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6월10일 [(녹) 연중 제10주일]
제1독서
<나는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15
제2독서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4,13─5,1
복음
<사탄은 끝장이 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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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0주일
2018년 나해 6월10일 연중 제10주일 마르 3,20-35
1990년이니까, 28년 전의 기억입니다. 주일학교 학생들과 지리산
산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산악반 출신인 저는 선발대로 학생들과
주로 텐트를 들고 출발하였습니다. 한참을 오르던 저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잠시 멈추고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파악했습니다. 우리는 선발대이기 때문에 주로 텐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과 음식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행히 길을 다시 찾았고,
우리는 조금 늦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믿고 따라
주었던 학생들이 고마웠습니다. 산은 언제나 겸손한 사람에게 문을
열어준다는 것도 새삼 알았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묻는 것은 아담이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두려워 숨어있던 아담의 마음을 묻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살던 하와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하와 역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던 뱀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이야기하면 하느님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끊임없이 주변의 상황을 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바로 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잘못 만나서, 친구를 잘못 만나서, 시대를
잘못 만나서 힘들다고 이야기합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날씨가
추워서, 비가 와서 힘들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분들은 늘 ‘그럴
수가 있나!’라고 이야기합니다.
고백성사에서도 이런 분들을 만나곤 합니다. 본인이 하느님과 멀어진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가족과 이웃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평화와 위로가 들어설 공간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함께할 공간이 없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나자렛 출신의 목수인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표징을 보이신 것은 다른
악령의 힘에 의해서라고 단정 짓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이하는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합니다.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함을 가집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집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도 소중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미워했던 사람까지도 품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모든 신자가 신부님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30%는 신부님의 의견을 찬성합니다. 30%는
다른 의견을 이야기합니다. 40%는 별로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신자들 모두가 신부님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착각이 심해지면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의견이 다른 분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교구청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할 때입니다. 모두 녹색 영대를
사용했습니다. 저만 빨간 영대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신부님이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야 제가 전례의 의미와 다른 영대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다른 곳을 바라보면 알 수 없는
실수였습니다. 저 자신을 바라보았다면 다른 신부님들과 다른 영대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지금
일시적으로 겪는 환난이 그지없이 크지만,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면 장소와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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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천사가 되는 길, 사탄이 되는 길|오늘의 강론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2018년 나해 6월10일 연중 제10주일
복음: 마르 3,20-35
천사가 되는 길, 사탄이 되는 길
저희 어머니는 고아로 자라오셨습니다. 전쟁 직후, 여자아이가 고아로
살아남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한 가난한 집에 맡겨졌지만 그
집에서마저 키울 능력이 없어 다른 부잣집에 맡겨졌습니다.
그 부잣집에서는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고 집안일을 돕는 하인
정도로 취급했습니다. 그 집 주인의 자녀가 잘못해도 항상
혼나야했다고 합니다. 물론 일을 한 것에 대한 보수는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에 감사해야했습니다.
참다못한 어머니는 18살 되던 해에 그 집에서 도망 나와 물어물어
처음 자신을 받아주었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에서는 공부도 안
시키고 식모처럼 부려먹기만 한 그 사람들을 고소하겠다고 했지만,
그 집에서도 살아가는 것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 집은 워낙
가난해서 역시 일만 죽도로 해야 했습니다.
하루는 청소를 하고 있는데 그 집 여동생이 방안에서 놀고만 있어서
청소를 거들어달라고 했다가 그 이야기가 어머니의 귀에 들어갔고
또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몇 년 동안 일만 죽도록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딸을 일 시키려 했다는 비난과 함께
오랜 시간 당하는 구타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집에서도 자녀로
취급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살 힘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못된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약을 타서 가족들을 다 죽이고 자신도
자살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바다를 보며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바다 위로 예수님이 걸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머, 예수님, 빠지시면 안 되는데...’ 갑자기 예수님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온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던 어머니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당신에게 오시는 것을 향해 팔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시던 길을 꺾어 나환자들이 사는 동네로
걸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나환자들이 사는 바로 그 동네에서 처음 어머니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첫 기억은 산을 헤맬 때 무서운 모습의 나환자가
지금 살고 있는 집까지 데려다 준 일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나환자들도 사는데...’ 예수님은 아마도 “온 몸이 허물어져가서
가족은 물론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나환자들도 잘
살아가고 있으니 너도 그 사람들을 보고 힘을 얻어 잘 살아보아라.”
하고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혹은 “네가 가장 무서워했던 나환자가 너를 도와주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세상엔 너 혼자가 아니다.” 그렇게 마음 안에서 악한 생각이
사라지고 다시 돌아와 열심히 살았고 그 집은 이런저런 좋은 일이
겹치며 동네의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집의
호적에 딸로 등록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데 율법학자들이 와서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고 말합니다. 혹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평가합니다.
예수님은 한 나라도 갈라져서 싸우면 망하게 되는데 어떻게 악력이
악령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계셨습니다. 이에 그들을
보시며 당신을 모독하는 것은 참고 용서해 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성령을 악령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랑을 믿어야 사람을 믿게 되는데, 성령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믿지 못하면 예수님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더라도 사랑은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힘으로 어머니의 어둠을 몰아내셨습니다. 부모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낀 저희 어머니 속에는 어둠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어둠을 밝혀주는 것은 빛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예수님의 그 호의까지 어둠으로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를 이 꼴로 만들어놓고, 나에게 오시다가 다른 곳으로 가시다니!’
그러면 분노가 더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어머니는
가리옷 유다처럼 영원히 어둠으로 가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령의 좋은 빛은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누구든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기준으로 다른 것을 보고 해석합니다.
개는 아름다움이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 꽃이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 안에 아름다움이 넣어져있기 때문에
꽃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귀가 되면 개와 같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습니다. 온통 어둠이라면 아주 작은 빛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태양을 보기 싫어서 땅 속으로 들어가 아예 눈이 퇴화해버린 지렁이와
같은 것들이나 동굴에서 자라 눈이 사라져버린 물고기들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이것들은 이제 빛을 아예 분별할 수 없게 되어버려 빛 속에서 사나
어둠 속에서 사나 큰 차이가 없게 돼 버렸습니다. 오히려 빛 속에서
살면 자신들의 상태가 보이기 때문에 어둠속으로만 들어가게 됩니다.
어둠 속에선 자신들이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예수님께서 독사들, 혹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이미 본성이 그렇게 빛을 볼 수 없는
사탄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어둠으로 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도 어둠인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 중의 사랑이기 때문에 태양의 빛과 같습니다. 태양의
빛을 보며 어둠이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좋아질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눈을 감아버려 퇴화시켜 버린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이들에겐 아무리 큰 사랑의 빛을 비추어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미리내 천주성삼 수도회 임언기 신부님에게 오래 전 한 임종직전
냉담자에게 병자성사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분에게 가보니 이미
배에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냉담한 것에 대한 고해성사를 들으려고 하는데 입도 꿈쩍 않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하기 힘든가보다 싶어서 여러 죄들을 신부님이 열거하면
해당하는 것에 그냥 고개만 끄덕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꿈쩍을 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 가려고 하는데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더랍니다.
“나 죄 없어!”
사실 사탄은 하느님의 사랑도 미움의 행위로 봅니다. 사탄은
하느님이 자신들을 미워하고 인간들을 더 사랑한 것에 대해 반기를
든 천사이고 그런 집단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좋게 보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은 하느님에 대한 저주로 가득합니다.
만약 그 중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는 이가 있다면
하느님은 그들을 천국으로 데려오실 것이지만 그들의 눈은 이미
시각을 잃어서 태양을 보더라도 빛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을 발견하게 되면 천사의 눈을 지닌 것이고 모든 것 안에서
부정적인 것만 발견하면 사탄이 된 것입니다. 아마 가리옷 유다도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상에서 빵을 적셔 주실 때 ‘나에게 아부하는
건가? 십자가의 고통은 싫은가보지? 나에게 무릎 꿇으면 팔아넘기지
않을 수도 있지...’ 라며 예수님의 마지막 사랑의 행위까지 어둠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래서 스스로 이렇게 사탄이 되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 안에 선한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야 사랑을
받아들이고 더 빛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만을 주시려 하시지 아프게 하시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의사가 칼을 들고 있다고 몸을 움츠려서는 안 됩니다.
절벽으로 떨어지는 망가지의 주인이 자신의 꼬리를 잡고 아프게
한다고 더 절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아프고 고통스럽다고 사랑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본래 아프게 합니다. 이 아픔 때문에
선한 것이 악한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선한 생각이
없으면 선한 것이 보이지 않고 그러면 점점 더 사탄이 되어갑니다.
아주 작은 것 안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우리
안에 빛이 조금씩 커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감사 일기를 쓰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기도하러 앉았다면 한두 가지
정도는 감사기도를 꼭 바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작은 것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보았다면 어떤 죄든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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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2018년 나해 6월10일 연중 제10주일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바오로 사도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이방인의 사도’, ‘모든 민족의 사도' ‘위대한 대설교가’ ‘백개의 팔을
지닌 일꾼’,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저술가’...
생각만 해도 존경스럽고 믿음직스러운 바오로 사도이지만, 전도
여행차 로마를 떠나 아테네를 거쳐 고린토로 여행하기 전, 이렇게
솔직히 자신의 내면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1 코린토서 2장 3절)
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는 계속되는 전도여행 중의 갖은 박해와
다양한 위협으로 인해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정신적
심리적으로도 크게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 코린토 12장 7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오로 사도는 변변한 수입도 없어 늘
가난했습니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그 누구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막 만드는 일과 복음선포를 병행했습니다.
오늘날 너무 편하게 사목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참으로 부끄럽게
만듭니다.
더구나 당시 코린토는 아카이아라는 로마 주(州)의 수도인 동시에
로마 집정관의 체류지였으며, 로마 군대의 주둔지였습니다. 또한
동서를 연결하는 국제도시였기에, 다양한 인종, 문화, 학문, 종교,
상업의 집결 장소였습니다.
자연스레 코린토는 죄와 타락의 도시, 거대한 부와 사치의 도시,
우상숭배와 부도덕의 도시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코린토 교회 안에는 바오로 사도의 직무 수행에
노골적인 반기를 들고 비방하는 적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오로 사도가 다른 열두 사도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불림 받은
순수 정통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문제 도시 코린토 교회의 방문을 앞둔 바오로 사도였기에 너무나
당연히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차라리 이곳을 건너 뛰고 다른
도시로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는 피해가지 않고 정면 돌파를
감행합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자신은 비록 나약하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강건하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반대자들도 자신이 돌봐주어야 할 양떼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큰 마음으로 포용합니다.
코린토 2서는 바오로 사도가 혈혈단신으로 코린토 교회의 회개와
성장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투쟁하고 있는 흔적으로
가득합니다. 목숨 건 전도 여행로 인해 지칠대로 지친 바오로 사도가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코린토 공동체 건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참으로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코린토 2서만큼 바오로 사도의 인간적이고 영성적인 탁월성을 느끼게
해주는 편지는 다시 또 없습니다. 이보다 더 열정적이고 눈물겨운
편지 역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한 줄 한 줄이
모두 명대사입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
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2 코린토 4장 16~5장 1절)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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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6월10일 연중 10주일(마르3,20-35)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소위 ‘열심 하다’고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 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본인은 정말로 열심히 복음을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고 또 미움을 낳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오해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 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엉뚱한 소리가 들릴 때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유혹을 받아 봐야 자신을 가장 잘 알수 있다.”고 했습니다.
상대를 통해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챙겨야 합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마르3,21)는 소문이 돌고 혹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3,30)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거짓은
밝혀지고 그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좋은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더 큰 은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를 얻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악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고
사실과는 다른 소문을 퍼뜨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들을 갈라놓고 나를 과시하며,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나는 분명 악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악에 사로잡히면 결국 성령을 거부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됩니다(마르3,30).
물론 주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지 않는 행위,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중죄를 범하여 나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느님의 자비를 포기하는 사람은 용서 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어둠에 머물게 되고 그 자체가 용서 받지 못하는 상태의
영원한 죄입니다.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마음이 비뚤어져
하느님께 속한 자비와 사랑, 용서를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왜곡하며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바르지
못한 마음과 행실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착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 눈에 드는 겸손한 행실을 통해 은총에 은총을 더해가길
희망합니다.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두를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삶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였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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