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의 詩편지](37) 침묵
이해인 수녀맑고 깊으면
차가워도 아름답네
침묵이란 우물 앞에
혼자 서 보자
자꾸 자꾸 안을 들여다보면
먼 길 돌아 집으로 온
나의 웃음소리도 들리고
이끼 낀 돌층계에서
오래 오래 나를 기다려 온
하느님의 기쁨도 찰랑이고
‘잘못 쓴 시간들은
사랑으로 고치면 돼요.’
속삭이는 이웃들이 내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고마움에 할 말을 잊은
나의 눈물도 동그랗게 반짝이네
말을 많이 해서
죄를 많이 지었던 날들
잠시 잊어버리고
맑음으로 맑음으로
깊어지고 싶으면
오늘도 고요히
침묵이란 우물 앞에 서자
-시집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중에서
가을이 되니 시집을 일부러 찾아 읽게 되는데 가끔은 성당 안에서도 시집을 꽂아두고 읽을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오래전에 발간된 저의 시집이 눈에 띄어 읽다가 ‘침묵’이란 제목의 이 시가 문득 새롭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요즘은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으니 말을 많이 할 기회가 그리 많진 않아 다행으로 여깁니다. 한 달에 한 번 집중 기도를 하는 날이 있는데 그럴 적마다 유독 ‘그동안 사람들 앞에서 강의로 대화로 글로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무어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곤 하였습니다.
내가 사는 공동체 안에서도 가장 많이 주의를 듣는 것이 침묵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일과를 다 끝내고 난 끝기도 후, 밤에서 아침까지의 대침묵이 아니더라도 성당에서 식당에서 복도에서 침방에서 꼭 필요한 말만 조용히 하는 소침묵을 잘 지키라는 것인데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을 해서 원장님께 주의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쓸데없는 말들을 삼가는 혀의 침묵뿐 아니라 눈과 마음 그리고 지성의 침묵도 잘 지키라고 말합니다. 타인의 결점 찾기를 멈추는 눈의 침묵, 험담과 소문을 실어나르는 소리를 막는 귀의 침묵, 이기심·미움·질투·탐욕을 피하는 마음의 침묵, 거짓됨과 파괴적인 생각, 의심과 복수심을 차단하는 지성의 침묵을 지키도록 늘 깨어 있으라고 강조합니다.
수도자들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얼마쯤은 알아야 구체적인 기도에 도움이 되기에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지역신문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신문을 골고루 찾아 읽는데 크게 실어도 좋을 미담은 아주 작게 나오고 부각시키지 않아도 좋을 기사들은 너무 크게 나와 아침부터 마음에 부담이 될 때가 많습니다.
특히 국민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정치인들이 서로의 잘못만 탓하며 과격한 막말을 쏟아낼 적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좀 더 유익하고 정화된 말을 하기 위해 우리는 자주 침묵이란 우물 속에 들어가 마음을 헹구는 노력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맑고 푸른 가을하늘이 우리를 선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초대하는 이 가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묵도하는 한 그루 고요한 나무가 되어 마음의 우물을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언어를 정화시켜 가는 코로나 시대의 겸허한 현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말을 더 잘하기 위한 침묵의 애호가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만과 독선으로 경직된 차가운 침묵이 아니라 사랑과 겸손을 바탕으로 한 따뜻한 침묵의 주인공이 되는 기쁨으로 말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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