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6월15일 [(녹)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9,9ㄱ.11-16
복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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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6월15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지난 금요일 사제 성화의 날에 유 경촌 주교님께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제목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였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간략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교님께서는 우리 시대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던 ‘고 김남호 박사’님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김남호
박사님은 자녀들(3남 4녀)을 모두 의사와 약사로 키우셨습니다.
아들들의 머리를 손수 깎아 주셨고, 공부를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병원에는 간호사와 직원이 없었고, 모든 일을 혼자서 하셨다고
합니다. 왕진을 가게 되면 걷거나, 버스를 이용하셨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진료비를 받지 않았고, 아끼고 절약해서 모은 전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였습니다.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면서 김남호 박사님께 배울 것이 3가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규칙적인 생활입니다. 김남호 박사님은 40년간 진료를 하면서
늘 같은 시간에 출근하였다고 합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날
이외에는 평생 휴가도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찾아오는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았고, 환자들은 대부분 좋아졌다고 합니다. 사제들은
무엇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만나는 신자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40년가량 사목을 하게 되는데 그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야 합니다.
둘째는 학문에 관한 연구입니다. 김남호 박사님은 책을 가까이하였고,
후배들을 위해서도 책을 저술하였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새로운 것들은 책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사제들은 신학을 배워서 신자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신학은 신학교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늘
가까이해야 합니다. 휴대전화도 충전해야 쓸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기도와 말씀을 충전해야 합니다.
셋째는 청빈한 삶입니다. 김남호 박사님은 늘 이면지를
사용하였습니다. 간호사, 직원도 고용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이
쓰다 버린 색연필을 사용하였습니다. 휴가도 가지 않았고, 음식도
절제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전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였습니다.
이는 사제들이 늘 마음에 두고 실천해야 할 덕목입니다. 가난의
결핍이 사제를 어려움에 빠트립니다. 가난은 사제를 양육하는
어머니요, 세상의 정신으로부터 지켜주는 보루입니다.
오늘의 제1 독서를 묵상하면서 예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15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강의를 위해서 대방동 성당엘 갔습니다.
저의 강의는 3시였지만 12시 30분에 도착하였습니다. 제가 교육의
담당자였기 때문입니다. 준비 사항을 점검하고, 저는 잠시 쉬기
위해서 성당 앞에 있는 불가마 사우나로 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사우나에서 방송이 나왔습니다. 손님 중에 조 재형 씨를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놀라기도 했고, 당황하기도 했지만 누가 저를
찾는지 생각하면서 나왔습니다. 저를 찾았던 분은 봉사자였습니다.
1시에 강의를 하기로 하신 신부님이 사정이 생겨서 늦는다고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봉사자들은 제가 일찍 왔기 때문에 3시까지 오시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를 찾아서 사제관,
성모 동산, 성당을 갔었다고 합니다. 저는 봉사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불가마 사우나에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강의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늘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많습니다. 시인은
봄이 되면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봄처럼
부지런 하라는 말, 봄처럼 꿈을 가지라는 말, 봄처럼 새로워지라는
말입니다. 전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봄의
모습이었습니다.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컵에 남은 물이
반이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반밖에 남지 않았구나!’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직도 반이나 남았구나!’ 신앙인은
어쩌면 발상의 전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
살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소유와 풍요가 넘쳐나는
세상에 나눔과 희생의 가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늘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도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면서도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주님께로 가야 할 운명입니다. 어떤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봄처럼
부지런하다면, 우리가 봄처럼 꿈을 간직한다면, 우리가 봄처럼 늘
새로워진다면 거친 들판에서도, 고독과 절망 중에서도,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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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악의 유혹을 끊음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6월15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5,27-32: 악의 유혹을 끊어버려라
분노는 살인의 어미이듯이, 욕정은 불륜의 어미이다.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실제로 그를 죽이지는 않았을지라도 마음은 그를
죽이고 있다. 뜻을 중요하게 보시는 하느님 보시기에 그것은
살인이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28절) 간음을 저질렀다고 하신다. 행위보다 의지를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간음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유 없이 이웃에게 성내는 일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 또한 여자를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도 그것을 행동으로만
옮기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의지를 존중하는 사람은 그것을 큰 죄로 여긴다. 그것은
사람의 행동 뿐 아니라 마음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큰 죄이기
때문이다. 그 욕구를 잘라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게 하는 지체가 있으면 뽑아 버리고
잘라버리라고 하신다(29-30절). 이 말씀은 옳지 못한 사랑이나
우정이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것을 잘라 버리라는 말씀이다. 눈
하나나 발과 같은 지체가 옳지 못한 사랑 때문에 지옥과 협력하는
관계로 이끄는 길이 된다면, 차라리 그 지체가 없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마음도 잘라 버릴 수 있다면, 마음이라는 지체도 잘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체를 잃더라도 몸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의 지체의 일부를 없애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온갖
악의 근원이나, 죄를 짓도록 하는 그 원인을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들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영원한 불행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을 모두 거부하는 삶이
중요하다. 그래서 범죄케 하는 것들을 과감히 끊어버릴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혼장을 써주는 일에 대해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마태 19,8)고 말씀하시며 이혼장을
폐지하시고 당신이 처음에 세우신 법을 되살리신다. 당신이 세우신
혼인법은 풀 수 없는 법으로 순결한 혼인관계를 지키라고 하신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그리고 오늘 복음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혼을 금하시면서 또한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32절)라고 하신다. 여기서 “불륜을 저지른 경우”라고 하는 것은
부부간의 신뢰를 저버렸다는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에서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이신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를 말한다.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을 금하게 되었고, 그럴 경우에는 관면을 주어
혼인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이다. 관면을 받지 않고 결혼을 하게 되면
그것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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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인간의 대화법과 하느님의 대화법의 차이|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6월15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독서 : 열왕기 상권 19,9ㄱ.11-16
복음: 마태오 5,27-32
인간의 대화법과 하느님의 대화법의 차이
저는 남자만 3형제인 집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워낙 시골이었기에
동네에서도 여자와 놀아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대학에 들어가니 여자와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대화법을 익혔습니다. 점점 대화법을 익혀가다
보니 대화가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배운 대화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대의 관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 자기생각만 합니다. 나의 이야기를 즐겨 들어줄
때도 자신이 좋으니 들어주는 것이지 관심이 없으면 아무리 울고불고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상대의 관심 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대의 이야기에 수긍해주고, 그 관심사를
질문을 통해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자연스레 유도하며 그런
관심사에 관한 나의 이야기도 솔직하게 말하면서 공감을 이끌어내고
간혹 위트 있는 말로 분위기를 밝게 이끌어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건 좀 아니다싶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면 상대는 나를 좋아해주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세상적인 대화법의 목적은 상대의 애정을 얻기
위함입니다. 상대가 나에게 애정을 가지게 된다면?
그 다음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이 다입니다. 발전이 없습니다.
내가 상대의 애정을 얻기 위해 상대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애정이란 것이 냄비와 같아서 금방 뜨거웠다가 금방 식었다가
하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감정입니다. 그 허무한 바람과 같은 것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대화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하는지를 알아야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만나주시는 방식을
접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방식입니다.
먼저 하느님은 엘리야를 호렙에 있는 동굴에서 밤을 지새우게
하십니다. 산 위의 동굴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광야나 산은 하느님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의지를 먼저 보십니다.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애원하지 않으십니다. 원하는
사람을 만나주시고 얼마만큼 원하는지 시험하십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광야나 산을 오를 준비가 되어있다면 이제
당신도 만나러 오십니다.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나섰을 때
주님이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바위를
부수었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 속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는데 그 곳에도 계시지 않고, 불이 일어났는데
그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다가오십니다.
이는 사람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마음가짐이십니다.
하느님은 강한 바람, 즉 비난하러 오시지 않으십니다.
혹은 불안하게 지진처럼 나를 흔들지도 않으시고 불처럼 화가 나서
다가오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오십니다. 평화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항상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말에 그 마음이 담겨 상대를 비난하거나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담기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물으십니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느님의 관심은 엘리야에게 있습니다. 이는 세속적인 대화법과
일치합니다. 하느님은 엘리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그의 말을 충분히 들어주십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예언자이기에 죽임을 당할 지경에 와 있다고 길게 한탄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다 들어주시고 나서 위로를 해주시기는커녕 또 다른
소명을 맡기십니다. 들어주시는 것만도 큰 위로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엘리야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십니다.
왕들에게 기름을 부어주고 자신의 후계자를 뽑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계속 그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왕직-사제직-예언자직을
수행하도록 독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 대화법과 다른 면입니다. 하느님은 애정에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발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싫어서 간다고 하면
잡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시며 그것이 싫어서
떠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잡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말씀하심에 주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 대화법의 목적은 상대의
애정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하느님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처음엔 저도 고해성사를 들을 때 위로해주고 받아주고 가슴 아플 것
같은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사람이 조금
아프더라도 고쳐야 할 사항들을 조심스럽게 말해줍니다.
물론 위로를 받기 위해 들어왔다가 기분 나빠 나가는 것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말해주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은 애정을 구걸하는
인간적인 대화법에 얽매여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올바른 길을 알면서도 상대의 감정을 고려하여
말해주지 않는 것보다 솔직하게 말해주는 것이 더 큰 사랑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화하면 나의 애정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떠나가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는 사람만 주위에 남게 됩니다. 변하려는
사람들만이 그런 말들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남는 사람들이 저의 참 친구들이 됩니다. 이런 우정의
풍요로움은 애정만 구걸하는 세속적인 대화법으로 사는 사람들은
얻을 수 없습니다. 타인에게 매여 자유를 잃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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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생명나무 성도 : 오늘의 능력말씀
생명나무 성도
오늘은 “생명나무 성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고목나무’로 유명한 가수였다가
지금은 주의 종이 된 장욱조목사님을 아십니까?
장목사님은 세상 인기가 높을 때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사셨습니다.
하지만 음반제작에 실패하고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앉게 되면서
‘동가 숙, 서가 식’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세상 것을 잃어버리고 나니 삶의 소망이 끊어졌을 때
아내의 인도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찬양을 하며 그 은혜를 받은 순간 이후에 완전히
새사람이 됩니다.
장목사님은 그 옛날 ‘고목나무’로 얻었던 부귀영화는 모두 다
지나가버리고 ‘생명나무’ 십자가를 만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온 이상 옛 사람은
지나갔습니다. 절망이 지나갔습니다. 자기주장도 지나갔습니다. 내
생각은 더 지나갔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새사람이 되어서
생명의 꽃 피우고 생명 열매 맺는 생명나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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