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 성당 2022년 6월 영적도서 : 발타사르의 「구원 이야기」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22-07-22 23:59:40    조회 : 189회    댓글: 0

지은이: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1905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태어나, 1927년에 독일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36년에 예수회 사제로 서품되었다. 1944년에 신비가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와 함께 재속수도회(요한공동체)를 창립하여 지도신부가 되고, 1947년에 요한출판사를 설립했으며, 1950년에 예수회를 퇴회하고, 1956년 쿠어Chur 교구에 입적했다. 1973년에 국제 신학 월간지 Communio(공동체)를 공동 창간하고, 1988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으로부터 추기경직에 서임되었으나 수여식 사흘 전에 타계했다. 평생 동안 119권의 단행본, 532편의 논문, 114편의 공동 집필서, 110권의 번역서를 남겼고, 말년에 집필한 주저 Herrlichkeit(신학적 미학) 3부작(15)은 현대판 신학대전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옮긴이: 김관희 신부

1988년 미리내 천주성삼 성직 수도회 사제로 서품되어, 1996년에 로마 라테란대학교에서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수원가톨릭대학교와 동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에서 성사론, 그리스도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

 

 

나눔의 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구원 문제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실존의 문제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발타사르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바오로 사도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해서 구원받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구원을 희망하는 것이 하느님 경외의 출발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걱정하고, 자신의 종말에 의문을 던집니다. 그러한 의문이 우리를 힘들게 하더라도 회피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합니다. 이 또한 책임 있는 삶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보편적 구원,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 등의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성경, 교부들의 가르침, 여러 신학자들의 입장,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과 현명하게 비교하고 제시하며 우리가 궁금해하는 보편적 구원에 대한 현대신학의 해석을 들려줍니다. 너무나 알고 싶었던 정말 궁금한 이야기 - 구원 이야기 요약해서 올립니다.

 

 

 

1장 쟁점과 고발

 

그리스도교 신앙인인 우리는 신앙의 신비스러운 성격을 감안할 때 모두가 심판 아래에 놓여 있다고 이해한다. 우리가 심판을 좌지우지하는 존재가 아닌 이상,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무죄 선고를 받았노라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1코린 4,4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 앞에서 당황하거나 주눅들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바오로 사도가 의연히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받을 심판에 대해서 확신parrhesia과 희망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교의가 가르치듯이 우리의 심판관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에 대해서 태평해도 될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평생 받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고스란히 되갚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또 바리사이가 아니라면, 오히려 그 반대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살아가는 동안 받은 은총에 감사하면서 자신 안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이 하느님보다 더 많이 안다고 우쭐대며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심판 아래에 놓여있다는 경외심으로 가득 찬ehrfürchtig 상태는 우리가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어느 정도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 묻게 만든다. 왜냐하면 심판은 살아있을 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자비하게적용될 것이고야고보2,13, 반면에 나름대로 하느님 자비와 상응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선고될 것이기 때문이다.(심판관은 곧 구원자다.)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 2,13

 

두 가지 가능성, 곧 구원과 멸망의 가능성이 우리 눈앞에 있다는 것은 계약 시초부터 하느님의 전략Taktik이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신명 30,15 이제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놓아둔다.”예레 21,8 의로움의 길에는 생명이 있지만, 악인의 행로는 죽음에 이른다.”잠언 12,28 이 양자택일 구도는 신약성경을 거쳐서마태 7,13이하; 2베드 2,15 초기 교부들의 작품에도 나타난다.Didache ,1;Barn.18-20 심판 아래에 처한 인간은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과연 하느님이 최종적으로 당신의 구원계획을 인간의 선택에 맡길 것인지, 아니면 오로지 구원만을 원하시는 당신의 절대적인 자유를 피조물이라서 상대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자유보다 우위에 둘 것인지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안셀모는 이것과는 다르게 접근한다. 만일 인류가 종국에 정의로운 자들과 불의한 자들로 나뉜다면, 하느님의 고유한 속성도 동시에 한쪽은 그분의 자비로, 다른 한쪽은 그분의 (징벌적) 정의로 갈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느님의 두 속성을 마치 칼데론의 희곡처럼 고상하게 대결시키는 구도는 온당치 못하기에, 우리는 스페인에서 회자되는 다음의 교의적인 언명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징벌은 구원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나온다(이 말은 어느 모로 보나 연옥을 시사한다.) 보복성 처벌poena vindicativa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정의에서 나오고, 이는 죄나 허물과 관련이 있다.”(지옥을 지칭한다.) 하느님의 자비(여기서는 다분히 제한적인)가 위축되면, 그 자리를 과연 순수한 정의가 차지하게 될까? 이와 같이 하느님의 속성에 경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쟁점이 되는 다음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하느님의 심판 아래에 서있는 인간(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랄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감히, 그러나 소신 있게 그렇다고 답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Der Fels라는 신학 잡지 편집장 Gerhard Hermes의 입 다물라는 거친 항의였다.

 

···뵈크만은 이렇게 반박했다. “만일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좋게 끝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안다면, 누가 회개하려 들고 누가 그리스도인답게 열심히 살려고 하겠는가?”···

 

헤르메스그런 희망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확실한 앎에 반대되거나 공공연한 하느님 의지에 반대되는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분명하게 일어나지 않을 줄 알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 우리는 희망할 수 없다따라서 결론은 간단했다. “모두가 구원될 희망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아무튼 헤르메스는 지옥에 대한 확실한 앎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일쑤 다음과 같은 평범한 가톨릭 신자이기를 자처한다는 것이다. 곧 내세를 무지갯빛과 장밋빛에 둘러싸인파라다이스로 만들거나 낙관적 구원관만 믿고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을 자행하거나 오늘날의 교회에 대해서 따분하고 무미건조한 수다를 떨거나 근대신학을 운운하면서도” “뻔뻔스럽게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한다고 너스레를 떤다는 것이다.

 

헤르메스의 말대로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치자. 그렇다면 개개인의 구원은 어떤가? 만일 개별적인 인간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이가 여기에 속하는가? 바로 여기서 헤르메스의 둘째 모순이 등장한다. “우리는 끽해야 모든(!) 개별적(!) 인간이 구원되기를 바라거나 기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로서는 하느님이 정말로 그를 심판하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이것은 계시에서 명백히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모순적 언명의 마지막 문장을 천착할 텐데, 그것은 비로소 여기에서 그의 확실한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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