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월 세마성당 영적독서「神學 하는 즐거움」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9-07-31 11:38:14    조회 : 250회    댓글: 1

2019년 7월 세마성당 영적 도서  : 「神學 하는 즐거움」

지은이 : 송용민 신부
1997년 6월 26일 사제품을 받았다. 2003년 독일 본대학교에서 기초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4년 인천교구 부평4동성당 보좌를 거쳐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2010년 안식년을 거친 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인천 삼산동성당 주임, 2013년부터 2014년 8월까지 인천 강화성당 주임을 역임했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총무를 맡았다. 현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에 「세상 속 신앙 읽기」 · 「문지방에 선 신앙」 · 「신학 이해를 찾는 신앙」, 역서에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이 있다.
 

나눔의 글
 
송 신부님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나아가 세상 모든 일을 주님의 섭리를 통해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일이 전문 신학자나 신학생들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셨기에 이 책을 통해 막연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신학의 문턱을 한층 낮춰주고 있습니다.

송 신부님은 “올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선 내 신앙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작업이 꼭 필요하며 일상 속에서 믿음의 언어를 찾고, 마침내 나의 진정한 안식처가 어디인지 깊이 사색해 보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고, 신학의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2010년 11월부터 2011년 5월까지 평화방송에서 「神學 하는 즐거움」이란 제목으로 강의한 내용의 전반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신학 하는 즐거움은 크게 1부 신학을 준비하는 이야기와 2부 신학의 출발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만을 간추려 올려봅니다.  


1부 신학을 준비하는 이야기
 
신앙생활, 즐겁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또는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을 할 때 우리는 즐겁습니다. 반대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왜? 라고 질문을 던지지만 그 답을 찾지 못할 때 나는 즐거움을 잃고 맙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한 고민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신앙생활이 부담스럽다고 하는 신자도 많아집니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교회공동체와 함께 신앙생활 하는 일도 부담스럽고, 때로 상처까지 입습니다. 성당에 가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심란합니다. 어려운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가톨릭 신자 중에는 사제가 신자의 영혼 구원에 힘쓰지 않고 세속적인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신부나 수녀들의 권위적인 모습을 보면서 교회에 염증을 느끼고 굳이 성당에 나가야 하나 의문을 갖는 신자들도 늘고 있습니다. 과연 이 많은 의문들을 한쪽으로 밀어두고도 나는 과연 행복한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 믿음을 굳건하게 해주고, 신앙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신앙인의 태도

오늘날 우리는 두 가지 대조적인 믿음의 태도를 만납니다. 하나는 가톨릭교회가 2천 년 역사 속에서 믿어온 것을 그대로 믿으면 되지 굳이 물음을 던질 필요가 없다는 태도입니다. 반면 다른 하나는 내가 믿는 것이 정말로 믿을 만한 것인지, 내가 믿는 것들을 통해 나는 정말로 삶의 기쁨과 평화를 찾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려는 태도입니다.


첫째 부류에 속한 신자들은 자신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도 성경이나 교리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생각하는 능력, 고민하는 능력이 사라지면 쉽게 동물적 감각이 지배하는 세상이 됩니다. 인간의 내면적 가치는 사라지고 동물적 생존 욕구만 가득해 집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 한마디로 ‘철학’이 없는 시대입니다. 철학이란 인간이 지닌 이성의 능력, 곧 생각함으로써 얻는 ‘지혜의 길’을 뜻합니다. 

 
믿음은 시련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여정  

둘째 부류에 속한 신자들은 내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 궁금해 하고 고민하며 믿음에 대하여 적극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번쯤 자기 인생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해본 이들, 곧 시련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몸부림을 쳐본 이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내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앙인이 하느님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련을 겪을 때 믿음이 힘이 된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찾고, 자신이 겪는 모순과 고통이 어떤 의미를 주는지 묻기 시작합니다.


 믿음에 대한 다양한 태도  

내가 향하고 있는 하느님을 향해 이야기하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정말 믿을 만하다고 납득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는 길입니다. 신앙 형태에는 세 가지 정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맹신과 근본주의
이는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길에서 자주 만나는 열정적인 선교사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라는 말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고 그것은 선교가 아니라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무조건 믿으라는 요청은 자신의 믿음을 절대시해서 상대방이 지닌 가치나 신념을 거부하는 배타적 신앙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종교에는 이런 배타성이 담겨있습니다. 가톨릭 신앙은 말 그대로 ‘보편적’ 신앙입니다. 보편적이란 말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떤 장소에서도 믿고, 바라고 희망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뜻합니다.


둘째, 선택적 믿음 , 카페테리아 신앙
이는 내가 믿고 싶은 것,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골라서 믿는 태도입니다. 이른바 ‘선택적 믿음’ 또는 카페테리아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가톨릭 신앙이 지닌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들 중 내가 필요한 것만 선택하고 또 누군가에게 가톨릭 신앙을 소개한다면 반쪽짜리 가톨릭 신앙을 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적당히 내가 원하는 정도로만 믿음을 지키다 보면 더 많이 알고자 하는 필요를 못 느낍니다. 믿음은 알면 알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입니다. 알면 더 많이 보이고 더 사랑할 수 있듯이, 잘 알아야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합리적 믿음, 냉소주의
내가 믿는 것은 다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과학주의 시대인 오늘날, 직접 눈으로 보고 확신할 수 있도록 타당하고 논리적인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가령 하느님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에서, 선하고 정의로우신 하느님이 세상의 악과 고통을 의인에게 허락하신다는 모순은 물론 세상의 창조와 진화에 대한 믿음 사이에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합리적 믿음을 가진 이들은 쉽게 냉소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본래 합리적이기도 상식적이지도 않기에 이들은 쉽게 회의를 느끼거나 하느님의 존재를 수용하지 못해 합리적 무신론에 빠지고 맙니다.

하지만 신앙은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태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삶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과학은 실험을 통해 증명되지만 신앙은 삶으로 증언될 때 살아있는 진리로 확신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음을 던지는 신앙    올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신앙에 물음을 던지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 희망하는 것, 사랑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깊이 생각해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공감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그분에게 공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공감은 내가 왜 하느님을 찾는지, 하느님을 찾고 있는 나는 누구인지 묻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근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최후에 제기해야 할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라고 하면서, 인간이 던져야 하는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소개합니다.


첫째 질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앎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고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야말로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보다는, 입증이 가능한 과학적 진리에 익숙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을 ‘신비’라고 부르는 것도 내가 하느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분명히 우리 삶을 지탱해 주고 계시지만 그것은 과학적 지식으로 입증할 수 없는 지혜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은 먼저 하느님의 신비를 찾아야 합니다. 


둘째 질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행동합니다. 이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순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의지는 인간의 고유한 본질에 속하지만, 우리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날 윤리적 가치들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 질문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우리가 인생에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희망하며 사는지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와 삶의 태도는 달라집니다. 신앙은 내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현실의 모순과 고통 속에서도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의 근거를 묻는 것입니다. 희망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이 세상에서 겪는 죽음의 고통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집니다.


내 믿음에 물음 던지기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 대부분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고 상처받은 이들이었습니다. 신앙은 모두에게 하나의 물음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결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죄의식,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감이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을 위해 어떤 여정을 걸어야 할까요?


첫째,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회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분명 다릅니다. 세속적 축복과 평안함을 찾는 신앙은 찰나의 행복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하는 평화와 믿음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둘째, 사랑하기 위해 더 깊이 이해하기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나와 다른 상대방의 말투와 행동,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만나면 상대를 이해하고 인내해 주기보다는 내 입장에서 판단하고 식별하기 마련입니다. 사랑에는 상대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체험하는 것으로 충분한가요?


신앙은 ‘체험’이고 ‘느낌’이 중요하다?   신앙인의 목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하느님을 만나고 싶지만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야 할지, 하느님을 가슴으로 느끼고 체험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최근에는 ‘영성’이란 이름으로 하느님 체험을 안내하는 피정이나 강좌들이 많이 생겼고, 다양한 종교적 수행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도와줍니다.


신앙은 현실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    신앙은 기적이나 환시와 같은 강렬한 사적 계시를 체험해야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세상 밖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생생한 삶의 체험 속에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내 삶의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믿음, 하느님은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내 곁에 계신다는 믿음이야말로 신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성장시키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오직 죽음 이후에 내 영혼이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구원은 현실의 모순과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으로 언젠가 선물처럼 주어질 해방과 자유, 치유와 위로를 희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세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체험할 수 있는 현실입니다.
 
성령쇄신운동과 하느님 체험      8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서도 성령쇄신운동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이 성령쇄신운동을 개신교 따라잡기나 감성에 치우친 열광주의로 치부하지만, 성령쇄신운동은 얼어붙고 완고해진 자아를 성령께 의탁하여 치유를 얻고,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자신을 투신하는 영성 수행의 일환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성령쇄신운동에서도 심령기도나 기적적 치유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먼저 제공하는 것입니다. 참된 하느님 체험은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나약하고 죄스러움을 직시하고, 그분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묻고 생각하며 식별해 내는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믿음에 대한 이해는 복음 선포의 시작    내가 믿음을 갖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나의 소명과 확신을 살아가는 것이지만, 이웃을 위한 신앙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왜 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내 믿음의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남에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믿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태도, 이것이 사도가 말씀하신 ‘간직한 희망에 대한 설명’이고 생각하는 신앙인이 추구하는 길입니다. 


신앙은 영원을 향한 희망의 사색    신앙에 대한 사색은 숙명처럼 따라옵니다. 신앙은 사라질 것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하며 무한한 것에 대한 희망에 뿌리를 두기 때문입니다. 영원하고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을 향하는 인간을 철학에서는 ‘초월의 인간’이라고 합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神에게 자기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대한 믿음과 봉사로 신앙생활이 충부한가요?


교회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에는 오랜 가톨릭 신앙의 역사와 체험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지식에 갇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태도와 믿음의 내용들을 아무런 고민 없이 글자 그대로 믿는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진정한 겸손은 믿음에 대한 지적 책임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더 이상 깨달을 수 없을 때 그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 참된 겸손이지, 처음부터 무조건 믿기만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아기적 신앙에 머무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내 삶의 언어와 체험으로 풀어내지 않으면 믿음은 자동판매기 같은 요구 충족의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가 곧 교회다     누가 교회인가? 교회는 단순히 건물이나 조직, 또는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제도이기 이전에 살아있는 인격 공동체이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교회란 하느님 백성으로 부름받은 신자 공동체 전체를 뜻합니다. 나의 신앙이 공동체 신앙과 결합되어 있기에 교회 밖의 나는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 생활에서 상처받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교회를 비판할 때 나를 빼놓고 무조건 비난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비판은 언제나 사랑을 동반해야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신앙이고, 나의 신앙은 교회 안에서 표현됩니다.

성직자에 대한 실망 때문에 냉담을 하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계급적 질서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같은 신앙 안에서 다른 소명을 받은 동등한 하느님 백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면 흔히 말하는 사제들의 성직주의나 신자들의 냉소주의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동시에 배우는 것이며, 교도권 역시 언제나 ‘신자들의 신앙 감각sensus fidelium’에서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     함께 신앙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 것이 교회 신앙의 기초입니다. 가령 사제들이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은 가르치는 일면만 지니지 않습니다. 사제가 고해소에서 진심으로 참회하는 신자의 고백을 들을 때 배우는 교회의 지체이기도 합니다.


고해소는 신자들의 영혼 치유만이 아니라, 사제들의 영혼도 정화하는 곳임을 사제들은 압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의 인도로 자비와 용서, 회심을 체험하는 고해소는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나의 믿음은 결코 나 혼자만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하느님 백성의 믿음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교리보다 이웃 봉사가 더 중요하다?      어떤 이는 신앙생활은 삶이고 희생이며 봉사가 우선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회칠한 무덤”(마태 23,27)이라고 비난하신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봉사는 그 자체로 즐거움을 동반해야 하고, 그래야 신심이 자라납니다. 믿음의 성장은 성경과 교리공부를 필요로 하지만, 배우고 들은 복음을 실천할 때 이루어집니다. 봉사가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의 정신으로 삶에 녹아드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인의 목표임은 분명합니다.


봉사의 올바른 지향과 식별의 기준    봉사를 하다가 빠지기 쉬운 유혹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 고 말씀하셨지만 봉사를 하다 보면 누군가가 내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고, 칭찬도 받고 싶습니다. 칭찬과 인정이 자긍심을 세워주지만, 그 봉사가 내가 인정을 받고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때 그것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아닙니다.


봉사는 올바른 지향과 식별을 통한 우선적 선택이 중요합니다. 봉사는 내 능력과 시간에 맞추거나 남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께 사랑받고 용서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고 보속하는 마음으로 봉사할 때 대가를 바라지 않게 되고 개인의 영적 성장에도 도움이 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느님, 내가 믿고 싶은 하느님이 아니라, 나를 아시고 나의 내면 깊은 곳 까지 들여다보시는 하느님을 만나야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체험은 죄의 식별에서    하느님 사랑을 말하면서 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죄란 자기기만과 모순이 드러나면서 겪는 죄책감과는 다릅니다. 신앙인에게 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무한한 자비 앞에서 용서를 청하는, 나약한 인간의 체험에서 나오는 진실된 고백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죄의 인식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갈망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원초적 체험입니다.

고해성사는 내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보속하지 못하고 산 것이 고백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죄책감 때문에 고해성사를 본다면 그 사람은 참된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용서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사랑 체험의 강력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봉사하는 사랑과 보속의 행위    이웃을 위한 봉사도 하느님 사랑과 자비에 대한 감사와 보속에서 시작해야합니다. 사랑과 보속으로 이루어진 봉사에는 교만과 위선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진정한 봉사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남들에게서 인정받기 위한 것일 수 없습니다.


교회 봉사도 직책을 받아서 하다보면 그 직책을 놓은 이후에는 쉬고 싶거나 다른 직책을 얻어야 봉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 안에서의 봉사가 일부 신자에게 집중되고, 본의 아니게 봉사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일도 생깁니다. 행여 본당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다가 상처라도 입으면 언제든 냉담으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봉사는 믿음의 확신에서    이웃에 대한 봉사는 올바른 선의와 확고한 믿음에서 시작해야합니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는 다양한 형태의 봉사와 사도직 활성화를 독려하지만, 동시에 가톨릭 신앙에 대한 정체성과 신자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교우들이 봉사에만 열중하다가 교우 관계에서 상처를 입으면 냉담에 빠지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신학, 생각하는 신앙이 필요한가요?


신학이란 말을 들어 봤나요?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경’이나 교리’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신학’이란 단어는 대체로 생소합니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신학이라는 말에는 ‘신의 말씀‘’ 또는 신에 대한 진술, 담론, 이야기’라는 뜻이 담겨 있고 ‘신에 관한 학문’이란 뜻도 됩니다. 곧 신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묻고 깨닫는 일련의 과정이 신학이며, 한마디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학, 하느님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   하느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아무런 고민 없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넓은 의미에서 신학은 신학생이나 신학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탄원하며 고뇌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학을 하는 주체입니다. 한마디로 신학은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신학을 풀어내는 세 가지 길      하느님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신학을 다음의 세 가지 여정으로 발전하게 했습니다.


첫째, 신학은 ‘하느님의 이야기’, 신화에서 출발한다
神話는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신화들,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단군 신화 같은 신화는 영원한 속성을 지닌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도 사실 신화의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원역사로 불리는 1-11장의 이야기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첫 번째 이야기에 속합니다. 그렇다고 창세기의 이야기가 신화일 뿐이며 허구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원초적 관계에 대한 진실을 당대의 신화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둘째, 신학은 ‘하느님의 이야기’다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뜻을 되새기고 묵고 고민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철학’하는 존재입니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자신의 존재는 물론 존재의 근원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철학과 신학의 차이는, 철학이 인간의 이성으로 세상과 삶의 논리를 찾아보는 것이라면, 신학은 그 세상을 지탱해 주는 신비, 곧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존재에 대한 신뢰로 세상과 인생의 의미를 찾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조차도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이라고 여기며, 철학할 수 있는 이성의 도움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신학은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은총’을 깨달아 가는데 철학의 방법론에서 도움을 받습니다. 과학과 대화하고자 할 때 ‘과학신학’이 되고 생태환경에 고민할 때 ‘생태신학’ 또는 ‘환경신학’이 되기도 합니다.


셋째, 신학은 ‘하느님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주고, 나아가 우리 이야기를 듣고 말씀하는 분이라고 이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바로 ‘믿는다’는 의미이고, 좀 더 깊게 들어가면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성의 길이기도 합니다.
 
신학은 기도할 수 있게 해주는 길입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먼저 듣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되새기는 자세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태도가 일상에서 훌륭한 습관 곧 ‘덕德’이 될 때 영성靈性으로 곧  영적 삶에 대한 애착이 싹트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닮고 싶어 하고, 하느님께서 불어 넣어 주신 생명의 숨을 쉬면서 그분의 거룩한 영, 성령의 인도에 따라 더욱 거룩하고 완전한 삶으로 초대받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이란?  그리스도인이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 곧 나자렛 사람 예수를 통하여 드러난 ‘그리스도’ 곧 구원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정통 신앙을 지키고 보호하며 전승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론과 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지만,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인류에게 내어주신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의 인생이야기, 신학의 시작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며, 여기서 이해해야 할 대상은 내가 믿고 있는 대상,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인 교회이지만, 또한 그런 이해를 추구하는 나 자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내가 믿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묻기 이전에, 하느님을 찾는 나는 누구인지,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며 내가 믿는 하느님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나에 대한 물음이 신학의 시작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은 나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남의 생각으로 나를 생각하고 남의 이야기로 나의 야기를 풀어냅니다. 내 인생 이야기에서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인생 이야기는 삶에 대한 해석  내 인생은 수없이 많은 사건과 기억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들은 그것이 행복한 일이든, 슬프고 고통스런 일이든 내 인생에서 이미 그 의미가 해석된 것입니다.

해석되지 않은 내 인생은 단 한순간도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살아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 해석이 어떤 기준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판단해 주는 해석의 고리를 찾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내 인생은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평가하는 현재의 기준이 됩니다.


역사적 실존으로서의 인간    인간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 살며 자신의 존재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생하게 의식하는 존재입니다. 이를 20세기 철학자들은 ‘實存’이라 부르고, 철학자 하이데거는 ‘現存在,Dasein’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생한 실존을 ‘불안’속에서 느낍니다. 실존적 인간은 불안의 현실을 생생하게 체험하며 생의 의미에 대해 묻습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져 모순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현존재’를 만납니다. 


불안과 불확실을 살아가는 현존재   인간은 현실을 벗어나 몽상과 비현실의 세상에 살 수 없습니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고통이나 모순, 회의나 절망, 때로는 불안과 무의미의 체험들을 생생하게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한순간도 살 수가 없습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정체는 한 가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미래로 인한 불안, 언제일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우연한 사건들과 고통의 실재들, 내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외면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마주해야 하는 죽음의 공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불안을 느낍니다.


우연성의 체험들, 비구원의 현실    인류는 불확실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18세기 서구의 계몽주의 이후 급속하게 발전한 과학은 운명의 고리에서 인간을 풀어내는 문명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신의 영역을 인간의 몫으로 돌려놓았고, 인간은 ‘神性’을 풀어내어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 합니다.

삶의 의미를 묻는 인간   하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모순과 불확실, 불안과 우연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21세기의 인류는 어느 때보다 인생의 의미를 더 깊이 묻습니다. 고통스런 현실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왜 삶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인간은 삶의 모순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살아갑니다. 의미를 찾는 여정, 이것이 바로 인생 이야기 속에서 신학을 시작하는 첫 출발점입니다. 신학은 내 삶의 의미를 밝혀주시는 무한하고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희망하는 나, 신학의 여정


희망은 살아갈 이유   고통은 피하고 싶은 인생의 걸림돌이지만, 때로는 인생의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희망은 단순히 이 고통스런 세상에서 도피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받은 한 번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리스도교는 생명이 그 자체로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향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생명의 목적이 우리 내면에 새겨져 있다고 믿습니다.


더불어 사는 희망     인간의 희망은 결코 홀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이 희망에는 언제나 관계의 원리가 있습니다. 유다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1878-1965)는 「나와 너」에서 관계의 본질적인 신비를 밝히고 있습니다. 너라는 타자는 내 소유와 집착의 대상이 아니고,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타자는 단순히 ‘그것it’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일 뿐입니다. 관계적 실존이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 누군가와 대화하고 통교와 친교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을 뜻합니다.  


인생 이야기, 삶의 지평을 넓히는 길  나와 다른 인생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깨닫지 못했던 삶의 의미들,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열립니다. 이것을 ‘삶의 지평 horizon’이라고 부릅니다.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1900-2002)는 나의 삶의 지평과 타자의 삶의 지평이 만나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을 ‘지평 확대’라고 부릅니다.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 덕이 많은 사람은 인생의 다양한 체험들과 만나고 대화하면서 공유하고, 타자를 존중하며 인생의 지혜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디딤돌로 여기며 삶의 지평을 넓혀간 사람들입니다.


내 삶의 이야기   내 인생을 기쁘게 살기 위해, 행복한 삶을 위해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발견해 내고, 만들어 가며 미래의 희망을 향해 기획해 나갑니다. 삶의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롤 모델’을 찾는 것입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을 통해, 자서전이나 인생이야기를 풀어 놓은 위인전을 통해서도 만나며 가깝게는 부모와 형제, 선생님이나 성직자가 롤 모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신학교 대학원 과정에 복학하자마자 유학을 가게 되어 낯선 독일로 떠났습니다. 독일 신학교에서 사는 동안 독일 신학생들과 로마와 아시시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인솔자 신부님이 아시시를 설명하다가 영화를 한 편 보는 것이 열 마디 말보다 낫다고 하시며 어린 시절 성당에서 감명 깊게 본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을 상영해 주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다시 본 그 영화는 제게 또 다른 의미를 주었습니다. 내가 사제성소를 어디서 얻게 되었는지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클라라 성녀의 모습에서 그 순수함과 열정, 아름다운 사랑의 힘을 다시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아시시를 방문하여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을 때 그 감동은 깊은 공감과 열정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종교인으로서 나를 찾기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믿는 종교인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인생의 마침표인 죽음을 넘어서 희망할 수 있게 해주고, 인생의 의미 찾기의 마지막 물음이 될 수 있을까요?


종교, 죽음을 뛰어넘는 희망의 길    종교란 무한한 신성 또는 신에 대한 인격적 관계를 의미하고, 이 관계 안에서 인간은 온전히 완성된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종교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 의미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과연 인간이 찾아야할 궁극적인 의미란 무엇일까요? 모든 종교가 저마다 삶과 죽음을 둘러싼 신비를 밝혀내고, 신적 계시의 가르침을 전달하며, 참된 행복의 길을 밝히고자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궁극적인 물음은 바로 ‘죽음’입니다.


모든 종교는 공통적으로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면서도 행복의 근원은 죽음에 대한 물음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종교의 근본적인 과제는 삶이 죽음을 넘어 여전히 가치가 있음을 확신하게 해주는 일입니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이 죽음을 넘어서도 살아갈 이유를 갖게 해주는 것, 바로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입니다.


종교인으로서 나를 찾기     종교인이 찾는 것은 무엇이며,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형태와 내용은 달라도 이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것들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하고 완전한 가치, 궁극적이고 진실하며 거룩한 그 무엇을 종교인들은 찾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삶의 ‘궁극적 의미’라고 말합니다.


내 삶의 궁극적 의미는?     인간은 죽음으로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들을 사랑하다가 죽은 이들 앞에서 인생의 허망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충분히 보상 받지 못하고 상처투성이인 인간들은, 영원한 세상, 이 세상과는 다른 저세상에서의 환생 또는 귀의를 희망하며 삽니다.


종교, 영원을 향한 인간의 희망     죽음을 뛰어넘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종교인, 종교인은 분명히 세상의 모든 가치를 넘어 영원한 생명과 희망에 대한 가치를 찾아낼 것입니다. 인격적인 신의 계시에서든, 인간 안에 내재된 신성의 발견에서든, 아니면 물질적 세상과는 다른 영적 세상에 대한 희망에서든 영원성을 찾게 될 것입니다.  모든 종교인은 영원성을 발견하기 위해 다양한 체험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으로서 나를 찾기


종교인이자, 그리스도인이 지닌 희망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하느님’안에서 찾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인간의 역사 안에 사셨으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느님의 얼굴을 세상에 보여주신 분이라고 그리스도인들은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동기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같은 세례와 같은 신앙고백을 통해 교회 안에서 형제적 친교를 나누고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체험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의 인생을 살고 있는 이들을 먼저 만납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희망을 찾은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와 신앙 체험담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갈망케 하는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인물들을 복음서에서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난 첫 인물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당시 유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척받는 이들, 곧 창녀, 세리, 과부, 고아, 병자들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회심이야기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만나 변화와 회심의 삶을 살아간 이들을 감동적으로 소개한 일화들이 많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요한 8,1-11참조)는 복음서에서 가장 극적인 일화입니다. 그 여인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용서와 치유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녀의 회심과 열정입니다. 예수님을 궁극적 의미로 고백하고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이 점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새로운 삶의 지평을 보여준 이들을 먼저 만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들이 자신의 생애에서 찾은 실존의 의미야말로, 우리 역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인생과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내가 마주하는 예수님의 얼굴   이제 내가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인지, 그들이 만난 예수님, 그분께서 당신 얼굴을 보여주실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가난에 찌들어 살던 이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조차 없이 이기적으로 살다가 죽은 이 사이에서 하느님이 상벌을 내리시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루카 16,19-31)가 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했지만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섬기려던 마르타와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자 했던 마리아 이야기(루카 10,38-42)는 다른 사람의 소명이 나의 것보다 못하다는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와 하느님의 능력을 기적으로 보이며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시지만,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다라 살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외딴 곳에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시며, 하느님을 갈망하고 명의 치유와 조의 용서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해방자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    말씀이 살아서 다가오는 것을 체험해 본 사람만이 성경 속의 예수님을 살아계신 구원자로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 묵상이 성경의 이야기를 내 기억 속에 되살려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느끼게 해주는 수행의 일부라면 예수님과의 만남은 성경, 특히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로의 초대   나의 신앙고백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면서 동시에 교회의 신앙고백이 나의 신앙고백을 지탱해주는 원리가 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다른 지체로 이루어진 몸’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1코린 12,12)

교회는 하느님께서 ‘진리의 성령’(요한 15,26 참조)을 통해 이끄시는 공동체이기에 ‘믿음 안에서’ 결코 오류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우리 인생은 그 자체로 모순이고 역설입니다. 초월을 향한 의지가 종교심을 일으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종교심의 뿌리가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진 것임을 믿고, 예수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 악에 대한 하느님의 궁극적인 승리가 이루어졌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신학 에세이1(요약)


외로움과 고독의 간격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란 하느님과 맺은 근원적 친교의 단절을 의미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묻지도 않으며, 오직 소유하고 지배할 대상만을 찾는 인간에게 근원에 대한 물음의 단절은 궁극적인 자아 상실이자, 인간이 체험하는 외로움의 본질이다.


사람은 인격적 관계를 벗어나 사물에 대한 집착이나 탐욕을 통해서라도 외로움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더 큰 외로움과 공허감이 찾아오는 것을 체험한다.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탈출구는 인간 자체이다. 하지만 친구라고 부르는 인격적 대상들과 관심을 공유하거나 행복의 나눔이 상호적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흐를 때 이 또한 인격적 친교가 아닌, 인간을 도구화하는 집착에 불과하다.


외로움의 극복은 참된 고독 속에서 발견되는지도 모른다. 고독은 분명히 외로움과 다르다. 외로움은 외로움을 만든 원인을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집착의 대상을 찾는 갈망의 결과라면, 고독은 외로움의 근원을 직시하는 것이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 자신이 맺고 있는 모든 인격적 관계와 사물들과의 관계를 관조하면서 자아를 들여다보는 행위다.


외로운 사람은 고독한 삶으로 초대될 수 있다. 하지만 고독한 삶은 외로운 삶의 허공으로 빠지지 않는다.


고독의 심연에는 하느님이 계신다. 인간은 자기 자아의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음성을 듣는다. 그 음성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에게서 오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이 아름다운 것은 이 때문 일 것이다. “늦게서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방황하는 영혼이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비로소 터뜨리는 고백, 그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체험이니 말이다.
 


2부 신학의 출발점


신학,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신학을 시작하는 세 가지 여정    신학은 하느님의 이야기를 듣고,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하고, 하느님을 향해 이야기하는 과정으로 성장합니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내게 들려오는 말과 이야기를 식별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일상의 체험에서 시작해, 주변의 수많은 표징을 올바로 읽어내고, 그 표징을 성경 말씀과 믿음의 눈으로 새롭게 보는 과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을 하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신학은 ‘공부’하는 것
‘신학을 공부한다learning’란 표현에는 내가 믿음을 갖기 위해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 지 먼저 알아가는 과장을 거친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오랜 전통 속에서 간직하고 정립해 온 신앙체계를 습득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앎을 통해 성장합니다. 믿음도 앎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둘째, 신학은 연구하는 것
많은 신자들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다양한 신앙 강좌에 참여하지만, 신학은 다른 학문들과는 달리 신앙으로 연결되지 않고 지식 추구에 그치면 죽은 학문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신학은 연구의 과정studying을 필요로 합니다.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 한 분야에 깊이 몰두하는 것,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갖고 몰두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드러냅니다.

신앙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이 바로 신학 연구의 과정입니다. 연구에는 언제나 ‘즐거움’이 따라야 합니다. 사람은 즐겁게 하는 일에서 흥미를 느끼고 집중을 합니다. 신앙생활도 무조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교리, 윤리적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납득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신학 연구는 내가 믿는 교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스스로 납득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을 믿는 사람들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인 하느님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그 길을 마련하는 것이 신학 연구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셋째, 신학은 실천하는 것
신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데 한 가지 위험요소가 있습니다. 신학이 학문적인 지식 체계나 논리적 정당성을 찾는 것에 그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무관한 학문 체계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삶으로 실천 doing하고 전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삶의 체험은 하느님을 향한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중요한 연결 고리입니다. 교리는 체험을 언어화하고 객관화해서 전달할 수 잇도록 만든 것이기에 교리에 담긴 체험을 우리 삶과 만나게 하는 것이 ‘신학 하다’란 말에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느님의 지혜를 체험한 이들의 회심과 열정을 만납니다. 신학은 신앙을 실천으로 이끌어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느님 체험이 강조되고, 성령쇄신운동이 일어나며, 영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회의 새로운 모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앙은 삶의 문제이며, 신학은 신앙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만 아니라, 삶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신학, 누구나 할 수 있나요?     신학은 신학자나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평신도도 얼마든지 신학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 됩니다
최근에는 각 교구에 교리신학원이 생겨서 신자들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둘째, 다양한 신학 분야에서 전문가의 책을 접하는 것도 좋습니다
최근에는 신학자들이 개설한 인터넷 홈페이지나 카페가 많이 생겨서 좋은 글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셋째, 신학을 삶으로 실천하고 살아가고자 노력할 수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연구할 시간과 여건이 안 된다고 신학 함의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신학을 하기 우해서는 일상에서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보십시오. 왜 나는 그 내용을 모르는지, 내가 알고 있는 내용과 왜 다른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의 시작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입니다. 


신학에도 기초가 필요한가요?


신학에도 기초가 필요합니다. 신앙을 갖게 되는 배경과 동기는 서로 다르지만, 내가 믿음을 갖게 된 동기가 분명하고 믿음을 키우기 위해 공과 시간을 들인다면 그것은 훗날 영적 성장의 기초가 됩니다.

신앙의 기초가 잘 다져졌을 때 신자 생활이 풍요롭고 신앙의 오류나 편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종교의 가치들이 다양해지는 시대라 내가 간직한 믿음과 희망이 위협을 받거나 의혹을 일으킬 때 이를 식별해내는 은사가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다원주의 시대에 도전에 맞서기    오늘날 ‘다원주의pluralism’라고 불리는 시대정신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원多元’이란 말 그대로 근원이 되는 것들이 다양하다는 뜻입니다. 흔히 우리 시대를 ‘다양성’과 ‘개성’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과거처럼 절대적이고 독자적인 진리를 주장할 수 없는 다원주의 시대의 특징을 표현합니다.

하느님 존재에 대한 의문과 부정, 서구 사상과 서구 그리스도교 중심사상이 무너지면서 세계의 중심이 다수가 되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의 흐름은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다른 종교적 가치에 대한 상호존중의 문화로 발전합니다. 특정 종교가 절대적 진리를 주장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들이 부활 신앙보다는 불교의 윤회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신앙의 기초 교육이 더 절실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톨릭 신학을 시작하는 여섯 가지 기준 


첫째, 거룩한 신비이신 삼위일체 하느님
하느님은 신학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숨겨진 신비이십니다. 우리의 속됨을 일깨우고 거룩함으로 초대하는 신비입니다. 그 하느님을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둘째,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느님 말씀 ‘성경’
성경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특정한 언어와 문화 속에서 문자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올바르게 해석하고 묵상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는 중요한 신앙의 기준입니다. 


째, 사도들의 신앙 전승으로서 교회의 거룩한 전통 ‘성전’ 

하느님의 말씀은 성경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하고 증언한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통해 교회의 역사 안에서 전승되었습니다. 이를 성전聖傳이라고 부르며, 가톨릭교회는 사도전승의 보전과 전달은 물론 해석의 권한을 지닌 교도권의 도움으로 살아있는 하느님 말씀의 전통을 간직합니다.

넷째, 신학의 자리, 오늘 이라는 ‘현실’
신학은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구원 이야기를 읽어내고 풀어내며, 희망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따라서 신학은 현실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시대의 표징을 읽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고자 노력합니다.


다섯째, 신학이 봉사하는 신앙 공동체 ‘교회’
신학은 신앙 공동체인 교회에 봉사합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제도적 요소를 갖고 있기에 제도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도록 교회의 정당함을 변호하고 지켜야 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성령의 도유를 받아 부름 받은 하느님 백성이기에 이 교회가 세상에서 올바른 하느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도록, 신학은 예언자적 통찰력으로 현실 교회의 비판적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섯째, 하느님 말씀에 응답하는 ‘신앙 행위’
하느님 말씀의 계시와 선포는 역사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구원을 향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말씀은 언제나 인간이 그 말씀을 듣고 응답할 수 있는 ‘신앙’이란 행위를 필요로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로마 10,17) 온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 하느님의 계시가 인간이 드리는 신앙의 응답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 전해집니다.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느님은 누구신가요? 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가?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물을 때 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내 처지와 현실에 대해서도 묻습니다. 왜 나는 불행한지, 왜 내게만 슬픔과 고통을 주시는지, 하느님을 원망하며 탄식하는 순간들도 하느님에 대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학은 하느님에 대해 묻고, 동시에 하느님께 물음을 던지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신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나와 연관하여 물음을 던질 때 이미 나는 신학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느님’이란 단어에 숨겨진 뜻  우리가 쓰는 ‘하느님’이란 단어에는 많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 우리는 하느님을 ‘천주님’으로 불렀습니다. 그것은 가톨릭이란 단어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이란 뜻이며,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마태 5,45) 주시기에 ‘하늘’[天]의 ‘주인’[主]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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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글라라님     작성일시:

[신학하는 즐거움]은 대부분 학문적으로 빈약한 평신도들에게 안성 맞춤인 도서로, 어려운 신학 내용을 쉽게 문답식으로 풀이해 주셔서 독서 중에 내내 평안함을 느꼈습니다. 역시나 탑재용량 초과로 파일을 첨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