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6월3일 주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
<이는 주님께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4,3-8
제2독서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9,11-15
복음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2-16.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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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명동 가톨릭 회관 벽에 대형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민족 화해
위원회에서 성모의 밤을 준비하면서 만들었습니다. 현수막의 내용은
‘기억하는 한 살아있고, 기도하는 한 이루어진다.’입니다. 북한에 있던
성당들을 기억하자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언젠가 북한에도
성당이 세워질 것이라는 바람입니다.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남과 북의
평화와 번영이 이루어지고, 북한의 신자들에게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시간이 오면 좋겠습니다.
1992년 김광석의 콘서트를 보았습니다. 26년 전의 일입니다. 소탈한
그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의 노래가 기억납니다.
그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리 곁에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는 김광석
뮤지컬을 보았습니다. 김광석의 음악과 삶을 추모하면서 만든
뮤지컬입니다. 뚝섬역 근처 성수 아트홀에서 공연이 있습니다.
김광석의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김광석을 기억하는 분이라면,
바쁜 일상의 삶에서 잠시 여유와 행복을 맛보고 싶은 분이라면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혈액형이 A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혈액형에 따라서 성격이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A형은 세심하고 풍부한 감수성이 있으며 내성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강한 뒤끝과 집착이 있으며 계산적이라고 합니다. B형은
사교적이고 활발하며 낙천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변덕스럽고,
가벼워 보인다고 합니다. O형은 활동적이며 강한 지도력이 있고
온화하며 원만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지식하고, 지나치게 털털해
보인다고 합니다. AB형은 냉철하고 예리하며 합리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4차원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저는 혈액형에 따른
성격을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좋은 것은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혈액형은 수혈할 때도 꼭 알아야 합니다. A형은 A형에게만 수혈을 할
수 있습니다. B형, AB형도 각자의 혈액형을 가진 사람에게만 수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유형의 혈액형에 수혈을 할 수 있는
혈액형이 있습니다. O형입니다. 과학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신앙적인
면에서 보면 O형의 혈액형이 가장 모범적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것을 모두에게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체성사의 가장 큰 의미는 ‘내어줌’입니다.
사제는 미사 때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재현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공평하지 않게 만드신 것은 ‘흐름’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강약, 고저, 장단’이 있습니다. 물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공기도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흘러갑니다. 구름도 비가 되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립니다.
사람의 피도 끊임없이 흘러야 생명이 유지됩니다. 세상은 이렇게
흘러야 하고, 그렇게 흐르는 세상은 공평해지는 것입니다. 돈도
흘러야 경제가 살아납니다. 사람이 사는 이 세상도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한 나라의 것들이 강한 나라로, 가난한 사람들의 것들이
부유한 사람들에게로 흐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흐름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의 흐름이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긴 곳에서 짧은 곳으로 흘러간다면
세상은 공평해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은
예수님이 꿈꾸던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있는
나라,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있는 나라, 사막에도 샘이 흘러 꽃이
피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공부해서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출세해서 자기만 잘살고, 잘 먹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출세해서 세상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혼자서 오천 명의 것을
빼앗아 먹을 수도 있지만, 혼자서 오천 명을 먹여 살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오천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리시면서 어떻게 해야 공평한 세상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잘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남을 잘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도,
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잘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또한, 우리도 이웃을
잘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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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은
당신에게 필요한 절반입니다
2018년 나해 6월3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은 당신에게 필요한 절반입니다>
복음: 마르코 14,12-16,22-26
한 아이의 어머니이자 이혼한 아내의 글이 뉴스에 올라와
읽어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운전을 하다가 자살충동을 느껴 몇 번이나
길을 벗어나려다가 마지막 순간에 핸들을 꺾었습니다. 어머니의
아픔은 유일한 중학생 아들 때문입니다. 학교에 가지 않으려하고
자퇴하겠다고 말하며 교복을 입은 채로 몇 시간씩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아들은 엄마를 폭발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퇴근 후 집은
항상 전쟁터가 됩니다. 아들 초3때 이혼하였지만 아들은 엄마의
노력으로 잘 성장하는 듯 보였습니다. 특별한 문제도 없었고 관계도
좋았으며 통장엔 돈이 쌓여갔습니다. 싱글 맘이 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기까지 마음속에
엄마에 대한 원망을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밖에 있을 땐 얌전한
학생인데 집에만 오면 180도 돌변합니다. 차라리 TV라도 보고 컴퓨터
게임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집을 미친 듯 어지르고 그 무더기 위해
몇 시간씩 누워서 천정만 바라봅니다. 울어봐야 아들은
본척만척합니다. 혼자만의 싸움에 지쳐 가끔씩 이혼한 남편이
생각납니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무관심한 가장의 모습에
지쳐버려 이혼을 했지만 지금은 남편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아내는 자존심과 감정을 다 버리고 남편에게 연락하였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으니 아들과 자신 사이에 잠시만
서 있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남편이 밖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얼마의 빚을 져서
자신에게 불똥이 튈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특유의
무심함으로 쿨하게 아이와 소통도 하고 큰 소리 안 내고 학교에
보내고 오후에 같이 외출도 합니다.
엄마는 퇴근 후 두 남자에게 아무 말도 안 건네고 방으로 들어와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 불안한
마음도 없지는 않지만, 두 남자가 함께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저녁은 두 남자의 대화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이 편안함 속에 결혼에 실패했는데, 이젠 이혼에도 실패하게
되지는 않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출처: ‘내겐 짐, 아들엔 힘... 前 남편을 어떡하지’,
조선일보, 2018.06.01]
엄마의 사랑이 아무리 커도 아빠의 사랑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는 엄마 반, 아빠 반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혼자만의 작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엄마의 사랑 반, 아빠의 사랑 반으로
성장해야합니다. 몸만 태어났다고 해서 태어 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사회에 우뚝 설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갈 길이 멉니다. 아기가 잉태될
때 둘이 23개씩 주는 유전자에 조금이라도 부족한 것이 있으면
아기가 온전할 수 없듯이, 자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의
사랑만으로는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아마 혼자만으로
자녀에게 충분한 사랑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느님께서는 아메바처럼
무성생식으로 자녀를 낳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녀에게
주는 사랑은 항상 자녀가 필요한 사랑의 양의 1/2입니다. 나머지 반은
나의 배우자에게서 채워져야 합니다.
사람은 아빠 반, 엄마 반으로 태어나지만 그건 육체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한 사람 반, 하느님 반으로 태어납니다. 육체는
인간에게서 영혼은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엄마,
아빠, 하느님의 사랑을 동시에 받지 않는다면 어딘가 부족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불운하게도 부모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을 하나도 받지 못하면
유영철이나 신창원 같은 동물의 수준에 머무는 사람이 탄생됩니다.
아기가 정글에 버려져 동물들 속에서 자란 것과 같습니다. 그런
아기는 인간의 사회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매우 다행히도 한 부모의
사랑만 받았다면 아이는 그 부모의 기대대로 자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못하여 배고픔을 느낀다면 오히려
자신을 키워준 홀 부모를 원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어야하는데 어떤 사람 때문에 그 음식을 평생 절반만 먹어야
한다면 그렇게 만든 당사자를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당사자가
음식의 반을 제공해주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예는 너무도 많은데
아이를 홀로 키우며 전국 1등을 바랐던 어머니가 고3 아들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그렇고, 홀로 키운 아들을 빼앗겼다는 마음에
며느리를 못살게 굴다가 결국 며느리가 자살하여 아들이 어머니와
연을 끊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평생 자신이 희생만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자녀들이 이 홀 부모를 위해 희생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다 받았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많은 전직 대통령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큰돈을 횡령하여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부모님의 온전한 사랑을 받았을지라도 세상에 속한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도 세속적인 자녀들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원숭이에게서는 원숭이가 나오고 개에게서는 개가 나옵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 집착하여 세속-육신-마귀,
즉 돈-쾌락-교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더 모으려하고 더 자신의
배만 채우려하며 더 높아지려고만 하는 욕망은 정글의 법칙에서
나오는 동물의 속성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인간은 그저
두 발 달린 동물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느님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아야합니다. 사람 사랑 반, 하느님 사랑
반으로 채워져야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과 같은 분들은 사람의 사랑 반, 하느님의 사랑 반을
받은 분들입니다. 이들이 세상을 유지시키고 세상에 공헌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한 부모는 아무리 잘 키워야
반쪽 인간만을 만들뿐입니다.
오늘은 거룩한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성체도 그렇지만 성혈도
사랑을 상징하고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전부인 살과 피를 주시는 것은 맞지만 예수님은 동시에 아버지께도
당신 자신을 바치시고 계십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 피인 성령을
주시는 동시에 아버지께도 당신 영을 바치십니다. 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지만 성령은 우리 안에서 샘물이 되어 하느님께도 드려지고
이웃에게도 줄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을 증폭시키십니다. 이는 마치
아내가 남편에게 줄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게 줄 사랑도
동시에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계약을 맺을 때 모세는
소를 잡아 그 피를 절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절반은 여러 그릇에
담아 백성에게 뿌렸습니다. 소는 자아를 상징하는데 내 자신이 죽으며
아래와 위에 동시에 그 피를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은 우리를 위한 피 흘림인 동시에 우리 죄를 위해
아버지께 봉헌하는 피 흘림인 것입니다.
피는 곧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입니다. 내가 사랑을 반으로 쪼개어
남편과 자녀에게 나누어 줄 때 그것은 부족한 반반의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면 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됩니다. 사랑을 반으로 쪼개어 나에게 사랑을 주신 분께
보답하고 그 사랑으로 태어난 자녀를 위해서도 주어야하지만 결국 그
반쪽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이 되어 자녀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의 사랑으로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면 나의 사랑을
반으로 나누어야합니다. 아내가 남편도 사랑하고 자녀도 사랑해야
자녀가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동시에 받을 수 있어 온전해집니다.
아내가 자신이 사랑만으로 자녀를 충분히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면
자녀는 아빠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 삐뚤어지게 됩니다. 남편에게
돈을 받으면 반은 자녀를 위해 쓰고 반은 남편을 위해 써야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에너지를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반반 나누어 써야합니다. 시간의 반을 기도하는데 쓰고
나머지 반을 이웃을 위해 써야합니다. 그래야 내 이웃에게 부족한
하느님의 나머지 반쪽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내가 주는 사랑은 항상 상대에게 반쪽밖에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싶으면 나의 에너지
반은 하느님을 위해 써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체성혈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께도 바쳐지는 제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만 주시기로 하였다면 하느님으로부터는 사랑을 받지 못해
우리는 반쪽의 불완전한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항상 나의 사랑을,
마치 모세가 피를 반으로 나누어 하느님과 백성에게 뿌린 것처럼,
위와 아래로 반씩 나누어 뿌려야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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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그리스도화 하는 성체성사/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6월3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그리스도화 하는 성체성사
성체성사의 신비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찬미를 모두 동원하여도 그 신비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부속가 2절에 “정성다해 찬양하라. 찬양하고
찬양해도, 우리능력 부족하다.”고 하고 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화 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취하셔서 우리를 당신으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이다.
제1독서: 탈출 24,3-8: 이는 주님께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제1독서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을
맺는 의식을 서술하고 있다. 모세는 이 예식에서 ‘중재자’ 혹은 ‘예식
집전자’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첫째는 계약을 이루는 법규들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규를
준수하는 의무가 부과된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3.7절)라고 하고 있으며, 두 번째로는 그 계약이
희생제물의 피로써 축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계약의 신성성을
표현하는 것 뿐 아니라, 그 계약이 결코 파기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피로써 표현되는 생명력이 그 계약을 봉인함을 의미한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8절)
복음: 마르 14,12-16.22-26: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포도주를 축성하시며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24절)라고 선언하실 때, 이
말씀은 모세의 선언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약이란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를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계약을 맺으신다. 바로 당신 자신이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되신다. 성체성사는 그러기에 새로운 계약인 것이다.
복음의 앞부분은 희생 제물로 바쳐지고 그것을 먹어야 하는 파스카
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새로운 파스카 양은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성체성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행위의 예고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그 행위의 재현이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22절)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봉헌하는 것도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루카는 이 사실을 더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루카 22,19)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24절) 이
축복양식의 말씀은 희생제물을 바치며 거행했던(탈출 24,5)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탈출 24,8)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피를
흘린다는 것”은 분명히 희생제사(레위 1,5.12.15; 3,2. 8.13)에 항상
연결되어 있는 죽음의 행위를 연상케 한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성체성사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죽으심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하신 모든 말씀들은
당신의 몸이 창에 찔려 피가 완전히 다 쏟아진 성 금요일에 입증된
죽음의 상황의 재현이다. 이 모든 것은 희생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창에 찔리는 고통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사랑의 봉헌을 통해 자신을 바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현존”일 뿐 아니라,
“희생”이다. 예수님께서 갈바리오 산 위에서 바치셨고 오늘도 당신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감싸시며 성사를 통해 신비스럽게 재현하시는
바로 그 “희생” 자체이다. 이러한 것으로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
느끼게 되는 매력적이면서도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제2독서: 히브 9,11-15: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합니다.
제2독서에서도 “피”로써 새로운 계약을 맺는 “희생”으로서의
성체성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구약의 사제직과 대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탁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약의 사제들은 물질적인 희생제물을 봉헌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영원히”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을 악에서 해방시키시어
당신 자신과 더불어 “영원한 상속 재산”(15절)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이 상속 재산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피로써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가 되심으로써 보증하셨던 영원한 생명, 구원이다.
우리는 이미 신앙을 통해 성사적 표징 안에서 미래의 “유산”을
차지하고 있다.
이 유산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서두에 말했듯이,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로 변화시켜 주는 성사이며, 그래서 참 아들딸이 되게 하는
성사이다.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성사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면 우리는 한 몸 그리스도를 이루게 되며
그리스도로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제는 성체성사를
열심히 거행하며, 합당한 준비로 성체를 영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기념이며, 옛 계약의 형상적 완성이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경이로운 일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이며,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놀라운 증거이다.”(Opuscolo 57).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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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부단히 건너갑시다!
2018년 나해 6월3일 성체성혈 대축일
부단히 건너갑시다!
원치도 않았는데 주어진 장애(障礙), 난데 없이 다가온 장애 앞에,
장애우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스스로
거동이 힘들어진 어머님을 모시고 외출할 때 마다, 장애우들과
가족들이 느끼는 고충을 크게 실감합니다.
제 눈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낮은 턱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태산보다 더 높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손쉽게 누리는 산책이며
운동이, 누군가에게는 그림의 떡이요 절실한 희망사항이었습니다.
장애는 우리네 인간 삶 안에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저런
결핍과 장애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언제 어떻게 장애를 지니게 될 지 모르는 잠재적 장애우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어느 순간, 스스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리 모두 누군가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아야
하는 필연적 장애우가 되기 때문입니다.
장애는 회피하거나 분리시켜야 할 대상 아니라, 연대하고 통합해야
할 대상이며, 끌어안고 존중해야 할 대상입니다. 장애를 우리네 삶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런 한 부분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동시에 장애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가 드러나는 장(場)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최근 참으로 기가 막힌 소식을 한 가지 들었습니다. 한 지역 주민들이
‘집값 하락’, ‘안전 위협’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내세우며,
장애우들의 자립을 위한 공동생활시설 퇴출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렸답니다.
대단한 시설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장애우 세 분의 자립을 위한 방
3개 짜리 작은 주택 하나 매입하겠다는 것입니다. 더 웃기는 것은
자신들이 무슨 민주화 운동 투사라도 되는 양, 한 사람 한 사람
연판장에다가 ‘결사 반대’라는 표현까지 쓰셨더군요.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로서 정말이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셨습니다. 동물들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분노 보다는 수치와 슬픔과 서글픔이 느껴졌습니다.
그리스도교적 복자, 복음적 복지가 추구하는 장애우들을 위한 복지의
미래는 ‘탈시설화’ ‘탈 대규모화’ ‘가족화’입니다. 장애우들이
첩첩산중 오지에 지어진 대규모 시설에서 단체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우리 사회의 당당한 한 일원으로 일반인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살아가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장애우들을 위한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자연스럽고, 지극히
인간적인 이런 사업들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사례를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랍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우리의 현주소요 민낯입니다. 동물들도 하지 않는
일들을 인간의 탈을 쓰고 태연스럽게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체성혈대축일입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 파스카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그 묵상한 바를
삶으로 실천하는 날입니다.
파스카(Pascha)란 말은 ‘지나가다’, ‘건너가다’ ‘넘어가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한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한 우리는 부단히 건너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약육강식의
동물적 삶에서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인간적 삶에로
건너가야겠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삶에서 이웃의 슬픔과 눈물을 내 슬픔과 눈물로 여기는, 이타적
신앙인의 삶에로 건너가야겠습니다.
천박하고 미성숙한 삶에서 품격있고 성숙한 삶에로 건너가야겠습니다.
세상 것에만 죽어라고 목숨을 거는 지상 시민의 삶에서, 관대하고
너그러운 시선을 지닌 천상 시민의 삶에로 건너가야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홍해 바다 건너편 피안(彼岸)의 언덕 위해 서서
우리에게 빨리 건너오라고 손짓하고 계십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죄와 악습, 인간적 미성숙과 극단적 이기주의를 모두 이쪽 땅에
내려놓고, 주님께서 서 계시는 반대편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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