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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유럽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유럽연합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 도심에서 점령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이들은 유럽연합이 추진해온 ‘녹색 정책’에 분노를 표출했는데, 극우 세력은 이런 불안과 불만에 호소해 정치적 지지를 얻어내고 있다. 유럽연합 누리집 갈무리
지난해 2월 유럽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유럽연합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 도심에서 점령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이들은 유럽연합이 추진해온 ‘녹색 정책’에 분노를 표출했는데, 극우 세력은 이런 불안과 불만에 호소해 정치적 지지를 얻어내고 있다. 유럽연합 누리집 갈무리

최원형 | 지구환경부장

 기후변화는 오늘날 극우 세력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게 하는 핵심 토양이다. 전세계 극우 세력에 참고할 만한 모델을 제공해온 유럽을 중심으로, 이 주제는 학계의 진지한 연구 대상으로 떠올라 있다. 특히 최근 연구들은 기후변화에 대한 극우 세력의 태도가 과거보다 좀 더 ‘전략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 전략적 태도 변화를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기후변화를 부정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기후 정책은 반대합니다.”

애초 기후변화에 대한 극우 세력의 기본적인 태도는 ‘부정’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첫 미국 대통령 임기 때 선포했고, 두번째 임기인 현재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태도다. 이들은 인간이 화석연료를 태우며 배출해온 온실가스가 지구의 온도를 높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이를 “좌파·환경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위기”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온갖 증거들을 외면하고 과학과 맞서 싸우는 게 쉬울 리 없다. 최근 유럽의 극우 세력들은 기후변화의 진실을 따지는 대거리 자체를 되도록 피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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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이들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도입하고 추진해온 구체적인 정책들을 비난하고 이를 정쟁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시내의 교통 혼잡을 막기 위해 통행료를 부과하는 정책처럼, 온실가스 감축 등 지구 공동의 기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은 어쩔 수 없이 대중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요구하게 된다. 극우 세력은 이 ‘추가적인 부담’이 부당하고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며 대중의 반발심을 자극하고, 그들로부터 표를 얻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시도한다. 유럽에서는 ‘녹색 정책’(green)과 ‘역풍’(backlash)을 합쳐 이런 현상을 ‘그린래시’(greenlash)라는 말로도 규정한다.

그린래시란 말을 대중적으로 유행시킨 이탈리아 정치학자 나탈리 토치는 여기에 “두가지 상반된 해석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유럽은 재생에너지 전환 등을 목표로 한 ‘그린딜’로 그동안 전세계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기후 정책을 펴왔던지라, 그린래시는 이상에서 현실적 과제가 된 탄소중립 달성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경고가 될 수 있다. “말로 떠드는 건 쉬웠으나, 실천은 어렵더라”는 걸 깨닫는 차원이다. 이 경우 정책의 방향성 자체는 흔들리지 않지만, 그 부담을 줄이고 현실성을 높일 방안은 무엇인지 구체적인 논의가 이어지길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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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되는 건,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린래시를 휘두르는 상황이다. 이때 “현실은 녹록지 않다”는 인식의 결론은 “제대로 해보자”가 아니라 “좌파·환경주의자의 위선적인 기후 정책을 때려치워라”로 나아가게 된다. 재생에너지를 구축하기 위한 비용이, 화석연료 감축을 위해 부과하는 세금이, ‘국민에게 부당한 부담을 지우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극우 세력은 불안·불만을 자신들의 정치적 연료로 삼는다. 영국 런던정경대 소속 연구진은 지난해 발표한 논문에서 “(2010~2023년 서유럽) 극우 정당들이 과거보다 기후변화 관련 이슈를 더욱 적대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기후변화 정책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다른 주류 정당들의 합의로부터 크게 일탈”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서 연구진은 극우 세력에게 기후변화는 ‘쐐기 쟁점’(wedge issue)이라 짚었다. 견고한 무언가를 단숨에 두 갈래로 가르는 쐐기처럼, 합의된 여론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불붙이는 쟁점이란 것이다.

씁쓸한 것은, ‘쐐기 쟁점’ 전략을 구사하는 세력은 그 실질적인 내용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극우 세력은 “태양광은 너무 비싸고, 대규모 정전을 일으키며, 자연 경관을 파괴한다” 등 다양한 ‘재생에너지 혐오’ 담론을 만들어내지만,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2050년까지 우리가 과연 어떤 발전원들을 어떤 체계 아래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 등에는 침묵한다. 그저 “화석연료는 아직 유효하고, 원자력은 만능이며, 어쨌든 산업은 발전해야 한다” 같은 언술만을 끝없이 반복할 뿐이다. 극우 세력은 이를 통해 집권에 한발 더 가까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뒤에 남는 건? 시시각각 다가오는 기후위기에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파탄 나버린 기후 정책들뿐일 것이다.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