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20. 9월 영적 도서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20-09-28 16:00:06    조회 : 139회    댓글: 1

성당 2020. 9월 영적 도서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지은이 : 토마시 할리크

1948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 카를 대학에서 사회학과 철학,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산 정권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면서, 1978년 동독에서 비밀리에 사제 서품을 받고 지하 교회에서 활동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 정권 붕괴 후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외부 자문단으로 일했고, 체코 주교회의 총대리로 봉직했다.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교황청 비신자대화평의회(현 문화평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에서 실천신학 교수 자격증을 취득했다. 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하버드 대학 등 세계 여러 대학에서 초빙 교수를 지냈고, 현재 프라하 카를 대학 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저서들은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독일에서 유럽 최고의 신학 서적(2009/2010)으로 선정되었다. 종교 간 대화, 저술 및 교육 활동, 영적 자유와 인권 보호 증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14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 2010년 로마노 과르디니 상 등 여러 저명한 상을 수상했다


옮긴이 : 최문희

 

나눔의 글

 

2014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을 받은 신학자 토마스 할리크 신부님 저서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대표작, 도서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전 세계 14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된 이 책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을 모티브로 신앙과 불신앙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신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이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믿음과 의심, 그리고 무관심 사이에서 현대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가 책에서 말을 건네는 대상은 바로 우리 안의 자캐오입니다. 신앙에 호기심은 있지만, 선뜻 그 안에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사람,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늘 의심하는 사람, 예수를 둘러싼 군중처럼 열정적인 사람들에게 반감을 느끼고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 그리고 그들에게 말을 건네야 하는 신앙인입니다.

저자는 신앙과 무신론의 차이를 인내라고 규정합니다. 믿음ㆍ희망ㆍ사랑은 하느님의 침묵’(혹은 부재)에 대면하는 인내의 세 얼굴입니다. 신은 죽었다’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심이야말로 열정적으로 신을 찾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을 인내하며 보낼 것을 권유합니다.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는 사람,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의 부재를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 종교에 관심은 있지만, 선뜻 그 안으로 들어가기는 싫은 사람, 하느님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들어가는 말

 

나는 무신론자들에게 동의할 때가 많다. 단 하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믿음만 빼고는 종종 거의 모든 점에 동의한다.

 

오늘날 온갖 종교 상품들로 북적대는 시장에서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니고서도 때로 회의론자나 무신론자, 불가지론적 종교 비평가에게 심정적으로 가까움을 느낀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없다는 느낌을 무신론자들과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부재감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성급한 조바심의 표출이라고 본다. 나도 간혹 하느님께서 침묵하시고 멀리 동떨어져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짓눌릴 때가 있다. 세상과 인생의 수많은 모순이 지닌 양면성은 숨어 계신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같은 말마디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나는 똑같은 이 체험도 달리 해석하고 하느님의 부재에 달리 접근할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위한 서로 깊이 관련된 세 가지 인내가 있다. 이들은 각각 믿음 · 희망 · 사랑이라 불린다.

 

하느님의 부재만큼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느님을 절실히 요구하게 하는 것도 없다. 이 체험은 하느님을 원망하고결국에는 신앙을 저버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부재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여러 다른 길이 있으며, 특히 신비주의 전통 안에는 더 풍부하게 들어있다. ‘하느님 없는 세상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고는 종교적 추구의 의미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일과 그 세 얼굴인 믿음 · 희망 · 사랑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닫기 어렵다.

 

모름지기 성숙한 신앙이란 신의 죽음또는 그보다 좀 덜 비극적으로는 신의 침묵이라고 일컫는 체험을 자기 안에 녹여 내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그런 체험은 내적 성찰을 통해, 피상적이거나 안이한 방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체험하고 극복해야 한다. 무신론자들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인내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들의 진리는 불완전한 진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우리의 진리’, 곧 이곳 지상에서 신앙의 종교적 진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신앙 진리의 본성은 신비에 대한 개방성에 있고, 신비란 마지막 때에 이르기 전에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만한 개선주의凱旋主義의 유혹에 맞서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과 타 종교 신자들에게도 할 말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귀 기울이고 배워야 한다. 현대에 들어 무신론이 마구 쏟아내는 뜨거운 비난이 다른 종교들보다 특히 그리스도교를 향했다는 사실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교훈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리스도교는 그 태만함을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그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다면, 그러한 비난들 속에서 시험받고 단련되어야 할 믿음과 희망을 포기해 버리는 것만큼이나 안타까운 일이다. 사도 바오로의 정신을 따르는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몸에서 무신론의 가시가 떠나게 해달라고 청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가시는 거짓 확신의 자기만족에서 깨어나도록 우리 신앙을 계속해서 찔러 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나약한 시대에 완전히 드러나는 은총의 힘에 더욱 기댈 수 있다(2 코린 12,7-10 참조)

 

무신론은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 신앙에서 종교적 환상들을 걷어 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조바심치던 사람들처럼 무신론에게 최종 발언권을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바닥까지 지쳐 있을 때에도 우리는 호렙산을 향해 가던 엘리야에게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듣고 받아들여야 한다. “일어나 걸어라. 갈 길이 멀다.”(1열왕 19,7)

 

복음 속 자캐오 이야기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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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에게 말을 건네다

 

나는 조국에서 수십 년째 종교가 탄압받던 1970년대에 외국에서 비밀리에 서품되었다. 같이 살던 어머니에게도 내가 사제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11년 동안 나는 지하 교회에서 비밀리에 사제 직무를 수행했다. 이제는 프라하 구시가지 중심부에 새로 세워진 대학교 본당에서 아무런 탄압의 위험 없이 자유롭게 공식적으로 사제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지하 대학이 주관하는 비밀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가정집들에서 근근이 철학 강의를 하던 시절이 끝나고, 이제 대학으로 돌아가 신문에 기고도 하고 책도 출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겨울날 아침, 나는 성당이나 대학교가 아니라 국회의사당 건물을 향하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성탄을 앞두고 성직자를 의회에 초대하여 성탄 휴가 전 마지막 회기를 시작하기 전에 국회의원들에게 짧은 묵상을 전하는 관습은 그 시절의 새로움 가운데 하나였다.

 

아마 대부분은 평생 한 번도 성경을 펼쳐 본 적 없는 것 같은 국회의원들 앞에서 나는 루카 복음에 나오는 한 장면을 언급하며 묵상을 마무리했다. 예리코에서 군중을 가로질러 가시던 예수님께서 뜻밖에도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몰래 당신을 지켜보고 있던 세관장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는 장면이다

댓글목록

작성자: 글라라님     작성일시:

모름지기 성숙한 신앙이란 ‘신의 죽음’ 또는 그보다 좀 덜 비극적으로는 신의 침묵이라고 일컫는 체험을 자기 안에 녹여 내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그런 체험은 내적 성찰을 통해, 피상적이거나 안이한 방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체험하고 극복해야 한다.ㅡ ‘들어가는 말‘ 중 에서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의 저서는 『상처 입은 신앙』에  이어 두 번째 만남입니다. 새로운 시야를 펼쳐 보여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