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언제부터 첨단이라는 단어을 자주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cutting edge’ 또는 ‘leading edge’ 라는 영어 표현을 옮기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사전에서 찾아보면 “시대 사조, 학문, 유행 같은 것의 맨 앞장”이라는 정의와 함께 “뾰족한 끝”이란 정의가 내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leading edge’, 즉 앞서간다는 개념보다는 ‘cutting edge’의 뾰족하다는 느낌이 더 깊이 새겨진 것 같다. 그래서 지극히 기술적인 분야가 아니면 첨단과학이 아닌 것으로 오해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생존 그 자체가 위협받는 이른바 ‘환경의 세기’에 살고 있다. 우리 모두를 이 엄청난 환경의 위기로부터 구해줄 생태학이 첨단의 관심사가 아니라면 무엇이 과연 첨단일까? 인류의 종말이 머지않은 상황에서 소위 첨단과학이라 일컫는 그 모든 과학 분야에 매달리는 게 무슨 ‘뾰족한’ 대수일까 싶다.
나는 2003년 1월 16~18일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신세기문명 포럼’에 참석했다.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가 주관한 이 국제포럼에서 나는 ‘호모 심비우스:21세기의 새로운 인간상’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포럼에서 나는 ‘현명한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사피엔스를 버리고 이 지구를 다른 생명과 공유하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공생인, 즉 호모 심비우스로 거듭나자고 호소했다. 그러자면 나는 무엇보다 우리 인류가 ‘생태적 전환’을 이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인류는 그동안 여러 다양한 전환을 맞았다. 언어적 전환, 문화적 전환 등이 있었다. 지난 세기말은 단순한 세기의 끝이 아니라 하나의 밀레니엄을 보내고 새로운 천 년을 맞이하던 순간이었다. 당연히 미래에 대한 구상이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었다. 기술적 전환, 로봇의 전환, 정보의 전환 등등.
그러나 나는 매우 당당하게 다른 모든 전환은 조만간 무의미해진다고 주장했다. 세가지 이유를 들었다. 21세기에는 1)기후변화, 2)생물다양성의 고갈, 그리고 3)치명적인 질병의 대유행 때문에 인간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텐데 다른 전환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역설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0여 년 전 나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전환은 바로 생태적 전환이라고 부르짖었다.”
최재천 <생태적 전환, 슬기로운 지구 생활을 위해서> 중에서
“2019년 프란시스코 교황은 ‘하느님, 다른 사람들, 공동체, 그리고 환경에 반하는 행동 또는 태만을 생태적 죄로 규정하고 이를 천주교 교리에 포함한다고 선언했다. 다 같은 피조물 간의 연대를 끊는 행위는 자연의 상호 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원죄이다…, 시간과 공간도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자연계 자체의 상호작용과 더불어 자연계와 사회 체계의 상호작용을 고려’해야만 생태적 해결을 찾을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태적 죄를 규정한 지 겨우 두 달도 채 안 돼 일어난 이번 팬데믹은 ‘자연 세계에 저지른 죄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거슬러 저지른 죄’라는 관점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어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환경 위기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이 힘 있는 자들의 이익 추구 일변도와 사람들의 관심 부족으로 효과를 내지 못했다고 유감스러워한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끔찍한 재앙을 예견하고 통렬한 “생태 회개”를 주문했다. ‘공동의 집’을 함께 돌보기는커녕 자꾸 허물기만 하는 인간은 회개해야 한다. 지구가 걱정스럽다는 사람들이 있다. 천만에, 지구는 살아남는다. 비록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인간이 사라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