력에 있다.
그렇다, 토마스 사도의 사명은 바로 이러한 것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만짐으로써 생겨난 믿음은 토마스 사도에게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이제 그 믿음은 그를 길 위에 멈춰 있게 하지 않는다.
토마스 사도는 의심의 어두운 밤 속에서 인생을 지나고 있는 많은 이들을 위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매우 특별한 현현과 예기치 않은 ‘하느님 경험’으로 이끄는 길을 낸다. 주님을 보았던 이는 보지 못했던 이들에게 문을 열어 준다. 주님을 보지 못했던 이들은 세상의 상처에서 거듭해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누군가 교회가 제공하는 전통적인 환경, 강론, 미사와 교리에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없다면, 그들을 위한 다른 가능성도 늘 열려 있다.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곳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 “너희가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나아가 우리는 자신의 고통 깊은 곳에서도 그분을 만날 수 있다.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빼앗긴 이들이 많을 것이다. 세상이 완전하다면, 세상 자체가 하느님이라면 세상에서 하느님에 대한 물음도 없을 것이다. 이 책에 영감을 준 복음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자신을 상처 입은 하느님으로 보여 준다. 스토아학파의 냉담한 神도, 우리의 소망이 투영된 神도, 한 인간이나 나라의 권력욕의 상징도 아니다. 공감하는 하느님, 즉 함께 느끼고, 함께 고통받고, 함께 기뻐하는 하느님이다.
그리스도는 참인간이고 참하느님이다. 이 고백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핵심은 고대 현자 중 한 사람의 고귀한 덕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나 저항하는 노예로 죽임을 당한 남자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이다. 한편으로는 그가 인성과 신성의 유일무이한 결합, 다시 말해 하느님과 인간의 진리와 이들 상호 간의 관계를 보여 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본성’ 안의 깊은 상처에 필요한 치료제, 즉 ‘구원’과 ‘죄의 용서’를 드러내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진술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의심하는 토마스 사도’가 부활하신 분을 만났을 때 외친 이 말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그렇다. 성경에서, 바로 그에게서 하느님이 발생한다. 하느님은 그렇게 발생하는 하느님이다. 토마스 사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에서 하느님이 발생하는 것을 경험한다. 하느님은 여기 있고, 그분을 ‘만질 수’ 있다. 유일한 중개자(1티모 2,5) 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직접적이며 둘 사이에는 간극이 없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상처들이 그를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끌었던 인간들과 ‘간극 없이’ 직접적인 연대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의 거울이다. 우리는 그 거울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진 악과 폭력을 본다. 세상의 끔찍한 일은 악한 인간들의 행위에 의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선한’ 인간들의 무관심과 행동하지 않음으로 일어난다.
수난사의 구원하는 능력은 그 이야기 안에서 세상의 실상과 우리 자신을 만날 뿐 아니라, 당신 아드님 안에서 인간 고통의 심연, 유한함과 죽음의 심연까지 다가가는 하느님 행위의 놀라운 방식을 간극 없이 만나는 데 있다.
죽음의 구렁텅이 앞에 선 한 사람, 더 이상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 전적으로 타자의 악함에 의해 농락당하는 사람, 포박된 물건처럼 적들의 손에 완전히 넘겨진 사람, 대사제, 빌라도, 헤로데, 군인들과 사형집행인이 서로에게 떠넘긴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 같은 사람, 이러한 이미지는 모든 겉치레와 배경이 사라진 인간존재의 근원적 심연을 비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사람은 인간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표현한다. 성 금요일의 진리 없이 부활절 아침은 없다. 이 사실 말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 바닥을 만져보지 않는다면, 심연에 직면해 얼굴을 가린다면, 인간 운명의 최극단까지 보려 하지 않고 모든 가능성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선다면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진리는 폭력을 ‘멈출’ 수는 없지만 폭력의 본성을 드러낼 수 있다. 예수가 인성을 온전히 받아들인,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그의 인성은 흠 없는 하느님의 모상(그는 새로운 아담, 에덴 동산의 추방으로 인한 상처가 없는 아담이다)으로서 인간의 위대함과 완전함을 포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또 다른 극단, 즉 인간 운명의 어둡고 고통스럽고 상처 입은 측면, 그 앞에서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닫아 버리고 싶은 불행과 비참함 또한 포함한다.
파스칼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인간에게 그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하는 종교는 자아도취적 투사에 빠진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들의 비참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찬양한 것이다. ”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 부활한 분을 알아차렸고,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은 빵을 나누던 행위에서, 토마스 사도는 그분의 상처를 보고 알아차렸다. ‘문이 잠겨 있는데도’ 즉, 사도들의 겁먹은 폐쇄성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온 예수는 ‘그들에게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의 상처를 보았을 때,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요한14,9) 라는 예수의 말씀이 성취되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예수에게서 하느님을 보았다. 그의 열린 상처를 통해 하느님을 보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와 부활한 자의 동일성뿐 아니라 – 많은 쟁점이 된 그리스도의 신성, 참인간, 참하느님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칼케돈공의회 교리가 언명한 – 신성과 인성의 신비로운 일치도 예수의 상처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인간이 고통받는 곳에 예수가 있다. 우리 주위 도처에 있는 그들은, 그리고 그들 안에서 예수는 ‘기회’이며, 성부께 가는 열린 문과 같다. 그런데 예수가 없는 곳이 있는가? 예수가 없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스스로를 정의롭고 선지자라 여기는 사람들,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예수의 말씀으로 문 앞에 차단기를 세우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이 들어가는 대신 다른 이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부들부들 떨며 문 앞을 지키고 있다. 이런 이들 곁에, 이들 안에 예수는 없다.
3
마음의 신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몸의 상처를 통해 마음의 신비를 연다”라고 썼다. 이것은 ‘위대한 신비’이며, 실제로 ‘두렵고도 매혹적인 신비’다. 사람을 홀리는 매력적인 신비인 동시에 마음을 뒤흔드는 놀라움과 공포를 야기하는 신비다.
이 신비에 이르는 두 길이 있다. 고대 동방의 대중 신심이라는 넓은 길과 신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신비주의자인 동시에 신학자인 이들의 가파른 오솔길이다. 이 두 길 모두 물론 커다란 위험도 안고 있다.
체스터턴은 그리스도를 ‘무신론자를 위한 하느님’으로 소개한다. 무신론자들이 하나의 종교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에는 하느님이 무신론자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당신 존재를 스스로 드러내고는 모든 피조물과 모든 죽을 운명의 인간이 관통해야 하는 無안으로 숨었듯이, 하느님 아들의 심장의 상처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감춰진 신비인 ‘아르카눔’arcanum은 완전한 ‘하느님의 자기 헌신’이 아닐까? 하느님이 당신 아들의 고통 속에서 우리의 허무성과 유한성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연대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순간, 하느님이 당신 아들 앞에서 얼굴과 존재 자체를 완전히 감춤으로써 이 순간에 당신 아들은 아버지를 철저하게 부재하는 ‘죽은’ 하느님으로 경험하는 순간, 바로 하느님이 숨어 있는 이 순간이야말로 성부가 성자와 영원히 대화하는 순간, 창조주가 세계와 인간과 대화를 시작하는 중요한 순간이 아닐까?
4
성전 휘장이 찢어지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숨을 거두는 순간 성전 휘장이 찢어졌으며 (참조: 마태 27,51:히브 10,19-20), 어둠과 텅 빈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의 실체가 드러났다. 성 토요일에 열려 있는 빈 감실은 바로 서로 깊이 연결된 이 두 상징, 즉 열린 성전의 지성소와 로마 군사의 창에 찔려 열린 예수의 심장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또한 예수의 심장은 이제 텅 비었고,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은 “자신을 비웠다(필립 2,7 참조).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심장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전하며, 교부들은 여기에서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기원을 읽었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은 인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당신 자신을 포기했다. 인간의 적개심의 힘을 비폭력으로 깨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인간적 본질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신 하느님이 내린 결론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이의 팔은 열려 있고 그 자체가 하느님 존재 안의 공간을 상징한다. 그리고 원수에게 그 공간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신다.
성전 휘장이 두 갈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옛 계약’이 성취되고 종결되었으며 예수의 십자가 피로 맺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선택된 백성과 맺은 주 하느님의 원 계약은 하느님 심장이 새롭게 열림으로써 극복된다. 이제 계약은 모든 민족에게 확대되고 모든 인류에게 유효하다. 우리는 이제 간극 없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숨어 계신 하느님’은 유다교 사상, 특히 유다교 신비주의 카발라의 아주 오래된 주제다. 하느님이 숨어 계시다는 표현을 하느님의 ‘자기 축소’라는 카발라 사상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 창조 때에 자신의 내면에 세상을 위한 어떤 공간을 만드셔야 했다. 숨어 계심의 또다른 모티브로서 유배 중에 자신을 숨긴 채 하느님 영광의 임재(Shekhina)가 안내했다는 견해를 예로 들을 수 있다. 하느님의 영광은 이집트 노예 생활 중에 유다인들과 함께 고통받았고 광야 생활 중에도 그들과 함께 아파한다. 또 바빌론으로 추방된 유다인들과 동행했고, 그들의 고향 상실과 민족 해체의 아픔을 같이 했다. 덧붙여 카빌라는 중세 시대 유다인들의 어둠의 시간에 가장 크게 발전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유다 신학’, 즉 하느님의 불간섭과 ‘하느님의 침묵’과 하느님의 부재에 대한 섬뜩한 경험 이후 신학이 이 오래된 모티브를 부활시켰다. 한스 요나스에 따르면 하느님은 당신의 속성 중 하나인 전능을 포기했다. 아우슈비츠에서 결코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거나 욥처럼 그분을 심판대로 불러냈던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은 현존한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에서 하느님은 오로지 기도를 통해, 신앙을 고백한 자들의 희망과 믿음을 통해, 그분 말씀에 대한 응답을 통해서만 현존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선 사람들이 듣는 자가 될 때 받아들일 수 있다. 하느님에게 무관심한 것은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전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한다. 기도가 되는 부르짖음을 입증하는 의미 있는 사건은 충분히 많다.
성전 휘장이 둘로 갈라졌어도, 성전이 불타서 무너졌어도, 하느님이 침묵해도 인간은 헌신적으로 순종하든 의문과 분노를 품든 하느님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단신의 활동, 즉 창조 행위와 특히 아들의 육화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신학자들이 강조하듯이, 하느님이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것’과 ‘어떻게 하느님이 존재하는가’는 우리에게 파악하기 힘든 신비로 남는다. 하느님의 숨어 있음은 그리스도교 부정신학에서도 강조한 바다.
이러한 전통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존재하는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이 의미는 이렇다: 하느님은 세계의 다른 존재들 가운데 ‘한 존재’가 아니다. 구체적인 존재들의 세계에서 하느님은 오히려 ‘無’다. 그리고 당신, 인간도 ‘무’가 되어야 한다. (당신을 이 세상에서 無에 고정시키고, 無와 온전히 동일시하며, ‘가난’, 다시 말해 내적 자유에 머무른다.) 이 無, 즉 가난과 자유 안에서만 당신은 ‘하느님과 같을 ’수 있다.
여러 부분에서 부정신학과 연결된 마루틴 루터는 하느님은 완전히 숨어 계시며 도달 불가능하다는 사상과 성 바오로의 가르침을 극단으로 밀고 간 자신의 ‘십자가 신학’을 결합했다. 하느님은 모순된(subcontrario) 형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역설 안에 숨어 계신다. 하느님의 숨어 있는 본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철학자들과 (거짓된) ‘훌륭한 신학자들’의 헛수고다. 하느님의 능력, 신성, 선은 무로 이끈다.
사람들은 이성, 철학, 또한 그것들의 공로, 선한 의지, 그로 인한 행동 같은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악마의 도깨비불일 뿐이다. 참된 그리스도교 신학자는 십자가의 신학자뿐이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의 나약함, 굴욕과 무능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능력을 통하는 것 말고 그분을 인식하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상처의 흉측함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를 위해 죄를 입은 그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 인식의 길로 나아간다. 빛나는 영광 속에서가 아니라 비천함과 연약함 안에 계신다. 우리는 “그분의 위엄과 본성 안에 있는 하느님”을 버려야 한다. 그러한 하느님과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인간적인 하느님(Deus humananus)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인간적인 하느님’은 우리의 경건한 표상과 우리 이성이 바라는 모습과 정반대다.
인간은 순수한 ‘하느님 자체’, 발가벗은 하느님(Deus nudus)에게 가닿지 못한다. 신적 본질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려는 형이상학자의 노력은 그 노력이 사탄의 아가리로 곧장 이끌지 않는다면, 인간의 왜소함과 발가벗음(homo nudus)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에게 하느님은 인간적인 하느님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제 죽음의 죽음(mors mortis)인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해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r peccator)이다. 루터는 자신의 신론과 구원론에서 이 역설의 의미를 한순간도 버리지 않았다.
십자가는 신성을 빛으로 꾸미고 구원을 준다는 모든 우상과 권력에 대한 심판이다. 이런 것들은 신앙의 빛을 비추면 한밤의 환영과 그림자처럼 사멸한다.
미국의 신학자 토머스 알타이저에 따르면, 하느님은 인간존재를 받아들였고 인류와 연대하고 본격적으로 당신과 동일시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버렸다’. 그리고 지금 여기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역사 안에 현존한다.
잊혔고, 상처 입었고, 이제는 소심하게 의식에서 떨쳐 버린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의미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는 예수의 역사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외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안다. 예수가 오래전 이 세상에서 거니셨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인격으로가 아니라 유일한 위격, 즉 ‘성자의 위격’으로 고백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다른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위격은 무엇보다 관계다. 예수는 관계 안에서 그리고 관계를 통하여 그의 깊은 본성으로 살아 있으며, 그는 성부에 대한 관계이고, 동시에 우리와의 관계 그리고 우리에 대한 관계이다. 이 내용은 ‘두 본성론’과 함께 칼케돈공의회 교의에서 분명히 표현되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삼위일체의 맥락, 즉 성부에 대한 관계 안에서, 성령에 대한 관계 안에서, 그 관계 안에서 또한 우리 안에 현존하는 예수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예수는 분명히 하느님에 의해 인간적 파멸의 심연에 발을 들여놓았고, 이를 통해 “그분은 하느님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예수는 ‘고아’로 남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도 고아로 버려두지 않았다.(요한 14,18 참조) 바로 이것이 부활에 관한 기쁜 소식의 참진리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실재의 뒤편’이 아니라 실재의 심연이며 실재의 신비다. 하느님은 ‘실재의 실재’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위격’이라는 은유를 사용한다면, 우리가 그분에게서 어떤 창조된 본질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통해 두 가지 사안을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첫째, 하느님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말을 걸어오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기도 안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삶과 실재의 전부를 통해 말씀하신다). 둘째,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심오한 본질로 관계를 맺으신다. 우리는 삼위일체로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는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성자와 관계 맺은 아버지이고, 하느님은 성자와 성령을 통해 본질적으로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5
춤추는 신
리처드 커니는 고대 그리스도교 삼위일체신학의 핵심어 중 하나인 ‘상호 내재성’(거룩한 삼위의 상호 ‘침투’와 상호 의존)이 춤 개념과 연결되어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는 초대교회가 삼위일체를 원으로 표현했음을 떠올리며,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서로서로 앞서가게 하는 춤으로서 삼위일체의 내적 삶에 대한 유쾌한 상상을 덧붙인다.
참으로 비범한 이러한 상상을 접했을 때 내 머릿속에서 섬광처럼 두 가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터키의 다르비시 춤이다. 이 춤은 수피즘 신비주의의 보화 중 하나로 하느님의 역동적인 사랑을 몸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고는 “나는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는다”는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니체에게 신의 춤은 가벼움,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다. 또한 이 춤은 니체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무엇보다도 도덕에 스며들었다고 말한 ’엄숙함’, ‘복수심’, 르상티망(마음속에 쌓인 원한 또는 분노), 도덕적 해이의 반대를 상징한다.
예수는, 그리고 그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느님은 춤추는 신일 수가 있는가? 우리 안에서 가장 먼저 본능적으로 ‘아니오’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이는 교회에서 우울한 그리스도 묘사로 인해 우리 상상력이 길들여졌다는 증거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특정 공동체의 신앙심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귀중한 외경 가운데 일부는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어떻게 춤을 추었는지 주저 없이 묘사한다. (이러한 묘사가 정경이 보존하는 많은 기억에 비해 권위가 없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특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몸이 눈에 띄게 역동적인 자세로 흔들리는 비잔틴 양식의 십자가에 대해 몇몇 해석은 요한의 십자가형과 부활의 일치, 굴욕과 드높여짐의 일치를 표현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셨다(시편 30,12 참조)라고 한 시편의 구절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부활하신 분의 현현이 왜 토마스 사도를 기쁜 황홀경으로 이끌었는지, 그리하여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고백하게 했는지 이해하고 싶다. 동시에 우리가 이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려 한다.
예수는 ‘다시 한 번 태어나고’ 다시 한 번 어린이가 될(참조: 마르 10,15; 요한 3,7) 겸손과 용기를 지닌 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했다. 부활의 자유라는 무도회장에 입장하기 위해 예수가 말한 ‘어린이의 영혼’이 필요하지 않을까?
무엇이 토마스 사도의 자리에서 우리가 부활의 자유의 빛 안으로 들어서고 기쁨으로 사도의 고백을 따라 하는 것을 방해하는가? 부활의 신비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닫힌 문들’은 어디에 있는가?
부활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을까? 하느님과 부활은 우리의 경험, 언어, 논리 그리고 상상력이 파악할 수 있는 지평과 가능성을 넘어서는 근본적 신비다. 하느님과 부활의 신비를 우리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고, 지식과 소유의 대상으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
예수의 변모된 상처의 빛은 토마스 사도에게 아주 잠깐 동안 인간을 통해 하느님을, 현재를 통해 미래를,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인식하게 했다.
예수가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영이 우리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요한 16,7 참조).
우리는 외적 보호자로서의 하느님 없이 살아야 한다. 단지 외적인 하느님 ,‘육에 따른 그리스도’와는 하느님의 춤추는 아들딸이 누리는 자유와 기쁨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요구했던 ‘자녀의 영’이 아니라 아이로 머무르며, 미성숙하고, 서투르고, 무능하게, 책임을 떠맡은 비웃음당하는 자녀가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 당신에게 ‘육에 따른’ 외적 그리스도를 권한다면 그 표상을 거부하고 “그것을 죽여라”!(안타깝게도 종종 우리 교회에서 그리고 오늘날 종교 시장에서 이러한 외적 그리스도 이해를 발견할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사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살고 성숙할 수 있는 ‘영에 따르는 그리스도’를 찾아라.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떠난다. 우리에게 자유와 책임의 공간, 우리가 그리스도를 다시 발견할 수 있는 성령의 공간을 허용하기 위해서다.
토마스 사도에 대한 복음의 장면은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에 대한 찬양으로 끝난다. 그 길은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미 없는 경건한 문구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 희망과 사랑을 통해 그분의 새롭고 다른 현존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은 모든 극적인 전환점을 지나 삼위일체의 품 안에서 추는 신적 춤의 대열에 황홀하게 동참하며 끝나길 희망하는 길이다.
6
어린양의 경배
‘신의 죽음’ 이후, 공적 공간에서, 오늘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와서 당신의 상처를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황제들에게’ 그들의 벌거벗음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울로서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정치 영역에 들어간다. 그러나 중요하지만 알아주는 이 없고 위험한 예언자적 임무를 수행하는 권력에 비판적인 반대자로서다. 거룩한 아우라를 취하려는 권력자에게 예언자들은, 나탄이 다윗에게 한 것처럼, 왕도 인간일 뿐 신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와서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갑옷, 가면, 그리고 허식을 벗어 버릴 용기를 준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종종 자신에게도 숨기는 상처와 흉터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 주었던 상처를 바라볼 용기를 주려 한다.
이 책에서 독자는 우리 세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지침을 발견하지 못한다. 바라건대 찾지도 말았으면 한다. 나는 구원을 위한 모든 처방전을 분명하게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숨어 계신 구름을 뚫고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의 도달할 수 없는 익명성이라는 침묵의 봉인을 깰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분 독생자의 이름(인간존재의 위격)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분에게 그분 아들의 이름으로 말을 건다면, 그분 아들의 이름으로 청한다면, 하느님께 말을 걸 수 있고 우리 삶과 우리 세계에 하느님을 초대할 수 있다고 복음서는 말한다.(요한 14,13 참조)
폭력과 악의 놀이에 응하지 않고, 폭력과 악으로 점철된 이 세상에서 무릎을 꿇었던 사람들, “큰 환난을 거쳐 자기 예복을 어린양의 피로 빤”(묵시 7,14 참조) 사람들에게 요한묵시록은 모든 사람이 어린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전례에 참석하리라 약속한다. “당신은 두루마리를 받아 그 봉인을 떼고 펴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것은 살육당하셨고 하느님을 위하여 당신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셨기 때문입니다”(묵시5,9).
그 봉인은 그리스도의 성흔이 찍힌 손만이 열 수 있다.
7
그리스도의 성흔과 용서
이미 고인이 된 프라하 대교구장 토마세크 추기경은 로마 베드로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피격을 목격했다. 추기경이 언젠가 나에게 요한 바오로 2세와 나눈 대화를 전해 주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쯤 후 병원으로 병문안 갔을 때 나눈 이야기였다. 몸 상태를 묻는 의례적인 물음에 병상에 누워 있던 교황은 눈짓으로 기계에 연결되어 있는 손과 붕대에 감긴 배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성흔이 찍혔어요!”
그리고 교황은 그의 삶을 고통스럽고 위태롭게 만든 사람을 몇 년 후 감옥으로 찾아가 그를 바닥에서 일으켜 안아 줌으로써, 상처의 진정한 치유라는 물음에 몸소 용기 있는 교황이 성흔이 찍힌 손으로 그 문을 열었다.
부활하고, 죽음을 통해 변모된 예수가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 처음으로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면서 신분증을 제시하듯 본인임을 증명했다. (기록된 바와 같이 당시 토마스 사도는 거기에 없었다.) 그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위대한 선물을 주기 위해 왔다. 바로 용서의 성령이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서의 이 성령 인도 장면을 설명할 때 사도행전의 비슷한 장면인 ‘언어의 은사’(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은사)를 떠올린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는 ‘용서의 언어’를 준다. 이는 낯설고 심지어 적개심에 찬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화합하는 수단이다.
부활만이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메시지, 이 이야기의 예상치 못한 해답, 부활절 신비의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준다. 하느님은 복수하지 않는다. 예수는 평화, 성령, 용서를 가져온다. 그의 꿰뚫린 손바닥은 복수와 폭력의 화염에 대항해 들어 올려졌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충분하다!’
제자들이 서로 갈라지지 않았다면, 여인들과 요한처럼 십자가 아래에서 참고 견딜 용기가 그들에게 있었다면 십자가에 달려 아래를 향해 한 이야기의 결말에 대한 명백한 암시를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루카 23,34).
용서받지 못한 죄, 치유되지 않은 악의가 어디에 이르는지, 상처받은 이들의 힘으로 폭력을 멈출 수는 없지만 더 커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보지 않았는가?
40일 동안 예수는 자신의 상처를 보여 주었고 제자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마침내 천상에 오르던 날, 신비에 가득 차서“다른 고장을 여행하던 분에게로” 사라졌다. 이제는 예수에게 배운 것을 우리가 증언해야 하는 자유로운 공간으로서 역사를 우리에게 맡겼다. 이제 우리는 상속자들이고, 포도밭의 관리인이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돌아볼 때 우리는 아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보내진 예언자를 돌로 치고 때려죽인 나쁜 포도밭 소작인을 더 많이 따라 하고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 ‘새천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거 상처의 치유를 간절히 바랐다. 교황은 용기 있게 세상 사람들의 눈앞에 敎會史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 보였다. 마침내 근 2000년 희년 사순 첫 주에 십자가 앞에서 교회가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저질렀고 이제야 고백한 모든 죄를 용서해 주기를 청했다. 우리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거듭해서 용서할 책임이 있다.
8
벽을 두드리는 소리
‘감방 벽을 사이에 두고 노크 소리로 서로 소통하는 두 죄수가 있다. 벽은 그 둘을 갈라놓지만 서로 소통하는 걸 허락한다. 우리와 하느님도 마찬가지자. 모든 분리는 연결이다.”시몬 베유의 말이다.
고통은 우리를 의미로부터, 또는 많은 이들이 의미라 이름 부르는 하느님으로부터 떼어 놓는 벽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벽 앞에 무감각하게 앉아 있는 대신 벽을 ‘두드리고‘ 무엇보다 상대편의 노크 소리를 듣는다면, 고통은 그 의미와 우리를 연결하는 벽이 된다. 이러한 소통이 사용하는 신호를 잘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종교교육’은 체코의 여성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주자나 스보보도바가 ‘무관심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것이라 적절하게 표현했듯이, 성경의 역사적 사실들을 단순하게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시련이 닥쳐왔을 때 절망하거나 고립된 죄인이 되려 하지 말고 이 상징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흉터, 이웃의 상처 그리고 ‘세상의 상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제 신앙의 관점에서 이 모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들은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육화의 신비를 믿는 한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상처가 된다.) 우리가 상처받은 이들과 연대하지 않는다면, 그 상처들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각자의 양심을 자극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 않고 무관심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의 상처를 하느님께 바칠 수 없다. 이 사실을 우리가 자각한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상처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그분의 것이 아니면서 우리의 것일 수 있는 것은 바칠 수 없다. 하느님 밖에는,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한 우리 밖에는 실제로 ‘지옥’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청원기도란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청원기도는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타자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다. 이 대화에서 나의 일차원적인 감정, 소망과 생각 들에서 조용히 거리를 두고 복음 말씀과 대면한다. 그러면서 고귀한 기도의 성령 안에서 나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법을 배운다. 기도 안에서 나는 피하지 않고 미루지 않고 잊지 않고 눈을 감아 버리지 않는 용기와 힘을 청한다.
또한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람을 정말로 ‘놓아주고’ 포기하는 것 즉 겸허히 그리고 현실적으로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신이 ‘전능하다는 망상과 환상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와 과부하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배운다. 이를 통해 나는 또한 죄책감, 부당함, 분노, 무능이라는 스스로에게 부과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이 아니므로, 내가 많은 과제를 하느님 그리고 그분이 이러한 일들을 위해 찾아낸 이들에게 넘겨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할 때 느끼는 걱정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느님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냉정함,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들을 변화시킬 용기 그리고 이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셨다.
기도는 진정제나 하느님 치마폭에서 흐느껴 우는 시간이 아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대장간이다. 거기서 복음 말씀으로 녹여져 그분의 도구로 단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도구는 그분의 손안에서 자유도 책임도 잃지 않고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사용될지 결정된다.
기도는 천상을 날아다니는 공상 여행이 아니고 우리 소망의 피안으로 달아나는 도피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공상에 잠겨 수동적으로 우리 상상, 투사, 공상, 망상 속에서 하늘을 보려 할 때마다 기도는 우리 시선을 지상으로 돌려놓는다. 이와 같은 음성은 우리를 모든 경건한 도피에서 나오게 하고, 땅 위에 단단히 서서 땅에 성실하고, 우리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땅(탈출 3,5)임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이 세상은 하느님의 보물이 숨겨진 밭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태 13,44 참조)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실 때 제자들에게 “밭은 세상이다”(마태 13,38) 라고 말했다.
그분이 끊임없이 활동하고, 끊임없이 일하라고 우리를 파견하는 밭은 우리 마음, 이 세상에 놓여 있는 우리 삶이기도 하다.
십자가 앞에서 또는 이콘 앞에서 기도를 할 때 이러한 상징물들이 마법적이고 거룩한 물건, 마법 도구여서는 안 된다. 이 표상들은 우리를 꿈에서, 자기 주위만을 맴도는 자아도취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기 말만 하고 싶은 유혹을 그만두게 하는 기억(ananmnesis)이어야 한다. 기도는 대화다. 따라서 우리가 쏟아 내는 아름답고 경건한 시적 표현에서 그분의 말씀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응답은 우리가 처음부터 듣고 싶었던 답을 순진하게 혹은 영리하게 짜 맞추는 은밀한 귓속말이 아니다. 우리 감옥의 ‘벽을 두드리는 하느님의 노크 소리’는 심령 모임에서 탁자를 두드리고, 이미 나누어 준 카드를 읽거나 ‘임의로 넘긴 성경페이지’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거나 미국 텔레비전 속 목사의 유치한 방식을 흉내내는 설교를 통해 우리를 믿게 하려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느님의 응답은 지금 차분히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분의 면전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읽어내는 우리의 삶이다. 복잡하게 꼬인 암호 같은 우리 삶이라는 본문을 복음의 열쇠로 풀 수 있다.(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복음을 자기만의 경험을 통해 거듭해서 더욱 깊이 이해한다.) 다양한 체험들로 빠르게 흘러가는 삶은 기도와 명상에서 단 하나의 경험으로 변화된다,
그렇다, 기도는 하느님의 대장간이다. 고귀한 영혼이 기쁨에 차 잠든 조용하고 구석진 곳이 아니다.
가끔 나는 ‘청을 들어주지 않은 은총’에 대해 말한다. 그러한 경험에 직면했을 때만 인간은 신앙의 문턱에 도달한다. 종종 남모르게 또는 스스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믿음직하고 실수 없이 자신의 주문을 처리해 주는 자판기로 여겼다면 ‘하느님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의 살림살이에 튼튼하고 성능 좋은 제품으로서 하느님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신앙과 기도에서 우리는 능력과 지혜를 키우고. 우리의 바람과 요청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도록 사심 없는 마음가짐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분명 많은 사람이 갈 수 있는 넓은 길은 아닐 것이다.
기도와 묵상은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지 고민하는 작업장이다. 그곳에서 감정의 덧없는 거품이 꺼진 후 아담처럼 변명의 덤불에 숨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느님께 대답하려는 의지가 성숙한다.
기도와 묵상은 결국 우리 삶의 상처를 치유하는 장소다.
그러므로 나는 대형 경기장에서 열리는 복음화 집회가 외치는 ‘신앙을 통한 치유’를 믿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히려 사자에게 물어뜯기는 원형경기장의 순교자 모습이라고 늘 생각했다. 나는 교황 방문이나 그와 비슷한 일로 야외에서 행해지는 미사에 반감이 없다. 그러나 대형 스피커에서 “예수 믿으시는 분, 손을 높이 드세요, 알렐루야!”같은 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 소리는 높이 쳐든 손들의 숲이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대세를 따르라고 재촉하고 이는 곧 회개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럴 때 가톨릭 미사 전례의 ‘마음을 드높이’를 떠올린다. 손을 높이 드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교 전통이 기도를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드높임으로, 외적이 아니라 내적 움직임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기억한다.
사제는 전례에서 손을 높이 들어 올리지만, 이는 대형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따른 몸짓이 아니다. 그리고 부흥회와 달리 가톨릭 전례는 전체주의 국가 의회에서의 만장일치 투표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따르는 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손처럼 우리 몸을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변화된 마음이지, 분위기나 대중이 부추기는 감정의 불꽃이 아니다. 마음의 변화는 마음이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 스스로 상처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감정이 모든 것을 명령하고 정당화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러한 일방성은 서서히 인간성을 부식시킨다. 사랑을 감정의 동요와 혼동하는 사람들은 배우자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배우자를 떠날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신앙을 경건한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혼동하는 사람들은 종교 생활에서 마침내 기저귀를 떼고 성숙할 기회를 갖게 되는 순간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희망을 낙관적인 감정과 혼동하는 사람들은 삶을 둘러싼 낙관적 환상이 희망을 빼앗아 갔을 때 그 순간이 희망의 힘을 입증할 기회임에도 그들은 자살을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나 기분에 대해서가 아니라, 희망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은 위에서 본다면, 즉 신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의 행위, 우리 영혼에 부어진 은총이다. 이는 ‘신학적 덕들’이다. 내가 믿지 않고자 한다면, 내 온 삶에서 나의 불신앙을 위한 새로운 이유들을 항상 만날 것이다. 사랑, 희망도 마찬가지다. 용서 또한 그렇다.
예수가 바리사이들에게 동정심을 갖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미워했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랑은 내가 다른 이에게 선을 기원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에게 이를 증명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미움은 내가 그에게 악을 기원하고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자마자 그에게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의지와 자유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대화로 형성되고 성숙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유는 세상과 우리 이웃의 상처와 요구에 다양하게 담겨있는 하느님의 요청에 대한 자유롭고 창조적인 응답이 될 때 성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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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몇 년 전 이야기다. 독일의 한 도시에서 어떤 부부가 학교 교실 벽에서 십자가를 떼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들의 자녀가 십자가 같은 흉측한 물건을 보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후 소송으로 불거졌고 마침내 카를스루에 있는 헌법재판소는 공립학교에서 십자가를 걸지 말라는 판결을 내렸다. 몇 년 후 프랑스 의회는 언론이 상세히 보도했던 무슬림 여학생들의 베일 착용에 관한 오랜 논쟁 끝에, 프랑스 학교에서 무슬림 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