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월 세마성당 영적 독서「평화안에 머물러라」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9-01-23 19:29:08    조회 : 336회    댓글: 0
세마 성당 2019. 1월 영적도서 : 「평화안에 머물러라
지은이 : 자크 필립 신부
· 1947년 프랑스 로렌 지방에서 태어났다. 1976년 베아티튀드 공동체에 입회하여 4년간 이스라엘에 머물면서 유다주의를 공부했다. 1981년부터 로마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한 후 1985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이탈리아 공동체 책임자로 일했다. 1994년 프랑스로 돌아와 공동체 양성을 담당하고 평의원으로 일하며 프랑스와 해외에서 피정을 지도했다. 최근에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서 공동체 발전을 위해 자주 현지를 방문하고 프랑스 공동체에서 양성과 교회법을 담당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하느님을 위한 시간 Du temps pour Dieu」, 「삶으로 부름받아 Appele a la vie」, 「평화 안에 머물러라 Recherche la paix et puorsuis-la」, 「내면의 자유 Liberte inteieure」가 있다.
 
옮긴이: 조안나
 
 
 
나눔의 글
 
 
가끔은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미사 중에 우리는 일상적이지만 부드러운 미소로 평화의 인사를 서로 나눕니다. 「평화 안에 머물러라」 - 손바닥 만한 자그마한 크기의 평화의 길잡이 속에서 평화의 하느님을 만나시기를, 주옥같은 내용을 요약하면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콜로 3,15)
“그대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애덕을 영혼에 가져다주는 평화야말로 영생으로 이끄는 지름길임을 체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후안 데보니아, 16세기)
-머리글 중에서-
 
 
 
제1부 성덕의 길인 내적 평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가능한 한 마음의 평화를 얻고 간직하려 애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려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모든 선이 오직 하느님한테서 온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고 말씀하셨다. 이 진리를 깊이 알아들어야 한다. 우리는 실패와 시련,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굴욕을 여러 번 겪고 나서야 비로소 지성으로만이 아니라 온 존재로 이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소화 데레사는 주님께서 자기 영혼에 하신 가장 큰 일이 ‘자신의 작음과 무력함을 보여주신’ 것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성과 계획, 능력으로 많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데 목표를 두어선 안 된다. 그것이 우리 눈에 아무리 좋은 일로 비치더라도 그렇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상태라든가 마음의 근본 태도 또는 영적 조건이 어떠해야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실 수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우리가 제시하고 전개하려는 진리란, 우리 안에 활동을 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선행”(에페 2,10)을 열매 맺게 하려면 (물론 의지 · 지성 · 능력의 협력이 필요하다) 마음의 평화, 곧 ‘내적 평화를 얻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 영혼이 평화롭고 한결같으며 내맡겨져 있을수록 본질적 선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웃에게 더 잘 전해진다.
 
흔히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애쓰며 불안해한다. 그러나 하느님 눈길 아래 평화롭게 머물면서 우리 지혜와 능력을 무한히 뛰어넘는 그분의 지혜와 권능으로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일하시게 해드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물론 게으름과 무위를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활동을 하되 온유하고 평화로운 영이신 하느님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라는 것이다. 자주 불안하고 동요되며 지나치게 서두르는 우리 자신의 영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비록 하느님을 위한 것이더라도.
 
내적 평화와 사도직의 풍성한 결실
 
어떤 이들에게 내적 평화 추구는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세상에는 고통과 비참이 만연하고 있는데 어떻게 안일하게 내적 평화 추구를 우리의 주목적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먼저 여기서 말하는 내적 평화는 복음의 평화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무감동이나 감수성의 소멸도 아니고, 부처상이나 몇몇 요가 수행자의 이미지가 연상시키는, 자기 안에 폐쇄된 차가운 무관심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기 말하는 평화는 이웃의 고통에 대한 참된 감수성과 진실한 연민과 사랑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런 평화만이 우리 자신한테서 우리를 해방시키며 이웃에 대한 감수성을 증가시키고 이웃을 빈 마음으로 맞이하게 한다.
 
이런 내적 평화를 얻은 사람만이 이웃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 내게 없는 평화를 어떻게 이웃에게 전할 수 있겠는가?
 
평화와 영적 투쟁
 
지금까지 말한 것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진리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차 없는 투쟁이요 싸움이란 점이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 삶이 특별한 일 없이 평범하고 고요하게 흐르는 삶이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악과 유혹, 우리 안에 깃든 죄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의 장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이 이따금 몹시 험난하다 해도, 싸움 후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투쟁하는 절망적 투쟁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며 투쟁하는 싸움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음이 평화로울수록 더 잘 싸울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적 평화는 금세 바닥나 버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싸우게 한다.
 
투쟁의 주목적인 평화
 
종종 영적 싸움은 우리한테서 평화를 빼앗으려는 원수에게 맞서 마음의 평화를 지키느라 생겨난다. 사실 한 영혼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그의 영적 성장을 늦추기 위해 악마가 흔히 쓰는 전략은 영혼이 내적 평화를 잃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16세기 영적 대가 중 하나로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매우 높이 평가한 스쿠풀리(1530-1610)는 이렇게 말했다.
“악마가 우리 마음의 평화를 없애려고 온갖 짓을 다하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평화 속에 머무시며 평화 속에서 큰일을 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 투쟁에 이기려면 우리의 모든 나약함과 결점을 극복하고 결코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고 투쟁에 임한다면 그 싸움터에서 질 수밖에 없다! 우리 가운데 누가 유혹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하느님도 이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됨됨이를 아시고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다.”(시편 103,14)
 
낙심하지 않고 넘어지는 것도 받아들이고 비참하게 떨어질 때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으며 자신의 실패에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더 높이 오르는 기회로 이용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영적 투쟁에서 무엇보다 우리가 노력해야 할 첫째 목표는 (유혹이나 나약함에 대해)언제나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경우를 포함한 모든 상황에서 ‘마음에 평화 간직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그것을 얻을 수 없음도 알아야 한다.
 
참 평화가 있는 곳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믿음의 명제 중 하나는 ‘우리가 평화를 잃는 것은 평화를 엉뚱한 데서 찾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믿는 이들인 우리의 평화는 본질적으로 이 세상에서 오지 않는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그 평화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신뢰에서 온다.
 
평화에 필요한 선한 의지
 
어떤 사람이 하느님 가까이 있으면서 주님을 섬기길 바랄 경우 악마가 흔히 쓰는 전략은 마음의 평화를 잃게 하는 것인데, 이때 하느님은 오히려 그에게 평화를 되돌려 주기 위해 그를 도우신다. 그러나 마음이 하느님한테서 멀고 무관심한 악의로 살아가는 이한테는 이런 법칙이 반대로 적용된다. 악마는 그가 거짓된 평온 속에 계속 머물게 하고, 그의 구원과 회개를 바라시는 주님은 그의 양심을 괴롭게 하여 죄를 뉘우치게 하신다.
 
내적 평화의 필요조건은 ‘선한 의지’다. 달리 말하면 마음의 순수함이다. 이러한 선의, 곧 큰일에나 작은 일에나 언제나 하느님께 ‘예’라고 말하려는 습관적 결의는 내적 평화의 필수 조건이다. 하느님께 자기 의지를 드린 사람은 어떤 의미로 이미 모든 것을 드린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하느님께 반대되는 모든 것에서 이탈하려는 항구한 결심이 있어야 한다.
 
평화에 충분한 선한 의지
 
선의는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기 위한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의를 지니고서도 여전히 많은 결점과 과오를 범할 수 있지만, 선의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하다.
 
사실 선의 외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겠는가? 선하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이 당신을 무엇보다 사랑하기를 바라면서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 괴로워 하고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알면서도 당신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쓰는 우리를 보는 것 외에 우리에게 무엇을 더 바라시겠는가?
하느님께서 몸소 개입하셔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실현할 수 없는 욕망들을 이루게 해주시지 않겠는가?
 
 
제2부 평화를 잃지 않으려면
 
생활에 대한 걱정과 결핍에 대한 두려움
 
우리가 흔히 평화를 잃게 되는 주원인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위협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이다. 곧 현재나 미래에 닥쳐올 난관에 대한 두려움, 무언가 부족할 까봐,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지 못할까 봐 갖게 되는 겁이다.
 
어떤 것이든 인간이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고 있는 것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고, 절대로 보장된 것은 없다.
 
우리가 평화를 잃게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오로지 인간적 재주와 개인적 기획과 결정 또는 다른 이의 도움을 기댐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보장하려는 태도다. 우리의 무능과 제한성, 어떤 것도 예견할 수 없는 무지함, 우리가 의지했던 사람들의 한계에서 느끼게 될 실망 등을 생각할 때 ‘스스로를 구하려는’ 사람이 갖게 되는 불안과 번민이 얼마나 클 것인지 알 수 있다.
 
우여곡절을 겪지 않을 수 없는 인간 실존에서 평화를 보존하려면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아시는 하느님 아버지”(마태 6,32)를 온전히 신뢰하며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기에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걱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을 보장하려 하고 그 때문에 슬프고 불행해진다.
 
우리는 모두 이 불신의 흔적을 지닌 채 세상에 태어난다. 이것이 바로 원죄다. 우리의 영성생활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하게 해주시는 성령의 은총으로 재교육되어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아가는 긴 여정이다.
 
‘신뢰로 되돌아가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며 고통스럽다. 여기엔 두 가지 장애가 있다.
 
하느님의 섭리를 믿기 어려움
 
첫째 장애는, 우리의 본질적 필요를 돌보시는 충실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구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참으로 섭리를 믿고 의탁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고집이 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론 충분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눈으로 보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주위에서 활동하는 섭리를 뚜렷이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섭리를 체험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이 활동할 여지를 줄 때만 그 도움을 체험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께 기대하는 만큼 주신다.”라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가 갖는 신뢰에 비례한다.”고 했다.
 
수도회 설립자들은 신앙 정신으로 대담하게 앞장서 간다. 그들은 돈 한 푼 없이 집을 사고 식량 한 톨 없이 가난한 이들을 맞아들인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는 우리 자신의 삶 또는 세상에서 만나는 고통이다. 하느님은 당신께 자신을 맡기는 이들한테도 고통을 허락하시며 때로 어떤 것의 결핍을 겪도록 하신다.
 
세계 역사는 물론 개인생활에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끝까지 (아무리 불합리해 보일지라도) 우리의 선을 위해 사용하실 만큼 선하시고 힘 있으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물론 이에 대해 수학적 · 철학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으며 믿음의 행위만 할 수 있다. 부활은 악에 대한 하느님의 결정적 승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삶의 어느 순간에든 겉으로 나타나는 것을 뛰어넘고 믿고,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도록”(로마 4, 18) 초대된다. 하느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언제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 개입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우리 힘이 미치는 인간적 지혜가 아니라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나 이해하지 못한다니 다행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의 지혜가 당신 계획대로 활동하시게 어떻게 놔둘 수 있겠는가? 신뢰를 위한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사실 많은 경우 우리라면 틀림없이 하느님이 하신 방식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라면 구원 수단으로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가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 잘 신뢰하려면 : 어린아이의 기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자랄까? 지적 성찰이나 신학적 고찰을 통해서는 물론 아니다. 이런 것들로는 시련의 순간을 지탱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관상하는 눈길을 통해 신뢰를 키워 나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을 관상하고, 십자가 위에서 보이신 ‘참으로 크신 사랑’에서 양분을 받아 신뢰를 키울 수 있다.
 
우리는 이처럼 관상이 신뢰의 성장에 절대로 필요함을 본다. 결국 많은 이가 관상을 하지 않기에 불안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대한 사랑 어린 시선을 통해 마음에 양식을 주고 평화를 되찾아 주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내적 평화의 참된 근원인 침묵기도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정하고 자애로운 마음을 느껴야 한다. 이는 하느님 안의 부드러운 휴식인 관상기도에 충실할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큰일에서든 작은 일에서든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하느님께 내맡기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하느님이 당신의 무한한 자비 속에서 나를 위해 하시는 것을, 신비롭게 감춰진 방식으로 모든 이와 세계를 위해서도 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철저한 내맡김
 
내맡김이 제대로 이루어져 평화를 가져오려면 철저해야 한다. 아무것도 제외하지 말고 몽땅 하느님 손에 맡기고, 물질이든 감정이든 영적 차원이든 모든 영역에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관리하거나 ‘스스로를 구하려’해선 안 된다.
 
우리가 내려놓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우리의 내적 평화는 포기와 이탈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맡기면서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가져가거나 주시도록 허심하는 사람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깊은 내적 평화와 자유를 누리게 된다.
 
모든 것을 요구하시는 하느님
 
덧붙여 꼭 알아야 할 점이 있다. 악마가 우리를 동요하고 낙담하게 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전략을 간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악마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을 방해하려고 우리가 지닌 선물(물질적 재화나 우정, 또는 우리가 좋아하는 활동 등)에 대해 잘못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이런 전략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당황하지 않고 완전한 신뢰 가운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그분이 바라는 대로 사용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다.
 
내맡기기 어려울 때
 
“내맡기기 어려울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 마르트 로뱅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내맡기세요!” 이 대답은 아기 예수의 소화 데레사의 “전적인 포기만이 내 유일한 법칙입니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포기는 자연히 되는 것이 아니므로 하느님께 은총을 청해야 한다. 우리가 끈기 있게 청한다면 주실 것이다. “여러분이 구하면 받을 것입니다.”(마태 7,7)
포기는 성령의 열매지만 주님은 믿음을 갖고 청하는 사람에게 이 영의 선물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네
 
시편 23편은 하느님 손길에 신뢰하며 내맡기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끌어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중략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우리의 불완전함은, 한탄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애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와 겸손이 자라고 성덕이 자라날 수 있는 멋진 기회다.
영적인 삶에서 성장하거나 꽃피운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고통 앞에서의 태도
 
식구 중에 건강문제나 실업으로 고통 받거나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을 때 얼마나 많은 가정이 지나치게 불안해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경우 주님은 우리가 이제까지 이야기한 모든 이유에 근거하여 내적 평화를 간직하도록 초대하신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정상이지만 평화를 잃지는 말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여인이 젖먹이를 잊겠느냐? 자기 뱃속에서 나온 아이를 가엾이 여기지 않겠느냐? 여인이 잊는다 해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이사 49,15)
 
그리스도인 삶에서 성장할수록 우리의 연민은 커진다. 우리 본성은 자비롭지 못하고 무관심하지만 성인들은 비참한 세상과 인류의 고통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연민이 자라나지 않는 영적 삶은 그 가치를 의심할 만하다.
 
우리는 어려움 속에 있는 이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을 그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옳은 태도라 여긴다. 그런 태도는 종종 우리 자신의 자애심을 드러낸다. 우리 자신이 고통을 두려워하기에 이웃의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 너무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으로 하느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에 충분히 바탕을 두지 않은 사랑이다.
 
여기서 참된 연민과 거짓 연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연민이 참된 그리스도교적 덕이 되려면 (하느님의 빛 안에서 그분 계획과 일치하는) 사랑에서 나와야지(고통이라든가 무언가를 잃는 데 대한) 두려움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우리가 가까운 이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한없이 더 나은 방법으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점이다. 그분은 우리가 이 사랑을 믿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당신 손에 맡길 줄 알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
 
고통을 겪는 형제자매들 주위에는 평온하고 신뢰에 차 있으며 기쁜 사람들이 필요하다. 평온하고 활기에 찬 이들은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들보다 더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잘못된 연민은 흔히 슬픔에 슬픔을 더하고 혼란에 혼란을 더할 뿐이며 고통 받는 이들에게 평화와 희망의 근원이 되지 못한다.
 
고통 받는 모든 이 안에 계신 주님
 
고통의 드라마를 평화롭게 대면하도록 스스로 도와야 할 결정적 이유가 있다. 우리는 강생과 십자가의 신비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셔서 스스로 우리 고통을 짊어지셨기에 고통 받는 모든 이 안에는 고통 받는 예수님이 계신다.
 
“너희가 이 보잘것없는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 말씀은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려 최선을 다하도록 초대하는 동시에 그 고통을 희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초대한다. 모든 고통 안에는 예수께서 계시기에 생명과 부활의 싹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시지 않았는가? 그분의 수난은 구원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던가? “희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마십시오.”(1테살 4,13)
 
이웃의 결점과 실수
 
때로 우리는 고통이 우리에게 직접 닥치거나 위협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의 행위가 우리를 슬프게 하고 걱정에 빠뜨리기 때문에 평화를 잃곤 한다. 이는 우리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으면서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선善이 원인이다. 우리 공동체, 교회의 선익 또는 개인의 구원이라는 선이 원인이다.
 
이에 대한 대답 또한 신뢰와 내맡김이다. 다른 사람이 좀 더 잘 행동하도록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평화롭고 부드럽게 해야 하지만 나머지는 모든 것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주님께 맡겨야 한다.
 
이 원칙은 이웃의 결점에 대한 인내라는 문제 외에도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을 바라고 열망하는 것만 아니라 그것을 좋은 방식으로 바라고 열망하도록 해야 한다.
 
한 공동체의 책임자가 자기 공동체 회원들의 성덕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훌륭한 바람이다. 그러나 그가 회원들의 불완전함이나 미지근한 태도 때문에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며 평화를 잃는다면 그를 움직이는 것은 분명 성령이 아니다.
 
영성 생활에서 우리 태도의 결함이 자주 드러나는 것도 이 부분이다. 우리는 하느님 뜻에 일치하는 좋은 것들을 바라지만 ‘하느님의 방식’으로 바라지는 않는다. 부드럽고 평화로우며 인내로운 영이신 성령의 방식이 아니라 긴장과 서두름 속에서 인간적 방식으로 바라고 그 좋은 일이 지향하는 목적에 금세 다다르지 못하면 낙심한다.
 
인간적 방식으로 바랄 때 우리 영혼은 동요되고 불안하며 평화를 빼앗겨 우리와 이웃 안에서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서두르면서 덕을 얻으려 하는 것만큼 덕행의 진보를 방해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결론으로 우리의 갈망이나 바람에 대해 우리가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표시는 비단 우리가 바라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데에뿐 아니라 우리가 평화로운가 하는 데에도 달려 있다. 바라는 바가 매우 훌륭한 것이라도 평화를 잃게 하는 바람은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 아니다.
 
이웃에 대한 인내
 
주변 사람들이 더 훌륭하게 행동하기 바라는 우리의 열망 또한 앞에서 말한 원칙을 따라 불안에서 벗어나 평온함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이웃이 부당하고 올바르지 못한 방식으로 행동하더라도 평온하게 머물 줄 알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이가 주변 사람을 어떻게 해서라도 변화시키려고 하면서 평화를 잃어버리는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주님께서 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고 여러 결점을 없애시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견디시며 때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적당한 때를 인내롭게 기다리신다. 나도 주님처럼 해야 한다. 기도하고 인내해야 한다. 어째서 하느님보다 더 요구하고 서두르는가?
 
하느님은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를 사랑하시지만 나보다 덜 서두르신다!
 
인내는 우리 안에서 필요한 정화를 이루어 주는 것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이웃이나 우리 자신의 선을 바란다고 믿지만 우리 바람은 흔히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감춰진 나의 욕구와 자신의 뜻, 편협하고 제한된 개인적 애착과 뒤섞여 있다.
 
우리 자신의 잘못과 불완전에 대한 인내
 
우리가 잘못한 후에 느끼는 영혼의 슬픔과 낙심과 불안은 좋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평화 속에 머물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비참과 실패를 겪을 때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근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불완전함과 죄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초인적으로 노력하는 것(아무튼 이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이 아니라 잘못을 했을 때나 자신의 불완전 때문에 동요될 때 슬픔이나 낙심에 빠지지 않고 최대한 빨리 평화를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관용주의도 아니고 범용함에 머무는 체념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빨리 성화에 이르는 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느님은 영혼의 평화 속에서만 일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에 대항해 분주히 애쓰기보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평화를 되찾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둘째, 그렇게 할 때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기도 하는 것은 어떤가?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또 죄를 지었습니다.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겨우 이겁니다. 어느 날인가는 당신이 저를 완전히 낫게 해주실 것을 알기에 신뢰하며 당신께 맡깁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제 비참에 대한 경험이 저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이웃에 대해 더 자비롭게 만들며 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당신의 사랑과 자비에서만 모든 것을 바라야 함을 더 잘 깨닫게 해주도록 당신께 청합니다.”
 
셋째, 우리가 실패나 잘못 후에 느끼는 동요나 슬픔, 낙심이 순수한 경우는 매우 드물며 하느님을 거스른데 대한 단순한 아픔인 경우도 극히 적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의 상당 부분은 자존심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거슬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이상적 이미지가 흔들렸기에 슬퍼하고 낙담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통은 흔히 상처 입은 오만에서 온다! 이 과도한 고통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과 스스로의 힘을 신뢰했다는 표시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않으며 하느님 한 분께만 의지하는 겸손한 이들한테는 이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는다.
 
잘못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
 
이런 슬픔과 낙담이 좋지 않은 네 번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잘못을 너무 비극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 잘못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
아기 예수의 소화 데레사는 십자가의 상 요한의 다음 말을 매우 좋아했다. “사랑이신 분은 내 안에 있는 선한 것뿐 아니라 악한 것도 이용하시면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신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는 그분이 우리 잘못과 불충실한 모든 것에서 선을 끌어내실 수 있다고 믿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잘못은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덜 의지하고 하느님을 더 신뢰하는 선을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우리 죄가 이웃에 대한 자비와 친절의 원천이 될 수 있음도 알아야 한다. 그토록 쉽게 넘어지는 나인데 어떻게 내 형제를 판단할 수 있을까? 어떻게 주님이 내게만 자비로우시고 내 형제에게는 자비롭지 않으시겠는가?
 
평화는 영의 식별에 본질적인 기준이다. 하느님의 성령한테서 오는 감정은 매우 깊고 강렬하며 언제나 평화가 뒤따른다. 우리를 동요시키고 용기를 앗아가며 게으르거나 소심하게 만들고 의무를 행하는 데 늑장을 부리게 한다면 원수의 소행이므로 ‘그 회한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평상시대로 행동해야’ 한다.
영적 성장의 표시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보다 죄에서 빨리 일어서는 데에 있다.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까지 말한 것에서 우리가 잘못했을 때 가져야할 중요한 행동 규칙이 나온다.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평화를 되찾아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영성생활을 계속해야 한다.
 
‘죄를 지은 내가, 하느님을 거스른 내가 어떻게 이런 상태로 그분 앞에 선다는 말인가!’ 어떤 때는 기도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데 며칠씩 걸리기도 한다.
이는 중대한 잘못이며 악마가 불어넣는 거짓 겸손이다. 오히려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참된 성덕은 우리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의존해야 하는지를 더욱 깊이 인정하는 데 있다.
 
교만이라는 커다란 악에서 보호하시려고 주님은 때때로 우리가 어떤 결점에 빠지는 작은 악을 허락하시는데, 우리는 이에 감사해야 한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느끼는 불안
 
평화를 잃게 하는 원인 중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명확히 알 수 없을 때의 불안감과 시련을 겪는 양심의 불안에 대해서다.
 
이런 경우에도 이제까지 우리가 말한 포기와 신뢰라는 일반적인 태도, 어떤 것도(심지어 우리의 실수가 가져다줄 결과까지도!) ‘극화’하지 않도록 해주는, 하느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는 바로 이처럼 불확실한 상황에서 지녀야 할 중요한 자세다.
 
우리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지나치게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의 여러 측면을 분석하고 개인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결정하기 위해 자신의 동기를 성찰하며, 성령께 하느님 뜻에 맞게 행동할 빛과 은총을 청하는 기도를 하고, 필요하다면 결정에 빛을 주는 사람들의 조언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지닌 문제나 딜레마에 대해 다른 이에게 말하기 위해서는 겸손과 신뢰의 태도가 필요하다. 소중한 내적 평화는 삶의 어떤 순간에는 우리 혼자서 찾을 수 없고 누군가에게 우리 영혼을 열어 보이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성 알폰소 데 리구오리도 뛰어난 영적 지도자였지만 자신의 영성생활을 위해서, 자기를 열어보이던 사람의 도움 없이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주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때로 주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놔두신다. 또 그분만이 아시는 이유 때문에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 주님이 우리를 불확실 속에 버려두실 때는 평온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선의와 올바른 지향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전무결하거나 우리의 결정이 완벽하기를 요구하시지 않는다.
 
악마는 우리 안에 세심증을 일으켜 놓거나, 우리가 행해야 하지만 힘이 닿지 않거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지 않는 선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면서 우리를 낙담하게 하고 평화를 잃게 만든다.
 
악마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이런저런 희생을 주님이 요구하신다고 믿게 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악마는 온갖 세심증과 양심의 불안을 일으키나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하느님 품에 달려들어 이를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결정을 이끌어야 할 자유로운 정신에 대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말로 이 장을 끝맺으려 한다.
 
마음을 넓게 가지고 용기를 내십시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언제나 섭리에 내맡기면서 더 큰 부드러움과 고요함을 지니도록 하십시오.(플레셰르 부인에게, 1609년 5월 13일자 편지)
 
사랑의 왕도王道
 
유일하게 참된 완덕은 사랑의 완덕이다. 파우스티나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무얼 해야 할지 모를 때 나는 사랑에게 묻습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조언자니까요.”
 
복음에 따르면 흠잡을 데 없이 행동하는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완전하다. 완전한 행동이란 하느님께 대한 사심 없는 사랑이 더 크고, 자신에 대한 교만한 추구가 적은 행동이다.
 
자신의 가난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의 가난은 하느님이 당신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시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능함과 아무 것도 아님이 더 이상 슬픔과 불안의 원인이 아니라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을 줄 때 우리는 성인이 될 것이다.
 
몇 가지 조언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을 실천하도록 하자. 근본 원칙은 ‘나는 결코 낙담하지 않겠다!’이다. 또 하나의 실용적 원칙은 내가 큰일을 할 능력이 없다 해도 낙담하지 않고 작은 일 들을 실천하는 것이다.
“착하고 충성스런 종아, 너는 작은 일들에 충실했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들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어려운 상황에서 평화로이 머물 수는 없더라도 좀 더 쉬운 매일의 상황 속에서 평화를 간직하려고 노력하자. 주위 사람들에게 평화롭고 부드러운 말과 행동을 보이고 서두르지 않으면서 일상의 일들을 짜증 내지 않고 평온하게 해야 한다.
 
 
제3부 성인들의 조언
 
후안 데보니야*
*16세기 스페인의 프란치스코 회원. 그의 저서「영혼의 평화에 대하여」「내적 평화」에서 발췌
 
그대의 마음이 동요나 슬픔, 흥분이나 불안에 휘말리게 놔두지 말라. 언제나 평온한 마음을 지니도록 노력하라.
주님은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 하셨다.
 
참된 자유는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데 있다. 그대가 이렇게 거리낌 없게 될 때 하느님은 그대 영혼을 찾아오셔서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이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1567-1622
 
평화의 하느님
사랑은 평화 속에 머문다. 내가 그토록 자주 그대에게 권고한 마음의 거룩한 고요를 간직하도록 언제나 노력하라.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정신을 동요시키는 모든 생각은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평화의 임금이시다. 불안과 동요는 원수의 유혹이므로 물리쳐야 하며 결코 내 안에 남겨두어선 안 된다.
 
어디서나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내적이든 외적이든 고통이 올 때 평온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기쁨이 온다면 이 또한 평온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악을 피해야 할까? 악을 피할 때도 동요하지 말고 평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을 피하면서 오히려 걸려 넘어지고 악마에게 기회를 주어 우리를 쓰러지게 할 수 있다. 선을 행할 때에도 평온하게 해야 한다. 서두름으로써 우리는 많은 잘못을 할 수 있다.
 
평화와 겸손
평화는 겸손에서 생긴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높은 평가와 자존심에 잡혀있을 때 불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스스로를 선하고 단호하며 견고하다고 믿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고 실패해 버렸음을 볼 때 실망하여 동요되고 불안해한다.
 
모든 것이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 하느님은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능력과 지혜가 있는 분이시니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이들에게만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다. 하느님께서 성 바오로를 거꾸러뜨리셨듯이 그대에게 실패를 겪게 하신다면 그것은 그대를 다시 영광으로 들어 올리시기 위함이다.
 
하느님만을 절대적으로 바라라
하느님만을 절대적인 분으로 오롯하게 바라야 한다. 그러나 그분을 섬기는 방법에 대해서는 융통성을 지녀, 누군가 우리에게 그 방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
 
섭리를 신뢰하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 섭리의 크기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에 비례한다.
 
사랑하는 딸이여, 어린아이처럼 되라. 어린아이들은 아무 일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생각하는 부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니 사랑하는 딸이여, 그대도 이렇게 하면 넘치는 평화를 누릴 것이다.
 
서두르지 마라
일을 할 때 결코 서두르지 마라. 서두르며 급하게 한 일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그대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평화롭게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해나가도록 노력하라.
 
자신의 결점 앞에서 평화를 간직하라
우리는 자신의 결점을 미워해야 하지만 이 미움은 격하거나 혼란스럽지 않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이어야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
*1515-1582
 
참된 겸손과 거짓 겸손
악마가 우리에게 불어넣는 겸손을 경계하라. 악마는 눈앞에 우리 죄의 심각성을 보여주면서 몹시 불안하게 만든다. 이렇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혼을 불안하게 한다.
 
참된 겸손은 영혼을 불안하게 하거나 뒤흔들지 않는다. 오히려 평화와 기쁨과 휴식이 따른다. 거짓 겸손은 영혼을 오통 뒤집어 놓고 씁쓸함으로 가득 채운다. 악마는 우리 스스로가 겸손하다고 믿게 하여 할 수만 있다면 하느님께 대한 모든 신뢰를 잃게 만들고자 한다.(「완덕의 길」, 41장)
 
 
강생의 마리아*
*1566-1618 프랑스 신비가로서 맨발 가르멜회를 프랑스에 처음 도입했다.
 
하느님 뜻에 내맡김
만일 우리가 내적 시선을 통해 우리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과, 우리가 불행이나 슬픔이나 비탄이라 부르는 것 속에 깃든 모든 선의와 자비를 볼 수 있다면,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은 마치 어머니 품 안으로 달려드는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비오 신부*
*1887-1968. 카푸친 수도회 사제로 오상을 받았다. 이 글은 이 책의 저자가 번역한 편지에서 발췌했다.
 
평화는 단순한 정신이요 평온한 양심이고 고요한 영혼이며 사랑의 끈이다. 평화는 질서이며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조화로움이요,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지속적 기쁨이며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마음의 거룩한 경쾌함이다. 평화는 완덕의 길이다. 아니 오히려 평화 속에서 완덕이 발견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잘 아는 악마는 온 힘을 다해 우리가 평화를 잃게 하려 애쓴다.
 
영혼은 하느님을 거스른다는 단 한 가지만을 슬퍼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 잘못을 뉘우쳐야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면서 평화로운 가운데 해야 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비난과 회한을 경계하자. 이런 비난은 흔히 악마한테서 오는데 그 목적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평화를 깨뜨리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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